뷰티 아이템

LE VOYAGE

2020.08.24

LE VOYAGE

경험론자, 불완전함의 미학, 장인 정신… 어느 뷰티 생태계 혁명가의 이유 있는 일탈.

서울에서 영감을 얻은 르 라보 ‘시트롱 28’.

깨진 타일 뒤로 드러난 거친 콘크리트, 녹슨 철제 서랍장, 주름진 가죽 소파, 마모된 우드 테이블, 빛바랜 싱크대. ‘르 라보’ 매장(공식 명칭은 ‘랩(LABS)’)은 어느 곳이나 한결같은 분위기다. 그 뚜렷한 정체성의 발현지는 뉴욕 놀리타(Nolita). 한 세대를 넘어 자리를 지키는 식당과 현대적으로 단장한 상점이 공존하는 오묘한 거리에 르 라보 1호점이 있다. 글로벌 화장품 회사에서 근무하다 독립한 두 남자에게 뉴욕 한복판에서 이상과 예산이 맞아떨어지는 공간을 찾는다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었을 것이다. 공동 창업자 파브리스 페노(Fabrice Penot)는 자신이 거주하던 놀리타 골목 한쪽에 작은 매장 겸 사무실을 얻었다. 지금은 ‘르 라보 스타일’로 정의하는 노출 콘크리트와 오래된 주석 타일 인테리어는 그곳을 매장으로 꾸미기 위해 철거 작업을 하던 중 발견한 것으로 한눈에 매료된 오래된 건물의 훈장이나 마찬가지였다.

우연히 마주친 운명은 수많은 고민의 산물이다. “어떤 일을 시작할 때 ‘왜’라는 명분을 찾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만큼 어렵죠. 의미와 목적이 있는 일, 감성에 부합하는 일, 남들과 다른 일을 하고 싶었어요. 이를 구체화하는 데 1년이 걸렸습니다.” 파브리스 페노와 함께 르 라보를 세운 에디 로시(Eddie Roschi)는 거대 향수 회사에서 일하던 시절이 행복하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숫자, 즉 돈으로 움직이는 화장품 회사의 구성원으로서 향수를 허영과 가식의 결정체로 양산하는 일에 가치를 매기는 것은 무의미하게 여겨졌다는 것이다. 이후 에디와 파브리스가 내린 결론은 명확했다. 향은 일상 속 신선한 경험이자 아름다운 감각의 체험으로 그 본분을 다해야 한다는 사실. 2006년, 르 라보가 탄생한 순간이다.

“우리는 설명이 예술을 망가뜨린다고 믿는다(We believe that explanation kills art).” 론칭 초기, 파브리스와 에디는 르 라보 매니페스토(20세기 들어 유럽에서 일어난 새로운 문화 예술 운동은 그 정신과 의도를 글로 천명했는데, 르 라보가 이를 답습했다)에 이런 말을 남겼다. 그들의 다짐대로 르 라보의 향수는 그럴싸한 광고 문구나 비주얼로 포장하지 않는다. 이 청년들은 향수를 기획하며 불필요한 미사여구 대신 향의 본질에 집중한다. 심지어 제품명조차 핵심 향조와 전체 원료 가짓수의 조합(대표작인 ‘상탈 33’은 주원료인 자작나무를 뜻하는 프랑스어 ‘Santal’과 33개 향료 구성을 의미한다). “향수와 인간이 조우하는 찰나, 둘 사이에 향을 제외한 어느 것도 침범하지 않길 바랍니다. 그 순수한 감정에서 향의 의미가 정립되기 때문이죠.” 에디 로시의 의도는 향수 라벨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향의 제목이 적힌 라벨에 소유주가 원하는 문구를 각인하는 과정을 끝으로 향수가 완성되는 것이다.

이처럼 르 라보는 철저히 경험론에 입각한다. 랩은 이를 현실화한 공간이다. 직접 향기를 맡고, 만지고, 발라볼 수 있는 제품이 있고 곳곳에 브랜드 이념이 깃든 문구가 적혀 있으며 그곳을 지키는 직원, 소울(Soul)은 고객과 나누는 대화에 거침이 없다. 또 향수 제조실을 보유하고 있어 주문 즉시 알코올과 농축 오일을 배합한다.

“지나치게 완벽하면 지루하죠.” 에디는 르 라보의 향과 패키지, 매장에 이르기까지 불완전한 가운데 아름다움의 가치를 믿는 일본의 ‘와비사비(Wabi-Sabi)’ 철학을 전파한다. 이는 효율성과 불량률 0%를 목표로 하는 공장식 대량생산 시스템을 버리고 향수에 직접 라벨을 붙이거나 캔들 용기에 왁스를 붓는 핸드메이드 방식에 대한 존경의 증표로 언급되곤 한다.

르 라보 ‘시티 익스클루시브’ 라인은 일상에서 벗어나 여행을 주제로 한 컬렉션으로 9월 한 달간 해당 도시에서만 구입할 수 있다. 8월부터 1.5ml 샘플을 사전 판매하고, 전 세계 르 라보 매장에서 언제든 리필 가능하다. 뉴욕, 런던, 파리, 암스테르담 등을 유랑한 ‘시티 익스클루시브’ 라인의 14번째 주인공은 서울이다. 이름은 ‘시트롱 28(Citron 28)’. 메인 원료로 사용한 시트러스는 익숙한 향조지만 르 라보만의 파격은 예외 없이 적용된다. 탄산과 함께 입안을 적시는 새콤한 레모네이드 향, 파스텔 톤 섬유 유연제의 포근한 향, 오래된 종이에 밴 쌉싸름한 향까지. 시간을 두고 반전을 거듭한다. 매장 방문 이유는 더 있다. “한글 라벨링 서비스를 도입했어요. 해당 지역의 언어로 라벨을 인쇄하는 것은 브랜드 최초의 시도죠. 현재 ‘시트롱 28’에 한정해 진행하고 있지만 9월 이후 전 제품으로 확대합니다.” 르 라보 코리아의 친절한 설명이다. 그리고 여행의 즐거움을 잃은 요즘, 에디 로시는 ‘시트롱 28’로 서울을 추억한다.

