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새의 우주로 뛰어든 예술가 양혜규와 김보라
오늘날의 예술가란 동시대의 무의식을 명명하고, 잊고 있던 의미를 찾아주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양혜규와 김보라의 두 세계가 만난 지점에서 응결이 발생했고, 안팎의 경계가 녹아내렸다.
미술가 양혜규와 영화감독 김보라의 ‘블라인드 데이트’의 결과는, 주선자의 영역도 아니거니와,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다. 예술이라는 자장 안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동시대 예술가들이 보일 법한 적절한 공통점과 차이점을 막연히 예상했을 뿐이다. 그러나 양혜규의 MMCA 현대차 시리즈 2020 전시에 선보일 작품 중 하나인 <소리 나는 가물家物>을 국립현대미술관 수장고에서 꺼내와 일렬로 정렬시킨 후 그들 ‘사이’에 양혜규와 김보라가 섰을 때, 이후 자그마치 3시간 반 동안 쏟아진 진지한 농담과 가벼운 진담, 직업적 토로와 인간적 의견 ‘사이’에서 나의 상상은 다른 확신으로 변모했다. 미술과 영화, 두 세계의 시스템이나 언어 차이를 훌쩍 초월하는 필연적 다름과 공교로운 같음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오늘의 만남이 두 사람의 같음과 다름 자체에 주목하기보다 그 절묘한 틈 혹은 간극에 대한 기록이 될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생각해보면, 세상의 모든 유의미한 사건은 ‘사이’에서 일어나고, 간극을 말끔히 메우려는 게 아니라 인지하고 인정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사건의 의미가 발생한다.
만남의 계기는 9월 말 개막을 앞둔 양혜규의 국립현대미술관 개인전 <O2 & H2O>였다. 양혜규는 5년 만에 한국의 미술관에서 선보일 작품 제작과 설치에 여념이 없었고, 김보라는 <벌새>라는 불세출의 장편 데뷔작으로 담담한 태풍을 일으킨 지 1년 만에 두 번째 영화를 준비하는 상황이었다. 서로의 예술적 속성을 향한 기대가 만남의 동력이었을 텐데, 그 속성의 중심에는 일상의 비주류 혹은 반(反)지배적 부분(혹은 대상)에 대한 ‘급진적 의지’가 자리한다. 양혜규의 작업은 이분법을 거부한 ‘혼종’을 향한 관심과 문화 인류학적 사유로 무장한 채 예술적 경계와 국적, 삶과 예술을 넘나드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김보라의 <벌새> 역시 영화적으로나 현실에서나 반(反)주류인 ‘여자’ ‘중학생’의 주변적 시선을 통해 시대상의 안팎을 1990년대(이전)부터 2020년대(이후)까지 꿰어내고, 보편적 경험과 공통의 기억으로 발화시킨다. 무의식이 우리가 알고 있거나 경험했지만 이름을 부여받지 못한 무엇이라면, 오늘날의 예술가는 동시대의 무의식을 명명하고 잃어버린 의미를 찾아주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물병 속의 찬물이 뚜껑을 열지 않고도 따뜻한 공기 중으로 빠져나오듯, 경계의 표면에 맺혀 흘러내린다. 서로 다른 온도 차로 인해 발생하는 물의 응결은 조용하고 신중한 소통의 모델이다. 다름을 인지하고 유지한다면, 눈물과 땀이 흐르더라도 공존할 수 있다.”
적어도 내게 양혜규의 이 고백은, ‘함께 존재’하려 분투하는 과정, 반쪽이들의 공동체를 향한 상상과 연대의 이야기로 이번 전시를 이해하게 한다. 관객으로서 처음 대면하는 응결의 과정은 제목에서부터 시작된다. 대단히 어렵지도 않지만 익숙하지도 않은 이 용어를 ‘공기와 물’로 독해하는 필수 과정을 거쳐야만 전시로의 진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오래전부터 작가가 골몰해온 소통의 열망과 그 개념인 ‘응결’(2009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전시 제목), 주유소에서 우연히 표지판 ‘공기와 물’(2002년 두 개의 선반을 활용한 작품과 동명의 전시 제목)을 목격한 후에 천착한 일상 속 맥락의 관계성, 그리고 ‘O2 & H2O’에 이르기까지, 그녀에게 있었을 상태와 문맥의 변화, 주요한 전환의 순간들. 그러므로 이번 전시를 경험한다는 건 ‘공기와 물’을 ‘O2 & H2O’로 표기한 저의를 파악하려는 노력 혹은 움직임이다. 인간, 동물, 무생물 ‘사이’의 기괴한 피조물인 이무기 모양의 조각, 인간과 사물, 기계와 생명 어딘가의 ‘틈’에 존재하는 가전 기기 조각, 그 자체로 ‘간극’을 상징하는 DMZ를 표현한 벽화… 양혜규가 질서 정연하게 쏟아낸 이 혼돈의 더미에서 틈을 찾는다면, 그것이 작가의 행보뿐 아니라 우리의 현 상태를 경험할 수 있는 길이 될 것이다.
