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세포 소년
10년 전<집으로>의 400만 흥행 신화를 기록한 유승호는 올해 스무 살의 청년이다. 지금 이순간 건강한‘세포분열’을 일으키며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보내고 있는 이 댄디보이를 만나보자.
올해 고등학교를 졸업했죠? TV조선의 <프러포즈 대작전> 촬영장에서 졸업 파티하는 걸 봤어요.
네. 올해 2월에 졸업했어요.
그런데 배우 입장에서는 그렇게 사력을 다해 달려도 종편 드라마라 주목을 못 받았잖아요. 야속한 맘이 있었겠어요.
제 바람은 ‘이 드라마로 기적을 만들어보자’였어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판타지 멜로’라니, 새롭잖아요. 그런데 모든 스태프들이 공을 들여 영화처럼 찍어도 시청률이 1%가 잘 안 나와요. 그러면 후반으로 갈수록 좀 지치죠. 지금은 잘 끝냈다는 데 의미를 둬요.
그건 졸업하고 비슷한 거네요. 잘 끝냈다,는 거.
(씨익 웃으며)그렇죠.
새로 시작하는 드라마 <아랑 사또전>에서도 배역이 독특하던데요.
옥황상제예요. 전국을 관장하는 청년 옥황상제요. 박준규 선배님이 지옥을 담당하는 염라대왕. 우린 서로 친구예요. 하하. 동안 친구, 노안 친구. 저와 박준규 선배님이 코미디 쪽을 담당하고 이준기·신민아 씨가 멜로를 담당해요. 전, 그러니까 특별 출연인 셈이죠.
승호 씨 멜로도 근사할 텐데요.
음…, 사실 전 멜로는 관심이 없어요. 아직까지는 멜로가 진부하고 지루해요. 매력적이지 않아요.
스무 살이잖아요.
그게 나이상으로는 멜로가 매력적이어야 하는데, 전 안 그래요. 이제까지 일만 하고 연애를 도통 접할 기회가 없었으니까요.
연애를 접할 기회가 없었어요?
평범하지 않은 학창 시절을 보냈잖아요. 어찌 보면 되게 평범한데…, 친구들이랑 같이 놀러 다니고, 여자도 만나고 그런 걸 못해봤으니까.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고 구설수에 오르고 그런 걸 피하다 보니까요….
많이 조심스러웠어요?
많이요.
학교엔 다녔지만 학창 시절은 없었던 건가요?
저 스스로는 그래도 얻은 게 있다고 위안을 해봐요. 친구들이 공부할 때 저는 열심히 일해서 지금 탄탄한 직업을 가지고 있으니까. 14년 동안 참고 하길 잘했다, 생각하는 거죠.(웃음)
많이 외로웠나 봐요.
맞아요. 외로웠어요. 수학여행에 가서 함께 어울린다거나, 특별하게 공유할 수 있는 추억이 없어요. 전 항상 혼자 지냈어요. 그러니까 그게 외로운 감정이 맞을 거예요. 연예인이니까 신기해서 다가오는 친구들도 많았어요. 그러면 저는 또 그게 가식적으로 보여서 피하고. 그래도 친하게 지내는 친구는 두 명 있어요. 그 친구들은 저를 연예인으로 안 봐요. 나한테 막 욕하고, 서로 때리고 그래요. 형편이 어려운 친구들인데 되게 열심히 살아요. 전 그 친구들 보면서 자극 받고 스트레스도 풀고 그랬어요.
난 아직도 ‘유승호’ 하면 <집으로>가 자동적으로 떠올라요. 벌써 10년이나 지났는데도. 사람들이 아역 배우에게 몰입하는 부분은 다분히 개인적이고 감상적이에요. 나는 변함없는데, 저 아이는 저렇게 컸구나!
하하. <집으로>는 아마 평생 저를 따라다닐 것 같아요. 전 아홉 살 이후로 한 번도 그 영화를 본 적이 없는데 말이죠. 그때는 엄마 손에 이끌려서 뭔지도 모르고 했어요. 집안 형편이 심하게 안 좋아서, 음… 어느 정도였냐 하면 끼니 굶고 거리에 나앉을 정도였거든요. 당시에 엄마가 예쁜 아이 선발대회 신청했는 데, 대회는 못나갔어도 그때 보낸 사진 보고 의상 카탈로그도 찍고, 핸드폰 CF도 찍고, 첫 영화도 찍은 거예요.
생활고를 겪는 아역배우였군요?
네. 전 지금 이정도 사는 게 정말 꿈만 같아요. 너무 감사해요.
<집으로> 영화 촬영장에선 어땠어요?
