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UBY
스털링 루비는 그의 예술품을 보다 광범위한 관객에게 보여주고 싶어 한다. 그런데 루비의 패션 브랜드가 예술품의 가치를 떨어뜨리진 않을까?
캘리포니아주 버넌은 인구 112명의 로스앤젤레스 인근 소도시다. 매일 1만5,000명이 그곳에 있는 1,800개 공장과 창고, 소규모 사업체로 출근한다. 조명 장치, 파머존 핫도그, 산업용 화학물질, 멕시코식 핫 소스인 타파티오 핫 소스, 봉제 완구가 그곳에서 만들어진다. 소토 스트리트에 자리한 많은 고용주 가운데 한 명이 아티스트 스털링 루비(Sterling Ruby)다. 그의 대형 그림, 콜라주, 멀티미디어 조각, 표면에 기포가 생긴 도자기, 다른 대형 작품은 직원 15명의 도움을 받아 예전 손수레 공장이던 곳에서 탄생하고 있다. 루비가 로스앤젤레스 현대미술관(MOCA)에서 난생처음으로 대규모 전시회를 개최한 2008년 이후, 그의 작품은 구겐하임, 휘트니, 현대미술관, 퐁피두센터, 테이트의 영구 소장품이자 마이애미에서 베이징에 이르는 여러 도시 사람들의 개인 소장품이 되었다.
2017년에 아메리칸 어패럴은 부도가 나서 버넌 근처에 있던 자체 공장을 폐쇄했다. 루비는 비서를 한 명 보내 그곳 게시판에 ‘재봉사 구함’이라는 공고문을 하나 붙였다. 그는 비공개 프로젝트를 도울 유능한 재봉사들을 구하고 있었다. 나는 그즈음에 루비를 만나러 그의 거대한 복합건물을 방문해 그 부지의 뒤쪽에서 커다란 창고를 하나 봤다. 그게 뭔지 내가 루비에게 묻자, 그는 비밀 프로젝트를 아리송하게 언급하며, 텍스타일과 상관이 있다고만 말했다. 그가 꽤 오래 열어둔 창고 문틈으로 프린지드 애시드워시 데님 팬츠와 오버사이즈 워크 셔츠가 걸린 옷걸이 여러 개가 힐끗 보였다. 루비는 “저는 회사를 하나 시작할까 생각하고 있어요”라고 말하고는 문을 닫았다.
루비는 이제 47세다. 건장한 체구에 약간 구부정한 자세로 걷는다. 눈동자가 파란색인데, 그 눈은 종종 금빛을 띤 길고 거추장스러운 갈색 머리카락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루비는 배기 팬츠와 함께 벌키한 스웨트셔츠나 구제처럼 보이도록 색이 바래고 염색한 워크 셔츠를 걸치고, 황갈색 가죽 워크 부츠나 커다란 스니커즈를 신곤 한다. 도서관에서처럼 낮은 목소리로 자주 말해서 사람들은 그의 쪽으로 몸을 기울여서 이야기를 들어야만 한다.
많은 패션 디자이너가 예술계로 진출했다. 헬무트 랭은 그의 패션 레이블을 포기하고 조각가가 되었다. 미우치아 프라다는 젊은 아티스트들이 그들의 재능을 선보일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밀라노 외곽에 재단을 설립했다. 그리고 아티스트들은 패션 디자이너들과 협업했다. 무라카미 다카시는 루이 비통 핸드백을 장식했고 알렉스 이스라엘은 리모와 수트케이스를 만들었다. 그렇지만 주류 비주얼 아티스트 가운데 패션 사업을 시작한 아티스트는 아무도 없다. “그것도 제가 여기에 뛰어든 이유 가운데 하나예요. 어떤 아티스트도 이런 시도를 해본 적 없는 것 같거든요.” 어느 날 우리가 고물 승합차 옆을 지나쳐 가는 동안 그는 말했다. 그가 인근 주차장에서 발견해 언젠가 쓸모가 있겠지 싶어 스튜디오까지 힘겹게 끌고 온 것이다. 그는 옷 만드는 일을 그저 자신의 다면적 예술 활동의 또 다른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루비에게 패션은 자기 분야를 지나치게 확장한 듯 보이지는 않는다. 그의 복합 스튜디오 건물에 있는 여러 공간 가운데 하나는 일명 ‘부드러운 조각’이라고 하는 그가 디자인한 패브릭을 누비고 덧대고 바느질해 만든 미국 동화 작가 닥터 수스의 작품 속 캐릭터 같은 분위기의 거대한 박제 생물을 만들기 위해 마련한 슈퍼마켓 규모의 전용 공간이다. 콜라주 회화 작품에 천 조각을 사용하는데, 작품에 원사가 너무 많이 들어가 직원이 그가 어느 원사 회사에 대한 총판 자격을 얻게 해줄 때까지 조앤 패브릭 앤 크래프트 지역 여러 매장에서 재고를 정기적으로 한꺼번에 구매하곤 했다.
스털링 루비는 미국 펜실베이니아에서 살던 어린 시절에 엄마의 오래된 싱거 재봉틀로 바느질하는 법을 배웠다. “계속 바늘을 부러뜨리고 실패를 구부러뜨렸어요.” 그가 말했다. “너무 많은 천을 한꺼번에 밀어 넣고 작업하려고 해서였죠.” 루비가 13세가 되었을 때, 엄마는 그에게 중고 재봉틀을 하나 사줬다. 최근에 이제 막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딸아이 로즈메리가 케이프를 원해, 루비는 스튜디오에 있던 쓰레기통에서 적당한 크기의 천 조각을 구해 즉석에서 딸에게 케이프 한 벌을 손수 바느질해 만들어줬다. 그와 순수 미술 사진작가인 아내 멜라니 시프는 로즈메리 외에 딸과 아들을 한 명씩 더 두고 있다(15세인 또 다른 딸이 한 명 더 있다).
그 스튜디오 복합 단지는 면적이 1만6,000㎡ 규모로, 루비의 작업을 중심으로 공간이 나뉜다. 그곳에는 대형 쓰레기 수집 용기인 덤프스터 크기의 가마 여섯 개에서 녹은 듯 보이는 도자기 그릇을 생산하는 지하 공간이 있다. 여러 개의 대형 방에는 엄청나게 큰 그림과 콜라주가 있고 금속, 레진, 우레탄 조각품을 보관하는 곳도 있다. 루비가 ‘관람실’이라 부르는 2,800㎡ 규모의 창고가 시범 갤러리로 마련되어 그곳에서 완성작을 평가하고 다른 곳에서 개최될 미술 전시회를 실물 크기로 배치해볼 수 있다.