양혜규와 김보라는 “엄연히 마주치고 있지만 의문투성이인 현상”에 대한 현실적인 의견을 나누었다. 이들에게 어떤 작업을 한다는 건 자신의 존재론을 각자의 방식으로 탐구하는 것과 다름없으며, 역설적으로 이런 방식은 예술가 본인뿐만 아니라 모두를 주체로 만든다. 다만 양혜규가 다른 세계로 도약하기 위해 스스로를 끊임없이 타자화하며 추상 언어를 내면화하는 예술가라면, 김보라는 철저하게 자기 자신으로 온전히 존재하고자 끊임없이 내면을 성찰하고 그 힘으로 세상을 다루는 예술가다. 우리를 둘러싼 사연과 사건에 대한 대화가 충돌할수록, 두 예술가의 세계 사이의 틈은 더 선명해진 반면 안팎의 경계는 솔직한 운동에너지로 인해 자연스럽게 용해되었다. 흥미로운 응결의 현장을 일곱 개의 핵심어로 정리한 이 대담이 <O2 & H2O>전의 일종의 파라텍스트이자, 김보라의 다음 영화까지 상상할 수 있는 단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스스로 꽤 일리 있다고 생각되는 이유다.
1사물에 대한 애정
보그: 다리미, 마우스, 헤어드라이어, 냄비의 형태지만 또한 외계 생명체 같은 <소리 나는 가물家物>(2020)을 보고 있자니 언젠가 양혜규 작가님과 나눈 이야기가 떠올랐어요. 부엌이나 집 안에 가전 기기를 두는 게 ‘그냥’ 싫다고 했죠. 돌이켜보면, 마냥 싫었다기보다는 마음이 쓰였던 게 아닌가 싶어요. 이들의 충성심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헌신적이며 신실하니까요. 존재감 없이 삶을 살피던 가전 기기에 방울을 달아 세속적인 신비함을 더했고, 바퀴를 달아 자유를 부여했으며, 손잡이를 달아 세상과의 접점을 제공했습니다. <소리 나는 접이식 건조대–마장 마술>(2020)도 빼놓을 수 없겠죠. 사람을 상대하고도 남을 덩치의 가물에 비해 왜소해 보였지만, 살림의 증표로서 빨래 건조대는 <사동 30번지>(2006)부터 진화를 거듭해온 ‘가물’의 원형 격이에요. 특히 촬영 중간에 작가님이 무릎을 꿇고 앉아 이들의 사진을 찍는 모습이 의도치 않게 지극하고 다정해 보였습니다.
김보라(이하 김): 특히 <소리 나는 가물家物> 시리즈에서 일상과 물건에 대한 작가님의 애정과 유머가 느껴졌어요. 일상의 물건이 커지니 위엄도 생기고, 그래서 낯설게 바라보기가 가능하더군요. 영화학자 엠마뉴엘 시에티가 쓴 책 <쇼트>의 한 문장이 떠올랐어요. “클로즈업 쇼트는 삶에서 만들어낸 이미지를 확장시킬 뿐 아니라 그런 이미지를 더 깊이 있게 만든다.” 영화 속 클로즈업이 이를테면 와이셔츠 단추조차 우주선처럼 특별하게 만들듯 부분적인 걸 인격화하고 차원이 다른 리얼리즘을 만들어낸다는 내용이었는데, 이번 조각들도 비슷한 감흥을 선사했어요. 예전 인터뷰에서 언급했듯, 작가님은 ‘모든 것과 어우러진 모든 것(Everything mingled with everything)’이라는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것 같아요. 세상 만물에 대한 사랑이랄까요. 그 힘이 어디서 비롯되나요?
양혜규(이하 양): 솔직히 사랑, 행복 이런 단어는 제게 좀 어려워요(웃음). 오히려 통했다, 아니 그보다는 어디에 투자한다 할까요? 사물에 대한 관심, 투자, 투영은 순간적, 사실 순식간에 일어나는 편인데 그런 감정을 반감 없이 잘 수신하는 편이에요. 오히려 같은 질문을 감독님께 드리고 싶군요.
김: 대중교통 이용하는 사람들을 관찰한다고 한 인터뷰를 읽으면서 “뉴욕의 지하철을 타면 그리스 로마의 신을 모두 만날 수 있다”던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의 말을 떠올렸어요. 저도 아무도 봐주지 않는 것들을 나의 눈으로 명료하고 정확하게, 잘 들여다보는 것 자체가 사랑이고, 삶을 사랑한다는 것도 그런 노력인 것 같아요. 실은 제가 좋아하지 않는 단어 중 하나가 ‘좋은 사람’이에요.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고 좋은 사람이라 표현하는 건 모독이라고 생각하고,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감히 그렇게 말할 수 없다고 봐요. 저는 좋은 사람이 아니라 인간적인 사람이면 좋겠어요.
