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zen
꽁꽁 얼어붙은 111.12m의 타원형 경기장과 하얀 설원을 무대로 멋진 경기를 보여줄 국가 대표 선수들. 그들이 결전을 벌일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태릉선수촌에 모였다.
역전의 명수 심석희_Short Track Speed Skating 4년 전 소치 동계 올림픽에서 가장 짜릿했던 순간을 꼽으라면 여자 쇼트트랙 3,000m 계주일 것이다. 마지막 두 바퀴만 남겨놓은 상황에서 최종 주자로 나선 심석희는 아웃코스로 중국 선수를 추월해 금메달을 따냈다. 올림픽에 처음 출전한 열일곱 살 소녀는 거침없이 질주했다. 175cm의 가늘고 긴 팔다리를 힘껏 저으며 폭발적인 스퍼트로 내달리는 그녀에게 팬들이 지어준 별명은 ‘폭주기린’. 2018 평창 동계 올림픽은 심석희에게 더욱 특별하다. 쇼트트랙 경기가 열리는 강릉아이스아레나가 있는 강릉은 심석희의 고향이다. 초등학교에 갓 입학했을 무렵, 집 근처 논두렁에서 빙판을 지치며 오빠와 함께 스케이트를 배웠다. “신기해요. 처음 스케이트를 시작했을 때만 해도 그곳에서 동계 올림픽이 열릴 거라곤 상상도 못했거든요.” 그 당시만 해도 강릉은 스케이트의 불모지였다. 조재범 코치와 함께 서울로 스케이트 유학을 온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평창 올림픽을 앞두고 심석희는 선수들과 매일 훈련 중이다. 새벽 5시 30분부터 아침 8시까지 오전 훈련을 마치고 나면 낮 1시 30분부터 저녁 6시 30분까지 오후 훈련이 이어진다. 국가 대표 쇼트트랙 팀의 막내였던 심석희는 이제 ‘언니 그룹’에 속한다. “제 위로 아랑 언니(김아랑)가 있긴 한데 저보다 어린 후배들이 더 많죠. 선수들의 평균연령이 많이 낮아졌어요. 대부분 고등학생이라 그런지 선수단 분위기도 밝고요.” 어린 후배들을 이끌어줘야 하는 선배의 위치가 된 만큼 올림픽에 임하는 각오도 다르다. “소치 때는 정말 멋모르고 뛰었어요. 지금은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더 열심히 하고 있고요.” 주 종목인 1,500m와 세계신기록을 수립한 1,000m 외에 단거리 훈련에도 집중하고 있다. 스피드는 전에 비해 많이 빨라진 상태다. “아무래도 단거리가 많이 부족한데 그런 점을 보완하면 장거리를 탈 때도 순간적인 움직임이 좋아질 수 있을 것 같아요.”
소치 올림픽이 끝난 직후 휴대폰 뒷자리를 ‘2018’로 변경한 심석희의 휴대폰 번호는 여전히 그대로다. 쉽게 들뜨거나 지치는 법 없이 한결같은 선수다. 늘 옆에서 묵묵히 응원해주는 가족 덕분이기도 하다. 오빠가 9개월간 아르바이트해 모은 돈으로 선물한 스케이트화를 신고 월드컵 네 개 대회에 나가 금메달 아홉 개를 석권하며 세계 랭킹 1위에 올랐던 심석희는 이번 평창 올림픽 때도 오빠가 사준 팔찌를 끼고 경기에 나설 참이다. “저도 궁금해요. 4년 전에 비해 제가 얼마나 달라졌을지. 그래서 설레요.” 쇼트트랙 선수로서 심석희의 꿈은 하나다. “쇼트트랙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선수가 됐으면 좋겠어요.” 꿈을 이루는 그날까지 심석희의 은빛 질주는 계속될 것이다.
은빛 곡예의 기수 김광진_Freestyle Ski Half-Pipe 설상에서 펼쳐지는 눈부신 공중 곡예의 향연! 하프파이프(Half-Pipe)는 말 그대로 파이프를 반으로 자른 듯한 모양의 슬로프를 뜻한다. 선수들은 기울어진 반원통의 양쪽 끝을 아슬아슬하게 오가며 공중회전과 점프 등 다양한 기술을 구사한다.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며 묘기를 선보이는가 하면 아파트 3층 높이까지 날아오른다. 김광진은 국내 1호 하프파이프 국가 대표 선수다. “저희 종목은 스타일이 중요해요. 완전히 프리스타일이죠. 스키를 뒤로 타기도 하고, 더 높이 뛰고. 남들이 하지 않는 것, 누구도 생각지 못한 것들을 시도해요. 그런 새로운 구성이 높은 점수를 받고요. 스키를 잡는 그랩부터 창의적이죠. 옷차림도 자유롭고요. 데님 스키복을 입거나 복면 마스크를 쓰고 타는 사람도 있고, 패션도 점수에 반영돼요. 어릴 땐 그런 게 멋있어 보였죠.”
