배우의 언덕을 오르고 있는 T.O.P
첫 영화 〈포화 속으로〉에서 T.O.P은 폐허가 된 소년의 얼굴을 드러냈다. 카메라를 향해 악마적인 관능을 쏟아내며 거침없는 플로우로 랩을 하던 이 아이돌 스타는 지금 양철북을 십자가처럼 짊어지고 배우의 언덕을 걸어 오르는 중이다.
메케한 연기가 피어 오른 숲에서 소년의 북소리가 들린다. 푸른 침묵으로 위장한 낡은 세계엔 균열이 일어나고, 뒤틀린 평화는 깨어진다. 탁, 퉁, 탁. 권터 그라스의 소설 속 오스카의 표현에 따르면 ‘전구와 나방의 대화’를 닮은 그 소리는 연약한 존재가 잔혹한 세상에 대항하는 유일한 무기다. 북을 두드리는 내내 T.O.P은 별다른 말이 없었다. 아이에서 어른으로의 진화를 보여주는 날렵한 턱은 구릿빛으로 번들거렸고, 양미간엔 주름이 잡혔다. 입술은 굳게 다물었지만, 태생적 힘을 지닌 눈동자만은 열려 있었다. 그런 특별한 눈빛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것이 아니다. “늘 머릿속이 복잡해서 그런 것 같아요. 다른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놀 때, 전 혼자 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거든요. 아주 어릴 때부터 가사를 쓰고 랩을 하는 게 유일한 낙이었죠. 그런 쓸쓸함이라든지 외로움이 어떤 에너지가 되어 제 안에 고여있다가 필요한 순간 튀어나오는 거예요. 처음 무대 위에 올라갔을 때, 저도 모르던 제 자신을 보았어요. 그렇다고 날뛴 적은 없어요. 쓸데 없는 곳에 에너지를 소모하지도 않죠.” 카메라를 향해 악마적인 관능을 쏟아내며 거침없는 플로우로 랩을 하던 아이돌 스타는 지금 양철북을 십자가처럼 짊어지고 배우의 언덕을 걸어 오르는 중이다.
“꼭 제가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이유 모를 책임감을 느꼈어요.” 첫 영화 출연을 결심한 이유는 간단명료했다. 빅뱅 콘서트에서 수트 차림으로 솔로곡 ‘아무렇지 않은 척’을 부르던 T.O.P을 보고 〈아이리스〉의 냉혹한 킬러 빅을 떠올린 장태원 대표는 드라마가 끝나기도 전에 그에게 한 편의 시나리오를 건넸다. 1950년 8월 포항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71명의 학도병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열일곱 살 소년의 눈으로 바라본 전쟁의 비극을 담은 〈포화 속으로〉였다. 故이우근 학생이 어머니에게 쓴 수백 통의 편지에서 모티브를 얻은 이 영화에서 T.O.P은 이야기의 화자인 학도병 대장 오장범을 연기한다. “어머니!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편지는 이렇게 시작했다. “전혀 몰랐어요.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저보다 어린 팬들은 학도병을 질병의 하나로 이해할 정도죠. 역사적 진실을 알려주고 싶었어요. 제가 아주 어릴때부터 랩을 하고 힙합을 했던 건 뭔가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서일 텐데, 그렇다면 전 넘쳐나는 아이돌 가수들과는 좀 다른, 더 의미 있는 일을 해야만 해요.” 그렇게 말하는 T.O.P은 정말 오장범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고 사는 20대를 본 적이 없다. 그처럼 어린 나이에 스타가 되고 돈을 번다는 건 어떤 것일까? “저도 항상 생각은 해보는데, 누구나 그렇듯 자기 인생에 대한 답은 없는 것 같아요. 만족을 해본 적도 없고요. 나를 아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그걸 즐기려고 하기보다 책임감이 생기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 더 완벽해지고 싶어져요.” 또래의 우상이 짊어져야 할 삶의 무게는 학도병 대장의 그것과 다르지 않은 듯 하다. 원래 인간의 기대는 무거운 법이다. 그렇다면 스타가 아닌 남자로서의 T.O.P은? “글쎄요. 제가 T.O.P을 사귀어 본 적이 없어 잘 모르지만, 책임감이 있다고 생각은 하는데, 그렇게 얘기하진 않을래요. 나중에 제가 힘들어질 것 같아요.(웃음)”
드라마 〈아이리스〉가 끝난 바로 다음날부터 합천에서 6개월을 생활했다. 허름한 모텔이 참호였고, 지방의 소도시엔 식당도 몇 개 없었다. 감자탕집과 중국집, 어쩌다 고깃집이 전부였다. 확실히 화려한 아이돌 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다. “저녁 6시에 촬영이 끝나고 모텔 방에 들어가 시나리오만 읽다 보면 외롭고 생각도 많아져서 매일 혼자 와인을 마시다 잠들었어요. 소주는 너무 우울하잖아요. 잠을 잘 못 잤어요. 전쟁 트라우마처럼 이유 모를 공포심과 악몽에 시달렸거든요.” 가끔 꿈속에서 북한군 대장 박무랑을 맡은 차승원이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 기간, 일본과 한국을 오간 10번의 콘서트 무대를 제외하고 어디에도 T.O.P은 없었다. 오장범만이 존재했다. 직접 프로듀싱까지 맡아 준비해온 솔로 음반도 무기한 연기하기로 했다. 목숨걸고 하지 않으면 도저히 해낼 수가 없다는 게 이유였다. 양현석 사장은 절대적으로 그의 결정을 신뢰했다.