양: 저는 조각가예요. 그래서 물건을 기본적으로 부담스러워하는데, 어쩌면 사물에 대한 관심 역시 끊임없이 물건을 만든다는 콤플렉스에서 기인한 건지도 모르겠어요. 더 파고들자면, 지식인들과 작가들이 ‘기계’라는 단어를 자주 쓰잖아요. ‘디바이스(장치)’도 있지만, 저는 ‘가전 기기(Appliance)’라는 용어를 선호하는데요, 거대한 산업의 생산 시스템보다는 가정, 삶을 지칭하기 때문이죠. 특히 들뢰즈·가타리 혹은 프로이트를 논하자면 등장하는 ‘욕망 기계’ 같은 말은 제게는 너무 거시적이고, 남성적이며, 서구적인 뉘앙스를 풍기는데, 좀 더 겸손하고 겸허하며 반성하는 느낌을 주는 용어가 필요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용어 자체도 확장적이며 포괄적인 여성성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변화할 때라고 느껴요. 그래서 저는 ‘여성성(Feminity)’ 대신 ‘가사성(Domesticity)’이라는 말을 써요.
김: 여성의 눈으로 바라보는 걸 의미하는 걸까요? 페미니스트 신학자 현경 교수가 만든 ‘살림이스트’라는 단어도 떠오르네요.
양: 살림이라는 말에는 ‘관리’의 뉘앙스도 포함되어 있어요. ‘삶’의 ‘관리’, 작은 스케일이지만 갖출 건 다 갖춘 느낌. 그런 스케일에 존경과 영예를 부여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제가 엄청 겸손한 사람은 아니지만, 적어도 기존 실수를 되풀이하고 싶진 않다는 어떤 소극적인 노력의 일환으로 가사성이라는 개념에 임하는 것 같아요.
2 공기 그리고 물
김: 이번 전시를 세 가지 단어로 표현한다면요?
양: 응결, 공기와 물, 그리고 O2 & H2O. 이번 전시는 크게 이 세 가지 사이에서 일어난 ‘전환’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요. 응결은 소통이나 공동체를 찾아 헤맨 나의 키워드였어요. 당시 무생물적이고 물질적인 이야기를 한 이유는 사람들 간에 언어가 통하지 않기 때문이었어요. 소통 과정에서 문화적, 언어적 문제가 개입되는데, 그게 또 저의 현실이었죠. 맞서 싸우고, 추억하고, 충돌하고, 반목하고… 물이 수증기가 되어 공기 중으로 날아가고, 다시 물로 응결하는 물질의 상태 변화, 그 ‘전환’의 의미에 주목하다 보니, 소통도 사람 간 심정의 상태 변화를 지칭할 수 있겠다 싶어요. ‘공기와 물’이 ‘O2 & H2O’로 언어라는 형식을 달리한 것처럼, 전환을 통해 지금까지와는 다른 어떤 신호가 생성되는 거죠. 물질과 요소는 바뀌지 않았지만, 우리는 다른 국면에 와 있죠. 더 불확실해지고, 더 오염되고, 운동은 더 빨라지고. 그래도 공기라는 요소가 없어지진 않았잖아요. 엄연한 것들은 엄연한 것들끼리 두고, 마인드 혹은 모드를 바꿔보자는 취지에서 출발했어요.
김: “추상은 서사를 잉태한 ‘Pregnancy of Narratives’의 형태여야 한다”는 작가님 말씀에 무척 공감했어요. 예컨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두고 어렵다고들 하잖아요. 하지만 각자에게 주관적으로 다가간다는 점에서 ‘쉽고’ 정말 재미있거든요. 서사 자체가 완전히 다르니까요. 작가님의 작품도 그 자체가 어렵다기보다는, 방금 설명처럼 굉장히 다양한 서사를 품고 있다고 봤어요. 보는 사람마다 기억을 소환할 수 있는 어떤 공간을 열어주는 거죠. 하지만 같은 창작자로서 보자면, 그런 작품을 만드는 게 더 어렵죠. 작가가 몸체가 되어 자기 안의 것들이 경험이 되고, 통과하고, 축적되고, 녹아들어야 하니까요. 즉 추상이 추상으로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기억과 경험 등 축적된 상태로 흐르고, 그렇기에 작품이 타 문화권 관객들에게도 다채롭게 다가간다고 생각해요. 어떤 방식으로 공부하고, 경험하고, 언러닝(Unlearning)하는지, 세상의 다양한 것들과 만나고 받아들이는지 궁금합니다.
