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예진과 현빈의 에너지 게임
한 사람의 인생을 성실하게 전달해온 배우의 작품을 만나는 일은 언제든 반갑다. 손예진과 현빈은 인지도가 높아지고 작품 선택지가 늘어나며 인기가 폭발적으로 높아져도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데 골몰해온 배우들이다. 이들은 새로움이라는 목표를 동력으로 드라마나 영화를 구분 짓지도, 장르를 가리지도, 작품의 규모나 감독의 유명세를 따지지도 않았다. 전과 다른 인물이라면, 전에 없던 이야기라면 기꺼이 이야기의 일부가 되길 자청했다. 그 결과 손예진과 현빈은 이름이 곧 설득력이 되는 배우가 되었다. 82년생 동갑내기인 두 배우는 영화 〈협상〉에서 숨 막히는 긴장감 속에서 팽팽한 대결을 벌인다. 두 배우의 목표는 하나였다. 영화를 상영하는 2시간 동안 관객이 한시도 눈을 뗄 수 없게 하는 것. 〈협상〉은 손예진과 현빈이 건네는 완벽하게 새로운 세계로의 초대장이다.
공감의 미학, 손예진
“지겹게 인사드리는 손예진입니다.” <협상> 제작 보고회 날 손예진이 기자들에게 건넨 첫인사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가 3월 개봉이었으니 올해만 벌써 세 번째 작품이더라고요.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여운을가지고 계신 분들도 있을 텐데 걱정이 됐죠.” 손예진의 설명으로 확실해졌다. 작품의 노출 빈도는 배우의 이미지에 반드시 정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작품 속 캐릭터에만 집중하며 한 사람의 인생을 충실히 전달해온 배우의 연기를 만나는 건 언제든 반가운 일이라는 것을. 게다가 “반복된 연기는 하는 사람도 지겹다”고 말하곤 했던 손예진은 이번에도 전에 보지 못한 단발머리를 한 채, 한 글자씩 꾹꾹 눌러쓰는 듯한 강렬한 음성을 쏟아내며 예고편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 “범죄 오락 장르 좋아해요. 2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는 영화. 사실 영화 볼 때 중간에 시계도 보고 휴대폰도 보고 잠깐씩 한눈팔잖아요. 그런데 이런 장르는 스릴 있고 긴장감 넘쳐서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어요. 스트레스 받거나 생각이 많아질 때 미스터리 스릴러나 전쟁 영화 많이 봐요.” <협상> 시나리오가 딱 그랬다. 단숨에 읽었고 뒤가 궁금했다. 긴장감과 몰입감이 압도적이었다. 그리고 직업에 강인한 신념과 인간애를 품고 있는 캐릭터 하채윤이 있었다.
하채윤은 제한된 시간 안에 극악무도한 인질범(현빈분)을 설득해서 최악의 인질극을 막아야 하는 협상가다. “주체적이고 강인한 인물이지만 ‘협상가가 인질범을 잘 설득해서 싸운다’는 포맷이 있는 거잖아요. 어떻게 보면 정형화될 수도 있는 캐릭터예요. 강인하고 정직하기만 한 캐릭터는 매력 없거든요. 어떻게 하면 인간적으로 보이게 할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똑같은 공간에서 12시간 동안 이루어지는 이야기라 잘못하면 계속 반복일 수 있었어요. 같은 톤으로 연기하면 지루할 수 있어서 변주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했어요.” 의사가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 손을 소독하듯, 손예진은 촬영에 들어가기 전 화장실에서 혼자 손을 씻으며 그날 촬영에 대한 마음을 정리한다. 촬영을 맞이하는 그녀만의 의식이다. “<협상>은 하루하루 시험대에 오르는 것 같았어요. 항상 극적인 긴장감이 있는 상태여야 했어요. 고조된 호흡을 유지해야 해서 촬영 할 때마다 진이 빠진 기억밖에 없어요.” 평소 심리학에 관심이 많았던 손예진에게 더없이 흥미로운 캐릭터였지만 심리적 압박은 상당했다. 그러니까 영화 <협상>은 손예진이 항상 추구해온 새로움이 고통스럽게 진화된 결과물이기도 할 것 같다.
