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탁자 외모를 가꾸고, 맵시를 다듬는 화장대의 사전적, 물질적 개념은 사라진 지 오래. 때로는 사무실 책상이, 택시 안의 내 두 무릎이, 운동 후 옷을 갈아입는 드레스 룸 한쪽, 화장실 세면대도 모두 나의 화장대다. 하루를 통틀어 ‘진짜’ 화장대 앞에 앉는 시간은 단 5분. 침대와 옷장 사이 자리한 나의 화장대는 매일 아침 식탁으로 둔갑한다. ‘낮져밤이’ 올빼미 인간인 내가 실눈으로 출근 준비를 몰아칠 때, 엄마는 화장품과 잡동사니가 수북이 쌓여 본분을 잊어버린 서른두 살 철부지 딸의 화장대 위에 정갈하게 깎은 과일과 달걀 프라이, 물 한 잔을 내준다. 옷장을 열어 옷을 고르고, 한 조각 남은 사과를 입에 넣은 채 민낯으로 부랴부랴 떠나는 출근길.
강남구 언주로 726 두산빌딩 9층에 자리한 <보그> 사무실이 목적지다. ‘칼출근’과 동시에 내 자리는 곧 화장대로 변모한다. 먼저, 모니터 옆에 놓인 손 세정제로 코로나 바이러스의 위협을 날린다. 매달 출시하는 메이크업 신상과 최첨단 기술을 탑재한 스킨케어 라인, 패션 하우스의 ‘멋쁜’ 향수, 각종 보도 자료와 책, 시안으로 마구 뒤엉킨 책상. 그 속에서 자외선 차단제와 파운데이션, 아이브로우, 마스카라를 꺼내 바른다. 그다음은 오늘 기분에 어울리는 립스틱 컬러를 선별할 차례.
“‘꼼지락꼼지락’ 분주한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출근했구나?” 편집장님의 장난스러운 한마디. 도라에몽의 ‘요술 주머니’처럼 없는 게 없는 마법의 화장대를 하루 내내 꼼지락거리는 탓에 내 별명은 ‘프로 사부작러’. 미니 반짇고리, 숙취 해소제를 비롯한 각종 알약, 손톱깎이, 족집게, 마사지 볼부터 따끈따끈한 신상 향초까지, 차고 넘치는 물건만큼 예뻐지고 싶은 욕망도 넘쳐흐른다. 동료 에디터는 퇴사하게 되면 이 서랍을 통째로 하사해달라는 우스갯소리를 건넬 정도다. 우중충한 잿빛 교복과 한 몸이던 10대 시절, 가슴팍 높이의 책장에 탁상 거울을 올리면 그것이 곧 화장대였다. 유튜브로 화장을 배우고, 친구와 새로 구입한 신상 틴트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는 요즘 Z세대와 달리, 올려진 거라곤 손때 묻은 선크림과 로션, 여드름 연고, 고데기뿐이었다. 그러나 한 뼘 남짓한 이 공간은 이유 없는 반항심으로 똘똘 뭉친 사춘기 소녀의 유일한 탈출구였다.
클렌징 크림(엄마들이 꼭 ‘크렌싱 크림’이라 말하는!), 길고 투명한 병에 담긴 토너, 얼핏 봐도 비싸 보이는 세럼, 자외선 차단제, 아이 크림, 영양 크림 그리고 형형색색의 아이섀도 팔레트와 립스틱이 즐비한 엄마의 화장대는 동경의 대상 그 자체였고, 흙이 없는 놀이터였다. 무엇보다 포근한 살냄새의 엄마를 상징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응답하라 1988> 중 덕선이가 푸른 빛깔의 아이섀도를 눈두덩 가득 바르던 모습처럼 엄마의 화장품은 매일 봐도 탐났으니까.
아시다시피 화장대는 영어로 ‘Vanity Table’이다. 발음조차 멋스러운 ‘Vanity’는 ‘허영심, 자만심, 헛됨, 욕망’을 의미한다. 화장대가 욕망의 탁자로 명명된 까닭에는 아름다움을 갈망하는 인간의 본질적 욕망이 한몫한다. 앙증맞은 서랍이 달린 상자 내부에 거울을 부착한 조선 시대 여인들이 쓰던 ‘경대’의 기원에서도 그 이유는 목격된다. 앉은 자리에서 약 45도 비스듬히 세워 사용하는 경대는 주요 혼수 품목 중 하나. 주로 여성을 위한 용구였지만, 선비들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격식 중 하나인 ‘용모단정 의관정제(용모는 단정히 하고, 차림새는 가지런하게 하라)’로 경대는 남녀 공용으로 퍼져나갔으며 왕실, 서민에게도 인기 만점이었다.