루비가 패션 브랜드를 하나 디자인할 계획이라는 소문이 퍼진 이후, 1973년 일본에서 설립된 꼼데가르송의 혁신적 디자이너 레이 가와쿠보, 다수의 패션 및 마케팅 컨설턴트, 크리에이티브 아티스트 에이전시의 공동 창업자 겸 오래된 미술품 수집가인 마이클 오비츠 등 예상 밖의 많은 방문객이 그의 스튜디오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오비츠는 2008년 MOCA 전시회에서 루비의 작품을 처음 접하고는 이 아티스트를 베벌리힐스에 있는 자신의 개인 홈 갤러리에 초대해 그곳에서 전시회를 열게 했다. 오비츠는 루비가 미니멀리즘과 유폐를 장난스럽게 표현한 것이라고 말한 관 작품 몇 점을 제외하고 그 전시회에 전시된 모든 작품을 구매했다. “제게 관은 필요 없었거든요.” 오비츠는 말했다.
또 다른 방문객은 벨기에 출신의 패션 디자이너 라프 시몬스였다. 루비의 친구이기도 한 라프는 루비가 패션 디자인 분야로 진출하도록 씨를 뿌릴 수 있게 해준 인물이다. 질 샌더와 디올을 디자인했고, 그 후 캘빈 클라인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일한 시몬스는 정밀함과 미니멀리스트적 절제의 미학으로 유명하다. 이런 특징적 면모는 의도적으로 풍성하게 흩트려놓는 루비의 거친 스타일과 정반대다. 2008년 시몬스는 루비에게 도쿄에 자신의 패션 레이블을 위한 부티크를 하나 디자인해달라고 요청했고 푸른 페인트를 지저분하게 흩뿌린 흰색 벽을 비롯한 최종 디자인이 매우 마음에 들어, 캘빈 클라인의 런웨이 배경으로 사용할 세트 디자인을 두 차례나 루비에게 의뢰했다. 또 다른 캘빈 클라인 패션쇼에서 모델들은 무시무시한 창고 파사드 아래에서 무릎 깊이의 팝콘 더미 사이로 워킹을 했다. 창고의 서까래에는 루비가 선홍색 원사로 제작한 치어리더들의 폼폼이 걸려 있었다. 2014년 시몬스는 루비에게 몇몇 남성복에 대해서도 협업을 제안했다.
루비의 갤러리스트들이 그런 협업을 좌절시켰다. 활동 초기부터 그는 아티스트와 딜러 간의 전통적인 재무 계약을 거부했다. 하나의 갤러리에 얽매여 그들이 자신의 작품 매입가의 절반을 가져가게 하는 대신, 루비는 여러 갤러리와 동시에 작업하며 각 계약 조건을 따로따로 협상한다. “50 대 50이라는 갤러리 모델을 결코 신뢰하지 않았어요.” 그와 같은 규모로 생산하는 다른 많은 아티스트와 달리, 자신의 작품에 자금을 대고, 갤러리에선 판매가의 지정된 비율을 그에게 지불한다. 예술계의 일부 사람들은 신의 없이 갤러리를 금방금방 갈아타는 출세 제일주의자라고 매도하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는다.
그래서 딜러들이 시몬스와 함께 작업하는 자신을 미심쩍은 눈으로 봤을 때 그들을 무시했다. “딜러들이 제게 화를 많이 냈죠.” 그는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결과는 정말 짜릿했다. 시몬스의 패션쇼가 끝난 후 그는 어느 기자에게 말했다. “모두 다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고 있었어요. 그 순간 저는 생각했죠. ‘빌어먹을, 예술가는 무슨 예술가. 정말 아주 멋진걸!’”
시몬스와의 협업이 루비에게는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청소년기에 어머니의 재봉틀로 스케이트복을 만들었고, 성인이 되고 나서는 예술 작품을 만들기 위해 물감을 흩뿌리거나 표백제로 바래게 하거나, 페인트칠을 하는 등 자신이 실험하고 남은 직물이나 캔버스 천 조각을 사용하여 스튜디오에서 걸칠 작업복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늘 손수 만드는 DIY 미학을 갖고 있는데, 이는 그의 블루 컬러 뿌리를 연상시킨다. 그가 만드는 물건은 고등학교 기술 수업 시간에 만든 물건의 아주 큰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그것들은 모순적이지 않다.
다음으로 내가 지난해 12월에 소토 스트리트를 다시 방문했을 때, 루비는 자신의 패션 프로젝트의 직원 규모를 확대하여 총책임자 한 명, 생산 책임자 한 명, 샘플 제작자 두 명, 의류 라인의 디자인 및 판촉에 대해 조언해줄 컨설턴트 여러 명을 추가로 고용했다. 이 프로젝트는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았지만, 루비는 내가 이미 본 적 있는 구제처럼 보이는 데님과 그래픽 티셔츠, 그가 ‘놀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팬츠라고 부르는 배기 트라우저와 가장자리에 술이 달린 큰 코트 등 샘플 의상을 계속 제작하고 있었다. 의류 라인은 이제 로고와 구두점이 많이 들어간 이름까지 생겼다. 바로 ‘S.R. Studio. LA. CA.(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S.R. 스튜디오.)’이다.
루비는 이 프로젝트를 조용히 진행하려고 애썼는데도, 그는 피렌체에서 1년에 두 차례 열리는 중요한 남성복 패션 위크인 피티 우오모에 초대받아 자신의 첫 번째 패션 컬렉션을 선보이게 되었다(과거에 초대된 특별 게스트로는 에디 슬리먼, 로다테의 케이트, 로라 멀리비, 라프 시몬스, 마르탱 마르지엘라 등이 있다). 2019년 6월에 열린 패션쇼 장소로 루비는 보볼리 가든스 근처의 오래된 건초 창고인 레 팔리에레를 골랐다. 다시 로스앤젤레스에서 그는 댈러스와 로스앤젤레스에서 동시에 열리는 미술 전시회를 바쁘게 준비하고 있었다. 또 코첼라 밸리에서 열리는 데저트X 전시회에 선보일 조각 하나를 만들기로 했다(그 결과 ‘스펙터’라는 선적 컨테이너 크기의 형광 오렌지색 사각형 덩어리가 완성되었는데, 이 작품은 인스타그램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12월 바로 그날, 루비와 그의 새로운 패션팀은 피티 컬렉션 일정을 맞추는 데만 신경을 쓰고 있었다. 남성복과 여성복 외에 신발과 핸드백도 선보일 참이었다. 패션팀은 의류 라인의 상표와 그 상표가 옷에 프린트되도록 할지 아니면 짜 넣을지에 대해 논의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프린트된 상표는 제 눈에는 약간 눈속임 같아요.” 데스 엔젤 티셔츠와 물감을 흩뿌린 스니커즈에 프린트 상표를 사용한 루비는 말했다. 예전에 헬무트 랭에서 이사로 일한 바 있으며 루비가 컨설턴트로 영입한 미셸 소디는 “모든 제품의 관리 라벨에 ‘드라이클리닝만 가능’이라고 써야 하는 건가요?”라고 물었다. “우리로서는 그게 가장 안전한 방법이니까요.” 생산 부문 감독을 위해 고용된 젊은 여성이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그 그룹은 원탁 테이블에 둘러앉아 커피를 마시고 글루텐이 없는 페이스트리를 먹는다. 그들은 이 패션 컬렉션에 대해 350달러짜리 로고 티셔츠에서부터 버넌 스튜디오에서 수작업으로 마무리한 특별 품목에 이르기까지 가격 체계를 정하기로 했다. 이런 가격 책정은 아티스트들이 보통 에디션을 규정하는 방식에 바탕을 두었다. 한정된 수량만 생산해 개당 수천 달러에도 판매할 수 있는 품목을 ‘S.R. Studio. LA. CA. 한정판’이라고 부르자고 제안하는 사람도 있었다.