연기를 시작한 지 19년, 손예진은 ‘회고전’을 한다고해도 손색없는 배우가 됐다. ‘손예진 회고전’을 한다고 가정하고 개막작으로 어떤 작품을 걸고 싶은지 물었을 때 손예진은 <클래식>을 꼽았다. 처음으로 주연을 맡은 작품이자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사랑해주는 영화라는 이유였다. 얼마 전 극장에선 실제로 <클래식>이 재개봉했다. 팬들은 전설의 멜로 영화의 귀환을 반겼다. “결과와 반응을 떠나 모든 작품이 제게는 그 시기에 해야 하는 이유가 있었던 것 같아요. 배우로서 다양한 선택을 하는 원동력이 된 작품은 <작업의 정석〉이에요. 멜로만 하다가 처음으로 망가지는 로맨틱 코미디를 할 수 있었거든요. <외출> <연애시대>는 나이와 상관없이 경험하는 보편적 감정을 알게 해줬어요. 20대 중반은 그런 시기였어요. 아무리 많이 작품을 해도 한 꺼풀씩 덧씌워지며 똑같아 보일 수 있는데 항상 다른 걸 하고 싶어서 몸부림을 쳤던 것 같아요.”
손예진은 데뷔 초 여성 캐릭터는 청순하거나 섹시한 캐릭터밖에 없었다고 기억했다. 물론 손예진이 속한그룹은 ‘청순파’였다. 그러다가 캔디 캐릭터가 나오고 ‘걸크러쉬’ 캐릭터가 나왔다. 시대가 바라보는 여성상이 시나리오에 담겨 있었다. 요즘 시나리오에서 손예진은 강인하고 주체적인 자들을 본다. “사회에서 억눌려 있다 보니까 거침없이 할 말 다 하는 캐릭터를 원하면서 동시에 우리 자신을 투영할 수 있는 나약한 인물을 원하기도 하는 것 같아요. 그동안 감사하게도 다양한 장르를 꾸준히 해올 수 있었고 앞으로도 그러고 싶은 소망이 있죠. 성별을 떠나서 이제는 정말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마녀> 같은 영화는 신인 여배우가 누아르 장르를 연기했어요. 영화 관계자들의 공식에는 맞지 않는 영화인데 잘됐어요. 잘 만든 콘텐츠는 잘된다는 걸 보여줬다고 생각해요. 다양함 속에서 진짜 재미가 있으면 관객들은 분명히 좋아할 거라고 믿어요.”
손예진을 다시 보게 된 건 <비밀은 없다>와 <덕혜옹주〉에서였다. 잘 안다고 생각한 배우의 완벽하게 다른 얼굴을 보는 건 관객으로서도 짜릿한 경험이었다. “어릴 때라면 <비밀은 없다> <덕혜옹주> 같은 역할은 주어지지도 않았을 거예요. 배우로서, 인간으로서 많은 감정을 쌓아가게 되잖아요. 타이밍이 맞았던 거죠. 연기를 보여주는 영화가 있고 스토리 위주의 캐릭터를 보여주는 영화가 있는데, 두 영화 모두 여성 캐릭터가극을 끌어갔고 희로애락의 폭도 넓고 깊었어요. 둘 다 처절한 아픔을 겪는 엄마 캐릭터였고, 같은 여성으로 공감대를 형성하는 지점이 있었어요. 배우는 어떤 색깔의 옷을 입느냐에 따라 다르게 변하는데 관객분들이 다행히 그 모습을 생경해하기보다 새로워서 좋았다고 말씀해주셔서 아주 좋았죠.”
