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의 반란
바이러스 포비아 시대에 우리는 안정과 평화를 수호하는 ‘그린 러시’ 신드롬을 갈망한다. 웰니스 생태계에 대세로 떠오른 대마의 반란.
코로나19가 지구를 점령한 이후 우리 여자들의 지갑은 좀처럼 쉽게 열리지 않는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유례없이 호황을 맞은 분야도 있다. 자가 격리 시간을 채운 넷플릭스와 다양한 온라인 쇼핑몰, 건강염려증이 촉발한 웰빙 산업이 활기를 띠는 중이다. 그중 소비량이 급증한 건강 기능 식품 목록 가운데 꽤 당황스러운 단어 하나가 포착됐다. ‘헴프(Hemp)’라 불리는 대마 성분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토록 우울한 나날이 지속되자 집에서 환락 파티라도 벌이는 걸까?
이를 점검하기 위해 ‘그린 러시(Green Rush)’라는 단어부터 언급할 필요가 있다. 대마 산업이 합법화된 지역으로 자금이 몰리는 현상을 뜻하는 신조어를 ‘그린 러시’라고 지칭한다. 전체 마약 거래량의 절반을 차지하는 단속 1순위 대마가 21세기 블루 오션이 됐다는 아이러니! 그 내막에는 기호 식품으로 대마 거래를 허가한 우루과이, 캐나다 기반의 대마 스타트업(무려 3조2,000억원 규모)이 일조했다. 하지만 이를 신드롬급으로 격상시킨 곳은 미국이다. 2018년 12월 연방 정부는 대마의 일부 성분인 ‘헴프 추출물’을 마약류 규제에서 제외하는 파격을 감행했다. 이로써 식음료업계는 물론 헬스, 뷰티 월드에까지 대마가 이슈 메이커로 부상했다. 아,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미국에서 인정한 헴프 추출물은 이른바 마약으로 일컫는 대마, 즉 마리화나와 엄연히 다르다는 점이다. 종류만 해도 수십 가지에 이르는 대마는 THC(테트라하이드로칸나비놀)와 CBD(칸나비디올)라는 공통 성분을 갖고 있다. 환각과 중독을 일으키는 주범인 THC 함량이 높은 대마의 대명사가 ‘마리화나’라면, THC 대신 CBD를 다량 품은 것이 ‘헴프’다(‘마리화나’의 몽환적 발음과 달리 ‘헴프’는 어딘지 모르게 귀엽다).
CBD에 어떤 신묘한 효과가 있길래 다들 주목하는 걸까? ‘트립(Trip)’은 간결한 로고와 미끈한 파스텔 톤 캔으로 밀레니얼의 취향을 저격한 헴프 음료다. ‘집콕’ 시대를 맞아 매출이 무려 420% 급증했다. 이런 기적 같은 성장은 세로토닌 수용체를 활성화해 불안과 우울을 낮추는 CBD 덕분이다. 바이러스 공포에서 해방시키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공황 장애, 강박 장애에서도 빠른 회복을 부른다. 스웨덴에서 정형외과 전문의로 일하던 시절 CBD의 의학적 가능성을 경험하고 대마 알리기에 집중하는 온라인 매체 ‘도사주(Dosage)’를 설립한 줄리 몰트케(Julie Moltke)의 얘기를 들어보자. “스트레스와 불안을 줄이기 위해 CBD를 복용한 환자 75%가 실제 효과를 봤습니다.” 그는 임상 결과를 공개하며 이러한 주장에 힘을 실었다. 그뿐 아니다. 2018년 런던 퀸메리대학 연구진은 췌장암에 걸린 실험용 쥐에게 CBD를 주입하니 생존 기간이 세 배 늘었다고 발표했다. WHO 역시 CBD의 치료적 용도를 옹호하는 분위기다. 마약으로서 대마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지만, CBD의 항염, 항스트레스, 통증 완화를 아우르는 기특한 기능을 활용해 우울증과 천식, 녹내장 등의 치료제로 검증을 권고했다.
웰니스 라이프를 빠르게 답습하는 뷰티 생태계는 새롭고 흥미롭기까지 한 헴프를 지체 없이 받아들였다. 헴프 줄기에서 추출해 항염, 항산화 효과가 뛰어난 CBD를 주성분으로 내세운 로드 존스(Lord Jones), 카누카(Cannuka) 등의 브랜드가 여드름과 트러블 개선 스킨케어 제품으로 세포라 한쪽을 차지했다. 문제의 원인이 되는 세포만 타깃으로 실력을 발휘하는 것도 헴프만의 장점이다. 클로리스(Kloris)는 페이스 오일에서 시작해 모발에도 쓸 수 있는 고체 비누와 입욕제, 손 소독제까지 알찬 라인업을 완성하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헴프 뷰티를 실천한다.
