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김수현이면서, 색다른 김수현
데뷔 이후 지금껏 김수현이 보여준 명제는 정확하다. 반듯하고 정갈하게. 안전핀이 뽑힌 김수현을 모노크롬 속으로 그리고 컬러 속으로 살짝 밀어 넣으면 이런 화학반응이 나타난다. 은밀하고 섹시하게, 거침없이 남성적인. 이토록 다채로운 김수현.
오늘 우리는 조금 다른 김수현을 마주했어요. 생각지도 못한 모습이 튀어나올 때는 약간의 쾌감마저 있었죠. 달랐나요? 하하. 오랜만의 비주얼 작업이라 조금 부담이 된 건 있어요. 한 번도 입어보지 않은 스타일이 계속 밀려오는데, 제가 망설이거나 낯설어하면 포즈나 표정에서 들켜버리니까 자연스럽게 보이느라 꽤 노력했네요. 오늘 제 마음속 컨셉은 ‘내려놓자’.
내려놓으니 뭐가 보이던가요. 달라진 내가 반갑나요, 낯선가요? 이상한 게 내려놓는다고 해도 완벽하게 내려놓아지지는 않더라고요. 그래도 오늘은 조금 다른 나를 장착하려고 노력했어요. 비주얼 작업을 자주 하는 편도 아니지만, 언젠가부터 이 정도 선이면 되겠다는 나름의 가이드라인이 형성되었던 것 같아요. 넘치면 오버하는 느낌을 줄 수도 있고, 부족하지만 않게 채워주면 되지 않을까 싶었죠. 제 나름의 타협 방식이었던 것 같은데, 같이 일하는 스태프들은 반복적인 작업에 약간 갈증을 느꼈던 것 같아요.
재능이 있는데도 그걸 소비하지 않는 것에 대한 아쉬움 아닐까요? 오늘 오면서 2010년에 처음 작업하던 날을 떠올렸어요. 딱 이맘때쯤이었는데 옷과 포즈를 연결시키는 모습에 깜짝 놀랐죠. 어떤 면에선 모델 출신 배우보다도 옷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어요. 기억나요. <크리스마스에 눈이 올까요?>라는 드라마를 마친 직후였죠. 제대로 작업하는 첫 인터뷰 촬영이었고, 표정이나 몸짓으로 제 느낌을 조금 드러냈던 것도 같아요. 신인의 정석 같은 게 있잖아요, 자신을 어필하고 잘 각인시켜야 하는, 그런 마음이 크지 않았을까요. 그 후로 진짜 오랜만에 이렇게 제약 없이 옷을 입고, 자유롭게 몸을 움직여보니 재밌네요.
그러고 보니 벌써 데뷔 14년 차예요. 화려한 축제는 끝났고, 명분이 중요시되는 시점이죠. 2007년에 처음 나섰으니까 벌써 그렇게 됐네요. 돌이켜보면 모든 면에서 풍요로운 과잉 상태였던 적도 있었지만, 후회하고 후퇴하며 결핍되던 시간도 있었어요. 지나고 보면 뭐가 옳다고 정의 내릴 수는 없는 건데 그 어떤 순간도 다시는 말려들고 싶지 않다거나 피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는 않아요. 결국 시간은 흐르고, 영광이든 상처든 흔적은 남기 마련이니까. 그 흔적에 진심이 담기면 명분은 드러나기 마련이죠. 아직 달려가는 중이고, 언제까지 배우로 목소리를 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저를 둘러싼 모든 감정이 아직은 견딜 만하다고 말하고 싶군요.