손예진이 연기한 인물들은 남을 의식하기보다 주관대로 사는 사랑스러운 여자들이었다. 배우로서 그녀는 결핍이 많은 캐릭터를 사랑했다. 연민으로 그녀들의 부족한 점을 끌어안았다. “<아내가 결혼했다> 인아 처럼 제가 가지지 못한 면을 가진 캐릭터도 좋아했죠. 하지만 현실에서는 현명한 사람이 좋아요. 무슨 일을하든 신념과 사명감을 가지고 진지하게 일하는 사람들을 존중하고 좋아해요. 게으른 사람은 안 좋아하는것 같고요. 아, 그런데 매력은 남자들에게 느껴야지, 언제까지 여자들한테 느껴야 하나요.(웃음)”
작품 속 손예진의 모습을 제외하면 몇 년 전 손석희의 <뉴스룸> 인터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손예진은 “청순에 재도전하겠다”고 말했다. 나는 그녀가 멜로라는 장르를 타고난 외모와 분위기로 누구나 한때 거쳐가는 장르로 여기지 않아서 좋았다. 어느 정도 인지도를 얻고 나면 대중이 사랑하는 모습을 배신하고 배우들 만의 장르로 이적해버리는 다른 배우들과 달리 손예진은 대중이 기대하는 모습도 살뜰히 돌봤다. 연기력을 드러낼 수 있는 역할이 아니라도, 엄청난 예산이 투입되거나 거장 감독의 작품이 아니더라도 이야기가 있다면 손예진의 선택을 받았다. 그 선택은 어쩔 수 없어보이지도, 안일해 보이지도 않았다. 20대 중반에 이혼한 캐릭터를 선택해 대중을 깜짝 놀라게 했고 이야기로 설득했을 때처럼 손예진의 선택은 신선했고 편안했다. 손예진은 <뉴스룸> 당시 다짐대로 올해 <지금 만나러 갑니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로 돌아왔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에서 여전히 흰색 원피스와 니트 카디건이 잘 어울리는 모습을 보며 이미지란 시간으로 휘발될 수 없음을 확인했고,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를 보며 손예진이 50대, 60대에도 멜로 드라마를 찍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기자들끼리 한국에 리즈 위더스푼이 나온다면 손예진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얘길 한 적 있다. <덕혜옹주> 촬영 당시, 예산이 초과되어 촬영 규모를 줄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을 때 손예진은 완성도 있는 작품을 만들고자 하는 마음으로 10억원을 투자했다.
<덕혜옹주>는 손익분기점을 넘기며 수익으로 보답했다. 아직 제작자로서 어떤 구체적인 계획도 없지만, 손예진에게도 더 많이 만들었으면 하는 영화가 있다. “<비포 선라이즈〉, <비포 선셋>처럼 적은 제작비로도 충분히 만들 수 있는 소소하고 재미있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아요. 비행기 옆자리에 정말 멋있는 사람이 타서 벌어지는 이야기 있잖아요. 예전부터 <델마와 루이스> 같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어요. 로드 무비 같은 영화에 관심이 있어요. 그리고 <밴디트>라는 1997년에 개봉한 독일 영화가 있어요. 여자 교도소안에서 일어나는 일인데 비디오로 구해서 세 번 봤어요. 꼭 한번 보세요.”
현재 한국에서 ‘여배우’라는 단어는 사전적 의미보다 더 상징적이다. 작품 수가 많아질수록 행보에 귀감이 갈수록 여배우로 대표성이 부여된다. 손예진은 그 책임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걱정은 책임감으로, 사명감으로 모습을 바꿔가며 손예진을 따라다닌다. <해적〉 때는 유일한 여배우로서 존재감에 대해, <덕혜옹주〉 때는 여배우 중심의 영화가 사라질까 봐, <지금 만나러 갑니다> 때는 그렇지 않아도 귀한 멜로가 더 이상 제작되지 않을까 봐 걱정했다. <협상> 개봉을 앞둔 지금은 여배우가 범죄물에 어울린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는 걱정이 있다. “처음에는 어떻게 하면 연기를 잘할 수 있을까, 나는 왜 이렇게밖에 못하지 그 고민만 계속한 것 같아요 그러다가 <공범> 때였나, 혼자 이야기를 끌고 가고 제 이름이 크레딧 제일 앞에 나오면서 스코어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투자한 만큼 결과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책임감이 생기더라고요. 좋은 결과를 얻을 때마다 ‘다음에 또 잘해야지’라는 부담과 ‘망하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함이 찾아와요. <협상>도 가편집본을 보고 재미있다, 다행이다 생각했는데 오늘 막상 예고편을 보니 또 불안감이 찾아오네요. ‘연기에 최선을 다했으니 됐다. 배우가 할 수 있는 역할은 홍보까지고 나머지는 하늘의 뜻이다’라고 생각해야 오래 배우 생활을 할 수 있다던데 그게 잘 안 돼요. ‘결과는 제가 컨트롤할 수 없으니까요’라고 말할 수가 없어요. 성격인 것 같아요.”
