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리보이의 비사이드 세계
여기에 매끈하고 반질반질한 건 없다. 조금 어둡고 군데군데 흠이 있으며 먼지도 묻어 있다.
정규 8집 앨범 <9컷>을 발매한 기리보이, 그의 비사이드(B-Side) 세계를 들여다봤다.
회사원처럼 브리프케이스를 들고 다니는군요? 뭐가 들어 있나요? 어떤 사진에서 봤는데 서류 가방 들고 다니는 게 멋있더라고요. 노트도 있고, A4 용지 모아놓은 서류철도 있어요. 서류철에는 가사도 있고 뮤직비디오에 대해 미팅한 내용도 있고, 발음 연습, 연기 수업 내용도 있어요. 제가 말을 너무 못해서 계속 말하는 법을 배우고 있어요. 버릇 들이려고 이 가방은 항상 들고 다녀요.
음악에서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는 어마어마한 욕구가 보여요. 이번 앨범 제목도 <9컷>인데, 영화의 장면을 말하는 건가요? 어릴 때부터 영화를 매우 좋아해서 초등학교 때는 비디오 대여점 가는 게 가장 즐거운 일이었어요. 사람들이 신작 비디오테이프를 빌려가면 거꾸로 뒤집어놓잖아요. ‘언제 오지?’ 하고 늘 기다렸어요. 언젠가 영화 시나리오도 써보고 싶었어요. 앨범의 첫 시작은 ‘영화 OST 같은 분위기의 음악을 만들고 싶다’였는데, 쓰다 보니 이야기를 더 만들게 됐고 여러 장면을 짜본 거죠. 아홉 곡이라서 ‘9컷’이에요. 중간에 인스트루멘탈 곡 ‘Interlude’를 넣었는데 그로 인해 장면의 분위기가 바뀌더라고요. 괜찮은 진행이에요.
요즘 트렌드와 달리 정규 음반을 계속 내는 태도에 대해서도 묻고 싶어요. 이유가 있나요? 요즘 시대에 비효율적이긴 하죠. 예전에는 CD나 테이프를 사면 순서대로 쭉 들었잖아요. 특히 테이프는 건너뛰기가 힘들죠. 덕분에 숨은 곡도 열심히 들었고요. 의미가 있는 한 곡 한 곡으로 채워진 앨범 전체를 건너뛰지 않고 쭉 들을 때의 감동, 제가 선배 가수들의 앨범을 들으면서 느낀 그 감동 때문인 것 같아요.
유튜브 채널을 보니 디페시 모드, 비요크, 우탱 클랜 티셔츠를 열심히 사 모으던데요. 지난 EP 앨범 <영화같게>도 테이프로 내고 ‘옛날거’라는 노래도 발매하고, 과거의 것에 왜 매혹돼 있나요? 심각할 정도로 빈티지를 정말 좋아해요. 신발도 새것은 신기 부담스러워서 일부러 더러워진 걸 사요. 어머니가 너무 싫어하시죠. 어릴 때의 기억 때문인 것 같아요. 용산 가서 옛날 닌텐도 게임 보이, 휴대폰, MP3 플레이어도 사고 그래요. 새것은 느끼해요. 더러워야 멋있어 보여요.
이번 앨범이 영화라면 사랑 영화 같은데, 어떤 영화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요? ‘사람이 어느 정도의 이별까지 할 수 있을까’에 관한 이야기예요. 좋은 감정은 낯간지러워서 싫어해요. 무조건 이별 이야기예요. 감독은 기리보이고 중간중간 카메오로 홍시영(본명)이 등장해요. 전체적인 이야기는 다 픽션인데, 저도 모르게 제 경험이 한 문장씩 들어가 있어요.