그야말로 진정한 스웩(Swag)을 추구하는 하프파이프는 프리스타일 설상 종목 중에서도 가장 자유롭다. 온갖 기상천외한 묘기가 펼쳐진다. 따라서 제일 위험한 종목이기도 하다. “정말 무섭죠. 죽을 수도 있으니까. 속도도 빠르고 높이도 높고… 1,260도 회전을 처음 시도했을 땐 머릿속이 하얘질 정도로 두려웠어요. 그런데 그걸 해냈을 때의 성취감이 있어요. 그게 너무 좋아요. 기술이 늘수록 두려움도 커지고, 그걸 이겨내는 과정이 조금 버겁기도 하지만 그래도 재미있어요. 무엇보다 제가 좋아서 시작한 거니까요.” 지난 2월 김광진도 큰 부상을 당했다. 2016-2017 국제스키연맹(FIS) 프리스타일 스키 월드컵 하프파이프 남자부 예선 경기에서 1,080도 기술을 선보이다 머리를 다쳐 경기 도중 병원으로 이송된 것이다. 부상으로 월드컵을 아쉽게 마감했지만 김광진은 그로부터 일주일 후 ‘스노우페스타’에 출전해 4위를 차지했다. 주치의는 말렸지만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물론 아직도 역방향 세 바퀴 기술은 겁이 나요. 하지만 세계적인 톱 랭커들과 경쟁해서 4등까지 했다는 데 만족해요. 결과를 떠나 스스로 한 단계 더 성장한 기분이에요.”
2014 소치 올림픽 때부터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하프파이프는 국내에선 아직 생소하다. 김광진이 곧 한국 하프파이프의 역사다. 2012년 국가 대표 선수는 당시 김광진 단 한 명이었다. “소치 올림픽 때는 성적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어요. 제가 못하면 저희 종목이 못한 거고, 제가 잘하면 저희 종목이 잘한 게 되니까. 그게 제일 힘들었어요.” 현재 하프파이프 국가 대표 선수는 그를 포함해 네 명이다. 김광진이 주장 역할을 하고 있다. “기술을 다 하고 내려왔는데 너무 기분이 좋을 때가 있어요. 점수를 떠나서 그런 후회 없는 경기를 하고 싶어요.” 한국 하프파이프 역사의 시작을 알린 김광진의 각오다.
설원의 스피드광 김동우_Alpine Skiing 미국 콜로라도주 아스펜의 하이랜드에서 국제스키연맹(FIS) 레이스 활강 경기가 열린 지난해 1월, 한국 남자 스키의 새로운 희망이 열렸다. 김동우가 1분 15초 45로 3위를 기록한 것. 한국 남자 알파인 활강 사상 국제 대회 첫 메달이다. “스피드 종목을 시작한 지 1년 만에 딴 메달이라 그런지 제일 기억에 남아요.” 베어스타운 스키장에서 근무하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세 살 때부터 스키를 시작한 김동우에게 스키장은 새하얀 놀이터였다. 알파인 스키는 스키 종목 중에서 가장 속도가 빠르다. 꽁꽁 얼어붙은 눈밭을 평균속도 125km/h 이상으로 내려올 때의 짜릿함이 알파인 스키의 가장 큰 매력이다. 스타트부터 골인 지점까지 각각의 기문을 통과하며 슬로프를 내려오는 기록 싸움이다. 차가운 날씨에 활강을 하고 나면 얼굴이 새빨갛게 얼어붙는다. 선수들이 얼굴에 동상 방지용 테이프를 붙이는 건 그 때문이다. 테이프 사이 빈틈에 노출된 피부가 헐고 다치는 일은 다반사다. 그럼에도 김동우는 오직 알파인 스키만 고집해왔다. “다른 종목은 여러 선수가 한꺼번에 경기하는 반면 저희는 모든 사람이 딱 한 선수만 지켜봐요. 처음부터 끝까지. 물론 스릴도 있고요.” 최근 그는 알파인 스키 중에서 스피드로 주 종목을 변경했다. “알파인 스키의 다섯 종목 중 세 개가 스피드고, 두 개가 ‘회전’ ‘대회전’으로 구성된 기술 종목이에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그동안 스피드 종목을 할 수가 없었어요. 