배우는 경험치를 넓힐 수 없는 환경에서 항상 다양한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아이러니한 운명을 산다. 손예진은 극복할 수 없는 운명을 받아들인다. “다양한 경험을 쌓기에 사회적 구조가 배우들에게 가혹하죠. 술취하고 사고 치고 싶어도 그러면 안 되잖아요.(웃음)” 손예진이 새로움을 추구하는 방법은 ‘혼자 있기’다. 그 시간 동안 책, 영화, 다큐멘터리를 보고 많은 걸 느끼며 끊임없이 새로운 자극을 받으려고 노력한다. 작품을 끝내고 외국으로 여행이라도 떠나면 번화가든 어디든 어슬렁어슬렁 계속 걸어 다닌다. 혼자 한강에 갈 때도 있다. 친구와 걷는 한강도 좋아하지만 혼자 생각하며 걸을 때 진짜 자신 같은 느낌을 받는다고 했다.
앞서 ‘손예진 회고전’을 가정한 질문에 손예진은 폐막작을 꼽지 않았다. 몇 작품 더 해봐야 알 것 같다고 했다. 우리 마음도 같았다. 손예진은 폐막작보다 현재 상영작이 궁금한, 계속해서 보고 싶은 배우다. 손예진의 행보가 입체성을 띨수록 대중은 그녀를 ‘믿고’ 볼것이고 손예진이 곧 ‘설득력’이 될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만족을 모른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최선을 다했는지 물었을 때 완벽하게 만족할 수 없어요. 그래서 저는 죽을 만큼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손예진이 통과하는 계절은 한 번도 뜨겁지 않은 적이 없었다.
쓸모의 확장, 현빈
“현빈 연기 인생 최초의 악역 도전!” 영화 <협상> 제작보고회에서 캐치프레이즈처럼 내걸렸던 문구다. 하지만 현빈은 덤덤한 얼굴로 악역이라고 생각하고 연기하진 않았다고 말했다. <협상> 예고편 속 그는 능글맞고 때로는 섬뜩하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하비에르 바르뎀이나 <프라이멀 피어>에서 이중인격자를 연기한 에드워드 노튼처럼 착해 보였는데 갑자기 악한 모습을 보일 때 더 무서운 것 같아요. 민태구를 연기하면서 그런 면에 공을 들였죠. 단선보다 복합적인 선을 만들고자 했어요. 민태구는 머릿속에 정확한 의도와 철저한 계획이 있는 캐릭터예요. 보는 분들이 ‘쟤는 진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궁금증만 들어도 성공이라고 봐요.” 현빈이 한 고민의 흔적을 가장 많이 지켜본 건 손예진이다. 손예진은 현빈으로부터 현명하고 똑똑한 배우라는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시나리오상에서는 ‘악역답게 아주 악랄하게’라고 적혀 있었지만 현빈 씨가 연기하면서 다채로워졌어요. 악랄한 인질범에게도 슬픔이 있어 보였고 어느 순간 귀엽기도 했어요. 그러다가 너무 나쁜 사람으로 바로 돌변했죠. 감정의 줄다리기를 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어요. 침착하고 다정하지만 사석에서는 의외로 웃겨서 언젠가 블랙코미디를 해도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도 했어요.”
제작 보고회에서 밝혔듯 배우들은 서로를 모니터로 보며 연기하는 이원 생중계 방식으로 촬영을 했다. 인이어를 착용하고 작은 화면으로 상대방을 읽어야 했다. 숨소리를 들을 수 없고 눈빛도 느끼지 못한 채 하는 연기는 낯설고 쉽지 않았다. 하지만 현빈은 어느 순간 손예진으로부터 필터가 느껴지지 않는 경험을 했다. 모니터를 보는 게 아니라 거울 뒤에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연기할 때 에너지가 대단하구나” 감탄했다. 그리고 유해진, 유지태 선배 못지않게 든든했다고 말했다. 나는 사실 <협상> 시놉시스를 보며 두 배역의 성별을 구별하지 못했다. 현빈이 협상가여도, 손예진이 인질범이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현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 배우 모두 인질범, 여경 같은 조건을 떼고 순수하게 인물에 집중해 연기했다고 전했다. “저도 역할이 바뀌면 어떨까 생각해본 적 있어요. 예진 씨가 욕을 하면서 총을 쏘면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더라고요.”
