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은이, 김숙, 박나래, 장도연의 ‘보그’ 서부극
송은이, 김숙, 박나래, 장도연이 <보그> 서부극의 개척자가 되기 위해 모였다. 이들은 코미디의 개척자다. <밥블레스유 2>만 봐도 그렇다. 여성 코미디언이 주도적으로 끌어가는 극, 서로를 음해하지 않는 품위, 함부로 조언하는 어른이 아니라 편이 되어주는 언니들에게 전한다. “Vogue Bless You!”
보고 있으면 흐뭇해지는 풍경이 있다. 마스크를 쓰지 않던 시절의 뛰노는 아이들, 눈사람이 두른 목도리, 가뭄 중 소나기에 머리를 감은 농작물. 그리고 <밥블레스유 2>에서 송은이, 김숙, 박나래, 장도연이 식사하는 장면도 추가한다. 비혼 여성 코미디언들이 ‘이대로도 괜찮아’라며 밥 먹는 모습을 몇 번이나 봤던가. 슈퍼맨이 되어 아이를 돌보지 않아도 괜찮고, 결혼해서 남편과 동상이몽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는 듯하다. 박나래가 <밥블레스유 2>에 합류한 이유도, 함께하는 선후배뿐 아니라 보기 드문 풍경에 서고 싶어서다.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여자들이 바쁜 일상에도 짬을 내어 밥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공유한다는 컨셉이 좋았어요. 혼자 사는 사람 앞에는 꼭 외롭다는 말을 붙이는데요. 절대 그렇지 않고 우리 모두 건강하게 잘 살잖아요? 사실 혼자도 아니죠. 동료들과 서로 도우면서 살아가니까요. 물론 결혼해도 좋지만 그건 필수가 아니라 선택이죠. 우린 삶의 여러 방식 중 하나를 선택할 권리가 있어요.”
한때 (지금도 여전히) 육아, 부부, 남성 크루 등을 소재로 한 관찰 예능 프로그램이 대세가 되면서 김숙은 방송 일이 줄었다. “자녀나 시부모님 이야기를 해야 방송이 됐어요. 혼자 사는 제 얘기를 할 데가 없더라고요. 궁금해하지도 않고. 그런데 한 5~6년 전부터 귀 기울이더군요. 시대가 달라지고 있죠.” 자기 자랑 하는 것 같아 가급적 인터뷰를 사양하는 김숙은 유일하게 두 번 <보그>와 함께했다. 그 첫 인터뷰는 2016년 ‘가모장’ 캐릭터로 인기를 누리던 때다. “남자 목소리가 어딜 담장을 넘어!”라고 호통치며 기울어진 운동장을 전복시킨 개그에 우린 열광했다. “이전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죠.”
<밥블레스유 2>는 ‘인생 언니’가 중요 키워드다. 매회 인생 언니(게스트)가 출연해 함께 식사하며 이야기를 나눈다. 여기서 언니는 나이 차가 아니라 신분에 따른 호칭이다. 박나래는 인생의 굴곡에서 철학과 노하우를 찾은 사람 모두 ‘언니’라고 말한다. “마마무의 화사처럼요! 나이는 어려도 멋져서 종종 언니라고 부른다니까요. 어느 순간부터 사람을 만날 때 나이를 물어보지 않아요. 여자 남자를 떠나 나이가 중요하지 않은 시대니까. 어떤 인물이냐가 중요하죠.” 장도연도 동감한다. “저 역시 나이를 묻는 것이 실례라고 생각해요. 하나라도 배우고 싶고 부러운 게 있다면 언니로 여겨요.”