사랑 노래는 공감을 많이 얻을 수 있지만 그만큼 새롭게 만들기 어려워요. ‘입씨름’, ‘인체의 신비’, ‘심한말’, ‘결말’, ‘이혼서류’ 등 그간 사랑 노래를 다른 시선으로 만들어오긴 했는데, 왜 또 사랑 노래여야 했나요? 제일 멋있어 보이는 사람은 절망적 위기에 놓인 사람이에요. 영화도 우울한 것만 봐요. 19세 이하 관람가는 아예 안 봐요. <라라랜드>가 한때 유명했잖아요. 전체 이용가인데 과연 재밌을까 싶었지만 사람들이 많이 보니 한번 보자고 틀었어요. 근데 처음 시작하자마자 갑자기 차가 막힌다면서 사람들이 뮤지컬을 하더라고요. 바로 껐어요(웃음). <인셉션>, <매트릭스> 한 번 더 봤어요. 음악도 ‘사랑 사랑’ 하는 것들은 재미없으니까 기괴한 사랑 노래를 하는 거죠. 싸우고 위기에 놓인 연인들 이야기를 좋아해요.
절망에 빠진 사람이 왜 멋있어 보이죠? 모르겠어요. 남자가 울고 지질하게 굴면 굴수록 그 사람이 되고 싶어요. 실제로 그 입장이 되면 싫겠지만요.
‘찰칵’의 주인공처럼요? ‘찰칵’은 듣고 있으면 무시무시한 내용을 상상하게 돼요. 영화 <데드풀>을 보면 총구에 ‘Smile, Wait for the Flash’라고 쓰여 있어요. 사진 찍을 때 하는 말이 총구에 쓰여 있는 거죠. 우리가 웃고 이렇게 사진을 찍지만 카메라가 총으로 보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촬영할 때도 살짝 무서울 때가 있거든요. 카메라가 무서운 물건이라는 의미로 만든 곡이에요.
만들어진 가짜 세계와 지어낸 이야기에 매혹되면서 방법적인 면에서는 서투른 스타일을 좋아하는 이유는 뭔가요? 평소에 일반인이 부르는 노래 느낌을 좋아한다고도 했고, 실제로도 음정이 안 맞는 듯이 노래를 부르잖아요. 모르겠어요. 그게 더 좋게 들려요. 흠잡을 데가 있어야 더 재밌는 것 같아요. 너무 갖춰져 있으면 거부감이 들어요. 요즘은 디테일에 신경 쓰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해보고 안 해야지 안 한 게 더 멋있을 것 같아서요(웃음). 이번 앨범 만들 때는 예전이었으면 그냥 넘어갈 것도 괜히 예민하게 수정해보고 그랬어요.
가사 중 갑자기 이태원 안경점 얘기가 나오는 등 즉흥적으로 곡을 쓰는 것 같으면서도 ‘말하자면 길어 / 다운’이나 ‘공황’ 같은 곡에서는 일부러 계획한 듯 심오한 무의식의 세계를 보여주기도 해요. 실제 작업 과정은 어떤가요? 그냥 막 썼어요. 잘될 땐 30분 만에 곡이 나오고, 노력해도 한 달간 안될 때도 있어요. 그 곡이 수록된 <기계적인 앨범> 낼 때가 제일 힘든 때였어요. 음악을 그만두고 싶었는데 스윙스 형이 저를 잡았거든요. 정신을 놓고 될 대로 돼라 하고, 그때 빠져 있던 일렉트로닉 요소를 넣어 만들고 싶은 대로 만들었어요. 버릇 없어지는 연예인병 걸리는 시기를 지나 이상한 짓거리 하고 막 살던 시기를 지나, 그걸 깨우치고 후회하던 시기를 겪은 거죠. 굳이 사람들에게 곡을 들려주고 이렇게까지 욕먹어야 하나, 그냥 집에서 혼자 음악 만들고 살면 안 되나 싶어서 정신적으로 좋지 않았어요. 모든 뮤지션이 겪는 과정일 거예요. 덕분에 지금의 제가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땐 음악이 재미없었어요. 만드는 게 너무 기계적이었어요.