경기장이 없었거든요.” 엄청난 유지 비용 때문이다. 눈을 뿌리고 펜스를 설치해 코스를 만든다 하더라도 경기를 진행하기 위해선 패트롤과 응급 차량, 비상 헬기가 필요하다. 국내 스피드 팀은 평창 올림픽을 앞둔 재작년 무렵 비로소 창단됐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국가 대표가 되었는데, 제가 원래 기술 쪽에서도 스피드가 강한 편이었어요. 체격도 좋고요. 이번에 스피드 팀에 가지 않으면 스피드를 접해볼 기회가 영영 사라질 것 같아 시작했죠.” 요즘 하루 일과는 훈련과 대회 준비로 채워져 있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오후까지 스키를 타고 들어오면 스키를 수리하며 저녁 시간을 보낸다. 한 종목에 쓰이는 스키만 다섯 대다. “스키마다 감도가 다르거든요. 어떤 코스에서는 이 스키가 낫고, 또 어떤 코스에서는 저 스키가 더 빠른 식이죠.” 스피드 스키는 기술 종목 스키에 비해 훨씬 길고 무거운 데다 반경도 크다. 확실히 스피드로 주 종목을 바꾼 후 기록은 더 좋아졌다. 김동우의 목표는 평창 올림픽 전 종목 출전이다. 다운힐과 슈퍼대회전, 복합 경기로 구성된 스피드 종목의 출전권을 확실하게 결정짓고 나면 회전 종목에도 도전할 계획이다. “세계적으로 알파인 스키 인구가 많은 데 비해 국내에는 그 수가 적은 편이라 아쉽지만, 우리나라가 선수층은 얇아도 실력 있는 선수들이 많아요. 훈련이든 취미든 스키를 타는 건 언제나 즐거워요. 평창 올림픽에서도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도록 최선을 다해야죠!”
찰나의 승부사 최재우_Mogul Ski “모굴 스키엔 변수가 많아요. 지면이 울퉁불퉁하고 뭐가 툭 튀어나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밸런스를 잘 잡아야 하죠. 한 치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기 때문에 엄청난 집중력이 필요한 경기예요.” 활주부터 공중 점프, 코너 회전까지 모든 게 순식간이다. 올림픽을 향한 4년간의 노력이 단 20여 초 만에 끝난다. 최재우는 그게 바로 모굴 스키의 매력이라고 했다. 캐나다로 스키 유학을 떠난 후 현지에서 모굴 스키를 처음 접한 최재우는 곧바로 이 새로운 스포츠에 빠져들었다. 캐나다 국가 대표 상비군 선발전에서 1등을 차지하며 귀화를 제의받았을 정도로 빠르게 실력이 상승했다. “그 제안이 저에겐 별로 유혹적이지 않았어요. 오랜 유학 생활에 지쳐 있기도 했고, 무엇보다 한국에서 잘하고 싶었거든요.” 2009년 열다섯 살의 나이로 최연소 모굴 스키 국가 대표로 선발된 그는 2013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한국 선수 최초로 5위에 오르며 국제스키연맹(FIS) 월드컵 모굴 스키 올해의 신인상까지 연이어 수상했다. 2015 FIS 월드컵에서는 4위를 차지했다. 슬럼프도 있었다. 소치 올림픽 결선 1라운드에서 10위를 기록하며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받았던 최재우는 2차 라운드에서 공중 세 바퀴 연기(Back Double Full)를 성공하고 회전 동작으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코스를 벗어나 실격 처리가 되었다. 모굴 스키는 활주 속도가 20%, 연기 점수 20%, 회전 기술이 60%를 차지한다.