어차피 T.O.P은 누군가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타입이 아니었다. 그는 지금껏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왔다. 중학교 때는 힙합 음악을 들으며 좋아하는 옷을 실컷 보기 위해 부모님 몰래 이태원의 옷 가게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고, 고교 시절엔 홍대 클럽에서 TEMPO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언더 신에서는 그때부터 이미 유명했다. “‘스무 살 까지는 모든 걸 다 해봐야겠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자유분방했지만 나쁜 짓은 안 했죠.” 옷은 질릴 만큼 입어 봤다. 존 갈리아노와 톰 브라운의 수트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소화하며, MC 해머 스타일의 가벼움과 클래식 수트의 깊이를 논할 줄 아는 스물네 살의 남자가 얼마나 될까? 가수가 되기 위해 오디션을 본 적도 없었다. 양현석 사장은 지드래곤이 건네준 TEMPO의 데모 CD 한 장을 듣고 그를 불러들였다. 여러 단계의 심사를 거쳐야 하는 YG의 역사상 유례 없는 사건이었다. 스무 살에 빅뱅으로 데뷔하기까지 연습생 기간도 다른 멤버들에 비해 무척 짧았다. “실패해본 적? 없어요. 독기 있는 성격은 아닌데, 간절히 몰두했던 소망은 어떻게든 다 이뤄졌죠. 많은 기회들이 운명적으로 먼저 다가왔어요. 물론 그만큼 노력도 해요.”
연기는 특히 그랬다. 2007년, 우연히 DJ DOC의 이하늘이 제작한 레드락의 〈헬로우〉 뮤직 비디오에 참여하기 전까지 연기를 한다는 건 생각조차 해본 적 없었다. 당시 T.O.P은 사랑에 상처 입은 남자를 연기하며 실제 자신의 머리를 삭발해버렸다. 그리고 같은 해 방송된 〈아이엠샘〉에서 반항적인 고교짱 채무신으로 등장했다. 한일 합작 텔레시네마 〈나는 19세〉 〈아이리스〉까지 그렇게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연기를 정식으로 배워본 적이 없어요. 초기엔 소속사에서 선생님을 붙여 주기도 했는데, 다들 포기하시더라고요. 정극 연기를 하기엔 제 말투와 억양, 발성 자체가 보통 사람들과 많이 다르데요. 전 보통 래퍼들과도 또 다른 발성을 쓰거든요.” 결국 혼자 방법을 찾았다. 가수 데뷔 전에 40일 만에 20kg이 넘는 체중도 감량했던 그였다. 그 결과는?
제작보고회가 열리던 날, 쟁쟁한 선배 배우들은 그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차승원은 “승현이는 내가 20대 때 가졌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하는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고, 김승우는 “내가 저 나이에 저렇게 연기를 할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였다. 어떤 기대를 해도 좋을 것”이라 평했다. 권상우는 “액션뿐만 아니라 디테일한 감성 연기까지 잘 이끌어냈다”며 촬영 분량이 제일 많아 현장에서 살다시피 한 그를 대견해 했다. 래퍼 특유의 리듬감은 사투리 연기엔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라임을 맞추듯 어미를 강조하는 버릇 때문에 애를 먹었지만, 한 번 들으면 억양만큼은 금세 따라 할 수 있었다. “모두를 놀라게 해주고 싶었어요. 그렇다고 연기자 변신 T.O.P이라는 말을 듣고 싶진 않아요. 저도 제가 누구인지 모르는데, ‘변신’이라는 말엔 어폐가 있는 것 같아요.” 연기를 할 때도 본명이 아닌 T.O.P으로 활동한다. 그래서 영화의 크레딧도 T.O.P(최승현)으로 올라간다. 그에게 T.O.P은 그냥 단순한 이름이 아니다. 그는 T.O.P이라는 인물을 데뷔 때부터 머릿속에 그려 왔다고 했다. 가상 인물처럼 설정해두고 랩을 할 때의 표정, 행동, 작은 손짓 하나까지 머릿속으로 디자인해 완성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양면성이 있어요. 순수함과 그렇지 않은 쪽을 옮겨다니죠. 못된 생각, 여우 같은 행동은 못하는 성격이지만, 그렇다고 제가 무대에서 착하고 순진한 표정을 짓고 랩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잖아요? 무대 위에서의 T.O.P은 진짜저일 수도, 아닐 수도 있어요.” 카메라를 정면으로 노려보며 마치 대화를 하듯 카리스마 넘치는 랩을 구사하던 그는 사실 평소엔 사람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다.
