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 드멀미스터의 수장, 세바스티앙 뮤니에르
생존하는 하우스 창립자의 바통을 이어받는 건 어떤 의미일까?
앤트워프의 앤 드멀미스터는 프랑스 청년 세바스티앙 뮤니에르에 의해 시적인 고요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게 됐다.
지난 2013년 겨울 패션계에 비극적 편지 한 통이 배달됐다. 앤 드멀미스터가 그녀의 시적이고 어둡고 아름다운 하우스를 떠나기로 결정한 편지였다. 이별 통보 역시 가장 그녀다운 방식을 선택한 그녀는 후임자도 공개하지 않았다. 얼마 후, 하우스에서 앤을 위해 일해온 새로운 인물이 가만히 존재를 드러냈다. 5년 전 앤과 대화를 나눈 지 30분 만에 러브콜을 받은 세바스티앙 뮤니에르(Sébastien Meunier)가 그 주인공. 만약 다른 패션 하우스였다면 회전문 신드롬이나 전임자와 후임자의 의자 뺏기 게임에 열중한 나머지 디자이너의 이름이 남발되거나 훼손되기 직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전설의 ‘앤트워프 식스’ 중 하나인 이 하우스는 창립자가 떠날 때처럼 후임자 선정 역시 조용하게 처리했다. 그로 인해 후임자가 발표한 지난봄 컬렉션에 대한 반응이 잠잠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나 세바스티앙 뮤니에르는 올가을 컬렉션을 통해 자신만의 확고한 신념과 취향에 앤 드멀미스터의 DNA를 결합, 새로운 시그니처를 완성했고, 바이어들의 반응은 꽤 긍정적이었다. 10년 후는 상상조차 못하며, 단지 현재 최선을 다하는 게 좋다는 그를 앤 드멀미스터 쇼가 끝난 다음 날 파리에서 만났다.
Vogue Korea(이하 VK) 컨디션은 어때요. 피곤하지 않나요?
SÉbastien Meunier(이하 SM) 살짝 피로가 몰려오지만 만족스럽고 후련해요. 컬렉션은 이미 공개됐고 이렇게 편하게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그저 좋을 뿐이에요. 이미 한 달 전, 다음 컬렉션 준비를 시작해 전체 구상도 마친 상태거든요. 남성복과 여성복은 물론, 늘 두 시즌을 동시에 진행하는 패턴에 익숙해요. 시작과 끝이 정해지지 않은 끝없는 뫼비우스 띠 위에 선 기분? 전혀 다른 시간대에 사는 느낌?
VK 이번 쇼에선 벨트로 꽉 조인 재킷이 인상적이었어요. 앤 드멀미스터의 상징이었던 날렵한 테일러링 재킷의 자리를 대신한 것 같더군요.
SM 옷깃이 뒤집어지고 부풀어 오른 형태는 꽃이 피는 모습을 조각처럼 표현한 결과예요. 선보다 형태의 전환을 시도했죠.
VK 컬렉션을 마친 뒤 기자와 바이어들의 반응에 신경이 많이 쓰이죠?
SM ‘좋은 반응’에 대해 스스로 경계합니다. 기자들의 호평은 단순한 칭찬이 아니거든요. 찬사가 가득한 글이더라도 쇼를 통해 보여주고 싶은 메시지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면 달갑지 않아요. 반대로 쇼를 제대로 이해한 혹평이라면 의례적인 칭찬보다 훨씬 반갑죠.
VK 올가을 컬렉션 품평도 읽어봤나요?
SM 앤 드멀미스터 리뷰는 읽어요. 사실 개인 레이블을 진행할 때는 외부 목소리에 관심이 없었어요. 저만의 세계를 고수하기 위해 선별해 받아들이곤 했죠. 하지만 20년이 넘게 자신만의 강력한 메시지를 전해온 패션 하우스의 수장이 됐다면, 외부의 소리도 중요시해야 합니다. 어느 때보다 그들의 생각에 주의를 기울이고 수렴할 준비가 돼 있습니다.
VK 후계자로 지목된 첫 쇼에선 당신을 내세우지 않았어요. 다른 이유라도 있었나요?
SM 이유는 간단합니다. 앤 드멀미스터는 노이즈 마케팅과 철저히 거리가 먼 하우스예요. 중요한 건 앤이 떠난다는 것. 누가 계승하느냐는 중요한 게 아니었어요. 진짜 중요한 것은 컬렉션, 그러니까 결과물이죠. 하우스의 이런 판단은 그녀의 이름을 존중한 신중한 처사였다고 생각합니다.
VK 당신은 오래전부터 스토리텔링을 강조해왔어요. 앤 드멀미스터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뭔가요?