루비는 ‘한정판’이라는 말에 움찔하며 놀랐다. “에디 바우어 버전처럼 들리는데요.” 그는 말했다. 이전에 톰 브라운을 위해 일한 적 있는 신임 총책임자 에밀리 마투로는 최고급 라인을 ‘소토’라고 부르자고 제안했다. “소토 씨가 버넌시를 세운 사람 아닌가요?” 루비는 말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는 부패한 사람이었나요?”라고 물었다. 테이블에 둘러앉은 모두가 각자의 휴대전화를 이용해 구글에서 ‘소토’라고 검색을 했다. “저는 ‘소토’가 좋아요. 아주 많이요.” 루비는 말했다. “저한테는 묻지 마세요.” 소디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저는 제 옷에 있는 상표란 상표는 죄다 잘라버리거든요.”
루비는 일찍 회의를 마치고는 딸 로즈메리의 생일 파티를 위해 집으로 향했다. 드라이클리닝 문제와 가격 체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나서 마음이 좀 가라앉았다. 루비는 자신이 예술 분야에서 다른 분야로 영역을 확장하고 싶어 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세상이 지나치게 상업화되는 듯해서라고 내게 말했다. 의류 생산이 그의 작품을 민주화해 보다 많은 사람이 그것을 더 저렴한 가격에 구하도록 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기를 바랐다. 루비는 대부분의 아티스트와 패션 간의 매시업이 시몬스가 이른바 ‘판매용 패키지’라고 부른 것처럼 다소 부정적이었다는 데 동의했다. 400달러짜리 티셔츠 구매자는 100만 달러짜리 그림 구매자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고객일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스털링 루비의 스튜디오 책임자인 타일러 브릿은 루비가 시몬스와 협업 이후 자신만의 패션 브랜드를 만들고 싶어 했지만, 그것을 어떻게 팔아야 하는지 몰라서 패션 회사를 시작했다고 내게 말했다. “의류에 미술품처럼 가격이 매겨지지 않는 한, 루비는 그것을 자신의 아트 갤러리를 통해 판매할 수 없었어요.” 브릿은 말했다. 그 전날, 나는 루비에게 그의 패션 브랜드로 달성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물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패션이 예술만큼 진실성을 갖길 원해요.” 그는 마침내 말했다. “패션 업계를 바로잡으려는 게 아니에요. 그저 아티스트를 정의하는 규칙을 재설정하고 싶어요.”
루비는 대략 10년 전에 성인이 된 후 처음으로 의류 한 벌을 디자인했다. 바로 가슴 부위에 정사각형 포켓이 두 개 달린 담녹색 데님 셔츠였다. 대형 아이폰이 처음 나왔을 때, 하나를 구매한 후 스튜디오로 가서 왼쪽에 아이폰을 넣을 수 있는 더 큰 포켓을 가진 새 셔츠를 만들었다. 친구들이 루비가 집에서 만든 작업복을 주목하기 시작했고 그들에게도 만들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재단을 연구했고, 시몬스와의 대화가 보다 구체적으로 바뀌었다. 루비는 다듬어지지 않은 느낌을 좋아하지만, 진정한 여성복 디자이너인 시몬스는 의상을 보다 깔끔하게 마무리하길 권한다. 루비에게 1980년대에 할머니가 레드, 그린, 화이트 아크릴 원사로 떠준 벌키한 크리스마스 스웨터만큼 소중한 것은 없다. 시몬스가 그것을 보고는 “오! 형편없어. 정말 형편없어!”라고 소리를 질렀다.
루비는 독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군대에 있었고, 비트부르크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네덜란드 여자를 만나 결혼했다. 루비의 가족은 그가 여덟 살 때 펜실베이니아주의 시골로 이사 갔다. 고등학교에서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밴드(배드 브레인스, 피터스, 스완스, 슬레이어)를 나타내는 헝겊 조각으로 옷을 장식했고, 여러 다른 셔츠의 조각을 함께 이어 붙여서 상의를 만들었다. 이처럼 괴상한 옷 때문에 일부 학생은 그가 게이일 거라고 생각하고는 그를 괴롭혔다. “그저 사람들과 노닥거리는 게 좋았어요.” 루비는 손수 만드는 자신의 방식이 그 시절의 불필요한 것을 모두 걷어낸 펑크 미학과 스케이트보드 타기 문화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했다(그가 사는 도시에서 어린 나이에 목수 일을 배운 아미시와 메노나이트 10대들은 최상의 스케이트보드 경사로를 세웠다). 루비는 또한 잡지를 만들었고, 10대로서 하드코어 밴드 ‘서클 저크’를 인터뷰했다. 부모는 그가 아침에 지각하지 않고 제시간에 학교에 가는 한 볼티모어와 워싱턴 D.C.에 있는 펑크 클럽에 갈 수 있도록 허락했다. “성장기를 보낸 곳에 패션은 없었어요.” 그는 내게 말했다. “사냥철이 되면 사람들은 플란넬 옷을 사냥꾼의 오렌지색 조끼로 갈아입었어요.”
루비는 시카고미술학교를 다녔는데, 그곳에서 여가 시간에 자전거 정비공이자 비디오 관리자로 일했다. 2002년 졸업 후, 아트센터 칼리지 오브 디자인에서 순수예술 부문 석사 학위를 얻기 위해 로스앤젤레스로 이사했다. 결국 학위를 따지 못하고 25만 달러가 넘는 빚만 안고 칼리지를 떠났다. 그는 2008년에 MOCA에서 획기적 전시회를 끝낸 후 마침내 빚을 다 갚았다.
피티 패션쇼를 여섯 달도 채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 긴박감이 돌면서 리테일 계획을 ‘가열차게’ 밀어붙였다. 아방가르드 전자 상거래 사이트 ‘센스(Ssense)’는 패션쇼 직후 루비의 의상 몇 벌을 판매하고 싶어 했다. 레이 가와쿠보와 그녀의 남편 아드리안 조프는 전 세계에 있는 자신들의 도버 스트리트 마켓에서 그의 패션 라인을 팔겠다고 제안했다. 그다음 해 9월에 파리 마레 지구의 영향력 있는 부티크 ‘브로큰 암’에서 자체 매장의 2층을 S.R. 스튜디오. LA. CA.에 넘겨주고 싶어 했다는 소문이 파리에서부터 들렸다.