아쉬웠지만 그게 제 운명이었던 거겠죠. 많이 배웠어요. 그래서 생활이나 경기에 임하는 자세도 달라졌고요. 요즘은 운동에만 집중하고 있어요. ‘즐기러 간다’는 가벼운 마음이었으니까 올림픽에서 그런 실수도 벌어졌던 거죠. 후회는 안 돼요. 좋은 경험이었고 덕분에 지금 더 열심히 하고 있어요.” 점프 연기에서 강점을 보이는 그는 회전에 있어서의 실수를 줄이고자 연습을 거듭하고 있다. 해외 전지훈련이 없을 때는 태릉선수촌 안에 혼자 남아 따로 개인 훈련을 한다. 선수촌 측에 특별히 허락을 받은 것이다. “메달도 물론 따고 싶죠. 하지만 그보단 최고의 컨디션으로 결선에서 저의 베스트 런을 만들고 싶어요. 실수 없이 베스트 퍼포먼스를 보여줄 수 있는 그런 날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골프, 웨이크보드, 수영, 쇼트트랙까지 운동이라면 안 해본 것이 없는 그이지만 모굴 스키 선수가 된 것을 한 번도 후회한 적은 없다. “운동이 너무 힘들어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있어도 후회한 적은 없어요. 잘 선택한 것 같아요.” 최재우의 생일은 2월 27일이다. 평창 올림픽이 끝난 직후다. “생일을 기분 좋게 맞이해야죠. 안 된다는 생각보단 무조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잘 준비해나가고 있어 기대도 됩니다. 저에겐 이번 올림픽이 중요해요. 제 인생이 걸렸으니까요.”
쇼트트랙의 신성 최민정_Short Track Speed Skating 최민정은 매년 무섭게 성장하고 있다. 국가 대표 선발전에서 종합 1위를 차지하며 화려하게 시니어 무대에 데뷔한 후, 불과 한 시즌 만에 세계선수권자로 등극했다. 한국 쇼트트랙의 전설 진선유 이후 여자부 최초다. 올 시즌은 더욱 뜨겁다. 압도적인 점수 차로 국가 대표 선발전에서 최종 1위를 기록했고,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쇼트트랙 월드컵 1차 대회에선 자신의 주 종목인 1,500m뿐만 아니라 500m, 1,000m는 물론 3,000m 계주까지 전 종목에서 우승하며 4관왕을 차지했다. 특히 500m 금메달은 특별하다. 한국 선수가 500m에서 금메달을 딴 건 2003년 이후 처음이다. 그야말로 괴물 같은 선수가 등장했다.
초인적인 기록과 달리 빙상장 밖에서의 최민정은 해맑고 수줍음 많은 열아홉 소녀다. “진짜 생각지도 못했는데 좋은 결과가 나왔어요. 원래 목표는 메달권에 드는 것이었거든요.” 최고의 경쟁 상대이자 믿음직한 선배인 심석희 선수보다 한 살 어린 최민정은 지난 소치 올림픽을 멀리서 지켜봐야만 했다. “훈련을 끝내고 선수들과 같이 TV를 보며 응원했죠. 제가 생일만 빨랐어도… 흐흐. 아쉽진 않아요. 생각해보면 당시엔 부족한 점이 많았거든요. 좋은 경험은 되었겠지만 만족할 만한 성적을 낼 수는 없었을 거예요.”
최민정은 여섯 살 때 쇼트트랙을 처음 시작했다. 언니와 엄마까지 세 모녀가 스케이트화를 신고 빙상장을 누볐다. 일주일 만에 엄마가 먼저 기권을 선언하고 언니도 부상으로 쇼트트랙을 그만두었지만, 최민정은 빙상장에 남았다. “너무 재밌었거 든요.” 그후로 줄곧 최민정은 1등이었다. 노란 헬멧에 자랑스럽게 새겨져 있던 1이라는 숫자가 6으로 바뀐 건 지난 2017 세계선수권대회 이후다. 처음으로 메달권 밖으로 밀려난 것이다. “6등을 했거든요. 쇼트트랙은 매년 세계선수권대회 성적에 따라 헬멧 번호가 바뀌어요. 아무래도 좀 낯설긴 했죠. 그런데 그 부진을 계기로 저 스스로 많은 변화가 생겼어요. 왼발에 좀더 신경을 많이 쓴다든지, 운동 방식이나 마인드도 좀더 다잡게 되었고.” 그동안 아웃코스에서 강점을 보여온 최민정은 인코스 회전을 보완하는 데 집중했다. “결과적으로 제가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저한텐 터닝 포인트가 된 셈이죠.” 수능 시험을 앞둔 학생처럼 평창 올림픽을 기다리는 최민정에게 쇼트트랙의 매력에 대해 묻자 금세 답변이 돌아왔다. “마지막까지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이요! 결승선에서 발을 내미는 순간에도 결과가 바뀌니까. 재미있는 스포츠인 것 같아요.” 최민정의 발 사이즈는 235mm. 발은 작지만 배포는 크다. 이제 최민정의 야무진 발끝을 지켜보는 일만 남았다.
