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가 ‘피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보통의 날이었다. 동호대교를 건너자 차가 막혔고 팟캐스트를 들으며 지루한 출근 시간을 버텼다. 점심시간에는 메밀 향이 진한 막국수를 먹었다. 최근 지하철역 근처로 이사 간 선배는 서울에 사는 우리는 세 가지 특권을 누리고 있다고 말했다. “뭐든 배달되지, 교통 편리하지, 밤길 안전하지. 안 그래?” 미국 여행에서 트렁크 가방을 통째로 도둑맞은 이야기, 프랑스 출장에서 소매치기당한 이야기가 소환됐다. “카페에서 가방 두고 화장실 다녀와도 그대로 있잖아.” 서울 생활이 썩 괜찮게 느껴졌다. 그때 카톡 알람이 울렸다. “서울역 묻지 마 폭행. 분노해주시고 공유해주세요”라는 글이었다. 30대 여성이 서울역 한복판에서 한 남성으로부터 폭행당해 눈가가 찢어지고 광대뼈가 박살 났다고 했다. 엑스선 촬영 사진 속 피해자의 광대뼈는 가운데가 파여 3자를 그리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뉴스에서 보도되는 사건이 남의 일로 분리되지 않는다. 여자, 한 아이의 엄마, 한 회사의 직원, 늙은 부모를 둔 자식… 범죄의 대상이 되곤 하는 약자의 조건과 나 사이 교집합이 계속해서 늘기 때문이다. 뉴스, SNS와 함께 실시간으로 진행 상황을 따라가며 피해자의 호흡을 고스란히 느낀다. 30대 여성, 공항 철도 이용자, 언제든 서울역을 활보할 수 있는 행인. 피해자의 신상은 나와 동일했다. 어깨를 부딪히면 외마디 비명이 나오는 감각, 욕을 들으면 “뭐라고요?” 되묻는 정서. 피해자의 행동은 평소 나의 행동과 동일했다. 우연에 따라 불운과 행운이 결정되는 나의 나라에서 피해자는 조 모 씨도 이 모 씨도 최 모 씨도 될 수 있었다.
용의자가 드러나기 전, 사람들은 반응했다. 피해자가 쳐다봐서 때린 게 아닐까. 욕을 맞받아쳐서 남자가 때린 게 아닐까.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냥 참지.” 결혼도 안 한 여자가 이런 사건을 당했다고 말하고 싶나. 주변에 알려지면 그 시선이 더 힘들지 않나. “그냥 참지.” 젠더 의식이 바뀌고 있다지만 남성 우위적 사고는 부지불식간에 드러난다. 데이트 폭력을 당해도, 가정 폭력을 당해도 때릴 만한 여지를 제공하지 않았겠느냐는 반문에는 남자는 정당한 이유 없이 폭력을 행사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우월성과 믿음이 뿌리 깊게 자리한다. 최대한 상상력을 발휘해서 가해자가 어깨를 쳤을 때 피해자도 똑같이 어깨를 치며 욕을 했다고 한들 광대뼈가 함몰되도록 때려도 되나. ‘맞아 마땅한 사람’이란 도대체 누굴까. “왜 때렸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서울역 폭행 피의자는 “욱해서 실수했습니다”라고 답했다.
왜 하필 ‘욱’하는 마음이 30대 여성에게 분출되었을까. 조현병이 있어도, 정신과 진료를 수차례 받아도 그 주먹은 절대 신체 건강한 남성에겐 향하지 않는다. 약자 앞에서 우리는 강해진다. 남편은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에게 반말을 섞어 쓰고, 나는 여덟 살 아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여덟 살짜리 아들은 발에 차이는 송충이를 꾹꾹 밟아 죽인다. 하지만 계산을 늦게 한다고 아르바이트생을 때리거나, 밥을 늦게 먹는다고 해서 아들을 감금하지 않는다. 지켜야 할 사회적 합의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대적 약자인 여성을 향한 폭행을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로 여기는 사회에서는 ‘욱하는’ 이유로도 폭행이 일어난다.
묻지 마 폭행인가, 여성 혐오 범죄인가. 속단하기 어렵지만 사건 명명은 그런 이유로 중요하다. ‘정신 질환자의 묻지 마 범죄’라는 설명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폭력을 사회문제가 아닌 어떤 특수한 개인의 돌발 행동으로 여기게 한다. 게다가 정상이 아닌 피의자의 상태는 ‘우발적’, ‘홧김에’ 같은 이유도 납득시킨다. 처벌받아야 할 범죄는 치료해야 할 환자가 보이는 이상행동이 된다. 이로 인해 결국 피해를 입는 자들은 사회적 약자다. 강남역이나 서울역에 가지 않고, 시비가 붙었을 때는 무조건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이는 방법 외에 자신을 지킬 수 없는 사회는 너무 불행하다. 야근이 예정되어 있는 오늘 퇴근길에도 운이 좋길 간곡히 바라야 할까. 이들을 돌발 행동으로 여기는 한, 유사한 사건은 계속 일어날 수밖에 없다. 사회적 약자를 향한 혐오 범죄가 분명히 존재함을 인정할 때 원인을 찾고 예방할 수 있다.