그렇다면 한반도의 상황은 어떨까? 지난해 말 정부는 마약류에 관한 법령을 개정해 난치성 질환에 효과를 보이는 의료용 대마를 허용했다. 하지만 치료 목적이 아니라면 사용은 고사하고 소지하는 것조차 여전히 불법이다. 이 상황에서 K-뷰티가 대안으로 찾아낸 보물이 헴프 시드다. “헴프 씨앗에서 얻은 원료인 헴프 시드 추출물은 법에 저촉되지 않는 안전한 성분입니다.” 지난겨울 론칭한 헴프 시드 스킨케어 브랜드 ‘GHMP 굿햄프’ 마케팅팀의 설명이다. “헴프 시드 오일은 식물성 원료로는 특별하게 체내에서 생성하지 못하는 필수영양소인 오메가 6와 3, 아미노산, 무기질 등을 지니고 있어요. 대마의 기본 소양인 염증 개선 기능까지 더해 민감성, 아토피성 피부도 걱정 없이 바를 수 있는 영양 보습 성분입니다.” GHMP 굿햄프 ‘데일리 햄프케어 앰플’을 비롯해 아비브 ‘햄프 시드 에센스 엑티베이팅 펌프’, CNP ‘팜슈티컬 너리싱 세럼 위드 햄프 시드’, 보레고 ‘100% 퓨어 햄프 시드 오일 by 닥터올가’, 멜릭서 ‘비건 릴리프 페이셜 크림’, 유랑 ‘촉촉 햄프 시드 비누’, 젠틀 프로젝트 ‘햄프 시드 아스트린젠트 토너 패드’, 베이지크 ‘리플레니싱 바디 오일’, 크나이프 ‘퓨어 블리스 배스솔트’ 등등. 한국에서 유통되는 대마 화장품 대부분이 진정과 보습에 초점을 맞춘 점도 이 때문이다. 클렌저, 앰풀, 크림을 막론하고 오일 성분이 들어갔는지 의심될 만큼 가벼운 제형 또한 특징이다. 예민한 피부에 자극을 줄이기 위한 세심함이 기특하다. 이러한 흐름에 따라 LG생활건강이 곧 선보이는 클린 뷰티 브랜드 ‘햄파맥스’의 주원료 역시 냉압착 방식으로 성분 분해를 최소화한 헴프 시드 추출물이다.
이러한 국내 헴프 시드 부흥을 위해 농림축산식품부는 원료의 안정적 공급과 위생 관리에 힘을 보태기로 했다. 경북 안동을 중심으로 ‘헴프 기반 바이오산업 규제 자유특구’를 설정, 대마 식품과 화장품 개발을 조력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하여 고작 52가구에 불과하던 국내 대마 재배 농가에도 다채로운 수익 창출의 활로를 열어줄 계획이다.
2010년대 후반 슈퍼푸드에 등극하고 뷰티 생태계에도 성공적으로 안착한 헴프 시드와 달리 급성장 곡선을 타고 인기를 얻은 CBD는 몇 가지 잡음이 일었다. 먼저 과대광고의 범람이다. 3년 전 영국 피토비스타(PhytoVista) 연구소는 CBD 화장품의 민낯을 고발했다. 30개 이상의 대마 스킨케어 제품을 살핀 결과 16개 제품이 공시한 용량보다 미미한 CBD 성분을 포함하고 있었고 심지어 50%에도 미치지 못한 제품이 절반이었다. 원료 자체에 대한 검증도 필요하다. 대마의 줄기와 잎에서 뽑아내는 CBD 원료를 얼마나 깨끗하게 정제했는지 제품에 동봉된 분석 증명서를 통해 확인해야 한다. 분리 추출 방식이 아닌 대마 전체를 응축한 오일이어야만, 최상의 효과를 누릴 수 있다. 시장조사 기관 더 브라이트 그룹은 2022년까지 헴프 시장 규모가 220억 달러, 한화 26조5,900억원에 이를 거라고 전망한다. 아름다움을 위해 우리 여자들이 또 하나의 금기를 깨기 시작했다.
- 뷰티 에디터
- 이주현
- 포토그래퍼
- 이신구
- 로케이션
- 스피크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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