전 정말 집으로 가고 싶은 맘뿐이었어요. 오죽하면 감독님이 무서워서 새벽에 엄마 품에서 ‘도망가자’고 했을까요. 그런 환경 자체가 어려웠어요. 전 숙달된 연기자가 아닌데 완벽한 걸 원하는 환경 속에 있어야 했으니까. 관객 400만이 들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도 몰랐어요. 빨리 집에 가서 게임하고 놀고 싶은 마음만 있었죠. 그 뒤로도 작품 하고 나면 엄마가 조립하는 레고를 사주셨거든요. 그거 받으려고 일했죠.
엄마는 승호 씨를 어릴 때부터 배우로 키우고 싶어 하셨나요?
아뇨. 엄마도 고민하셨어요. 그런데 제가 운동도 공부도 별 재능이 없으니까요. 후후.
어쨌든 그때부터 10년 동안 쭉 ‘국민 남동생’으로 관심과 사랑을 받았네요. <불멸의 이순신> <태왕사신기> 등 웬만한 주요 사극의 주인공 아역은 다 유승호였죠.
제가 한 게 아닌 듯해요. 주변 사람들이 지켜줬어요. 어느 날 정신 차려 보니 제가 여기 있고 모든 게 완성돼 있더라구요.
얼떨떨한 기분인가요?
하하. 전 책을 많이 읽진 않지만 심심할 때 한번씩 들여다보는 책이 <10대에 알았으면 좋았을 것들>이에요. 거기 보면 열심히 공부하고, 커다란 꿈을 꾸고… 뭐 그런 내용인데, 제 청소년기엔 해당이 안 되더라구요.
꿈을 꾸진 않았어도, 꿈꾸는 것처럼 와 있잖아요. 그건 승호씨가 인내심이라는 놀라운 덕목을 유지했기 때문이에요. 그럴까요? 전 A형이라 굉장히 내성적이에요. 그런데 연기할 때는 성격이 바뀌어요. 내가 쑥스러워 하면 주변이 피곤해지니까. 미친 척하고 덤벼요. 일단 빨리 끝내고 집에 가고 싶기도 하고. 하하.
빨리 끝내고 집에 가고 싶어 하는 거, 그거 훌륭한 태도예요. 윤여정 선생님도 그러셨죠. 연기의 동력은 ‘집으로’.
진짜요? 와! 되게 안심된다. 그런데 늘 다음날 ‘좀더 열심히 했어야 하는데’ 하고 후회한답니다.
연기 수업을 받은 적이 없다고 들었어요.
<가시고기>라고, 정보석 선배님과 함께한 제 데뷔작인데요. 감독님이 연기 수업을 받으라고 하셔서 학원에 등록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선생님이 계속 바뀌어서 의미가 없었죠. 제가 너무 하기 싫어서 계속 집에 가겠다고 떼만 썼거든요.
몇 살이었는데요?
일곱 살이요.
아! 일곱 살 아이에게 억지로 연기 수업을 시키다니, 좀 과장하면 그건 아동 학대죠.
그래서 결국 감독님이 한 장면씩 알려주면서 찍었어요. 저는 뭐, 말하는 기계였죠.
승호 씨는 연기라는 작업에 ‘애증’이 있어 보이네요.
처음엔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었으니까요. 그런데 정신 차려 보니까 이렇게 된 거죠.
순식간에?!
그렇죠. 전 사춘기도 없었어요. 어쩌면 지금 사춘기가 오는 느낌이에요. 얼마 전까지 전 미성년자였잖아요. 여섯 살부터 이 일을 했고 그래서 친구들보다 성공할 기회를 빨리 잡았죠. 그런데 지금까지는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이끌려서 한 거였어요. 이제서야 제가 제 직업을 순수하게 인정해야 될 때가 온 거예요. 난 스무 살이다! 정신 차리자! 과연 내가 이 일로 앞으로 얼마나 더 성공할 수 있을까? 이왕 하기로 했으면 말도 안 되게 어마어마하게 성공하고 싶다! 하하. 나를 한번 믿어보려고요.
모델이 될 만한 인물이 있어요?
벤 포스터라는 배우가 있어요. 그 사람이 멋진 게 조연으로 나와도 주연보다 빛나 보여요. 찌질할 때나 잔혹할 때나 실제 존재하는 인물처럼 보이죠. <3:10 투 유마>에서의 연기는 정말 끝내줘요. 동양인 하고는 완전히 다른 서양인 특유의 기운이 뿜어져 나온다니까요.
영화 취향은 어때요?
전 골 때리는 영화 좋아해요. 사이코틱하고 또라이 같은 거.
본인 영화와 드라마 중에 좋아하는 작품은 뭐죠?
<집으로>는 20~30년 후까지 저를 따라 다닐 테고, <마음이>도 좋았어요. 드라마는 <무사 백동수>요. 여운이라는 캐릭터에 많이 빠져서 지냈죠. 그 역할, 참 좋았어요. 상투 튼 무사가 아니라 생머리에 여자 느낌이 나는 고수였잖아요.