소매업자들을 줄 세우려면 가격 전략이 필요했다. “우리는 전통적인 도소매 가격 인상에서부터 시작했어요.” 브릿은 말했다. 예전에 멜라니 시프에게 사진을 배우던 브릿은 우레탄을 붓고 스튜디오 바닥 청소부터 시작했다. 이제 그는 건물을 관리하고, 고용 계약을 협상하며, 최근에는 의류에 가격표를 붙이는 방법을 모색하며 그곳을 운영하고 있다. 브릿은 의류가 보통 도매가의 2.5~3.5배 사이의 가격에 판매된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러나 미술품은 원가 가산(가격 결정) 방법에 따라 가격이 매겨지지 않는다. 여러 천 조각을 소재로 한 스털링 루비의 패브릭 조각은 12만5,000달러까지 나간다. “당신은 스털링이 손수 작업하는 의복에 어떻게 가치를 매기나요?” 브릿은 궁금해했다. 총책임자인 마투로는 독특하게 빛바랜 데님 판초 한 벌의 잠재적 가격으로 샤넬 재킷과 비슷한 가격인 8,000달러 정도를 제시했다. 루비는 젊은 사람들이 S.R. 스튜디오의 제품을 구매하고 싶어 했다는 점을 그들에게 상기시켰다. 그는 계속 명품에 진입하는 첫 번째 단계인 ‘엔트리급’ 품목을 몇 가지 내놓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루비는 자신이 디자인한 청바지가 495달러에 팔려야 한다고 제시했다.
회의에 참석한 사람 그 누구도 500달러짜리 멜빵바지의 진정한 대중성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브릿은 한 사람이나 기관의 재산인 미술품과 달리 “의복은 구매 가능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누군가 그것을 착용하지 않으면 우리는 쫄딱 망할 거예요.” 그는 덧붙여 말했다. 1월의 어느 비 오는 날, 또 다른 회의에서 판촉 관련 논의가 재개되었다. 폭우에 스튜디오의 아스팔트 옥외 촬영지에 온통 넓은 물웅덩이가 생겼다. 추위에 대비해 트랙 팬츠와 자신이 직접 디자인한 플리스 후디를 걸치고 니트 캡을 착용한 루비는 센스에서 온라인 판매용으로 주문한 의류 목록을 훑어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로고 티셔츠와 스웨트셔츠가 대부분이었다. “그저 다른 사람들이 다 그런다고 우리도 웹사이트에 그 빌어먹을 티셔츠나 잔뜩 올려놓지는 맙시다. 센스 같은 사이트가 걱정돼요. 맨 앞부분에 티셔츠를 잔뜩 배치해두면, 그건 그냥 또 다른 티셔츠 브랜드가 되고 말아요.”
루비는 최근에 시프가 촬영한 고해상도 사진을 프린트한 실크 칼럼 드레스를 추가하기로 결정했다. “가을 의상으로 실크 드레스가 잘 팔릴까요?” 그는 그룹에 물었다. 소디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패션 피플들이라면요. 그들은 마음에 들면 뭐든 입으니까요.” 루비는 또한 자신의 웹사이트가 성별 구분이 없는 이른바 유니섹스로 보이길 선호한다고 말했지만 마투로와 브릿은 그렇게 하지 않는 게 좋겠다며 루비를 설득하려 했다. 그들은 옷을 여성복이나 남성복으로 분명히 밝히는 것이 쇼핑객이 치수나 핏을 정할 때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날 자신의 스튜디오를 떠나며 루비는 이 패션 브랜드가 자신의 커리어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까 봐 약간 꺼림칙하다고 토로했다. “사람들은 그냥 패션이 예술보다 수준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거 같아요.” 그러나 루비는 옷도 조각이나 영화, 도자기처럼 또 다른 창작 행위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아티스트로서 의류 생산 같은 일을 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에요. 아티스트인 제 삶이 너무 좋고, 그래서 그걸 결코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아티스트로서 저는 하고 싶은 건 뭐든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까요.”
2월에 로스앤젤레스 슈프뤼트 마거스 갤러리에서 열린 자신의 최근 전시회 <댐네이션>의 개막식에서 루비의 두 세계가 서로 충돌했다. 루비와 시프는 둘 다 똑같이 시몬스가 디자인한 발끝에 금속이 달린 블랙 가죽 부츠를 신고 나타났다. 전시회에는 특히 화가 잔뜩 난 공룡같이 생긴 여러 두개골이 한 부분을 차지했다. 루비는 할리우드 소품 디자이너를 고용해 자신이 레진으로 날카로운 이빨, 동글납작한 눈알과 혀를 가진 거대한 두개골을 만드는 일을 돕게 했다. 루비가 각기 안락의자 정도 크기인 사나워 보이는 두개골 위로 아크릴 원사로 만든 컬러풀한 머리카락을 덥수룩하게 덮자 그것들은 <쥬라기 공원>의 공룡들보다 머펫처럼 보였다. 그 두개골은 가격이 제각각 25만 달러 정도로 책정됐다. 전시에서 가장 주목할 작품은 <스테이트>라는 제목의 30분짜리 영화였다. 루비는 헬리콥터를 대여해 캘리포니아주 감옥 위를 날았는데, 거기서 어느 비디오그래퍼가 거대한 콘크리트나 철제 블록 등을 사용하는 브루탈리스트 건축 형태와 함께 주변 시골 경관을 담은 장면을 촬영했다. 사운드트랙은 루비가 친 드럼과 신시사이저 연주였다. 영화 <스테이트>는 복사본 세 개에 25만 달러에 판매되고 있었다. 미술관 몇 군데에서 문의가 있었지만, 루비는 예술계의 전통을 깨고 싶은 기분이 든다고 내게 말했다. <스테이트>를 넷플릭스나 HBO 같은 스트리밍 서비스로 제공하기를 바란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손님들은 루비의 패션 사업에 대해 논의했다. “아티스트로서 왜 당신은 생산 양식에 관여하려 하지 않은 건가요?” 실험적 예술 공간 LAXART를 운영하는 함자 워커가 물었다. 술집 카운터에 서서 워커는 몇몇 아트 딜러가 루비의 패션 프로젝트에 대해 미심쩍어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런 신경과민은 예술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고질병이에요.” 그는 말했다. 워커는 루비를 미국 현대미술의 거장인 로버트 라우센버그와 비교했다. “라우센버그에게는 모든 게 열려 있었어요.” 그는 말했다. “그가 패션도 받아들였을까요? 물론이죠!” 근처에 서 있던 런던 출신의 아트 딜러 제임스 린던은 ‘고도의 임계치’라는 문구를 사용해 루비의 패션 사업을 묘사했다. “버프 버니보다 훨씬 더 체제 전복적이에요.”