김숙에게 언니의 판단 기준은 하나다. 내 마음을 움직이는 한마디를 하는 사람이다. “은근히 헛소리하는 언니들 많다니까요. 친언니라도 마음 안 맞기 십상이고. 삶의 방향성을 약간은 제시해줄 수 있는 인물이 언니예요.” 언니의 중요한 자질은 ‘자랑하지 말 것’. “우린 성공 스토리에 지쳤잖아요? 그런 얘기보다 일상의 고민이 더 많지 않나요? 어떻게 성공할지 같은 질문보다 내일 뭐 할지, 뭐 먹을지, 상사를 어떻게 할지 등이 궁금하죠. 인생 언니라면 그런 실질적인 고민을 도와야죠.” 송은이 역시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구는 어른을 기피한다. “<밥블레스유 2>의 첫 출연자 문소리 씨도 충조평판(충고·조언·평가·판단) 하지 말라고 했죠. 순간순간 의미 없이 지적하는 어른들이 많아요. 경험이 약간 더 있을 뿐인데 답을 다 아는 것처럼 말하죠. 전통적으로 어른이라면 답을 알고 제시해야 한다고 배웠기 때문이겠죠. 하지만 ‘네가 가는 모든 길이 그렇게 나쁘지 않다’고 말해주는 어른을 만나고 싶어요. <밥블레스유 2>도 ‘우리처럼 살아라’가 아니라 ‘우리처럼 살아도 좋지 않나’ 정도였으면 좋겠어요.” 송은이 역시 후배들이 상담을 요청해오면 별말 없이 밥을 사주며 이야기를 듣는다. 자신 또한 고민을 상담할 때 얘기하는 과정에서 정리될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송은이는 누가 뭐라고 하든 여성 코미디언의 인생 언니다. 전에도 좋은 선배였겠지만 방송국의 발주에서 독립해 후배들의 재능을 보여줄 새로운 돗자리를 펴왔으니까. 김신영이 “선배, 저 하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요”라고 뗀 운이 몇 달 뒤 현실화된 것이 셀렙파이브고, 해방둥이 다비 이모라는 ‘부캐’다. “여성 코미디언끼린 신뢰가 두터워 서로의 말에 귀 기울이죠. 특히 김신영 씨 머리에서 나오는 뚱딴지 같은 아이디어는 너무 귀해서 당연히 ‘쿵짝’을 맞춰야죠. 상업적 성공 여부를 떠나 동생들에게 힘이 된다면 하려고 해요. 혼자보다 같이 해야 성취감도 크고요.” 송은이와 후배들의 ‘쿵짝’은 계속된다. “창작자로서 새로운 것을 계속 만들어야죠. 숙제보다 즐거운 행위이고 싶어요. ‘바보들은 계획만 한다’는 말을 좋아해요. 계획은 백 개라도 세우지만 하나라도 실천해야 좋은지 나쁜지 알잖아요. 특히 후배들을 위해 길을 닦아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을 느껴요.” 실천도 좋지만 실패해 내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 두렵지 않은지 묻자 송은이는 “전혀”라고 말한다. “수업료죠. 돈이든 시간이든 에너지든 뭐든 안 하는 것보다 하는 게 나아요.”
박나래는 그런 선배들이 있어 든든하다. “송은이, 김숙 선배 모두 동대문의 풍물 시장처럼 잡다한 지식과 어마어마한 인맥, 경험에서 나오는 노하우를 갖고 계세요. 같은 자리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의지가 돼요. 게다가 잘 챙겨줘요. 생각나서 샀다면서 집 주소를 불러달라세요. 그런 남자 친구는 한 명도 없었거든요. 제가 뭘 보내면 보냈죠. 후배들이 따르는 선배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요.”
장도연 역시 <밥블레스유 2> 촬영을 ‘꽃받침 효과’처럼 멋진 사람들 옆이라 그 멋이 스미는 기분이라고 표현한다. “엄마와 유치원 때 찍은 사진을 보고 놀랐어요. 그때의 엄마는 저보다 어렸는데, 어른의 모습이더라고요. 솔직히 20대에 37세의 나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정신적으로도 여유로울 줄 알았어요. 후배에게 조언하는 멋진 선배이고요. 하지만 여전히 불안하고 철이 없어요. 일이 조금 많아진 것 외에는 갓 20대와 크게 다르지 않아요. 나이마다 새로운 고민이 자리 잡죠.” 장도연이 도움을 받은 인생 언니의 어록은 범죄 심리학자 이수정 교수의 ‘인간에겐 희망이 없다’. “처음에는 너무 정 없어 보였는데 해석하기 나름이더라고요. 사회생활에서 이해가 가지 않는 순간이 오는데, 이수정 교수님의 말씀을 생각하며 넘어가려고요. 이런 사람, 저런 사람도 있지 하면서 마음을 편히 먹기로 했어요.”
김숙은 <밥블레스유 2> 출연진 중에서 특히 김연경, 박세리처럼 운동에 일가를 이룬 선수에게 존경을 표했다. “그들에겐 하나의 특징이 있어요. 본인 의견이나 이야기를 정확하게 해요. 예를 들어 연경이는 ‘맛있긴 하지만 굳이 레시피까지 받을 필요가 있을까요?’라고 말해요. 저만 해도 방송에 찌들어 불편한 말을 못하거든요. 그나마 또래 연예인 중엔 잘하는 편이지만, 얽힌 사람이나 관련 업체가 생각나 말이 나오기 전에 걸려요. 이전엔 상 엎었을 일도 상당히 돌려 얘기하게 됐죠.” 그래서 김숙은 유튜브를 병행한다. 공구를 사서 직접 집을 짓고(결국 입주는 못했지만), 혼자 웬 8인용이란 핀잔을 들어도 꿋꿋이 대형 텐트를 친다. 김숙은 정말 저런 사람일 거 같다. “오늘도 ‘퇴근박’합니다. 텐트를 아예 쳐놓고 거기서 출퇴근하죠. 유튜브는 제가 좋아하는 것만 하려고요. 괜히 맞지 않는 거 하다가 막 말하느니 하고 싶은 거 하렵니다.”