양: 실은 무엇을 적극적으로 공부했다기보다는 자극받아 내달린 것 같아요. 일종의 연쇄반응처럼 뭔가를 하면 다음으로 연결되고, 가속이 붙고, 그래서 그 과정 자체에 동력이 내재되어 있고. 일종의 경로 의존성인데, 물론 이 역시 성정에 환경과 기회가 더해진 결과 아닐까요. 기본적으로 성실하고, 호기심이 없지 않은 성격에 새로운 걸 접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이랄까요. (보그: 오래 관찰해온바, 스스로를 쉽거나 편치 않은 낯선 상황에 일부러 던져놓는 노력도 ‘양혜규식 언러닝’의 방식이 아닐까 합니다.) 네, 그게 제가 생각하는 ‘좋은 환경’인 거죠.
김: 편한 상황을 경계하시는 건가요? 사실 저도 우유처럼 상할까 봐 스스로를 늘 성찰하려고 해요. <벌새>가 첫 장편이었고, 모든 게 처음이라 낯설기도 했어요. 영화제 레드 카펫을 밟기도 하고, 시상식에서 계속 상을 받고, 오늘처럼 화보를 촬영하기도 하는데, 때론 롤러코스터를 타는 그런 느낌이에요. 그럴 때 저는 이건 일종의 원시 부족의 제의 같은 거라고, 나는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 거라고, 이 상황으로부터 건강한 거리를 두려고 노력해요. 첫 영화가 예술영화로서 무척 잘되어 이런 나날이 한동안 지속되다 보니, 상황과 마음을 잘 정돈하는 게 제 숙제였어요.
3 주저하는 용기와 성찰하는 용기
김: 지금의 한국 사회는 나이 드는 것과 죽음을 외면하려고 해요. 지금 이 순간, 현재를 살기 위해 어떻게 하나요? 이건 무엇이 가장 두려운가 하는 질문과도 연결될 텐데요, 그럴 땐 어떻게 작가님만의 방식으로 직면하나요?
양: 너무 단순하게 임했기 때문에 아직 별 두려운 거 없이 살았는데, 앞으로 두려움 없이 단순하게 살지 못할까 봐 두려워요. (김: 현재 스스로 느껴지는 에너지 상태는요?) 자신감?(웃음)
김: 오, 부러운걸요. <의식 혁명>의 저자인 데이비드 호킨스는 의식의 레벨을 나눴어요. 맨 아래가 두려움이나 수치심, 용기나 중립, 자신감이 중간 단계, 그 위 단계가 사랑과 공감, 이렇거든요. 한 사람이 여러 단계를 오가는데 어느 단계에 오래 지속되어 있느냐로 스스로를 들여다볼 수 있어요.
양: 내게는 분류의 문제를 넘어서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용기만큼이나 취약한 감정도 중요해요. 2004년부터 2006년까지 만든 세 편의 비디오 에세이 중 2편 제목이 <주저하는 용기>였어요. ‘주저’하는 억제된 상태와 ‘용기’의 용감한 상태가 대립하지만 사실은 그 두 상태가 붙어 있다고 생각했어요. 주저하는 걸 극복하기 위해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진 않았어요. 그렇게 간단한 해결을 원해서도 안 되고, 어차피 그런 건 없는 데다, 용기가 필요한 이유는 주저함을 값지게 여기기 위해서예요. 에세이에서 제가 이런 얘기를 해요. 예술가에게 점진적인 진보와 발전보다는 도약에 대한 욕구가 강렬해지는 순간이 있다고요. 아주 멀리 가려고 해야 조금이나마 달라질 수 있다는, 도약 아니면 안 되겠다는 절실함이 느껴질 땐 용기가 필요해요. 하지만 일상에서는 주저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게 훨씬 나은 것 같아요. 더 반성적이고, 공감 능력을 발휘할 수 있고요. 매번 그 용기라는 것 때문에 얼마나 교만해지고 파괴적일 수 있는지 많이 봐왔으니까요.
김: 공감해요. 저 역시 느끼는 무수한 감정 중에 사랑도 있고, 두려움도 있고, 용기도 있어요. 두려움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지만 그 두려움을 미화하지는 않으려 해요. 수치심이 같이 올 때는 힘이 빠지는 에너지거든요. 그럼에도 그 감정 상태에 빠질 때가 있는데, 그러면서 이득을 얻는다고 착각하는 내가 있더라고요. 이를테면 모두가 힘들 땐 나도 같이 고난에 빠져야 한다고 착각하는 나 자신을 많이 발견했고, 평생 성찰해왔어요. 작가님은 현재를 살고 있다고 하셨지만, 저는 과거나 미래를 산 적이 많았고 그래서 스무 살 때부터 명상을 시작했어요. 명상에 들어갈 때는 현재만 있으니까요. 현재를 사는 것, 그게 시작이자 끝인 것 같아요. 나와 현재를 들여다보고, 착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또한 두려움이 사랑의 토대와 확장으로 가지 못하고, 누군가를, 나 자신을 미워하는 데만 머물 때는 누구에게도 좋은 영향을 주지 못함을 알아차리는 게 중요하다는 걸 느껴요. 작업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요.