라프 시몬스는 칼라 셔츠 위로 몸에 딱 맞는 데님 재킷을 걸치고 개막식에 참석했다. 시몬스는 최고 크리에이티브 책임자로서 캘빈 클라인에서 떠들썩한 몇 년을 보낸 후 그곳을 떠났다. 비록 벨기에에서 자신의 이름을 내건 남성복 라인을 계속 디자인하고 있지만 패션에 대해 완전히 다시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시즌별 컬렉션을 생산하기보다 바우하우스 양식에서 영감을 받은 다른 아티스트와 디자이너의 작품과 함께 자신의 디자인을 선보일 궁리를 하고 있다. “환경에 대해 생각하고 있어요.” 그는 루비도 동참하게 될 거라며 그 아이디어에 대해 벨기에 정치인들에게 이야기했다고 애매하게 덧붙였다. “스털링과 했던 경험은 아주 자연스러웠어요.” 시몬스는 내게 말했다. 대부분의 아티스트는 패션을 두려워했다고 말했다. 그는 수년 동안 아티스트가 될 생각을 해왔다는 말을 덧붙였다. 나는 그를 막아선 것이 무엇이었는지 물었다. “당연히, 두려움이었죠!”
<댐네이션> 전시회가 있은 지 몇 주 후, 피티 우오모는 루비의 패션쇼에 대해 공식 발표했다. 루비를 대변하는 래리 가고시안이 설립한 아트 갤러리 네트워크인 ‘가고시안’에서 그 발표를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그러나 루비는 속상해했다. “래리에게서 전화를 받지 않았어요.” 그는 말했다. 인스타그램 포스팅은 ‘패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고, 그건 고작 1,500개 정도의 ‘좋아요’를 얻었다. 가고시안의 포스팅치고는 적은 편이었다. 댓글을 단 한 사람은 “이건 정말 끔찍해요. 당신 무슨 일 있어요?” 루비는 이번 패션 프로젝트가 자신의 미술품 가격을 떨어뜨릴 수도 있다며 걱정하고 있었다. “이번 시도를 부정적이고 모순적이며, 아티스트로서의 제 작업보다 왠지 부족한 것으로 받아들일까 봐 걱정이에요. 제 작품에 수백만 달러를 지불하는 사람이라면 이 일이 지극히 평범하다고 느낄 수도 있을 거예요.”
최근 그의 후원자인 마이클 오비츠가 루비의 의류를 보고 싶다며 방문한 것 또한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는 오비츠에게 그의 애시드워시 데님과 티셔츠, 실크 드레스를 보여줬다. 오비츠는 이후에 다른 루비의 작품 범위를 생각해보면, 루비의 패션계 진출이 전혀 놀랍지 않다고 내게 말했다. 1974년에 자신이 C.A.A를 시작했을 때 엔터테인먼트 사업이 어땠는지 떠오른다고 오비츠는 내게 말했다. 당시 사람들은 TV를 영화보다 덜 중요한 것으로, 영화를 조각보다 더 수준 낮은 예술 형태로 여겼다. “시대에 뒤떨어진 나약하고 무기력한 생각이 많아요.” 그는 말했다. “저는 그게 영화가 됐든, TV가 됐든, 예술이 됐든, ‘창의성을 가장 중요시하는’ 학교를 다녔어요. 제게는 마틴 스콜세지나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재스퍼 존스나 사이 톰블리와 1, 2등을 다퉈요. 그런 최고의 자리에 패션 디자이너도 있다고 생각해요. 창의성에 위계를 두는 행태에 결코 동의한 적 없어요.”
오비츠는 자신이 약 10년 전에 신발 디자이너인 타마라 멜론(말레이시아 출신의 구두 장인 지미 추와 브랜드 ‘지미 추’를 공동 설립했고 지금은 그녀만의 브랜드를 운영하고 있다)을 만나기 시작한 후, 패션을 다르게 보고 있다고 인정했다. “톰 포드 의상을 좋아했지만, 멜론이 내게 말해주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됐어요.” 그는 말했다.
피티 쇼 날짜가 가까워지자 루비는 자신의 패션 라인에 더 많은 돈을 쓰기 시작했다. 루비와 시프는 셀린, 마르지엘라, 캘빈 클라인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마티유 블라지, 시몬스와 긴밀히 함께 작업하는 피에테 뮐리에, 이렇게 두 명의 디자이너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러 나갔다. 루비와 시프는 패션 사업의 재정에 대한 친구들의 견해를 듣고 깜짝 놀랐다. 뮐리에는 블라지와 함께 키득거리며 말했다.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의 돈을 쓰지 않아요.”
“그 말을 듣고 기분이 묘했어요.” 루비는 말했다. “저는 이것 때문에 파산하고 싶지는 않아요.” 루비는 최근에 자신의 패션 레이블을 위해 창고 하나를 또 개조해 본사처럼 사용하려고 거기에 거의 300만 달러를 쏟아부었다. 피티 쇼에 들어가는 비용은 디자인 비용이나 생산 비용, 계속 충원되는 루비의 패션 부문 직원에게 지불할 인건비를 빼고도 50만 달러 정도(피티가 이 중 절반을 지불하고 있었다)에 달할 듯했다. 루비는 메리 케이트와 애슐리 올슨이 디자인하는 지명도 높은 럭셔리 브랜드 ‘더 로우’ 출신의 라모나 존스를 신임 생산 책임자로 고용했다. 루비는 간호사 스타일의 스니커즈를 이탈리아에서 생산하고 있었고, 알루미늄을 주조해 투박한 핸드백을 카드보드 박스를 본떠 만들었다. 지갑이라기보다 조각에 가까운 그런 가방은 산업용 체인에 걸려 있었다.
루비는 미국과 이탈리아에서 각 의상별로 다섯 벌과 50벌 사이 정도만 기꺼이 제작할 수 있는 공장을 찾느라 고군분투했다. 스튜디오 직원들은 태양이 내리쬐는 아스팔트 위에서 코튼 덕과 니트 직물을 블리칭(옷감을 화학적으로 처리하거나 햇빛에 바래게 하여 표백하는 방법)하고 있었다. 공장으로 보내야 하는 시점에 맞춰 몇 야드씩 준비한다. 그러나 제조업자들은 어마어마한 옷감 두루마리로 작업하는 데 익숙해 톱으로 한 번에 수백 야드씩 절단할 수 있다. 어느 컨설턴트는 로스앤젤레스의 타자나에서 방울진 질감의 오버사이즈 스웨터 30벌을 루비가 원하는 사양에 따라 짜주겠다는 여성 한 명을 찾았다(시몬스는 이런 면에서 우세했다. 스웨터는 메리노 울로 만들어졌다).
