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호의 발견
배우 정경호가 제대 후 영화 복귀작으로 하정우의 감독 데뷔작 <롤러코스터>를 선택했다. 그는 괴상한 인물들로 가득한 비행기에 올라탄, 그나마 가장 정상적인 캐릭터인 ‘욕쟁이 한류 스타’ 마준규로부터 액션 연기보다 더 강렬한 쾌감을 느꼈다고 했다.
정경호는 언제나 가까이 있었다. <미안하다, 사랑한다> <개와 늑대의 시간> <그대, 웃어요> <거북이 달린다> 등 언제나 성실하게 필모그래피를 쌓아온 배우다. 한창 화면을 장악하는 존재감을 주장하던 2010년, 정경호는 의외의 차기작을 골랐다. 군 입대였다. 이준익 감독의 <님은 먼곳에> 덕분에 시작한 알토색소폰을 군악대에서 실컷 불며 배우에게 도움이 되는 호흡법을 연마하는 기회라 생각하며 견뎠다. 카메라 앞에 서기만을 고대하며 보낸 2년이었다. 제대 후, 정경호는 달라진 상황에 당황해야 했다. 원하는 연기를 못할 수도 있는 상황이 많아져 있었다. 불안과 초조가 밀려들었다. 우선은 대학 때부터 존경하는 선배이자 마음을 의탁할 수 있는 형인 하정우가 감독으로 데뷔하는 <롤러코스터>의 주연배우로 나서며 카메라 앞에 서는 희열을 맛보고 배우로서 자신을 리부팅시켰다. 그리고 7월 종영한 JTBC 드라마 <무정도시>의 멋진 싸움꾼 역을 맡으며 다시금 화면을 장악하는 배우의 자리로 돌아왔다. 정경호와의 만남은 부산국제영화제에서부터였다. 하정우를 인터뷰하는 동안, 곁에는 강퍅한 홍보 일정이 가져온 피로에 지쳐 무던하고 나른해진 정경호가 있었다. 부산국제영화제가 끝난 뒤, 서울로 돌아와 며칠 후 스튜디오에서 정경호를 따로 만났다. <롤러코스터>를 위해 잠도 줄여가며 “어딜 가나 영화에 대한 반응이 좋아 즐거운 마음으로” 스무 개도 넘는 인터뷰를 해낸 정경호는 지친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롤러코스터>의 ‘욕쟁이 한류 스타’ 마준규 캐릭터를 <보그> 식으로 트위스트한 ‘록 스타의 방탕한 대기실’ 컨셉의 화보 촬영은 아주 긴 시간 동안 진행됐다. “이렇게 센 캐릭터는 정말 오랜만인데요! <록 오브 에이지>의 톰 크루즈가 된 것 같아요!” 정경호는 <록 오브 에이지>에서 전설의 로커를 연기한 톰 크루즈보다도 더 위태롭게, 그리고 더 카리스마 있게, 섹스와 알코올, 그리고 영혼을 태우는 음악으로 살아가는 록 스타의 사적인 시간을 연기해냈다.
<롤러코스터>의 마준규는 ‘결벽증, 편집증, 폐소공포증을 가진 예민하고 가식적인 욕쟁이 한류 스타’라는 특이한 캐릭터다. 배우에게는 특히 더 재미있는 소재로 다가왔을 것 같다.
여태까지 배우로 살아가면서 하지 말아야 했고, 하지 않기 위해 참아야 하는 일들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연예인병, 영혼 없이 팬을 대하고 가식적인 웃음을 띠우는 것…. 주변에서 그런 배우들을 볼 때마다 눈살 찌푸리고 스스로는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조심하던 모습을 마준규를 통해 대리 경험해보니 스트레스가 해소됐다. <롤러코스터>를 준비하고 촬영하는 4개월 동안 어떤 자리에서 어떤 욕을 해도 용서되는 것도 재미있었다. “영화 캐릭터 때문에…”라는 변명을 영화에서와 똑같이 써먹을 수 있었다.
자신은 남들의 시선 앞에 가식적인 적이 없었나?
적어도 억지로 웃은 적은 없다. 항상 싫은 건 싫다고 확실히 표현했다.
사흘간 지켜본 당신은 매우 무던하고 나무늘보처럼 나른했다. 자신을 주장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다른 현장에서는 내가 주가 되어 행동하려 하고 예민한 면도 있지만, 그때는 너무 피곤해서 그냥 나른하게 있었다. 그리고 형들 앞이니까 막내로 예쁨받는 위치를 즐겼을 뿐이다. 그저 그 안에 있는 것 자체가 좋았다. 성격상 형들과 있는 걸 더 좋아한다. 무슨 짓을 해도 용서가 되고, 무의식적으로 정신을 놓을 수 있어서다. 바보처럼 까불고 놀면서 형들에게 기쁨조가 되는 것이 좋다.