SM 앤 드멀미스터의 본질은 앤의 내면과 모든 감정을 진솔하고 시적인 언어로 풀어내는 겁니다. 오랜 시간 자신을 스토리텔링해온 디자이너의 바통을 이어받은 지금, 저의 숙제는 그 감성을 단순히 재해석하는 게 아니에요. 디자인 코드는 가져가되 제 감정에 충실한 컬렉션을 보여주는 거죠. 나만의 이야기를 담는 게 브랜드의 가치관을 지키는 가장 정직한 방식일 겁니다.
VK 당신만의 스토리텔링을 위해선 어디에서 영감을 얻나요?
SM 복잡하고 미묘한 제 감정을 통해서! 저 역시 내면 세계를 통해 영감을 얻고 어떻게 컬렉션에 투영할지 고민합니다. 음악이나 미술도 단순히 참고 자료로 쓰는 게 아니라 작가의 감정과 제 감정이 교감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죠.
VK 쇼 음악에 따라 옷을 나눠둔 것 같았어요. 가벼운 색조가 등장할 땐 긴장을 푸는 편안한 음악이 나오던데.
SM 이 부분은 앤과 다른 점이기도 한데, 그녀가 패티 스미스 같은 특정 뮤지션을 통해 영감을 받았다면, 저는 다양한 음악을 듣고 음악감독과 대화하며 컬렉션에 쓸 음악을 고릅니다. 하지만 앤 드멀미스터는 ‘감정’이 중요한 브랜드이기에 쇼 음악을 고르는 일은 아주 중요하죠.
VK 프랑스 태생의 당신과 벨기에 태생의 앤은 다른 점이 또 있겠죠?
SM 당연하죠. 잭슨 폴록에게 영향을 받았던 앤이 옷감에 색깔을 흩뿌리듯 표현했던 방식부터 저와 달라요. 앤은 히피, 아마조네스 등에게서 영감을 받았죠. 저는 이 여성성에 록적인 요소를 더하고 있어요. 앤 드멀미스터 특유의 ‘강인함과 감성적인 유약함이 공존하는 복잡미묘한 여성성’은 같습니다.
VK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는데, 그 이력이 당신에게 어떤 식으로 영향을 주나요?
SM 법을 공부하던 시절 좋아하던 인용구가 있어요. ‘법이 모든 것을 이끈다.’ 법이 저를 여기까지 인도한 것을 보면 딱 맞는 말이죠. 문학에 대한 애정에서 시작된 전공이었는데, 직업으로는 삼고 싶진 않아서 전공을 바꿨어요. 참, 계약서를 쓸 땐 꽤 도움이 되더군요. 하하!
VK ‘내가 입고 싶은 옷이 곧 내가 되고 싶은 것’이란 생각으로 전공을 바꿨다고 들었어요.
SM 자기중심적인 생각이었지만 옷이 지닌 사회적 메시지를 남보다 일찍 깨달았어요. 특정 디자이너를 동경하거나 한 스타일에 얽매이고 싶지도 않았죠. 지금도 같아요. 늘 외부 세계와 적당히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걸 좋아하죠.
VK 졸업하기 전 어느 TV 채널의 아트 디렉터로 일한 적이 있던데, 어떤 경험이었는지 궁금해요.
SM 세상에, 어떻게 알았죠? 작은 음악 채널이었는데 학교를 졸업하고 인턴으로 일한 첫 직장이었어요. 갑자기 아트 디렉터가 채널을 옮기는 바람에 그 자리를 맡아 로고도 바꾸고 스튜디오도 새 단장하면서 비주얼 디렉터로 일했답니다. 하지만 TV 특유의 상업적 성향이 저와 맞지 않았어요.
VK 그 이력이 쇼 연출에 도움을 주지 않을까요?
SM 전혀요! 하하.
VK 장 콜로나에서 프리랜스 디자이너로 일했고, 이에르 페스티벌에서 수상했으며, 마르지엘라에서도 일했어요. 이 경력은 빅터앤롤프와 똑같아요. 성공한 파리 디자이너의 엘리트 코스인가요?
SM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듣고 보니 그렇군요. 신기해요! 하지만 저는 한 번도 어떤 길로 가야 한다고 제게 강요하지 않았어요. 완벽한 우연이죠. 아, 하나 다른 점이 있어요. 그들이 디자이너로서 명성을 누리고 즐길 줄 안다면, 저는 제 작업 뒤에 숨어 있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
VK 메종 마르지엘라에서 보낸 10년도 궁금하군요.
SM 마르지엘라 첫 출근이 벌써 15년 전이에요. 수석 디자이너로서 여성복 5년, 남성복 5년을 일했죠. 이 컬트 하우스에서 디자이너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기회를 누렸고, 갖춰야 할 모든 자질을 배웠어요. 애석하게도 마르탱이 떠난 후, 하우스는 과거의 모습을 많이 잃었어요. 물론 지금도 훌륭한 옷을 선보이지만 본질보다 마케팅에 신경 쓰는 브랜드가 됐고, 컬렉션 역시 메시지보다 대중에 집중하기 시작했거든요. 마르탱이 없는 마르지엘라에서의 2년은 더 이상 제가 머물 자리가 아니란 사실을 깨닫게 했어요. 10년을 일했으니 떠날 시기라고 느끼기도 했죠.