보그: 작가님의 책 <셋을 위한 목소리>에서 이런 문장을 발견했어요. “전시란 ‘주저하는 용기’를 ‘펼쳐내는’ 순간이다.” 이는 수년 동안 화면이나 대사는 물론 자신의 영적 상태까지 다듬어가며 영화를 탄생시킨 감독님에게도, 일상에서 전환의 순간을 숱하게 맞닥뜨리는 보통의 우리에게도 적용되겠죠. 흥미로운 사실은 ‘주저하는 용기’를 펼쳐내는 양혜규라는 작가에게 유독 두려움에 대한 질문이 잦다는 점이에요. 불완전함을 극복하거나 초월하려 들지 않고 이를 생산적인 힘으로 특징짓는 작가이고, 모두의 이해를 구하지 않은 채 질주하는 작업의 추상 언어가 필연적으로 대범하고 대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이런 질문의 발원지가 아닐까 싶어요.
4 인물과 사람
김: 혹시 명상을 하시나요?
양: 나는 내 안의 많은 분자를 다 모아서 하나로 명상할 수가 없어요(웃음). 아니, 명상뿐 아니라 자전거도 탈 줄 모르고, 수영도 못하고, 신체를 돌보는 일도 잘 못해요. 진담 반 농담 반으로 내 안의 ‘제3세계성’, 신파성을 탓하죠. 저 자신을 나름 평범한 사람이라고 여기는데, 만약 혼자 있는 시간이 적고 다른 사람과 같이 생활했다면 능히 자연스럽게 했을 일을 제가 놓쳤을 수는 있겠죠. 어쨌든 내게 아직 어려운 일이 있다면, 그건 신체에 관련한 부분이에요.
김: 올가을까지 예정된 모마 전시에서도 게오르기 구르지예프를 참조한 조각을 선보였고, 이번에도 에니어그램을 차용해 손잡이를 벽에 설치했어요. 구르지예프에 영감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작품에 함의된 신비주의나 이교도 등의 배경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고, 그래서 명상에 관심이 있으시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구르지예프는 고도의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각각의 자세와 몸짓에서 우주적인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으니까요. 그렇다면 혹시 영적 상태의 전달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나요? 덧붙이자면 저는 그랬어요. 사실 <벌새>의 준비 기간이 꽤 길었는데, 그 기간에 가장 열심히 한 게 명상이었거든요. 저는 예술가의 영적 상태가 작품을 보는 관객에게 전달된다고 믿거든요. 영적 상태를 인식하고, 정렬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양: 제가 영적 상태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남의 영적 상태를 관찰하는 편인 듯해요. 그리고 구르지예프는 신비주의자이고 영적인 삶을 추구하면서, 당시 세상이 주목하지 않았던 지역과 매체에 몰두했어요. 중앙아시아의 수도원을 방문해 신비로운 음악과 춤을 접했다는 점이 제가 관심 있게 생각하는 부분이기도 한데, 한 가지 종교나 정신적 수련에 천착했다기보다 정신적 수양을 구조적으로 통찰했고, 여행하면서 머리와 마음에 담아온 수백의 신성한 음악과 춤을 타인의 도움을 받아 기록했어요. 하도 다양한 일을 하니까 사람들이 그에게 대체 뭐 하는 사람이냐 물었는데, 그의 답이 ‘Teacher of dance’였어요. 수십 년에 걸쳐 영적인 삶을 탐구하던 인물이 자신을 ‘춤 선생’이라 표현한 건 의외였고, 내게 일종의 깨달음 같은 해방감을 선사했어요(양혜규는 2011년 영국 모던 아트 옥스퍼드에서 <무용 선생>이라는 전시를 선보였다).
김: 다른 마스터나 구루에게 특별하게 끌린 경우는 없었나요?
양: 마스터까지는 아니고, 또 매번 대상이 바뀌긴 합니다만, 어떤 인물에 많이 끌리긴 해요. 누군가 생각나면 들춰보고, 또 보고, 또 보고, 그런 스타일이거든요. ‘인물’이라고 칭할 만한 지점을 그렇게 곱씹다보면 매번 흥미로운 지점이 새롭게 드러나요. 마르그리트 뒤라스도, 김산도 그렇게 결국 존재를 작업으로 이끌어낼 수 있었어요. 최근엔 로맹 가리에 다시 엄청 꽂혔어요. 저도 자문하죠. 도대체 그의 무엇에 이렇게 사로잡힌 걸까? 물론 모두 역사적인 인물들이라 모순적인 지점도, 비판 혹은 논란의 여지도 많지만 번번이 이들의 불완전함에 끌려요.
보그: 김보라 감독님은 ‘보통 사람들’ 이야기에 특히 관심이 많다고 들었습니다만.