4월의 어느 날 오후, 루비는 본인이 작업하던 몇 가지 의상에 과감한 변화를 주기로 결심했다. 소매 부위를 길게 늘였고 네크라인을 더 높게 만들어 시몬스가 몇 년 전에 캘빈 클라인에서 모색했고 다른 디자이너들이 대중화시키고 있던 스타일인 프레리 드레스 같은 ‘체이스트 룩’을 보여줬다. “그게 벽돌처럼 저를 강타했어요. 바로 제가 성장기를 함께 보낸 아미시 소녀들과 메노나이트 소녀들에 관한 겁니다.” 펑크 록을 좋아하는 10대 소년이던 루비는 그들 집단의 기풍을 거부했지만 이제 그들 공동체의 직업윤리와 자급자족 정신의 진가를 제대로 알아차렸다. 그 컬렉션은 이내 헐렁한 원피스와 앞치마, 통 넓은 팬츠 위로 레이어드해 걸친 롱스커트로 채워졌다.
패션 브랜드 크리스토퍼 케인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디자이너 메건 로시가 최근 루비의 스튜디오에 합류했다. “의류보다 더 큰 뭔가를 찾고 있었어요.” 로시는 말했다. “여기서는 뭐랄까, 그게 도자기처럼 표현 수단으로서 의류 같은 거죠.” 많은 패션 디자이너가 패브릭에 거의 손을 대지 않는 데 반해, 루비는 패션 작업장에서 벗어나는 법이 없었다고 그녀는 말했다 “루비는 매 순간 여기에 와 있어요.”
루비와 시프는 로스앤젤레스의 마운트 워싱턴 지역에 살고 있다. 시골 샌 페르난도 밸리의 터헝가 마을에서 수년간 지내다가 워싱턴 산꼭대기에 집을 하나 사서 그것을 확장했다. 루비는 뉴 퍼레니얼 운동의 리더이자 뉴욕의 하이라인 조성을 이끈 주역인 네덜란드 조경 디자이너 피에트 우돌프의 아이디어에 따라 앞마당을 잔디와 자생식물로 조경했다. 루비와 시프는 옆집도 사서 수영장을 만들고 아이들과 도자기를 굽는 가마가 있는 가족 아트 스튜디오도 꾸몄다.
나는 부활절 주말에 그곳을 방문했는데 루비의 가족은 막 달걀 찾기를 끝낸 참이었다. 시프가 딸 로즈메리를 자신의 엉덩이에 대고 부드럽게 좌우로 흔드는 동안 루비는 자신이 작업 중인 실크 크레이프 드레스에 프린트할 양초 사진 시리즈를 비롯해 시프가 찍은 사진에 대해 이야기했다. 시프는 S.R. 스튜디오. LA. CA. 판촉 캠페인용 사진을 찍느라 바빴다. “당신이 그랬잖아. ‘우린 누군가에게 돈을 들여가며 판촉 캠페인 사진을 찍을 필요가 없어. 내가 찍으면 되니까’라고.” 시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운 컬렉션 쇼 날짜가 점점 가까워지자, 루비는 보다 활기차 보였다. 그는 종종 전시회가 끝난 후에는 우울증을 앓곤 하지만, 이번 패션쇼를 앞두고는 낙천적인 분위기였다. 5월 중순, 마티유 블라지는 비행기를 타고 벨기에 앤트워프에서 로스앤젤레스로 날아와 피티 런웨이에 선보일 룩 선정 작업을 도왔다. 그와 루비는 게시판 세 개를 앞에 두고 앉아 패션쇼에 선보일 듯한 의상을 걸친 모델들을 담은 스케치와 사진을 봤다. 이따금 둘 중 한 명이 사진을 옮기거나 바닥에 떨어뜨리기도 했다.
“이 다섯 개는…” 우리가 구스타프 클림트 그림에서 자주 보던, 에밀리 플뢰게가 구스타프 클림트를 위해 만든 옷에서 영감을 얻은 일련의 예복을 가리키며 루비가 말했다. “이건 과한가요?” 그는 사진 한 장을 다른 그룹으로 옮겼다. 블라지는 프린지드 데님 수트 한 벌과 벌키한 스웨터 두 벌을 왼쪽으로 몇 센티미터 옮긴 뒤 남아 있는 의상을 세보았다. 74개 룩. 그들은 30개를 더 없애야 했다. “수많은 패션쇼를 본 후여서 룩을 50개 정도 보고 나니 지쳤어요.” 루비는 말했다. 그는 온라인으로 패션쇼 영상을 계속 보고 있었다. “지난번 발렌시아가 패션쇼에서 저걸 봤어요. 저건 영원히 계속돼요.” 그들은 중복되는 듯한 여러 카디건을 빼기로 결정했다. 블라지는 몸을 구부려 버려진 사진 더미에서 애시드그린 반코트 사진을 한 장 집어 들었다. “이건 매우 중요한 의상이에요.” 그는 핀으로 다시 그 사진을 게시판에 고정하며 주장했다. “이건 대표적인 작업복이에요.” 루비가 캐스팅하고 싶어 한 모델들의 얼굴 사진은 또 다른 게시판에 핀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그들은 젊고 비쩍 말라서, 예쁘다고 생각할 만한 모델은 겨우 몇 명뿐이었다.
6월 초 루비 팀은 컬렉션 의상의 대부분을 배로 피렌체로 실어 보냈고 일부 의상은 수트케이스에 쌌다. 그들은 패션쇼가 열리기 6일 전 도착해 비알레 마키아벨리에 있는 패션쇼장 아래에 임시 본부처럼 꾸민 여러 방에 자리 잡았다. 데뷔 바로 전날이 되자, 루비는 집중 태세로 전환되어 분위기가 약간 어두웠다. 반쯤은 매우 높은 다이빙대에서 막 뛰어내려야 하는 불운한 남자의 표정이었다. “예술은 뭔가 늘 불안해요.” 모델을 선정하는 최종 회의에서 그는 말했다. “예술이 하나의 산업으로 변해가는 모습이 별로 신나지 않아요. 사람들이 아티스트를 경주마처럼 바라보면서 미술품에 투자가 아주 집중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아티스트들이 더 나은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 같진 않아요.”
루비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두 팔로 방 안 가득한 옷걸이를 쓸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이 옷이라는 것이 좀더 관습을 거스르는 면이 있다고 봐요. 저는 아직도 그림 그리는 게 정말 좋아요. 조각도 정말 좋아요. 그냥 기분이 약간 그래요.” 루비는 타자나의 니트 짜던 사람처럼 패션의 장인적 측면을 좋아한다(그는 그녀에게 그녀가 작업한 의상 라벨에 서명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럼에도 루비는 다른 디자이너들이 하듯 매번 3개월에서 6개월에 한 번씩 컬렉션 의상을 대량으로 찍어내는 일에는 전혀 관심 없다고 말했다. 자신만의 작업 일정표에 따라 옷을 만들고 싶어 한다.
그날 저녁, 지방시는 메건 마클의 웨딩드레스를 만든 것으로 유명한 영국 디자이너 클레어 웨이트 켈러의 첫 번째 남성복 컬렉션을 축하하는 파티를 열었다. 그 파티는 도시 외곽의 으리으리한 곳에서 열렸고, 초대 손님들은 다음 날 예정된 루비의 패션쇼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느 패션계 내부 관계자는 1년여 전 자신이 루비에게 이 프로젝트를 하지 말라고 주의를 줬다고 말했다. 그녀는 두 손으로 허공에 대고 정사각형을 그리고는 루비에게 “당신은 작은 그림 하나만으로도 25만 달러를 벌 수 있잖아요. 도대체 패션은 왜 하려고 해요?”라고 말했다고 했다.
