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 없는 세상
바나나가 멸종되고 있다.
정확히는 전 세계 작황의 45%를 차지하는 캐번디시 품종의 바나나가 멸종되고 있다.
우리가 먹는 그 바나나다. 오랜 세월을 함께한 바나나의 멸종. 어제오늘의 이야기는 아니다.
바나나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있을까? 1970~80년대 초까지는 버스 요금의 다섯 배 가격을 치러야 하는 비싼 과일이었던 바나나는 이제 마트에서 가장 싼 과일이 돼 누구나 즐겨 먹는다. 사과보다 싸다면 사과보다 맛이 없을 법도한데, 달콤하고 속도 든든해 아침식사 대용으로 제격인 바나나는 그런 법이 없다. 1904년 처음 만들어진 바나나 스플릿(바나나 위에 아이스크림을 얹고 온갖 시럽과 휘핑크림, 땅콩가루를 뿌린)은 21세기가 된 지금까지도 사랑 받는 디저트다.
만약 주스 바와 스무디 전문점에서 바나나가 사라진다면 레시피는 대혼란을 겪을 것이다. 바나나 케이크나 파이, 빵이 등장하지 못했다면 디저트 선택은 좀더 쉬워졌을 것이다. 그뿐인가? 바나나 없는 세상엔 찰리 채플린이 바나나 껍질을 밟고 엉덩방아 찧는 연기를 선보인 <순례자>(1923) 같은 영화도 나오지 못했을 것이고, 앤디 워홀이 그린 <벨벳언더그라운드&니코> 앨범의 커버는 사과로 바뀌어 비틀즈와 헷갈렸을지도 모른다. 물론 봄여름가을겨울의 명곡 ‘바나나 쉐이크’(1996)도 들려오지 않았을 것이다. 요시모토 바나나는 요시모토 파인애플 같은 이름이 됐을지도 모른다.
인류사적으로도 바나나는 인류 문명이 발전하도록 채찍질한 작물이다. 쉽게 썩고 물러버리는 바나나의 특징으로 인해 냉장 운송이 발명됐으며(햇빛을 반사하는 흰 범선에 얼음을 잔뜩 실었다), 바나나가 항구에 곧 도착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라디오 통신이 도입됐고, 바코드도 바나나의 이력 관리를 위해 처음 도입됐다. 하나하나 스티커를 붙여 과일에 브랜딩 개념을 씌운 것도 바나나가 처음이었다. 바나나 플랜테이션 농장 기업이 중앙아메리카 곳곳에 철도를 준설한 것은 그곳 작은 나라들을 착취해 재배한 바나나를 독점한 철도로 빠르게 운송하기 위해서였다.
바나나는 20세기 내내 미국인들이 바나나를 더 좋아하게 될수록, 특히 중앙아메리카 소국들의 근대사를 얼룩지게 한 작물이기도 하다. 이른바 ‘바나나 공화국’이라 불렸던 중앙 아메리카 국가들에서 바나나 대기업들이 더 많은 바나나를 싸게 얻기 위해 저지른 만행은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장편소설 <백년의 고독>에 장구하게 묘사돼 있고(파업 노동자와 그 가족 3,000명을 총으로 학살한 사건, 일명 바나나 대학살), 혁명가 체 게바라는 20대 시절 과테말라에 머무는 동안 바나나로 인해 한 나라 정부가 미국의 선동에 손쉽게 제압되는 모습을 보며 개탄했다.
죄 많고도 달콤한 열대 과일, 바나나는 이미 한 번 멸종됐었다. 정확히는 그로 미셸 품종이 멸종됐다. 캐번디시보다 크고 튼튼하며 맛도 좋았기 때문에 캐번디시 이전에 발탁돼 대량 재배된 품종이다. 멸종의 이유는 파나마병이 바나나 농장을 빠른 속도로 뒤덮었기 때문이다. 캐번디시는 그로 미셸을 고사시킨 파나마병에 대한 내성이 확인돼 대체 품종으로 재배된 바나나다. 하지만 또다시 캐번디시 품종의 파나마병으로 바나나 사업자들은 새로운 품종을 찾아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허무개그 같은 일이다. 그로 미셸을 초토화시킨 그때의 파나마병과 달리, 이번에 캐번디시를 말려 죽이고 있는 것은 변종 파나마병인 TR4다. 파나마병이 비로소 최근에 전파된 전염병도 아니다. 수십 년 동안 다른 농장으로 옮기거나 독한 농약으로 잡았던 파나마병이 이제 더 이상 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전파 속도가 빨라졌을 뿐이다. 여기서 한 가지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바나나의 멸종이 실제 멸종과는 다른 얘기라는 점이다. 여기서의 멸종은 특정 품종의 대량 재배가 불가능해져(상품 가치가 떨어져) 시장에서 멸종된다는 의미다.
바나나는 사탕수수와 마찬가지로 플랜테이션을 전제로 한 상품 작물이다. 이 작물이 그토록 쉽게 멸종되는 것은 바나나가 희한한 번식을 하기 때문이다. 유독 바나나 과육에만 씨가 없는 이유를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바나나는 괴상하게 생긴 꽃도 피고 달콤한 열매도 맺지만, 종자가 없다. 튤립이나 히아신스처럼 알뿌리로 복제 번식한다. 다른 유전자 형질을 받아들일 기회가 없다는 의미다. 어미 바나나에서 난 알뿌리를 심으면 어미와 똑같은 새끼 바나나가 자란다. 그래서 유전적으로 전 세계의 바나나는 다 같다. 유전자가 다 같으니까 똑같은 병에 똑같이 당한다. 단일 품종을 플랜테이션으로 넓은 지역에서 대량 재배하니 전염 속도가 빠를 수밖에 없다.
여전히 파나마병에는 근본적인 방제대책이 없다. 캐번디시 재배의 어려움은 확인된 사실이다. 그로 미셸이 그랬던 것처럼, 캐번디시 역시 시장에서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엄살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바나나가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바나나 대기업들은 수많은 야생 바나나(딱딱해서 치아가 깨지기도 하는 밀림의 야생 바나나를 포함해 아직 1,000여 종이 남아 있다)들 중 대량 재배가 용이한 품종을 또 찾아내고야 말 것이다. 유전자 연구실에서는 파나마병에 내성을 지닌 유전자 조작 바나나 연구에도 성공할 것이다. 인류가 바나나를 좋아하는 한, 바나나 없는 세상은 오지 않는다. 다만 캐번디시에 길들여진 입맛을 바꿔야 할 뿐이다.
- 에디터
- 컨트리뷰팅 피처 에디터 / 이해림(Lee, Herim)
- 포토그래퍼
- HWANG IN WOO
- 기타
- 참고도서 / (댄 쾨펠 지음, 이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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