김: 저도 작가님이 언급한 작가들을 좋아하고 특히 뒤라스에 굉장히 매혹되던 때가 있었어요. 또한 저는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엄청난 매력을 느껴요. 예를 들어 한글을 못 배운 할머니들의 구술사라든가 ‘보통 사람들’ 에세이를 좋아해요. ‘Humans of New York’이라는 사이트가 엄청난 인기를 끈 적이 있는데, 말 그대로 뉴욕 길거리에서 일반인들을 촬영하고 인터뷰한 거예요. 후에 책으로 출간되기도 했으니, 유명해지는 걸 넘어 현상이 된 거죠. 평범한 이들을 들여다보면 모두들 비범하고, 하나같이 특별한 존재라는 사실을 느끼곤 해요.
5 세대의 안팎
보그: <벌새>는 그때(1990년대)와 지금(2020년대), 성인과 반(反)성인, 집과 집 없음, 자아와 타인, 일상과 재난을 천천한 발걸음이지만 드라마틱하게 관통하는 영화예요. 동시에 1초에 80번 날갯짓한다는 벌새가 제목인 만큼 곧 움직임에 대한 이야기라는 생각도 들어요. 열네 살 은희를 둘러싼 공기는 시종일관 불안정해요. 그녀는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고 회복을 반복하며 끊임없이 움직여요. 이야기는 은희가 자신의 시선을 찾는 것으로 끝났지만 그건 영화적 시점에서의 마지막일 뿐, 아마 은희는 성인이 된 후에도 비틀거림의 역학을 반복하겠죠. 사실 ‘본래의 자리’라는 건 애초에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세상 만물은 움직임으로써 생명력을 유지한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근원적인 불안정함을 내재화한 이 영화는 해피 엔딩과 새드 엔딩 사이 어딘가에 있다고 봅니다.
양: 두 번째 영화로는 엄마 이야기와 SF 중에서 고민한다고 했는데, 어떤 방향으로 결정되었나요?
김: 곧 본격적인 시나리오 작업에 들어가요. 원작 단편소설이 있는, 두 명의 여자가 주인공인 SF 영화예요. 우주선, 우주여행 같은 미래의 개발적 면모에 관한 거라기보다는 기계 문명이라는 요소에 구애받지 않는 인간적인 SF예요. 정서를 자극하는 다른 문법의 SF랄까요. 페미니스트들이 SF에 관심이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 SF 자체가 소수자성이 있는 장르 같아요. 현재 한국에서 SF가 대세인 데에도 현실의 불안함과 불확실성이 동인이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양: <벌새>의 경우, 어른이 아닌 반(反)어른의 목소리를 빌렸던데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김: 역시 불확실성과도 관련 있겠죠. 예를 들면 주인공이 평범한 어른이면 이런 질문을 하지 않을 테니까요. 중학생을 주인공으로 삼는다는 것도 그런 선택이었어요. 신체적, 심리적, 사회적으로 가장 취약하고 불확실한 나이의 사람을 주인공으로 삼아 들리지 않은 목소리를 듣고 싶었고, 그 연약한 경계를 포착해 여정을 그리고자 했어요. 제게 그 나이가 중요했던 또 하나의 이유는 그때 경험한 감정을 어른이 되어서도 경험한다고 여겼기 때문이에요. 소속에 대한 열망, 불안이나 공포, 절망과 슬픔 등등 제대로 해소되지 못한 것들을 여전히 끌고 다니기에, 그 시기를 조망하고 싶었어요. 시각적으로는, 해 질 무렵 아파트 단지의 어떤 느낌, 정서를 드러내고 싶었어요. 애들이 떠드는 소리와 설거지하는 소리가 섞이는, 그 해 질 녘이면 늘 기분이 묘했거든요.
양: 알아요, 울렁울렁하는 그 느낌(웃음)! 제 동생이 “우리 세대 이야기”라고 했는데, 뭔지 알겠더군요. 저는 <벌새>를 세대론의 이야기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했어요. 영화에 내재된 불안감이 특정 나이대에 발현되기도 하지만 시대로부터 기인한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영화의 분위기가 문화 지식으로 묘사되거나 미학적 요소로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정서로, 본능으로, 그 시대를 산 사람이 딱 알아차릴 수 있게끔 다가오잖아요. 한국 사회의 세대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김: 사실 <벌새>를 만들면서는 그런 생각을 주로 하지는 않았어요. 보다 초점을 둔 건 영화의 등장인물들이 나이에 상관없이, 하나같이 집을 못 찾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이었어요. 자기 집을 못 찾고, 혹은 자기 집에서조차 편안함을 느끼지 못하고 부유하는 사람들, 흔들리는 사람들의 느낌이랄까요. 평소 사람을 볼 때도 물리적 나이보다는 영적 나이를 가늠하려고 하는 편이에요. 하지만 물론 1994년이 배경이다 보니 <벌새>에서 시대의 공기를 잘 포착하고 담아내려고 했죠. 그럼에도 이 영화가 시대를 넘는 원형적 경험이 되길 바라는 의도가 가장 컸어요.