르 라보의 공동 창업자이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에디 로시. 새로운 향을 기획하는 데 후각만큼 중요한 감각은 상상력이라 말한다.

왜 서울이었나요?

준비하는 내내 르 라보 매장이 있는 이태원 거리가 떠올랐어요. 인파로 북적이는 테라스 카페, 차가 많지 않아 고요한 거리, 모든 것이 차분한 공기에 둘러싸인 듯 우아한 장면이었죠. 강렬하지만 절제된 인상이었어요. 그곳에서 받은 감동을 ‘시트롱 28’에 최대한 재현하고 싶었습니다.

시트롱 28’의 초기 코드 네임이 ‘시트롱 보엠(Citron Boheme)’이더군요. 서울과 시트러스, 보헤미안, 이 세 가지 요소의 연결 고리는 뭔가요?

서울에서 느낀 공기의 감촉 하나하나까지 자유롭게 살아 있으면서도 편안한 향을 원했습니다. 친숙한 레몬 향에 반전을 더해 세상에 없던 시트러스 향을 완성한 이유죠.

파격을 이끈 ‘히든 원료’가 궁금하군요.

안타깝지만, 말해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의 영감을 향수로 완성하는 과정만큼은 설명해줄 수 있겠죠?

물론이죠. 이태원 거리에서 ‘시트롱 28’을 기획했듯, 향의 영감은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예상치 못한 순간 등장합니다. 그때 저와 파브리스는 실험실로 향하죠(웃음). 영감이 잊히지 않도록 단기간에 조향사와 의견을 나누고 몇 가지 재료로 향의 초안을 만들어요. 그 후 몇 년간 착향과 시향, 피드백을 거칩니다. 르 라보 향수 중 몇 가지는 400번 이상 수정하며 완성했고, 어떤 향은 50번이면 충분했습니다. 언제, 어디서 우리의 마법이 실현될지 모르는 거죠.

조향사 다프네 뷔제(Daphné Bugey) 역시 그 말에 동의한 적 있어요. ‘로즈 31’ 제작 막바지에 원료 추가를 놓고 고민하던 자신에게 당신이 “충분히 만족스럽다”라는 말을 건넸고, 그 길로 무사히 완성할 수 있었다고 하더군요.

조향사와 일할 땐 저와 파브리스가 보스니까요! 이 사실을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군요(웃음).

서울에서 영감을 얻은 르 라보 ‘시트롱 28’.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조향사와 작업할 때 원칙이 있나요?

르 라보 비전에 부합하고 창의적이면서 향을 만드는 일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조향사를 만나는 것이 우선이죠. 향을 개발하는 일련의 과정은 꽤 오랜 시간이 소요됩니다. 그래서 우리와 함께하는 여정을 하나의 프로젝트로 접근하기보다 향수에 깃들 감성 혹은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파트너를 찾습니다. 또 하나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예리한 판단력을 유지하는 거죠. 저는 조종사 역할을 합니다. 향에 어떤 의미를 실을지, 언제 그것이 가장 강력하게 증폭되는지 그래서 우리가 전하고자 한 것을 제대로 구현했는지 확인하죠.

향수에서 보디와 맨즈 그루밍 라인, 2017년 보디-헤어-페이스 컬렉션까지 일상에서 르 라보 영역이 확장되고 있습니다. 카테고리 확장의 기준은 뭔가요?

딱히 없어요. 그저 우리가 늘 사용하는 것을 직접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그 기준이 되겠군요.

향을 기획하는 것과 브랜드를 운영하는 것, 즉 창의적인 활동과 이성적인 능력을 동시에 발휘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죠.

저와 파브리스는 창조하는 일에 집중합니다. 비즈니스 활동은 희망 사항 정도로 남겨요. 르 라보의 신념에 충실하게 움직이며 나 자신과 서로를 신뢰할 뿐이죠. 향수 제조는 다양한 경험의 연속이에요. 몇 년 동안 노력하고 발전하고 실패하고 또 성공하죠. 누구라도 이 과정을 5분 만에 완벽히 수행할 수는 없어요.

그렇다면 최근 일상에서 받은 가장 신선한 충격은 뭐죠?

충격적인 사건을 겪지 않았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할 것 같군요. 저는 향에 대한 영감을 많이 받는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평소 영감, 즉 깨달음을 자주 발견한다는 것은 정서적 불안정을 겪고 있음의 방증일 테니까요. 최근 몇 년 동안 제 삶의 중심이자 원동력은 아이들이었고 부모로서 바람직한 교육을 하기 위해 노력했어요. 그러면서 일상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알게 되었죠.

당신에게 ‘향수를 만든다’는 것은 어떤 의미죠?

가장 사랑하는 일. 물론 삶에서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르 라보 창작물에 대한 칭찬은 언제나 자아도취로의 여행을 선물하죠. 이런 감정에 중독되면 위험하겠지만, 늘 기분 좋은 것도 사실이에요.

에디터
이주현B
포토그래퍼
이신구, Courtesy of Le La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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