CCTV에 찍히지 않아 범인을 잡기 힘들다고 했던 경찰은 SNS를 통해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고 언론이 주목하자 며칠 만에 범인을 검거해냈다. SNS를 수놓은 피드는 경찰서에 쌓인 수많은 사건 중 이 사건을 우선적으로 처리하게 했다. 한 명의 목소리에는 꿈쩍도 하지 않다가(피를 흘리고 있을지라도) 수만 명의 목소리에 빠르게 움직이는 행태가 씁쓸했지만 한편으로는 가능성을 본 듯했다. 경찰이나 행인으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하더라도 온라인 광장에는 공감하고 도울 사람들이 있다는 희망 말이다. 2020년 휴대전화는 과거 우리 여인들이 가슴에 품었던 은장도이고 SNS는 도와달라는 거대한 외침이다. 만난 적도 없는 우리가 온라인 광장에서 함께 분노하고 가슴 아파하는 건 공통적으로 경험한 어떤 것이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산책을 다녀오는 길, 전봇대 앞에 멈춰 있는 그림자에 불안감을 느꼈다. 저런 그림자는 나에게 다가온다는 학습된 공포의 감각이 있었다. 재빨리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왁!” 놀라게 하는 소리에 무릎이 꺾여 주저앉았다. 그림자의 주인공은 장난을 치려고 기다리던 아빠였다. “뭘 그렇게 놀라니?” 아빠는 웃었지만 나는 가슴을 쓸었다. 길 가다가 누군가의 화풀이 대상이 될까 봐 반사적으로 움찔하는 경험. 이런 공포가 타인의 일을 내 일로 여기게 한다.
다만 피해자의 여건을 생각해보면 마음이 복잡하다. 피해 상황을 정확히 기억했고 인상착의까지 또렷하게 진술했다. 수술 직전에도 언론 매체와 전화 인터뷰를 할 만큼 알려야겠다는 절박함과 사명 의식이 있었다. 피해자에게는 도움을 요청하는 SNS를 개설하고 목소리를 내는 가족도 있었다. 만약 피해자의 가족이 생계 전선에 내몰려 있었다면, 와이파이조차 제대로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문제의식을 가지고 글을 퍼뜨려주는 지인들이 없었다면, 언론의 관심을 받아 피의자 검거까지 갈 수 있었을까. 공권력이 가해자를 처벌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까지 피해자의 몫이 된다. 따라서 피해자가 어떤 조건에 놓여 있고 어떤 힘을 가졌느냐에 따라 범죄가 세상에 알려지기도, 묻히기도 한다. 누군가에게는 가해자를 처벌하고, 또 다른 희생자가 나오지 않길 바라는 마음보다 그날 벌이가 시급할 수 있다. 여성 범죄 피해자 안에도 계급은 엄연히 존재한다.
사건이 발생한 첫 주말, 친한 선배는 인스타그램, 트위터 어딜 접속해도 #묻지 마 서울역 폭행 관련 글이 보인다고 피로감을 전했다. 게시물을 올린 사람들의 진의를 궁금해하며 개념 있어 보이려고 올리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팔로워를 돈으로 구하고 생략된 SNS 프레임 바깥세상이 예술의 소재가 되는 지금, SNS에 진정성을 묻는다는 건 느닷없다. 올리는 콘텐츠마다 진정성을 조건으로 내건다면 피드는 피로감보다 심심함을 유발할 것이다. 지치지 않기. 지겹다고 생각하지 않기. 냉소하지 않기. 잊지 말고 끝까지 지켜보기. #n번방 가해자 신상 공개 요구, #버닝썬 재조명 등 밝혀지지 않은 의혹에 달려 있는 다짐은 사회적 이슈조차 더 자극적이어야 동요하는 현실이 담겨 있다. 끔찍함조차 갱신되어야 눈 깜짝하는 우리의 무신경함이 징그럽다.
사건 발생 2주째, 사건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경찰은 범인을 검거했지만 법원은 “한 사람의 집은 그의 성채인데, 비록 범죄 혐의자라 할지라도 주거의 평온 보호에 예외를 둘 수 없다”는 이유로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피의자는 풀려났고 현재 경찰은 다시 구속영장을 신청한 상태이나 검찰에서 영장을 다시 청구할지, 법원에서 영장을 발부할지 여부는 지켜볼 일이다. 진심으로 반성해서, 초범이라, 심신이 미약하기 때문에 감형해주지 않는다면 형법상 상해죄로 7년 이하의 징역, 10년 이하의 자격정지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것이다. “제발 피해자가 ‘피하지 않고’ 살 수 있게 해주세요.” 피해자 가족 트위터에 올라와 있는 트윗이다. 피해자에게도, 우리에게도 보통의 날은 그렇게 흘러간다.
- 피처 디렉터
- 조소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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