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로 나온 한복
우리는 평생 몇 번이나 한복을 입을까? 돌잔치, 초등학교 학예회, 명절, 결혼식 정도를 떠올렸다면 주위를 유심히 둘러보시라. 한복이 꽤 패셔너블한 일상복으로 거리를 장악하기 시작했으니까.
“한국만의 전통 기법이라는 리넨 콜라주 패치 워크(조각보를 말한다)는 놀라울 만큼 미니멀하고 모던해 보였다(미국 ‘보그닷컴’).” “한국 전통 의상은 중국이나 일본의 다소 익숙한 옷에 비해 라거펠트에게 신선한 영감을 준 게 분명했다(‘스타일닷컴’).” “한복의 소매에서 영감을 얻은 알록달록한 줄무늬, 라거펠트가 ‘샤넬 재킷의 한국적 버전’이라고 표현한 밝은 트위드 재킷이 특히 눈에 띄었다(‘WWD’).” DDP에서 열린 샤넬 크루즈 패션쇼에 대한 패션계의 반응은 뜨거웠다. 도넛 같은 가체를 올린 헤어스타일, 베개를 연상시키는 클러치와 고무신을 닮은 미디 힐, 저고리 동정 같은 브이넥, 한복 실루엣의 엠파이어 드레스, 그리고 곳곳에 활용된 색동과 조각보, 자개 장식까지. 한국의 전통 의상은 칼 라거펠트만의 시각으로 재해석됐고, 전 세계에 한복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해외 패션 뉴스에서 ‘Hanbok’이라는 단어가 이토록 자주 등장하게 될 줄이야!
샤넬 리조트 컬렉션처럼 한복을 직설 화법으로 표현한 것은 처음이지만, 하이패션 디자이너들이 한복에 관심을 보인 것이 처음은 아니다. 드리스 반 노튼 2012 가을 컬렉션에는 드라마 <황진이>로 잘 알려진 한복 디자이너 김혜순의 책 <아름다운 우리 저고리>에 등장하는 저고리 동정 부분을 패턴으로 만든 옷이 등장했고(백스테이지에서 김혜순은 반 노튼에게 연보라색 두루마기를 직접 입혀줬다), 지난 봄, 여름 로샤 컬렉션의 가슴 위를 묶은 벨트 장식과 허리선이 높고 풍성한 스커트는 영락없이 한복의 저고리 고름과 치마를 연상시켰다. 또 리한나가 올해 그래미 시상식에서 입은 지암바티스타 발리 2015 봄 꾸뛰르 피날레 드레스는 저고리 없이 한복 속치마만 입은 모습이었다.
샤넬 패션쇼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을 찾은 틸다 스윈튼도 <보그 코리아> 촬영장에서 한복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샤넬 옷과 한복을 함께 입은 채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특히 ‘차이킴’의 쪽빛 ‘답호(관복과 군복 위에 덧입는 반소매 도포)’는 예쁘고 편해서 매일 입을 것 같다며 구입 의사를 밝혔다. 또 얼마 전 방한한 ‘우주 여동생’ 클로이 모레츠는 한복을 곱게 빼입은 사진을 SNS에 올려 네티즌들의 지지를 받았다. 빅뱅 신곡 ‘Bae Bae’에도 멤버들이 한복을 입고 강강술래를 하는 장면이 담겨 있다(태양은 “특별히 한복을 알리겠다는 것이 목적은 아니었지만, 예전부터 우리 것을 좋아했다. 건축물부터 전통 예술품, 의상들까지 알고 보면 예쁜 게 정말 많다”고 전했다). 어디 그뿐인가. 인스타그램에는 ‘한복’이라는 해시태그로 15만 장, ‘hanbok’이라는 해시태그로는 10만 장 이상의 사진이 올라와 있다(최근 대학생들 사이에선 한복을 입고 해외 배낭여행을 가거나, 민속촌이나 전주 한옥마을에 가서 ‘인증샷’을 남기는 것이 유행이다).