패션쇼 당일 아침, 가고시안 파리 지사 대표인 세레나 카타네오 아도르노가 루비의 패션쇼를 보기 위해 아트 바젤 현장에서 소수의 클라이언트와 함께 피렌체까지 비행기를 타고 날아왔다. “이번 패션쇼를 극구 반대한 큐레이터들과 컬렉터 그룹이 있어요.” 아도르노는 패션 분야로 전향한 루비에 대해 그렇게 말했다. 아트 바젤과 피티 우오모 둘 다가 거의 똑같이 트레이드 쇼라는 사실은 알아채지 못하는 듯했다.
나중에 레 팔리에레에서 자신의 시제품 그린 너스 슈즈를 신은 루비는 자신이 직접 드럼을 친 사운드트랙에 맞춰 진행된 패션쇼 리허설을 지켜봤다. 그러고 나서 이른바 ‘첫 번째 룩’을 보러 백스테이지로 향했다. 피에테 뮐리에와 여배우 맥켄지 데이비스 같은 루비의 친구 몇을 비롯해 모델 45명이 패션쇼 대열에 맞춰 정렬해 있었다. 그중 몇몇은 독특한 대형 세미리지드 판초를 걸쳤는데, 판초 중 하나는 뒷부분이 찢어져 루비의 도자기 작품처럼 별 볼 일 없고 불완전해 보였다. 양초와 풀을 찍은 시프의 사진을 인쇄한 천상의 실크 드레스는 러그솔 부츠와 짝을 이뤘다. 루비는 의장대를 사열하는 것처럼 그 줄을 따라 걸어 내려갔고, 푸른 초극세사 천을 사용해 캐스트 알루미늄 핸드백과 장식 손도끼, 쇠지렛대, 망치, 괭이, 붉은 원사로 채운 철제 바구니, 노동 계층의 다른 장비 등 여러 액세서리를 닦아 광을 냈다.
쇼장에서는 시몬스가 프런트 로에 착석했다. 자신의 패션 라인에서 나온 트랙 팬츠를 입고 운동용 구두를 신은 채 그 위로 턱시도 셔츠를 걸치고 있었다. 베테랑 영국 패션 비평가 수지 멘키스가 그곳을 자세히 빙 둘러봤다. 아트 바젤에서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 디자이너 버질 아블로는 아트 딜러 비토 슈나벨 옆을 미끄러지듯 지나갔다. “예전에는 예술계가 자신이 해야 하는 것보다 더 많이 하는 사람에게는 힘든 곳이었어요.” 슈나벨은 말했다. “사람들은 자신이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본인이 만들고 싶은 것을 만들 수 있어야 해요.”
루비의 드럼 소리가 커지며 이제 곧 패션쇼가 시작된다고 알렸다. 런웨이에 오른 첫 번째 의상은 색이 바래고 염색한 데님 청바지와 멜빵바지, 그리고 여기에 잘 어울리는 셔츠나 재킷이었다. 캐스트 알루미늄 망치가 멜빵바지 포켓에서 반짝거린다. 대형 아이폰이 들어가는 크기의 포켓이 두 개 달린 얼룩진 칼라 셔츠를 착용한 모델은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을 마주한 군중의 일원인 것처럼 반짝거리는 괭이를 손에 쥔 채 군화를 신고 쿵쿵거리며 걸어 내려왔다. 또 다른 모델은 루비가 로스앤젤레스 전시회에서 선보인 등에 퀼팅 조각처럼 보이는 번호판으로 장식한 공룡 두개골에 씌운 가발을 만든 바로 그 레드와 그린 아크릴 원사로 장식한 롱 드레스를 걸쳤다. 필그림 광대들이 신을 것 같아 보이는 버클 대신에 커다란 알루미늄 안전핀을 부착한 에나멜 가죽 로퍼를 신은 모델들도 있었다. 패션쇼가 시작되고 30분이 지나자 루비가 런웨이로 올라와 손을 흔들었고 관중은 환호를 질렀다.
백스테이지에서 루비는 고무돼 보였다. 패션쇼가 끝나고 나서 보면 디자이너들은 종종 축복을 마구 쏟아내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얼떨떨한 신부처럼 보인다. 눈물을 글썽이며 루비는 버넌에서 온 동료들과 아트 바젤에서 온 사람들을 끌어안았다. 루비는 자신의 작품이 미술관에 걸려 있는 대신 세상 밖으로 나가 전 세계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여기저기로 유통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신이 난다고 말했다. 몇 시간 내에 패션 평론가들은 의견을 표명했다. <타임스>에서는 가이 트레베이가 이번 패션쇼를 ‘스타’의 탄생이라고 불렀다. <보그>는 백스테이지에서 멘키스가 “이번 패션쇼는 내가 지금껏 본 최고의 신예 컬렉션이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멘키스가 내놓은 자체 평론에서는 이번 컬렉션을 열렬히 환영한 ‘기쁨의 환호성’에 대해 묘사하며 그것을 “패션계에 길이 남을 그런 ‘순간’ 가운데 하나, 즉 기교, 독창성, 착용 가능하면서도 예술적 의상을 원하는 현시대의 열망을 표현한 컬렉션에 대한 패션 피플의 승인”이라고 강조했다.
그날 저녁, 가고시안 갤러리에서는 피렌체 외곽의 어느 레스토랑에서 루비를 위한 만찬을 준비했다(가고시안은 <보그> 기사를 트윗하긴 했지만, 갤러리의 수장 래리가 전화하진 않았다). 손님들을 태우기 위해 버스를 제공했고, 버스에 타자마자 패션쇼에서 선보인 컬렉션 아이템을 이미 센스에서 판매하고 있다는 말이 돌았다. 아트 컬렉터 제이슨 루벨의 열여덟 살짜리 아들 사무엘 루벨이 휴대전화를 꺼냈다. 그의 부모와 조부모는 2005년부터 계속 루비의 작품을 구매하고 있다. 사무엘은 S.R. 스튜디오 로고가 뒤집힌 채 프린트된 블랙 셔츠 한 벌을 클릭해 400달러에 구매했다. 그의 열여섯 살짜리 여동생 엘라는 분홍과 검정으로 된 미네랄 워싱 청바지 한 벌을 195달러에 구매했다. “그 옷은 홀치기염색을 한 타이다이 청바지처럼 보여요.” 그녀는 말했다. 그들의 열네 살짜리 여동생 올리비아는 그녀가 “우주선 같아 보인다”고 말한 695달러짜리 레깅스를 선택했다.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묻는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왜 그렇게 패션에 열광하는 거지?” “옷을 제대로 입지 않으면, 사람들이 놀리기 때문이에요.” 올리비아가 말했다. 루벨의 얼굴에는 부모로서 아이들을 자랑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 아이들은 반스앤노블에서 행복하게 책을 고르고 있었다. 루벨은 자신의 아이들이 루비의 의상을 좋아해 기뻐하는 것 같았다. “그 말인즉슨 예술이 크로스오버되어 새로운 관객에게 옮겨갔다는 거죠.” 그는 말했다. 루비와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으로서, 그는 이 회사가 자신의 투자 가치를 떨어뜨리지는 않을지 의구심이 들었지만, 패션쇼 후에 사람들이 몹시도 갖고 싶어 하는 이 의상이 루비의 비전과 잘 맞다고 결론 내렸다. “그 의상에 루비 특유의 어두운 기운이 느껴져서 완전히 다 팔릴 거 같지는 않았어요. 다 팔릴 수도 있었겠죠.”