양: 세대론적으로 접근하진 않았더라도 영화에 대한 반응이나 평가가 세대론적으로 나타날 수는 있겠죠. 저는 그걸 강하게 느낀 적 있어요. 2013년 처음 베이징에서 개인전을 열었을 때 젊은 관객들의 눈길에서 이들이 열광한다는 걸 느꼈죠. 그건 원하거나 의도하는 바와는 다른 차원의 일종의 현상인 것 같아요. 특정 세대에 대한 호오의 문제를 떠나, 한국 사회의 상당 부분이 세대론의 카테고리 안으로 수렴되고 있지 않나요. 유행이나 은어로 표현되지 않아도 그 세대만 공유할 수 있는 지점이 극도로 발달한 사회랄까요. 어쨌든 <벌새>는 국내외에서 매우 호평받았는데, 괴리 혹은 차이를 극명하게 느낀 경험은 없었나요?
김: 크게 다르지는 않았지만,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캐릭터를 감정적으로, 어렵지 않게 받아들이면서 각자의 복잡다단한 경험을 소환한다는 거였어요. 트라이베카 영화제에선 9.11 사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고, 일본 관객들은 일상이 재난과 맞닿아 있는 데다 가부장제가 심각한 나라에서 살기 때문인지 더 열광했어요. 기본적으로는 탐험하고, 성장하고, 이별하고, 깨지고,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하는 한 인간의 여정에 공감해주셨고요. 특히 ‘폭풍이 요동치는 느낌’을 포착해주거나 “이렇게 따뜻하면서도 불안한 영화는 처음이었다”는 평은 기억에 남을 만큼 좋았어요.
6 집과 집 없음 사이의 공동체
김: 시인 김혜순은 최근 시집 <여자짐승아시아하기>에 이런 문장을 썼어요. “우리가 제일 모르는 것, 우리가 아시아인이라는 것/ 우리가 제일 모르는 것, 우리가 짐승이라는 것/ 우리가 제일 모르는 것, 우리가 끝끝내 여자라는 것.” 작가님 자신을 코스모폴리탄이나 디아스포라보다 ‘혼종’이라는 단어로 표현한 것이 기억에 남고, 그 표현이 좋았어요. 그러나 내가 여전히 여자, 아시아인이라는 사실을 벗어나지 못해 답답한 순간이 있었나요? 어떤 방식으로 그걸 통과했나요?
양: ‘백인 남성 작가’라고 굳이 표현하지 않듯이, 이제는 ‘한국 태생의 여성 작가’, ‘캐리비안 출신의 흑인 작가’ 등의 수식어를 쓰지 않아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인식인 셈인데 이런 의식의 진전이 흥미롭지만, 한국 여성 작가라 불리는 게 아직은 폄하로 느껴지거나 지긋지긋하진 않아요. 과소평가나 악의적 비평도 신경 안 쓰고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제 무심한 태도를 오해하거나 잘 이해하지 못하는데, 처음 독일에 갔을 때 나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말할 수 없고, 들을 수도 없었어요.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는데도 내가 어떤 사회의 평가 체계에 잘 포섭되지 않는 모양인지 크게 상처받진 않았어요(웃음).
김: 그럼 언제 집(Home)에 왔다는 느낌이 드나요?
양: 물론 은유이긴 하지만, 나에게 집은 예컨대 자살을 위해 귀환하는 곳이에요(웃음). 휴식, 안식, 편안함보다는 가차 없이 과격하고 급진적일 수 있는 장소죠. <나탈리 그랑제>라는 뒤라스의 영화가 있어요. 한 여자와 그녀의 폭력적인 아이에 관한 이야기이고, 그래서 집 안에는 안타까움, 두려움, 불안이 잠재되어 있죠. 나탈리의 친구(잔느 모로)가 이 아슬아슬한 집에서 함께 머무르면서 지원하는데, 특히 두 여자가 카메라를 등지고 설거지하는 모습을 롱 샷으로 포착한 장면에서 모종의 연대 의식을 엿볼 수 있어요. 불안으로 팽배한 이 영화가 진정한 공감을 선사하던 순간이었어요. 제게 집이란 그런 공간이에요. 불안을 전적으로 수용하고, 건전한 사회의 기본적 단위로서의 가정이라기보다 치유 안 된, 치유하고 싶은 개인들이 숨기 위한, 그 정도의 자유가 보장된 곳.
김: 저에게 집에 왔다는 건 곧 나라는 한 인간이 안정되게 뿌리내린 듯한 느낌이에요. 특히 내 몸이 어디에 있든, 명상할 때 온전히 내가 집에 왔음을 느껴요. 그제야 비로소 저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 같아서요. 그리고 어떤 이들과 얘기가 잘 통할 때, 일대일로 대화했는데 뭔가 연결된 느낌이 들 때, 그 이상한 아름다운 공동체성이 형성될 때도 그렇고요. 내가 세상과 친구가 되는 듯한 순간, 그게 전형적으로 통용되는 친구일 필요는 없어요. 그냥 자주 가는 식당 사장님과 탁 하는 연결성이 느껴질 때도 있죠. 세상에 흐르는 어떤 공동체성이 생성되어 내 안에, 나의 일상에 계속 존재할 때 집에 온 느낌을 받아요.