VK 시그니처 컬렉션을 전개한 적도 있는데 다시 진행할 생각은 없나요?
SM 현재로선 전혀! 늘 은행 빚에 시달리며 주말과 휴가도 반납하고, 밤샘도 마다하지 않으며 열정만으로 밀어붙이는 삶은 20대에나 가능해요. 마르지엘라에서 일한 처음 5년간 개인 컬렉션을 전개했는데 사정이 여의치 않아 중단했어요. 그때 마르탱이 “드디어 너에게 남성복 컬렉션을 맡길 수 있게 됐구나!”라며 남성복 수장 자리를 내줬어요. 덕분에 과도기는 자연스러운 연장선이 됐죠. 그래서 지금도 제 컬렉션을 그만둔 것을 ‘잃어버렸다’고 여기지 않아요. 누가 제 이름을 아는 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진짜 중요한 건, 제가 선보이는 작업이 저의 창작물이라는 것뿐이죠.
VK 2010년, 앤 드멀미스터에서 러브콜이 온 순간도 기억하나요?
SM 저를 만나고 싶다며 연락해온 앤과 함께 커피를 마시고 산책하며 함께 하루를 보냈어요. 대화 내내 웃음이 끊이질 않았는데,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이젠 기억도 안 나요. 확실한 건 전혀 면접 같지 않았다는 것. 친근한 지인과의 소소한 대화 같았죠. 헤어진 후 30분 만에 앤 드멀미스터를 위해 일해달라는 문자를 받았어요. 당연히 곧장 알겠다고 답장했죠! 그녀가 왜 저를 선택했는지 묻거나 전해 듣지 않았지만,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큰 교감을 나눈 건 확실해요. 정말 근사한 환영 방식이었죠. 게다가 그날은 마르지엘라에서 마지막 쇼를 앞둔 전날이었으니 어떻게 잊겠어요.
VK 이제 앤과 남편 패트릭은 당신이 하우스를 독립적으로 운영하도록 일임했어요. 가끔 그들의 조언이 필요하진 않나요?
SM 앤과 패트릭은 더 이상 관여하지 않아요. 인간적으로 아끼는 가까운 지인이지만, 일에 있어선 완전히 무관한 사이가 됐어요.
VK 패션 월드는 디지털 덕분에 영역이 넓어졌어요. 당대 패션 하우스의 수장으로서 SNS에 대한 당신의 생각이 궁금해요. 당신의 인스타그램 계정을 찾을 수 없었어요!
SM 제가 다른 일을 했다면 달라졌겠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론 디자이너로서 대중과의 소통 수단으로 인스타그램을 쓰는 게 프로페셔널한 방법은 아닌 듯해요. 인터뷰도 제가 소화할 범위에서 진지하게 임하려다 보니 빈도가 적죠. 그렇다고 대중에게 저를 드러내기 두려워하거나 꺼리는 건 아니에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저를 노출하는 게 바람직한 관계는 아니라고 여길 뿐이죠.
VK 이제 가벼운 질문으로 바꿔볼게요. 옷장에서 가장 자주 꺼내 입는 옷은 뭔가요?
SM 제 스타일은 한결같아요. 화이트와 블랙 셔츠, 재킷과 웨이스트 코트! 특히 셔츠에 집착하는데 사람들이 ‘무슈 슈미즈(미스터 셔츠)’라고 부를 정도죠. 브랜드는 두말할 것 없이 앤 드멀미스터!
VK 컬렉션이 막 끝났는데, 이제 뭘 할 건가요?
SM 친구들과 좋은 시간을 보낼 거예요! 계획을 세워 뭔가 하기엔 패션계의 시곗바늘이 너무 빨라요. 동의하시죠? 오히려 컬렉션을 위해 에너지를 쏟는 사람들과 몰두하는 것만으로도 재충전이 된답니다.
VK 생각보다 심심하군요. 친구들과 가기 좋은 파리의 아지트 한 곳만 소개해주세요.
SM 질문의 주인을 잘못 골랐어요! 하하. 저는 딱히 선호하는 리스트가 없어요. 한곳에 머무르기보다 계속 새로운 것을 찾아다니며 자극받는 걸 즐기니까요. 대화 중에 갑자기 떠오른 곳이 있는데, 최근 우리 하우스 근처인 마레 지구에 문을 연 한국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했어요. 음식이 훌륭하던데요?
- 에디터
- 홍국화
- 포토그래퍼
- HYEA W.KANG, INDIGIT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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