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진구의 숲
열아홉 살 여진구는 영화 〈서부전선〉에서 걸출한 북한 사투리를 구사하며 어리바리 탱크를 몬다. 자신의 일을 좋아하는 한 소년이 물리적으로 정신적으로 커가는 과정은 성장이라는 가치에 대한 감동을 준다. 여진구의 매시간이 놀랍다.
태고부터 ‘오빠’는 손위 남자를 이르거나 부르는 말이었다. 여자들이 이성이라는 존재를 인식하고 느끼면서 콧소리 섞인 오빠로 변모하지만 오빠는 오빠였다. 그런데 요즘 오빠라는 단어가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다. 열아홉 여진구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딱 10년 전, <새드 무비>에서 눈물 콧물 다 흘리던 꼬마는 <해를 품은 달>에서 심장을 슬금슬금 간질여놓았고,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에 이르러 여자들로 하여금 눈앞에 교복을 보고도 ‘어이쿠, 진구 오빠’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커버렸다. 오빠란 ‘내 남자 삼고 싶은 사람’을 뜻하는 말이구나, 여자들은 가슴으로 깨달았다. 올 추석, 여자들은 진구 오빠의 군복 입은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니 교복보단 죄책감이 조금 덜할 수 있겠다. 여진구는 영화 <서부전선> 개봉을 앞두고 있다.
‘연기의 신’ 설경구와 ‘연기의 신동’ 여진구, 구구 커플의 만남으로 주목받고 있는 <서부전선>은 농사짓다 끌려온 남한군 졸병 ‘남복’과 탱크를 책으로만 배운 북한군 졸병 ‘영광’이 전쟁의 운명이 달린 비밀문서를 두고 대결을 벌이는 영화다. <해적: 바다로 간 산적>에서 작가로 사극과 코미디를 솜씨 있게 버무려냈던 천성일 감독이 <해적>보다 5년 전에 써두었던 시나리오다. 북한 소년병 영광의 나이 18세. 촬영 당시 여진구의 나이 18세. 천성일 감독은 <서부전선> 속 영광이 여진구가 영광의 나이가 될 때까지 기다려준 거 같다고 말했다. 그 시간 동안 여진구는 포스터 속 설경구와 정면에서 눈싸움을 벌일 만큼 통 크게 자랐다. 설경구는 “영화에서 여진구는 절대적이다. 대한민국에서 영광 역은 여진구밖에 할 사람이 없다”며 신뢰를 보냈다. 여진구 입장에서는 신기하게도 실제 자신과 닮은 구석이 많은 캐릭터였다. “영광은 해보지 않은 일을 두려워하진 않지만 어리바리하게 처리하는 스타일인데 제가 좀 그래요. 새로운 일에 적응될 때까지 시간이 필요한 편이거든요. 능글맞기도 하지만 진지한 면이 있는 구석도 닮았고요. 비슷한 점이 많아서 편했던 친구예요.”
여진구는 현장에서 그냥 ‘걔’처럼 지냈다고 표현했다. 그동안 여진구는 캐릭터의 성격이나 감정 상태를 오랜 시간을 들여 공부하고 연구하는 스타일이었다. 또래들이 등교해서 국·영·수를 공부할 때 여진구는 현장에서 인물을 공부했고, 또래들이 한 과목을 끝내고 다른 과목으로 넘어갈 때 여진구는 캐릭터를 갈아타며 새로운 연구를 시작했다. 하지만 <서부전선>은 좀 달랐다. “이번 작품은 되게 독특했어요. 연구를 엄청 하진 않았어요. 현장에서 리허설 하면서 감독님과 설경구 선배님이랑 얘기해보고 촬영에 들어갔어요. 감독님은 ‘하고 싶은 대로 해봐. 이상하면 또 찍으면 되지’라고 말씀하셨어요. 본능적이라고 해야 하나요? 즉흥적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현장에서 이뤄진 것이 많아요.” 설경구야말로 그냥 그 캐릭터 그대로 사는 선배였다. 그가 구사하는 충청도 사투리로 현장은 늘 구수했다. 같이 있다 보면 자연스럽게 영화의 연장선에 있었다. “선배님이 해주신 조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이오? 영화 속에서 워낙 서로 욕으로 불러서요. 하하하.” 예고편으로 판단해보건대, 사랑을 담아 ‘개XX’로 불렀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개XX’에 맞서 북한군으로서 ‘간나XX’를 입에 붙이기 위해 북한 사투리 수업을 받고 사투리 연기를 선보인 건 제2 외국어 연마쯤 되었을 것이다. “선생님한테 배우긴 했지만 사투리에 사로잡혀 연기를 하진 않았어요. 신경 써야 할 부분이긴 한데 사투리만 생각하다 보면 현장감을 놓칠 수 있으니까요. 고민이 많았어요.” 이번 영화에서는 100m를 11초에 주파하는 여진구의 달리기 솜씨도 감상할 수 있다. 광활한 초원에서 끝도 없이 뛰고 뒹굴고 넘어졌다. 현장을 지킨 매니저는 진구가 너무 멀리 뛰어가서 불러도 오지도 않고, 수풀 속으로 들어가서 보이지도 않았다며 당시 상황 설명을 거들었다.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에서 쐈다 하면 명중했던 사격 실력은 등장할 기회조차 없었다. 영광은 총 드는 것도 무서워하는 인물이었다.