사적인 모습과 공개된 자리에서 하는 말과 행동 사이의 차이가 큰 편인가? 이를테면, 인터뷰에서는 와인을 좋아한다고 얘기하고, 인터뷰 끝나고 식사하러 가면 막걸리를 마시는 식으로.
둘 다 사실이다. 촬영 기간 중엔 정우 형도 와인을 좋아하고, 나도 와인을 마셔야 빨리 잠들 수 있으니까 와인을 싸 들고 다녔다. 맨날 국밥집이나 통닭집 같은 데서 뒤풀이를 하는데, 그런 데선 와인을 구할 수가 없으니까. 그런데 막걸리를 좋아하는 것도 사실이다. 영화제 기간 동안 막걸리 싸 들고 와서 마시는 것 많이 봤잖나. 나 자신은 상황에 따라 변하는데 인터뷰할 때의 답변은 당시의 진실을 말하게 되니까 시차에 따라 진실이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전에 인터뷰할 때 담배를 끊었다고 말했는데, 지금은 금연에 실패해 다시 담배를 피운다.
제대 후 벌써 <롤러코스터>와 <무정도시>, 두 편의 작품을 했다. 좀 서두르는 것 아닌가?
군대 있는 2년 동안 오로지 카메라 앞에 서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제대 후 상황 자체가 많이 달라졌더라. 내가 하고 싶은 연기를 못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거기서 오는 불안과 초조를 연기를 통해 해소하고 있다. 명예퇴직 후보가 되어 전보다 더 열심히 실적을 내려 애쓰는 회사원의 심정이다. 군대 가기 전보다 좀더 집중력 있고 신중하게 연기하려고 배로 노력한다. 위기의식과 배우로서의 책임감을 느낀다.
이 영화로 하정우와의 오랜 숙원 사업을 이룬 셈이다.
느낌 있는 작품으로 정우 형과 함께하게 돼 제대 후 처음으로 카메라 앞에 다시 섰다. ‘내가 그토록 원하던 순간이다. 행복해하고 감사할 줄 알자’고 생각했다. 원했던 순간을 원했던 사람들과 함께 하니 정말 신났다. 대학 때 정우 형과 자취방에서 술 마시며 꼭 나중에 같이 성공해서 작품을 하자고 얘기했다. 그리고 7년 전 같이 부산국제영화제에 내려왔을 때도 똑같이 ‘우리가 만들어서 영화를 찍으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그런 얘기를 했다. 언젠가 꼭 같이 하고 싶었고, 몇 번 기회가 있었음에도 스케줄이 안 맞아서 여태껏 이루지 못한 약속이었다.
작품 선택에 있어 신인 감독 하정우에 대해 반신반의한 지점은 전혀 없었나?
계산이라면 ‘설마 정우 형이 날 망가뜨리기야 하겠어?’라는 선까지였다. 그냥 정우 형이랑 정말 같이 하고 싶었다. 내게 정우 형은 ‘정말 존경하는 형’이라는 말 외엔 다른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존재다. 배우로서, 선배로서 정우 형이 연기하는 게 진짜 좋다. 정우 형이 나오는 영화들도 진짜로 다 좋다. 나중에 정우 형도 이렇게 묻더라. “대본을 보고 아무 고민 없이 하겠다고 해서 솔직히 놀랐다. 왜 그랬냐?” 그때도 “그냥 형이랑 같이 하고 싶으니까 하는 거죠” 하고 답했다. 그랬더니 정우 형도 고갤 끄덕이며 “좋다. 뭐든 작품 선택할 때 재고 고민하지 말고 즐거울 것 같은 걸 해라” 하고 조언해줬다. 캐릭터나 시나리오도 중요하지만, 이외의 부분도 작품 선택의 명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롤러코스터>는 주연배우가 특별히 부각되지 않는다.
<롤러코스터>에는 혼자만의 세계가 없다. 마준규 혼자 대사 하는 것은 세 번의 기도 신밖에 없다. 엄청난 양의 대사를 대충 8명의 배우가 어울려 탁구 치듯 대화하는 호흡이다. 영화의 대부분 신을 계속 다른 배우들과 같이 하고, 긴 연습 기간 중에도 ‘신 바이 신’으로 연습했다. 누군가 한 사람이 튀지 않고 모두가 어우러져야만 의도한 웃음이 잘 나올 수 있는 영화라서 그렇다.