그리고 여기 어느 것이 진짜인지 알 수 없는 또 다른 T.O.P이 있다. 카메라를 응시하던 T.O.P의 눈이 젖어 드는가 싶더니 그대로 툭 눈물이 떨어졌다. 조금 전까지 〈더 레슬러〉의 미키 루크를 흉내 내며 사람들을 웃기던 쾌활한 남자 아이는 어딘가로 사라졌다. 탄피를 두르고 장총을 든 소년은 오장범이었다. 모두들 숨을 죽이고 지켜봤다. 포화를 연출하기 위해 원두를 태운 연무기만 연신 숨을 토해냈다. 숲은 어느새 커피 향으로 가득했다. 포토그래퍼 홍장현은 지금은 생산되지 않는 70년대 핫셀브라드 필름 카메라로 그순간의 모든 것을 포착했다. 그는 빅뱅이 ‘거짓말’로 활동할 때부터 스무 번쯤 T.O.P을 촬영해왔다. “아마 1년 전부터였을 거예요. 사진 촬영을 할 때도 표정 연기를 하고 싶어 했죠. 오늘 보니 이젠 배우의 아우라가 생긴 듯합니다. 다섯 명이 함께 있을 땐 발견하지 못했던 느낌이에요.” T.O.P은 무력한 욕망과 정직한 두려움, 연약한 믿음이 뒤섞인 표정으로 폐허가 된 소년의 얼굴을 드러냈다. 광기에 사로잡힌 어른들의 전쟁에서 그는 유일하게 남은 순수한 인간성의 상징이다. “전 제 삶에 고마움을 느낀 지 얼마 안된 아이예요. 그렇다고 불행한 것도 아니었는데, 성향 자체가 어두웠죠. 그런데 시나리오를 읽고 난 첫 소감이 그런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다는 데에 대한 감사함이었어요. 그걸 요즘의 젊은 친구들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학도병 故이우근은 다부동에서 한창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던 1950년 8월 11일, 포항여자중학교 앞 벌판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이날 전투에서는 제3사단 학도의용군 71명 중 그를 포함한 48명이 전사했다. 일단 역사적 사실은 이렇다. 그리고 고독한 숲 한가운데 홀로 선 T.O.P은 고발적이고 도전적으로 양철북을 두드린다. “내 이야기를 좀 들어달라.” 탁, 퉁, 탁. 전구를 향해 뛰어드는 나방의 마지막 속삭임처럼 애처로운 물방울만 튀어 오른다. 그는 무례하게도 운명에 도전을 하고 있는 중이다. T.O.P을 편애해온 운명의 신은 이번에도 그의 손을 들어줄까? 어쩌면 부조리한 이 세계 자체가 광기 어린 전장인지도 모르지만, T.O.P은 그래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 에디터
- 이미혜
- 포토그래퍼
- 홍장현
- 스탭
- 스타일리스트 / 지은(Gee Eun), 헤어/태현(이가자 헤어비스 청담점), 메이크업/ 임해경
추천기사
-
패션 아이템
크리스마스 아침, 침대맡에서 풀어보고 싶은 가방!
2024.12.18by 이소미
-
패션 아이템
체크 스커트, 젠지처럼 쿨하게 입는 비결
2024.12.17by 장성실, Ana Gándara, Lucrezia Malavolta
-
뷰티 아이템
겨울을 달콤하게 물들이는 바닐라 향수 6
2024.12.18by 오기쁨
-
패션 뉴스
더 푸른 바다를 꿈꾸는 프라다와 포토그래퍼 엔조 바라코
2024.12.18by 안건호, Ashley Ogawa Clarke
-
Culture
처음 뵙겠습니다, 영화로 만나는 ‘에드워드 호퍼’
2024.11.29by VOGUE
-
패션 아이템
거대하고 '못생긴' 겨울 부츠 멋스럽게 소화하는 방법
2024.12.20by 안건호, Melisa Vargas
인기기사
지금 인기 있는 뷰티 기사
PEOPLE NOW
지금, 보그가 주목하는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