보그: 두 분의 작업에서 공통 지점을 찾는다는 게 다소 억지스럽다 해도, 공히 ‘언캐니(Uncanny)’한 느낌을 발견한 건 우연이 아니에요. <소리 나는 가물家物>에서 카프카적 생명체를 목격할 때의 기이함이나 <벌새>를 보며 느낀, 꿈에서 또 다른 나와 눈이 마주치는 듯한 불편함은 모두 내 안에서 만나요. ‘언캐니’는 독일어 ‘Unheimlich’ , 즉 ‘Unhomeliness’에서 온 단어예요. 집에 다 왔는데, 내 집이 낯설다는 의미죠. 그래서 감독님의 집에 관한 질문이 흥미로웠어요. 양혜규 작가님의 ‘은유적 집 없음’, ‘보편적 집 없음’의 개념도 결국 본인의 정체성에서 출발해 공동체에 대한 열망을 전제하기 때문이에요.
김: 전 늘 이 질문을 마음에 품고 살아요. 집이란 내면의 상징적인 집을 의미하며, 예술가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이 질문을 세상에 던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7 불안의 변혁
보그: 각각 전시 개막과 영화 제작을 앞둔 입장에서, 현시대의 예측 불가함이 각자의 예술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생각해본 적 있습니까?
김: 심리 상담 선생님이자 명상 선생님에게 질문한 적 있어요. 코로나 시대의 불안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런 답을 주더군요. “코로나 시대이기 때문이 아니라 원래 있었던 불안이 드러난 거예요.” 저마다 숨겨온 무지를 드러내고 있고, 저도 분명 그랬을 거예요. 하지만 영적 도약 이전의 성장통이랄까, 사점을 지나는 단계 같은 느낌이고, 뭔가를 뒤집기하듯 도약이 일어날 거라는 희망이 있어요. 그런 희망을 동력 삼아 더 진보적인 이야기를 만들고자 해요. 특히 어떻게 하면 무언가를 포함시키는 이야기를 할까… 제게는 이 공동체성에 대한 이야기가 화두예요. ‘익스클루시브’가 특권인 시대지만, 나는 제외하는 게 아니라 포함하는 것의 기쁨과 아름다움을 생각해요. <벌새>에도 그렇게 품어 안는 세계관을 녹여내려고 노력했고요, 다음 영화에서도 ‘소외시키지 않는 세계관’을 펼치고자 고심 중이에요. 그런 세계관이 가장 진보적이고 SF적이라고 봐요.
양: 전시 개막이든, 영화 개봉이든, 우리가 이런 이벤트에 몰두하는 마지막 세대가 아닐까요. 이런 형태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지만, 결국 올 것이 왔구나 싶고요. 겪어야 할 일은 겪어야 하고, 또 겪기 나름이라고 봐요. 고통과 한계가 있지만, 의미론적으로나 태도적으로 ‘아예’ 달라진다면 ‘해피 엔딩’ 아닐까요. 이를테면 요즘 젊은 작가들은 전시 혹은 작업할 장소를 잃고 ‘베드룸 프로듀서’로 전락했지만 그 와중에도 좁은 방 안에서, 산책길에서 영감을 받아 무언가를 하고 있어요. 전통적으로 미술가에게 어디서 전시하는가의 문제는 너무 중요한 나머지 경도되기까지 했는데, 젊은 작가들은 이를 넘어서서 ‘작업한다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거예요. 단순 대체는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하는 반면 상황을 온몸으로 겪으며 내면화하려는 시도를 목격할 때면 놀라워요. 이들이 이 고유한 경험을 통해 무엇을 할지, 어떻게 변화시킬지 너무너무 궁금해요.
김: 우리가 쉬고 있는 숨이 타인에게 혹은 세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걸 자각하고 각성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매우 신선하게 다가와요. 그래서 이 연쇄 고리, 내가 어떤 숨을, 에너지를 세상에 발산하는지에 대해 예전보다 더 깊이 숙고하게 돼요. 내가 역사의 일부고,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이죠. 그런 만큼 일상에서 나 스스로를 변혁하고 싶다는 마음도 더 강해졌어요.
양: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라는 낯선 무언가가 처음 대두되던 3월에만도 조르조 아감벤, 슬라보예 지젝 같은 지식인들이 앞다투어 이 상황에 대한 글을 발표하며, 활발한 공론의 장이 생겼어요. 불과 몇 개월 지난 지금 그때를 떠올려보면 그런 열정과 상상력은 이미 희미해진 것 같아요. 반대로 오늘 우리가 하는 많은 공상을, 몇 달 후에, 몇 년 후에 과연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혹시 한심하다고들 느끼진 않을까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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