다음 날 아침, 레 팔리에레 아래에 자리한 S.R. 스튜디오. LA. CA.의 쇼룸에서는 그들의 매장에서 판매할 컬렉션을 구매할 권리가 주어진 소매업자 여덟 명을 접대했다(앞서 바니스에서 들어온 문의는 퇴짜를 놓았다). 루비는 이제 10월에 런던 가고시안에서 열릴 다음 조각 전시회 작업에 착수하기 전에 가족과 휴가를 떠나고 없다. 패션계에서는 희소성이 높은 가격을 뒷받침하기에 루비는 결국 명품 구매층까지 아우르기로 결정했다. 남성용 실크 모틀 셔츠는 1,700달러였다. 총책임자 마투로는 판초 같은 한 벌뿐인 특별한 제품에는 2만 달러 정도로 매기자고 처음 제안했는데, 루비가 그 금액을 두 배로 올려 한 벌에 4만 달러까지 올렸다고 말했다(같은 가격에 샤넬의 고급 여성복이나 피카소 석판 인쇄를 살 수도 있다). 루비의 팀은 자신들이 판매 수요를 너무 낮게 잡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여덟 가지의 독특한 의상 거의 모두에 대해 문의가 들어왔다. 의상은 온라인상에서도 사람들이 잡아채가고 없었다. 재고의 30%가 판매 개시 이틀 만에 소진됐다. 최고가 품목이 가장 빨리 팔렸다. 패션의 대중화는 이제 이만하면 충분하다.
루비는 유럽에서 4주 동안 그의 가족과 시간을 보냈다. 앤트워프에서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그는 누군가가 자신의 어깨를 툭 치는 것을 느꼈다. “스털링 씨죠?” 한 남자가 물었다. 디자이너 드리스 반 노튼이었다. 그는 온라인으로 루비의 패션쇼를 몇 번이고 다시 봤다며 칭찬을 건넸다. 루비는 또한 래퍼 에이셉 라키로부터도 팬츠를 한 벌 사고 싶다는 문자메시지를 받았다(루비가 답을 보내려 할 즈음, 에이셉은 폭행 혐의로 스웨덴 감옥에 수감되었다). <엘르>는 가수 빌리 아일리시의 표지 사진 촬영에 사용하고 싶다며 루비의 티셔츠를 몇 벌 요청했다. 오프화이트와 루이 비통 남성복 디자인에 대해 열광적 팬을 거느린 버질 아블로는 루비에게 청록색 나이키 신발 한 켤레를 보냈다. 아블로는 그 신발의 중창에 아티스트의 이름을 오프화이트 특유의 타일로 ‘에어 루비스’라고 휘갈겨 썼다. 그는 루이 비통 로고 부분을 줄을 그어 지우고, 그 위에 매직펜으로 ‘S.R. 스튜디오’로 쓴 커다란 루이 비통 쇼핑백에 그 신발을 담아 보냈다. 신발 사이즈는 맞지 않았지만 루비는 그 신발을 보관용으로 간직할 계획이다.
예술계에서도 요청이 들어왔다. 루비의 회고전을 구상 중인 보스턴 현대미술관의 어느 큐레이터는 회고전에 루비의 의상도 포함시켜달라고 요청했다. 슈프뤼트 마거스 갤러리에서는 루비에게 전시회에 그의 의상도 포함시키라고 요청했다. 루비는 둘 다 거절했지만 힘을 얻었다. 여러 미술관에서 하나뿐인 특별 아이템을 4만5,000달러에 구매할 수 있는지 문의해왔다. “그리고 우리는 아티스트에게서 편지를 받았어요.” 루비는 말했다. “스위스 시각 예술가 우르스 피셔는 다음과 같은 문자메시지를 보냈어요. ‘당신은 정말 굉장한 일을 해냈어요!’”
8월 아트 딜러 제프리 다이치가 루비의 의상에 대한 평가를 내놓았다. “루비가 디자인한 의상은 환상적인 것 같아요. 라프보다 나아요.” 그는 말했다. “신규 고객이 기존 고객을 앞지르고 있어요. 많은 컬렉터가 스털링이 패션 분야에서 하는 작업 때문에 그를 훨씬 더 원할 거예요. 신선하니까요.”
그런데도 이번 컬렉션의 초기 매출액은 착잡한 수준이었다. 루비의 조언자들은 보다 저렴한 티셔츠와 스웨트셔츠가 베스트셀러 제품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그것들은 대체로 팔리지 않았다. 값비싼 소토 라인이 불티나게 팔렸다. 주얼리 디자이너 가이아 레포시는 분홍색 블리치트 데님 옷을 한 벌 구매해 그것을 입고 파리 오뜨 꾸뛰르 위크에 갔다.
루비는 자신의 미술품 마감이 있지만, 직물과 소재를 감독하기 위해 ‘트림’ 코디네이터를 비롯해 자신의 패션 브랜드를 위한 직원을 추가 고용했고, 전자 상거래를 처리할 하청업자를 끌어들였다. 패션계의 런웨이 패션쇼 사이클에 동참하고 싶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 거대하고 부드러운 조각 스튜디오는 패션 레이블에서 차지했다. 스튜디오 책임자 브릿은 이제 자기 시간의 절반을 이 패션 회사에 쓰고 있다.
루비는 얼룩덜룩한 노란색의 저지 프레리 드레스, 형광 녹색과 검은색 격자무늬 천으로 만든 맞춤 남성 정장(오버사이즈 재킷과 슬림 팬츠) 등 온라인에서 판매할 새로운 의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나는 그에게 다음 런웨이 패션쇼를 언제쯤이면 준비할 수 있는지 여러 차례 물었지만, 그는 계속 얼버무렸다. “아직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분명히 하긴 할 거예요. 어디서 할지 계속 생각하고 있어요.” 그의 얼굴에서 익숙한 괴로워하는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다음 패션쇼는 파리에서 하면 좋을 것 같아요.” 그는 말했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군요.”
- 글
- Christina Binkley
- 포토그래퍼
- Sebastian Lis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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