시나리오는 하정우 감독이 썼지만 구체적인 에피소드에는 배우 모두의 아이디어가 녹아 있다던데, 당신의 경험담도 있나?
투자사 회장님을 황당한 장소에서 만난 경험이 있다. 극성인 팬도 만나봤고, 비행기에서 승무원에게 명함을 달라고 해본 적도 있다. 이야기의 큰 틀은 정우 형이 만들고, 디테일한 부분들은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자유롭게 비행기에서 일어날 수 있는 재미있는 상황을 생각하다 보니 다양한 사람들의 직접경험과 간접경험이 녹아 있다.
<롤러코스터>에서 배우 정경호의 대표 장면으로 꼽혔으면 하는 장면이 있나?
마준규가 ‘발광’하는 신이 있다. 그때 뭔가 시원한 느낌으로 대사를 쏟아냈다. 표현할 수 있는 방법들을 다 거침없이 동원해 내뱉은 느낌이었다. 그 장면은 다른 사람들도 최고의 신으로 꼽아주더라. 물수건을 받고 욕하는 장면, 또 똑같은 톤으로 물세례를 맞으며 욕하는 장면은 볼 때마다 웃긴다. 생각만 해도 웃긴다.
촬영 전 연극 연습하는 것처럼 두 달 반 동안 연습 기간을 거쳤다고 들었다. 내내 함께 했나?
당연하다. 배워야 할 게 많은 입장이다. 매일 다 함께 연습하고, 21회차에 걸친 촬영 때도 남양주 세트 근처 펜션 숙소에서 똑같이 합숙을 했다. 혼자 사는데 굳이 집에 갈 필요도 못 느꼈다.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할 때도 있었는데, 아침에 조깅하며 풀었다. 내 분량이 없는 게 조종실 세트에서 촬영하는 딱 사흘이었는데, 그때도 서울에 나와 펜션에서 먹을거리를 장 보고 그냥 다시 들어갔다.
이번 영화를 통해 배우로서 어떤 발전을 했다고 자평하나?
‘하정우 연기 스쿨’에서 배우가 작품에 임하기 전에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해 많이 배웠다. 연기력이라는 건 배우마다 큰 차이가 없다. 캐릭터에 얼마나 밀도 있게 집중하고 다가서려 노력하는지가 관객의 공감을 얻는가, 못 얻는가를 결정한다. 남들보다 두 번만 더 생각하면 시청자와 관객이 더 수월하게 내 연기를 이해하도록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다.
배우 정경호의 초심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했을 것 같다.
‘싫다’ ‘안 한다’는 마음을 품지 않고 기분 좋게 촬영에 임하는 사소한 마음가짐의 중요성. 좋은 사람이 되고 좋은 인성을 갖추는 게 좋은 배우가 되는 길이라 생각한다. 그러다 보면 좋은 기회, 좋은 작품이 내게 올 거라 믿는다.
혹시 다시 하고 싶은 작품이 있나?
한 편의 작품만 다시 할 수 있다면 단연코 SBS 드라마 <그대, 웃어요> 현장으로 돌아가고 싶다. 최불암 선생님조차도 “이런 현장 다시 없다”고 하셨을 정도로 트러블 없는 현장이었다. 서로 배려하고,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았다. 힘들다가도 다시 힘을 얻을 수 있었다.
하정우 감독의 다음 작품은 어떤가? 연출 차기작으로 내년 4월 크랭크인할 <허삼관 매혈기>도 있다.
사실 그 작품에 내가 할 만한 역할은 없다. 그래도 정우 형이랑 또 같이 하고 싶어서, 비중 상관없이 역할을 만들어달라고 조르고 있다. <롤러코스터> 개봉 후 여행을 다녀와서 영화를 한 편 하면 좋을 것 같아 시나리오를 보는 중이다. 가족과 같이 여행을 많이 다니는데 아빠랑은 해외여행을 한 번도 안 가봐서 이번에 단둘이 다녀오려 한다.
아버지 정을영 PD 얘기를 안 해서 서운한가? 김수현 작가와 콤비로 작품마다 성공시킨 베테랑 드라마 PD시다.
아니다. 안 물어보면 좋겠다. 인터뷰에서 아버지 얘기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여자 친구 얘기도? 다들 궁금해한다.
비밀이다. 절대 말 안 할 거다.
- 에디터
- 스타일 에디터 / 손은영, 피처 에디터 / 이해림(프리랜스 기자)
- 포토그래퍼
- 조선희
- 모델
- 원세미, 김화영
- 스탭
- 스타일리스트 / 최진영, 헤어 / 한지선, 메이크업 / 류현정, 세트 스타일링 / 다락(Da;r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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