미국 드라마 <킬링 이브>에서 첩보 요원 이브는 열과 성을 다해 뒤쫓던 사이코패스 킬러 빌라넬의 보금자리를 찾아낸다. 애증이라는 감정의 경계에서 이브는 고급스러운 취향의 화장대를 발견하곤 화장대 위 모든 물건을 때려 부수며 복잡한 심경을 내비친다. 소중한 공간의 일부를 망가뜨리려는 단순한 의도였을까? 혹은 허영을 깨뜨리고 상대방의 자만심을 무너뜨리려는 행위는 아니었을까? 영화 <위험한 관계>에서 글렌 클로스, 남편의 외도를 알게 된 김수현 선생의 드라마 <모래성>의 김혜자 여사에 의해서도 ‘화장대 부수기’라는 클리셰는 세속적 욕망과 아름다움을 향한 여성의 자유를 무너뜨린다.
나 같은 뷰티 에디터의 화장대는 늘 신상과 베스트셀러로 가득 차 있고, 이로써 아름다움에 대한 갈망은 불타오른다. 립스틱 한 자루를 위한 단돈 3만원의 소비는 내일의 아름다움을 기꺼이 보장한다. 남자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우리 여자들의 화장대가 차고 넘치는 이유다. — 우주연
LADY FOREVER 더 히스토리 오브 후 ‘공진향:미 럭셔리 립글로스’ #15 로즈, ‘공진향:미 벨벳 립 루즈’ #25 로지코랄, #45 로얄레드, ‘골드 안티에이징 마사지 롤러’, 설화수 ‘자정 브라이트닝 쿠션 스프링 컬렉션’, ‘자음수’, ‘자음유액’, ‘퍼펙팅 파우더’,
수려한 ‘천삼 선유 수액’, ‘천삼 선유 크림’,
라프레리 ‘화이트 캐비아 아이 엑스트라오디네어’, 끌레드뽀 보떼 ‘UV 프로텍티브 크림 SPF50+ PA++++’,
LG 프라엘 ‘플러스 더마 LED 마스크’.
ON & OFF SK-Ⅱ ‘맨 페이셜 트리트먼트 에센스’, ‘R.N.A 파워 에어리 크림’, 지방시 ‘미스터 매티파잉 스틱’, 라네즈 ‘옴므 블루 에너지 에센스 인 로션’, 샤넬 ‘보이 드 샤넬 포티파잉 젤 모이스처라이저’, ‘보이 드 샤넬 3-IN-1 아이 펜슬’ #614 브라운,
시슬리 ‘시슬리움’, 디오디너리 ‘멀티-펩타이드 세럼 포 헤어 덴시티’, 겐조 ‘겐조키 벨르 드 주르 세이크리드 로투스 아이 컨투어’,
유리아쥬 ‘배리어덤 시카 레브르’, 비오템 ‘옴므 UV 디펜스 시티 자외선 차단제 SPF50+ PA+++’,
에디션 드 퍼퓸 프레데릭 말 ‘엉 빠썽’, 아쿠아 디 파르마 ‘시그니처 레더’, ‘바비에레 쉐이빙 브러쉬’, 톰 포드 뷰티 ‘화이트 스웨이드’,
트리플블랙 ‘X5’, 르 라보 ‘맨즈 그루밍 컬렉션 데오드란트’. 리넨 화이트 셔츠는 브룩스 브라더스(Brooks Brothers),
모노그램 파우치와 가죽 카드 홀더는 루이 비통(Louis Vuitton), 수트는 맨온더분(Man On The Boon),
타이는 에스.티. 듀퐁 클래식(S.T. Dupont Classics), 시계는 페라가모 타임피스 by 갤러리어클락(Ferragamo Timepieces by
Gallery O’Clock), 타이 클립은 에스.티. 듀퐁 파리(S.T. Dupont Paris).