그땐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 좀 끌었겠는데요?
아휴~! 친구들은 저한테 관심 없어요.
여자 친구들은 연정을 품었을 텐데….
저도 여자를 보면 맘이 가고 떨리죠. 그런데 그 친구들은 본능적으로 사람들 앞에서 ‘나, 유승호랑 사귄다’ 소문 내고 싶을 텐데, 그러면 별로잖아요. 다들 어리니까. 오해도 많고. 그래서 그 부분은 처음부터 맘을 닫는 거죠.
만약에요, 나중에 승호 씨 더 커서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배우 하고 싶다고 하면 어떻게 하겠어요?
제가 해봤잖아요. 어린아이가 버티기 힘든 일이에요. 완벽한 성인이 될 때까지 과연 얼마나 많은 아이가 견뎌낼 수 있을까요. 배우만 아니며 청소부를 하겠다고 해도 응원하겠어요. 다만 저처럼 고등학교까지는 졸업하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그런데 대학은 왜 안 갔죠? <공부의 신>에서 연기했던 반항아 황백현도 인생역전을 이루는데 말이죠.
중학교 때부터 엄마한테 그랬어요. “엄마, 나 대학 정말 가기 싫어.” 전 공부하기 정말 싫었거든요. 그러고는 엄마랑 딜을 했어요. 결국 엄마도 합의를 했죠. “너 대학 안 갈 거면 해병대도 가지 마!”
대화 패턴이 참 재미있는 모자네요.
네. 저는 대학을 안 가는 대신 해병대도 포기했어요. 하하하.
후회하지 않을까요?
후회는 안 해요. 제가 대학에 가려는 건 학위가 필요해서고, 대학이 저를 받는 건 유명인이 필요해서잖아요. 그런 협상 재미 없어요. 제가 대학엘 가도 연극영화과일 텐데 전 현장에서 배우는 게 더 많아요.
승호 씨는 꿈이 뭐예요?
저는 어마어마하게 성공하고 싶어요. 이병헌 선배님이 할리우드 가셨지만, 전 거기서 더 나가고 싶어요.
그래서요? 성공해서 돈 많이 벌고, 좋은 집 사고, 비싼 차도 타고….그러고요?
(곰곰이 생각하다)전 사실 어릴 때부터 어른들 사이에서 일하면서 힘들었어요. 어리다고 무시를 당하는 게 참 슬펐어요. 어른들은 제가 어려서 그걸 모르는 줄 알지만, 어려도 예민해서 다 알고 느끼거든요. 그래서 저는 약한 사람, 어려운 사람 보면 맘이 많이 가요. 돈 벌어서 결국은 사람들한테 베풀면서 살고 싶어요. 또 하나 꿈은 환경에 관한 거예요. 지구온난화 때문에 빙하가 녹아서 북극곰이 새끼를 등에 업고 헤엄쳐 다니더라구요. 그런 거 보면 제 가슴이 너무 아파요. 그래서 전 일회용품 안 쓰고, 에어컨도 안 틀어요. 동물들과 공존하면서 살고 싶은 꿈이 있어요.
유승호는 현재 어떤 청년이에요?
전 겁이 많은 사람이에요. 용기도 부족하고 자신감도 없죠. 충분히 할 수 있는 일도 겁을 많이 내요. 하지만 닥치면 굉장히 열심히 해요.
어쩔 수 없는 A형이죠. B형이나 AB형이 되고 싶은 A형이요.
20년 동안 누구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어요?
엄마죠. 전 엄마랑 집에서 밥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 나눌 때가 좋아요. 제가 잘 되기를 가장 바라는 분이고, 항상 응원해주는 분이 엄마니까. 엄마는 제임스 딘을 좋아하셨어요. 전 잘 모르는 배우지만요.
승호 씨는 한국 배우 중 어떤 배우가 좋은데요?
최민식 선배님이요. 슬픔, 행복 모든 걸 겪은 후에 인간이라는 존재가 완성된 느낌이에요.
‘리틀 소지섭’이라는 말을 들을 땐 기분이 어땠나요?
소지섭이라는 이름과 함께 올랐다는 것만으로 좋았어요. 지금은 아무런 감정이 없어요. 그분은 그분대로, 저는 저대로 각자의 매력이 있는 거죠. 전 이제 성인이잖아요. 한때는 제가 국민 남동생으로 불릴 때도 있었지만, 이젠 여진구같은 친구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잖아요.
앞으로 10년 후, 서른 살에는 어떤 모습일까요?
영화계에서 인정받는 사람. 동년배 배우 중에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사람. 전 최고가 되고 싶어요. 톱 중에 톱이요.
- 에디터
- 피처 에디터 / 김지수
- 포토그래퍼
- 김영준
- 스탭
- 스타일리스트/홍은경, 헤어 / 이은혜, 메이크업/전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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