송은이는 김윤아 편을 가장 좋아한다. “영혼과 몸을 갈아 넣어 작품을 만든다는 김윤아 씨의 말이 기억에 남아요. 그가 걸어온 행보 또한 훌륭하고요. 기회가 된다면 이정은 배우를 초대하고 싶어요. 그분의 연기도 인상적이지만 토크쇼 <대화의 희열>을 보고 더 팬 됐어요. 본인이 특별하지 않다면서도 어려운 시절에 진 신세를 잊지 않고 약속을 지키는 모습은 겸손하면서도 묵직했죠.”
이 프로그램의 또 다른 특징은 ‘품위’다. 특정 코미디를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한 예능 프로그램 정도는 출연자들이 기를 쓰고 덤비고 깎아내리지 않길 바라니까. <밥블레스유 2>에는 외모를 평가하거나 누군가를 하대해 웃음을 유발하지 않고, 억지 게임이나 벌칙 음료가 없으며 잘생긴 누군가를 데려다놓고 억지로 ‘썸’을 만들지 않는다. 서로의 편이 되어주며 ‘웃긴다’. 송은이는 이처럼 다양한 프로그램이 생길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는 데뷔 후 정통 코미디는 물론 뛰어난 진행 실력으로 1990년대 쇼 프로그램 MC를 맡아왔다. 하지만 2000년대 버라이어티로 넘어오면서 대본을 든 MC보다 말썽 피우는 ‘쎈’ 캐릭터의 인기가 높았다. 송은이는 당시 일이 ‘제로’가 되었다고 회상한다. 이제 말썽쟁이들에 지친 시청자들이 송은이의 품위를 소환하고 있다.
KBS1 <다큐 인사이트>는 1993년 데뷔한 송은이부터 2006년 박나래까지를 다룬 ‘개그우먼’을 방송했다. 그곳에서 박나래는 사랑받지 못한 신인 시절을 회상한다. 사람들이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박나래에게 동료 김지민은 이렇게 얘기한다. “난 지금의 네 모습이 좋으니 지금처럼 살아. 언젠가 시대가 받아줄 거야.” 시대는 변했다. 아니, 김숙의 말대로다. “시대가 변한 것이 아니고 그들이 시대를 바꿨다.”
박나래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박나래의 농염주의보>에서 욕망과 몸을 과감히 드러낸다. 이전엔 불가능하던 쇼다. 박나래와 신인 시절부터 함께해온 김상미 PD는 초기 ‘개그우먼’들의 풍경을 이렇게 묘사한다. 양념처럼 치고 빠지는 역할, 이런저런 코너에 불려 다니며 받쳐주는 역할, 외모 비하로 소비되는 역할. 여성 코미디언이 하나의 캐릭터로 무대에 등장해 하고 싶은 개그를 하기까지 꽤 오래 걸렸다.
그 서막 중 하나가 <개그콘서트>에서 박나래, 장도연, 허안나가 함께한 ‘패션 넘버 5’다. 매회 하이패션을 하이 개그로 소화한 코너가 히트 칠 무렵 2011년에 <보그>는 세 명의 화보를 진행했다. 당시 장도연은 이렇게 말했다. “아, 올 것이 왔구나. 우리가 추구하는 것의 종착역.” 그것은 종착역이 아니었다.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삶을 주체적으로 사는 언니들로서 그들이 보여줄 것은 많고, 또 한 번 <보그>와 만날 거다. <보그>는 여성 코미디언들의 허들 넘기를 응원해왔으니까.
박나래의 인생관 중 하나는 이것이다. “인생에서 되지 않는 것은 없다. 뭐든 될 수 있으니까 뭐든지 해보자. 저는 내일이 없는 것처럼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그리고 나다웠으면 좋겠어요. 만약 제가 아닌 모습으로 사랑받았다면 그도 감사할 일이지만 스트레스를 받았을 거예요. 우리, 남에게 예의는 차리되 눈치는 보지 말아요. 물론 시대가 조금 더 변해야겠죠. 하지만 우리가 편 들어줄 테니 하고 싶은 거 하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그리고 인생은 길고 할 것도 많고 만날 남자, 맛있는 음식, 놀 거리는 참 많으니까 즐기고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밥블레스유 2>가 이들에게 남긴 것은 ‘연대의 확인’이다. 연대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더라도, 척박한 위치의 여성 선후배와 동료가 있었기에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내용이다. 박나래가 MBC 방송연예대상 시상에서 대상을 수상했을 때 눈물을 흘린 연유를 김숙은 이렇게 말했다. “이 상은 박나래 개인이 아니라 우리가 받는 거 같았어요.” 박나래가 가장 싫어하는 말은 “여자의 적은 여자”다. “저는 <밥블레스유>의 시즌이 이어졌으면 좋겠어요. 저희가 아니라 다단계처럼 백 명의 여성 코미디언들이 차례로 출연하는 거죠. 이야기 소재는 다르겠지만 그 풍경을 그저 계속 보고 싶어요.” 자, 서부 개척 시대의 카우보이보다 정당한 방법으로 여성의 지위를 개척할 그들에게 또 한 번 Bless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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