평소 여진구의 위시 리스트에 ‘군대’가 높은 순위를 차지하고 있지만 전쟁 상황이 어느 정도의 공포심이고, 어느 정도의 두려움일지 이해하긴 쉽지 않았다. 의문이 들 때마다 천성일 감독과 설경구는 믿는 대로 가보라고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나이가 한 자릿수일 때부터 카메라 앞에 섰던 여진구에게는 그야말로 엄청난 경험이었다. “한 번도 이렇게 연기해본 적이 없어요. 아무리 제 생각이 확고해도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어보고 그걸 가져오는 편이었는데, 이번에는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기도 했지만 제가 생각한 대로 인물을 그려나갔어요. 처음엔 걱정이 많았는데 하다 보니 자신감이 생기고 연기에 애착이 더 많이 갔어요.” 객관식 문제가 아니라 주관식 문제를 푸는 기분이었을 거다. 비교할 것도, 경우의 수도, 생각할 것도 많아졌는데 캐릭터에는 더 빠져들 수 있었다. 여진구는 자신 앞에 깔린 자유로운 연기의 멍석에 거듭 감사함을 표현했다.
탱크 운전을 글로 배우는 영광과 달리 여진구는 이론에 신경 쓰는 편은 아니다. 첫 출연작이었던 영화 <새드 무비> 권종관 감독은 150:1의 경쟁률을 뚫고 올라온 아홉 살 소년에게 연기 학원에 다니지 말라고 조언했다. 그때부터 여진구 연기 비결의 80%는 현장이다. 함께 연기한 선배 배우, 감독, 스태프 모두가 교과서이고 스승이다. 늘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흡수하는 소년에게 현장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노하우를 하나라도 더 알려주려 애썼다. “처음부터 감독님과 선배님들 얘기 들으며 연기했어요. 연기를 정의하긴 어려운데, 너무 벗어나면 안 되지만 너무 그 안에만 있어도 안 되잖아요. 그 범위를 감독님과 선배님이 항상 알려주셨어요.” 많은 선배들은 보통 사람의 삶을 경험하지 못한 배우 신동에게 일상으로 불리는 경험이 부족하진 않을까 우려도 거두지 않았다. “좋은 경험이든, 나쁜 경험이든 삶의 경험이 쌓여야 연기에 도움이 된다고 조언해주세요. 다행히 아직까지 경험 부족을 느끼진 않고 있어요. 제겐 연기가 경험이 되니까요. 현장에서 한 경험이 저에겐 큰 자산이에요. 지금은 이해하지 못한 선배님들의 조언도 시간이 지나면 이해하는 순간이 올 거예요. 그때가 더 기대돼요.” 선배들의 조언은 뼈가 되고 살이 되어 여진구가 잘 자랄 수 있는 자양분이 되었다. <미생> 한석율이 여진구를 만난다면, ‘역시 현장이지 말입니다’라며 악수를 건넬 것이다.
현장에서 연기를 배운 여진구는 <해를 품은 달>에서 아역 출신 배우의 역사를 다시 썼다. 그동안 아역은 진짜 주인공이 등장하기 전 사연을 설명해주는 존재에 가까웠다. <해품달>에서 그가 보여준 건, 아역도 충분히 그 시간을 주인공으로서 채울 수 있다는 가능성이었다. 그가 연기한 이훤은 김수현을 위한 서사가 아니었다. 그 시간의 주인공은 여진구였다. <보고 싶다> 역시 마찬가지였다. 좋아하는 여자아이에게 일어난 비극을 목격하는 여진구의 눈빛은 그 자체로 충분히 아프게 전해져왔다. 여진구는 작품을 거들었지만, 거들기만 한 존재는 아니었다. 이때부터 아역 분량을 늘려달라는 요청도 등장했다. 여진구는 누군가의 아역으로 출연해도 자신의 이름을 놓치지 않았다.