그래서 앨범 제목이 <기계적인 앨범>이었던 거예요? 네, 욕 먹은 내 모습, 자만하고 우쭐한 내 모습을 바라보는데 창피하더라고요. 남 앞에 나서는 것도 무섭고. 그 앨범이 제일 대중성이 없어요. 정산서 보면, 제일 안되는 앨범이죠(웃음). 하지만 당시 아무도 하지 않던 음악적 시도를 했다는 자부심은 있어요.
이번 앨범에 지금까지의 음악 생활에 관한 곡도 있다고 했는데, 어떤 이야기인가요? ‘내자리’라는 곡인데요. 함께 음악 하던 사람들 이제 옆에 없고, 옛날에 웃으면서 얘기하던 사람들 이제 연락이 안 되는, 그런 변화에 관한 내용이에요. ‘사람들이 다 어디 갔지? 이게 내 자리가 아닌가? 다들 제자리로 돌아오겠지’ 그런 내용이에요. 이번에 <쇼미더머니 9> 촬영하면서 너무 좋았던 게 릴보이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거였어요. 음악 처음 시작할 때 같이 했던 친구로, 예전에는 매일 만났거든요. 그러다가 형들이 서로 디스하는 바람에 우리도 연락하기 민망해져서 5년 넘게 아예 안 만났거든요. <쇼미더머니 9> 촬영하는데 계속 옛날 생각이 났어요.
스스로는 어떻게 변해왔다고 느끼나요? 일단 옛날 노래는 지금 못 들어요. 너무 못해서(웃음). 그게 제일 많이 변했고요. 원래 사람들 앞에 나가서 말하는 것도 못했어요. 지금도 잘 못하지만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발전이죠. 원래 남의 일에 신경을 안 썼는데 남의 인생에 개입도 해보고요. 지난해 <쇼미더머니 8> 끝나고 서동현 아버지가 저에게 오시더니 듀퐁 라이터를 주시더라고요. 집에 왔는데 약간 눈물이 났어요. 생각 없이 살면 안 되겠구나, 내가 잘못하면 내 주변 사람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 있구나 느꼈어요. 그때부터 운동도 열심히 하기 시작했어요.
음악에 대한 생각은 어떻게 바뀌었나요? 그건 여전해요. 제가 좋으면 좋은 거예요. 음악을 시작한 이유도 내가 듣고 싶은 음악을 만들기 위해서였어요. 어떤 곡을 듣고 ‘이건 다 좋은데 가사가 이별 이야기였다면 내가 더 집중해서 들을 수 있을 텐데’ 싶잖아요. 그럼 그런 곡을 만드는 거죠. ‘내가 매일 들을 수 있는 노래’라는 기준은 여전히 지키고 있어요. 매니저와 차를 타고 갈 때도 내 노래만 듣거든요(웃음). 좀 미안하네요.
‘너무 유명해지지 말고 너무 성공하지도 말고, 1등은 하지도 말고, 적당히 하자’라는 마인드, 여전한가요? 1등은 절대, 제발 안 했으면 좋겠어요. 1등 하면 집중되잖아요. 너무 싫어요. 22위 정도에서 왔다 갔다 하다가 사람들이 간간이 듣고 누군가는 ‘그 노래 알아’ 그러다가 슬슬 사라지는 게 좋아요.
주목받는 게 싫어요? 무서워요. 그런데 잘되고는 싶으니까 적당히 잘됐으면 해요. 지난해 <쇼미더머니 8>은 주목을 덜 받아 랩 하는 친구들과 부담 없이 음악 만들고 너무 재밌었거든요. <쇼미더머니 9>가 이렇게 잘될 줄 알았으면 안 할 걸 그랬어요(웃음). 제가 간사한 거죠. 욕은 안 먹으면 좋겠고 계속 음악을 해나갈 수 있게 제 음악을 듣는 사람은 있으면 좋겠고요. 인정해요
- 패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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