빛나는 도전 박승희_Speed Skating 소치 올림픽 이후 박승희에겐 꽤 많은 변화가 생겼다. 여자 쇼트트랙 부문 올림픽 2관왕(1,000m, 3,000m 계주)이라는 명예로운 왕관을 미련 없이 내려놓고 스피드 스케이팅이라는 새로운 도전에 나선 것이다. 어린 시절 스피드 스케이팅을 경험했다고는 하지만 메달은커녕 국가 대표 선발전을 통과할 수 있을지조차 미지수였다. 박승희는 주변의 모든 우려를 불식시키듯 2014년 10월 치러진 제1차 공인기록회에서 1분 20초 40의 기록으로 여자 1,000m 1위를 차지했다. 연이어 열린 국가 대표 선발전에서도 단번에 태극마크를 달았다. “그땐 정말 정신없이 막 달렸어요. 스피드 스케이트 슈즈를 신은 지 몇 달 되지도 않았고, 경험 차원에서 출전한 거라 월드컵에서 세계 선수들과 경쟁할 기량이 안 된다고 판단해 자격을 반납할 생각까지 했어요. 운이 좋았죠.” 동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에게도 스피드 스케이팅은 낯선 세계였다. 신발을 신는 법부터 쇼트트랙과는 달랐다. “처음엔 멋모르고 양말을 신은 채 신발을 신으려고 했는데 다들 양말을 벗더라고요. 유니폼도 진짜 입기 힘들고요. 쇼트트랙은 그냥 옷처럼 쉽게 입을 수 있거든요.” 1,000분의 1초로 승부가 갈리는 기록 경기인 스피드 스케이팅은 무게를 최소화한다. 당연히 헬멧도 없다. 전보다 몸무게도 꽤 늘렸다. 치고 나가는 힘을 키우기 위해서다. “식사량은 비슷한데 자꾸 몸이 커져요. 처음엔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까진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였던 친언니와 이상화 선수의 도움이 컸다. “상화 언니는 저랑 같이 시합하는 게 아직도 너무 신기한가 봐요. 그러면서도 많이 챙겨주죠. 언니 자세를 따라 하면 좋으니까 대표 팀에서 훈련할 때면 항상 저보고 자기 뒤에서 타라고 하고. 애정 어린 말이나 조언도 자주 해주고요.” 박승희에게 이상화는 넘어야 할 산이 아니라 늘 힘이 되는 든든한 선배다.
“은퇴 전에 꼭 한번 스피드 스케이팅에 도전해보고 싶었다는 박승희가 전향을 결심한 이유 중엔 경쟁에 대한 부담도 있었다.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쇼트트랙은 우리나라 선수들끼리의 경쟁이다. “선수촌에서 같이 생활하던 친구들과 경쟁하는 게 어느 순간부터 불편해졌어요. 많이 지쳐 있기도 했고요.” 경기 중의 자리다툼과 눈치작전도 치열하다. 소치 올림픽 500m 결승전에서 박승희는 상대 선수의 반칙으로 넘어지면서 동메달에 만족해야만 했다. “그때 회의가 좀 들긴 했죠. 4년 동안 500m를 위해 열심히 노력해왔는데 다른 사람에 의해 그렇게 되어버리니까… ‘한순간에 끝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계속하기 힘들었어요.” 박승희는 슬럼프에 빠져 과거를 되돌아보는 대신 또 한번의 도전을 택했다. 쇼트트랙을 할 때도 그녀는 늘 남과 다른 길을 갔다. 단거리에서 두각을 나타낸 여자 선수는 박승희가 거의 유일했다. “전 운이 좋은 아이인 것 같아요. 이제 스피드 스케이팅을 시작한 지 4년밖에 안 됐는데 상화 언니처럼 탄다면 천재죠. 이 정도 하고 있는 것도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만족하고, 그래서 너무 좋아요. 지금이 너무 좋아요.” 평창 올림픽은 박승희의 세 번째 올림픽이다. 박승희는 처음으로 자기만의 레이스를 달릴 것이다. 누구의 방해도 없이, 오직 자신이 꿈꿔왔던 목표를 향해!
- 에디터
- 김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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