그가 한 작품을 거뜬히 책임질 수 있는 배우로 보이기 시작한 건 역시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부터다. 자신이 왜 다섯 명의 범죄자 아버지에게 키워졌는지 알지도 못한채 총을 겨눠야 하는 혼란스러움과 보통의 삶에 대한 갈망이 뒤섞여 있던 화이는 여진구의 불완전하고 흔들리는 눈빛 속에 고스란히 담겼다. 우연인 듯 신기하게도 이때부터 여진구는 출연작 포스터에서 두 명의 배우 중 한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출연한 영화 <백프로> <내 심장을 쏴라>는 흥행은 하지 못했지만 “배우의 연기는 정말 좋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아역 배우들이 10대에 공백기를 두고 성인이 되어 다시 브라운관에 얼굴을 비치는 관례와 달리, 여진구는 그 시기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연기를 쉼 없이 이어오고 있다. 이는 단순히 좋은 배우가 좋은 연기로 좋은 작품을 선보이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잘 자랐다’, 혹은 ‘잘 자라줘서 고맙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자신의 일을 좋아하는 한 소년이 물리적으로 정신적으로 커가는 과정은 성장이라는 가치에 대한 감동을 준다. 아이의 시계와 어른의 시계는 속도가 다르다. 아이는 초침처럼 분주히 내달리고 어른은 시침처럼 느릿하다. 알고 있지만 잊고 있는 속도 차이를 우리는 성장하는 10대 배우를 보며 기억해내고 확인한다. 게다가 여진구는 잘 알고 있다. 나이도 외모도 경계에 서 있는 이 순간을 남기고 보여주는 게 누구나 할 수 있는 경험이 아니라는 걸. 비록 여진구 자신은 거울을 보며 ‘진짜 까맣다’는 생각밖에 안 할지라도 말이다.
그는 10대의 끝자락 열아홉 살의 현재를 하이틴 드라마 <오렌지 마 말레이드>에도 남겼다. 흡혈귀 소녀를 좋아하는 인간 소년으로 출연, 전생까지 엮여 있는 인연의 드라마 를 풀어냈다. “<오렌지 마말레이드>는 그냥 너무 기분 좋은 작품이었어요. 하이틴에 하이틴 장르를 남길 수 있어서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촬영장은 너무 편했어요. 장난치고 떠들며 학교 다니는 것처럼 촬영했어요. 연기에 대한 아쉬움은 커요.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부족함이 있어요. 평소 성격과는 너무 다른 역할이라서…” 그는 오래전부터 ‘모태 솔로’로서 멜로 연기에 오글거림을 토로해왔다. 하느님이 여진구를 빚다가 깜빡한 건 ‘애교’다. “멜로 연기는 평생 힘들 거 같아요. 진짜 애교가 없어요. 애정 표현도 못하는 편인데 앞으로 걱정이에요. 근데 진짜 못하겠어요. 진짜로. 걱정이에요.” <감자별 2013QR3>에서 하연수와 선보인 상남자 키스, <오렌지 마말레이드>의 목덜미 키스, <해를 품은 달>에서 잊으려고 하였으나 잊지 못하였다던 그 살 떨리는 대사는 도대체 어떻게 완성된 것인가. 그가 내놓는 대답은 ‘순간 집중력’이다. “감독님께 빨리 컷 해주시면 제가 ‘정말 잘하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려요. 확 시작해서 확 끝내고, 아우!” 멜로에 뻔뻔하지 않아서 누나들이 그를 보면 설렌다는 걸, 여진구가 깨달으려면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이 천진난만한 소년은 ‘오빠’라는 호칭도 별명으로 이해한다. “처음 들었을 때는 당황스러웠는데 들을수록 기분이 좋은 거예요. 처음 만나거나 어려운 사람에게는 쓰지 않는 호칭이잖아요. 누나들이랑 가까워지는 거 같아서 좋아요!” 잡아가겠다며 망태기 챙겼다는 농을 건네거나, ‘민증’을 숨겼다며 애정 섞인 댓글을 다는 누님들에 비해 역시 지나치게 해맑다.
소문대로 여진구는 반듯한 배우였다. 그 반듯함은 30℃가 넘는 한 여름 두꺼운 풀오버에 코트까지 입고 촬영하면서 “많이 덥죠?”라는 위로의 말 한마디에 “여름이니까요”라고 호탕하게 대답하는 기특함과 매니저의 자동차 열쇠를 숨겨놓고 낄낄거리는 장난 사이에 있었다. 방황과 반항은 결핍으로부터 비롯되고, 자신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고 있기에 사춘기도 별 탈 없이 지나갔다고 말하는 여진구는 고 3이자 열아홉살이다. 스무 살이 되어 그토록 해보고 싶다는 ‘치맥’을 하고 난 여진구는 또 어떤 표정을 지을까. 여진구의 매시간이 놀랍다. 다행히도 우리에겐 그 얼굴을 지켜볼 충분한 시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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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
- 조소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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