영화 제목을 <협상>이라고 지으면서 협상 당사자를 연기할 배우가 가진 에너지 크기를 가늠해보지 않을 감독이 있을까. 흔히 하듯 지긋한 경력의 연기파 남자 배우 몇몇을 등장시키는 게 아니라, 남녀 배우를 협상가와 인질범으로 세운다면? 내가 이종석 감독이었다고 해도 최선의 답은 손예진, 현빈이었을 것 같다. 실제로 이종석 감독은 손예진과 현빈을 머릿속에 넣고 시나리오를 썼다고 밝혔다. 영화 <협상>은 그러니까 두 배우의 터질 듯한 에너지를 비교해볼 수 있는 투우 경기장 같은 영화일 것이다.
군 제대 후 현빈은 마치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작품을 고르는 듯 보였다. <역린> <공조> <꾼> 그리고 <협상>까지 오락성에 충실한 작품이다. “예전에 선택한 작품보다 훨씬 오락성이 강하죠. 맞아요. 사회적인 분위기도 그랬고 힘든 일도 많이 있었잖아요. 사회에 갈등이 없는 날은 없겠지만 그래도 오락 영화 보면서 2시간 동안 아무 생각 안 할 수 있게 해드리는 것도 연기자와 영화라는 매체가 할 수 있는 일 아닐까 생각했어요. 영화를 보는 시간은 여가 시간이자 쉬는 시간이니까 다른 생각이 들거나 불편함을 느끼면 아무래도 좋지 않잖아요. 온전히 빠져들어서 볼 수 있는 작품이었으면 했어요. 예전에는 하고 싶은 얘기가 뚜렷한 작품을 선호했고 여운이나 미련이 남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오락 영화도 메시지가 없는 건 아니라서 지금은 ‘여운을 느끼세요’라고 하기보다는 ‘즐기세요’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다양한 작품에서 연기해온 만큼 시청자, 관객으로서 현빈의 취향도 공평하다. 장르는 가리지 않고 상황이나 순간의 느낌에 따라 감상 리스트를 정한다. “범죄 오락 영화는 하루가 끝나고 저녁에 맥주 한 캔 마시고 싶을 때 보곤 하죠. 낮에는 안 어울려요.”
<아일랜드> <만추> <그들이 사는 세상>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속 현빈을 사랑한 사람들은 현빈이 완벽하게 변절했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그런 작품을 모두 거치고 두 편의 드라마로 전 국민적인 사랑을 받은 현빈이 대중 영화에 진지하게 접근하는 모습에서 순수한 결기가 느껴졌다. 취향에 편식이 없어 보였고 오직 자신의 쓸모만 생각하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현빈은 시청자들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하는 배우였다. <시크릿 가든> 출연 당시 그런 마음을 전한 기억이 난다. 현빈의 ‘2시간 동안 빠져들 수 있는 작품’이라는 목표는 결과적으로 모두 달성되었다. <역린> 〈공조> <꾼> 관객 수가 증명한다. 땀으로 흥건한 정조의 세밀한 근육으로 대사보다 강렬함을 남긴 <역린>, 2시간 내내 카리스마만 날리다가 마지막에 보조개 웃음으로 정신을 혼미하게 한 <공조>… 현빈은 몰입도의 정점을 찍는 한 방을 잊지 않았다. 즉각적이고 노골적인 매력이 있음에도 현빈은 항상 은근하게 우리의 마음을 물들여놓았다.
하반기에도 오락성을 띤 대중적인 작품이 연이어 공개를 앞두고 있다. 영화 <창궐>, 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다. <창궐>은 야귀를 소재로 한 액션 블록버스터,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무려 증강현실(AR)을 다룬다. “국내에서 시도되지 않은 소재를 가지고 촬영하다 보니까 어떻게 보일지에 대한 걱정과 기대를 동시에 가지고 있어요. VR 아시죠? AR은 그보다 한 단계 더 진화한 개념이에요. 포켓몬 GO 생각하시면 돼요.” 현빈의 차기작을 듣고 영화·드라마 트렌드 현황을 확인한 듯한 느낌이었다. 현빈도 같은 생각을 한다. “영화 소재가 다양해졌다는 느낌을 받아요. <신과 함께> <인랑>처럼 상상력이 더해지고 후반 작업이 많이 필요한 작품이 많아진 것 같아요. 이런 현상이 약인지 독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소재가 다양해진다는 건 배우 입장에서는 굉장히 좋은 일이에요. 한편으로는 로맨틱 코미디나 멜로가 많이 없어졌어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장르인데 지금은 그 자리를 다른 다양성이 채우고 있죠. 독립 영화 아니면 완전히 블록버스터 상업 영화로 갈리는 느낌이라 안타까워요.”