ME TIME 록시땅 ‘2020 버베나 그라니따 바디 젤’, 르 라보 ‘바디 로션’ 히노키, ‘스크럽 샴푸’ 바질, ‘퍼퓸 오일’ 베이19, ‘샤워 오일’ 만다린, 클라랑스 ‘바디 파트너’, 이솝 ‘제라늄 리프 바디 밤’, 바이레도 ‘바디 로션’ 라 튤립,
‘바디 워시’ 모하비 고스트, ‘바디 워시’ 라 튤립, 산타 마리아 노벨라 ‘올리오 코스메티코’, 불리 1803 ‘윌 앙띠끄 바디 오일’ 키소 유자,
그라운드플랜 ‘시크릿 클렌저 포 우먼’, 수향 ‘캔들’ 히노키, 딥티크 ‘캔들’ 로즈, 베이, 빈바디 ‘커피스크럽’ 마누카허니,
필보이드 ‘슬릭 바디 오일 스크럽’ 페르소프, 르네휘네르 ‘트리파직 샴푸’, ‘압솔뤼 케라틴 리페어링 마스크’,
아윤채 ‘컴플리트 리뉴 더 카멜리아 오일 샴푸’, 닥터그루트 ‘힘없는 모발용 트리트먼트’, 로레알파리 ‘토탈리페어5 인스턴트 미라클
헤어팩’, 헤어 리추얼 바이 시슬리 ‘리바이탈라이징 포티파잉 세럼’, 페디베어 ‘프레시 핏 풋 필링’,
퍼 by 세포라 ‘퍼 오일’, 알롱 ‘셀프 하드 왁싱키트’, 러쉬 ‘배쓰 밤’ 인터갈락틱, 가디스, 샤넬 ‘N°5 로 인-샤워 젤’,
질레트 ‘비너스 스월’, 하요우 by 네타포르테 ‘뷰티 리스토어러 라이트’. LOCATION 소설 호텔
관능의 방 “사실 그렇게 많은 화장품이 필요하지 않더라.” 10년간의 뷰티 에디터 생활을 청산한 선배를 만난 날이었다. 당시 나는 2년 차 기자였고 “하늘 아래 같은 레드 립스틱 없다”는 우스갯소리를 증명이나 하듯 신상 화장품 수집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바르고 또 바르고’를 반복한 지금에야 그 선배의 말을 통감한다. 잘 고른 수분 크림과 자외선 차단제, 한두 가지 메이크업 제품만 있다면 ‘화장발’은 아니더라도 단정하게 꾸밀 순 있으니까.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침대와 작은 책상, 옷장을 제외하면, 수년째 내 방은 온통 화장품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러한 실상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심지어 꽤 깨끗하다. 하지만 말끔한 몰딩의 상아색 수납장 여러 개가 화장품으로 가득 차 있고, 수십 병의 향수가 A자형 팬트리에 전시되어 있으며(참새가 방앗간을 찾듯 밤낮으로 이곳에 머물며 심신의 안정을 찾아줄 향을 고르는 즐거움이란!), 취침 시간 애용하는 캔들과 아로마 오일은 침대 옆 스툴만큼 낮은 비스포크 타입 철제 박스에 모여 있다. 누워서 손에 닿는 침대 하단 서랍을 열면 롤온 아이 세럼과 립밤, 트러블을 잠재우는 티트리 오일 등 화장대까지 가기 귀찮다는 이유로 포기하는 제품을 단숨에 쟁취할 수 있다.
유난스럽다고? 17세기 중반 영국 귀부인들은 자신만의 ‘화장방(Toilette)’을 소유했다. 르네상스의 중심이 이탈리아에서 프랑스로 넘어오며, 돈과 명예를 거머쥔 영국 명문가의 안주인들은 프랑스 왕실의 아침 접견 풍경을 답습하고자 침실 안쪽으로 분리된 화장방을 마련한 것이다. 드레스 룸과 차이라면 이곳에서 방문객을 맞이하고(그중 남자가 절대다수였다) 그들 앞에서 아침에 일어나 몸을 단장하는 과정을 몇 시간에 걸쳐 뽐냈다는 점이다. 미모는 물론 화려한 인테리어와 장신구로 재력을 과시하고 자연스럽게 무장해제되는 ‘남심’을 저격해 식민 전쟁이 극으로 치닫던 시기, 심지어 정치색 짙은 대화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치마를 들춰 구두를 신고 은근한 노출이 허용되던 이 관능의 방은 당대 예술가의 영감을 자극하기도 했다. 화가 윌리엄 호가스(William Hogarth) ‘The Toilette’, 미셸 가르니에(Michel Garnier) ‘Elégante à Sa Toilette’, 장-프레데리크 샬(Jean-Frédéric Schall) ‘L’Amour Frivole’ 등 작품에서 그 시대 화장방 풍경을 엿볼 수 있다. 그림에 표현된 인물들의 과장된 표정과 몸짓을 살피면 다소 가벼운 사교의 장이라 넘겨짚을 수 있지만, 주인 혼자 남은 화장방은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남편에게만 허용되던 개인 공간, 응접실이나 정원이 아니라 벽으로 둘러싸여 깊은 사색에 빠질 수 있는 고독의 방이 그 시절 여인들에게 처음 생긴 것이었다.
“너무 두껍게 칠하지 말고, 인상을 좌우하는 눈썹도 신경 쓰고.” 스무 해 겨울, 엄마는 나의 뷰티 파우치에 슈에무라 ‘하드포뮬라’와 샤넬 립스틱을 슬쩍 넣어주셨다. 늘 단정한 엄마의 모습에서 단장의 필요성을 자각했다. 뷰티 에디터라는 직업 특성상 숱한 화장품을 선물해도 엄마의 화장대에는 여전히 꼭 필요한 제품만 조신하게 올라와 있다.
20년 뒤 중년의 나라면, 엄마와 닮은꼴 화장대 앞에 앉아 있지 않을까? 하지만 서른한 살의 나는 영국 사교계 미인들이 자신의 허영과 게으름을 쏟아내며 일상을 보내던 화장방을 맘껏 누릴 생각이다. <18세기의 방> 공저자 이시연은 이렇게 말하지 않았나. “특정 공간 그 자체가 한 시대의 문학적 상상력을 사로잡은 예는 18세기 영국 귀부인의 ‘화장방’이 유일하다”고. — 이주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