과연 한복이 패션 트렌드로 새로운 전성기를 맞을 수 있을까? 전통 맞춤 한복을 선보이는 ‘차이 김영진’과 좀더 가벼운 기성복 느낌의 세컨드 브랜드 ‘차이킴’을 이끌고 있는 김영진은 긍정적인 답변을 들려준다. “한복은 박제된 옷이 아니라 계속 진화하고 있습니다. 2015 봄, 여름 시즌의 한복은 조선시대 한복과는 다른 형태로 나타나는 게 당연하며, 그런 동시대성 때문에 젊은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거죠.” 실제로 ‘차이킴’에서 판매하는 의상들은 분명 한복이지만, 누구라도 일상에서 충분히 입을 만한 형태로 변형된 모습이다. 무관들이 입던 ‘철릭’이라는 관복을 원피스로 재해석한 ‘철릭 원피스’부터 허리까지 내려오는 16세기 저고리를 변신시킨 고운 빛깔의 리넨 재킷까지. 최근 대학생들 사이에 큰 인기인 생활한복 브랜드 ‘리슬’의 대표이며, <나는 한복 입고 홍대 간다>의 저자인 황이슬도 꽤 많은 젊은이들이 한복의 매력에 빠져 있다고 전한다. “‘리슬’ 고객 연령대는 10~20대가 주를 이룹니다. 아주 긍정적인 현상이죠. 한국화 작가, 전통 공예가, 전통 음식 명인뿐 아니라, 오로지 한복이 좋아 구입하는 경우가 늘고 있어요. 한복 여행을 준비하거나 수학여행에서 개성을 드러내고 싶은 학생들도 있죠. 한번 입어보면 모두가 입을 모아 예쁘다, 편안하다, 기분 좋다고 칭찬합니다.”
민속촌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고, 정말 세련되게 한복을 즐길 수 있는 방법은 뭘까? “‘한복은 이런 모습이어야 한다’는 편견을 깬 다양한 시도가 관건입니다. 상하의 모두 한복을 입는 것보다 기성복과 함께 연출하는 게 좀더 쉽게 한복을 즐기는 노하우죠.” 김영진의 설명이다. “차이킴’ 컬렉션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아이템은 ‘철릭 원피스’입니다. 다채로운 색감과 문양으로 선보여 사랑받고 있죠. 단품으로 입을 수 있지만, 다른 아이템을 어떻게 매치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의 룩이 완성되죠. ‘차이킴’ 옷들은 다른 기성복과 믹스매치가 가능해요.” 황이슬도 덧붙인다. “가령 기성복 팬츠에 저고리를 입거나, 평범한 티셔츠에 한복 바지나 치마를 입는 식이죠.” 황이슬은 ‘왜 한복 저고리를 청바지랑 입었어?’라거나 ‘한복 치마 밑에 운동화를 신은 건 좀 이상하지 않아?’ 같은 반응이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전한다. “저는 한복 치마에 가죽 재킷과 워커를 매치하기도 합니다. 각자가 본인이 갖고 있는 패션 아이템들과 연출하다 보면 꽤 재미있는 스타일링이 탄생할 수 있어요.”
이렇듯 한복은 다양한 옷감과 색상, 무늬를 만나 새롭게 변신 중이다. 그나저나 ‘생활한복’이라는 이름 아래 전혀 다른 형태로 변화한 한복도 한복이라 지칭할 수 있을까? 김영진은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의 개념이 무척 좁다는 점을 지적했다. “조선시대에는 집에서 옷을 만들어 입었기에 가풍이 다르듯 한복 형태도 조금씩 달랐어요. 그야말로 개성이 넘쳤죠. 전통이라는 건 정해져 있는 게 아닙니다. 다만 입체재단을 하는 서양 복식과 비교할 때 한복은 평면재단이 차별화된 특징이죠.” 그러고 보니 최근 레이 카와쿠보, 하이더 아커만, 피비 파일로 등이 평면재단에 관심을 보이는 게 무척 흥미롭다. “또 중국 치파오, 일본 기모노와 비교했을 때 한복은 담백하고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어요. 여백의 미죠.”
한복을 향한 젊은 층의 관심이 일시적으로 끝날지, 한복 유행이 과연 하나의 트렌드로 인정받을 수 있을지는 아직까지 미지수다. 다만 한번쯤 입고 싶은 사람이라면 한복 애호가의 말에 귀 기울여보자. “한복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것에 대한 자부심이 있어야 하고, 한국적인 정서에 공감해야 하죠.” 김영진의 말이다. “샤넬을 통해 전 세계가 한복에 관심을 가진 것은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에요. 다만 한복에서 끌어낼 수 있는 건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우리가 보여줘야죠.” 황이슬은 우리 것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강조한다. “심사숙고 없이 만든 옷이라면 그 형태가 한복처럼 보이더라도 한복이라 부를 수 없어요.”
- 에디터
- 임승은
- 포토그래퍼
- HYEA W. KANG, COURTESY PHOTOS, GETTY IMAGES/ MULTIBI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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