영화 트렌드는 바뀌었지만 현빈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출연하는 작품을 대중이 100% 좋아하리라고 생각하지 않고, 욕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냥 자기 일이라고 생각한다. “계속 조금이나마 다른 소재, 다른 이야기를 찾아서 보여드리는 게 제 역할인 것 같아요. 그냥 계속 다른 것을 찾고 있고 다른 점을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하고 있어요.” 그리고 배우로서 현재 위치를 규정짓지도 않는다. 주인공을 많이 하고 있지만, 관심이 가는 역할이 있다면 조연이라도 언제든지 할 의향이 있다. 혹자는 우직하게 연기에만 골몰하는 현빈을 두고 야망이 없는 배우라고 했다. 실제로도 과거 그의 인터뷰를 읽어보면 놀라울 정도로 인기나 보이는 것, 금전적인 것에 초연하다. “야망의 기준이 뭔지 모르겠지만, 글쎄요, 없진 않겠죠. 배우로서도, 제 개인적으로도 목표가 있어요. 예를 들면, 현재 대중의 50%는 제 작품을 좋아하고 50%는 실망한다면 그 비율을 조금 더 좋은 쪽으로 옮기는 것이 목표예요.”
배우로서 연기하는 즐거움을 100% 만끽하는 상태는 아니다. 늘 조금씩 새로움을 찾다 보니 스트레스가 된다. 연기에 골몰하는 현빈이 요즘 관심사에 대해 들려줬다. “보통 호흡과 눈빛과 손이 어긋남 없이 그냥 움직이는데 카메라가 돌면 한 가지가 중점적으로 나갈 수밖에 없죠. 카메라가 있을 때나 없을 때나 자연스럽게 동작을 일치시킬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계속 고민하는 중이에요. 정말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예요.”
연기의 전환점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작품은 여전히<나는 행복합니다>이다. 지금 현빈은 모든 작품으로 부터 배우는 중이다. “한 작품 끝날 때마다 늘 많이 배워요. 상대 배우든, 현장이든. <협상>을 끝내고 <창궐〉을 촬영할 때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줬을 거라고 생각해요. 지금 찍고 있는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에는 <창궐>에서 배운 것으로 또 뭔가 달라졌을 것 같고요.” 현빈은 연기할 때 그저 ‘왜?’라고 질문을 던진다. 왜 이 대사를 하고 있고 왜 이 행동을 하는지 합리화되고 타당성이 있어야 한다. 스케줄도 분명한 목적성과 타당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렇지않으면 무책임해진다고 생각한다.
“배우로서 ‘왜 일하는가’라는 질문에는 좋아서 하는 일이라고밖에 대답할 수 없어요. 어린 나이에 그냥 박수 소리가 좋았고 연습실과 동료들이 좋았어요. 전문적으로 공부해보고 싶어서 연극영화학과에 들어갔고 그러다 보니 운이 좋게도 어느 순간 직업이 되어 있었죠. 계속해서 새로움을 찾는 일이 쉽지는 않기 때문에 배우는 좋아하지 않으면 못하는 일 같아요. 그래서 끊임없이 좋아하려고 하고 끊임없이 비워내려고 합니다.” 현빈은 순간순간 행복을 찾는다. “<협상>이라는 작품이 완성된 것이 행복하고, 오랜만에 감독님이랑 손예진 배우 본 것도 행복이고, 드라마 찍다가 이렇게 잠깐 나와서 연기 얘기할 수 있는 것도 행복이에요.”
영화 <협상>은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얻는가에 대한 답이 담겨 있을 것이다. 현빈은 배우로서 고민과 영화 <협상>이 던지는 질문의 답이 같다는 걸 알고 있다. “진심과 진정성 아닐까요. 배우와 관객의 관계도 똑같은 것 같아요. 최대한 진심을 담아서 진정성 있게 표현해야 관객의 공감을 얻을 수 있으니까요. 배우는 관객을 설득하는 사람들이에요.”
- 에디터
- 조소현
- 포토그래퍼
- 안주영
- 헤어
- 구미정(제니하우스, 손예진), 임철우(아우라뷰티, 현빈)
- 메이크업
- 무진(제니하우스, 손예진), 성혜(아우라뷰티, 현빈)
- 스타일리스트
- 이윤미(손예진), 강윤주(현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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