10년이면 그게 뭐든 한 번은 허물어졌다가 다시 세워지기도 하는 시간이죠. 위기와 기회, 어느 쪽을 더 많이 마주쳤나요? 상황에 떠밀리거나 조급한 적은 없었지만 쉼표가 필요한 시점은 있었어요. 운 좋게도 입대와 맞물리면서 질문과 답변을 동시에 찾았죠. 영화가 한 편 있었지만, 모든 사람이 극장을 찾아 영화를 보는 건 아니니 편하게 접할 수 있는 시청자 입장에서 본다면, 김수현의 얼굴은 2015년 <프로듀사>가 마지막이죠. 거기에 군 생활 2년, 제대 후 아무리 빨리 작품을 선택해도 2020년이 되어야 했으니까 ‘5년이란 빈 공간이 익숙하게 잘 채워질 수 있을까’에 대한 물음표는 있었어요. 단순히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아니었고, 익숙하면서 새로운 모습을 보이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라고 해야 하나. 디지털 플랫폼까지 가세하면서 시청자의 선택은 방대해졌는데, 저만 제자리걸음으로 나타나면 안 되니까요.
입대가 제법 좋은 출구였군요. 그렇다면 남자들의 그 흔한 군대 얘기는 어때요. 무용담을 들을 준비가 돼 있는데요. 특별한 건 없어요. 워낙 DMZ 근무 환경 자체가 무지 바빠요. 수색대대였으니까 노출될 일도 없었고, 덕분에 시간이 금방 지나갔죠. 군에 있는 동안은 그냥 올인한 것 같아요. 이런저런 생각할 시간이 많이 주어진다고들 하던데, 저는 그냥 바빴어요. 하하. 아, 인생 최대 몸무게를 찍긴 했죠. 지금 체중이 67~68kg 사이를 오가는데, 그때는 77kg까지 나갔던 것 같아요. 가끔 휴가 나와서 친구들과 볼링 치러 가면, 볼링공이 가볍다고 느껴질 정도? 아예 몸을 키워볼까 싶어서 운동에 달려들기도 했는데, 뭘 잘못했는지 인대를 다치면서 포기했죠.
비수기 배우의 특권인 ‘내려놓음’이 있었군요. 불행히도 전부를 내려놓지는 못했어요. 자유롭긴 했지만 완전히 풀어질 수는 없더라고요. 체중으로는 내려놨다고 할 수 있는데(하하), 그 외적인 부분으로는 어느 정도 선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오늘 촬영에서 뭔가 여유롭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남자들은 입대를 기점으로 가치관의 변화가 있다고 하던데 생각의 중심이 옮겨졌나요? 욕심이 없어졌어요. 그전에는 내가 이만큼 해내야 한다는 책임감도 많았고, 어떤 장면에선 내가 연기적으로 돋보이도록, 상황을 뚫고 나와야 한다는 욕심이 있었거든요. 근데 제대를 기점으로 전체 안에서 어우러지는 법을 알게 됐죠. 방송 환경이라는 게 어떤 한 개인의 독보적 영향력으로는 완성될 수 없는 공간이니까, 결국은 서로 배려하고 어우러질 때 상대도 나도 빛날 수 있더라고요. 개인적으로는 부정적인 생각을 많이 덜어냈어요. 일 외의 부분에서 제가 좀 부정적으로 상황을 직면하는 태도가 많았거든요. 생각이 많은 편이라 경우의 수도 굉장히 많이 띄워두는 편이었는데, 지금은 모든 면에서 심플하게 접근해요. 가능하면 긍정적으로, 되도록이면 깊이 파고들지 않으려고 노력하죠. 어떤 걸 너무 잘하려고 하면, 거기에 갇혀서 다른 걸 놓치더라고요. 그럼 또 후회가 늘고, 그 마음이 오히려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독이 되더군요.
그런 마음가짐이 모여 <사이코지만 괜찮아>의 ‘문강태’가 나타났군요. 역시 김수현이면서, 색다른 김수현이기도 했어요. <사이코지만 괜찮아>는 지금까지 했던 작품과는 달리 굉장히 마음 편하게 접근한 작품이에요. 컴백작이라 부담이 더할 거라고들 했는데, 저는 그 어느 작품보다 자유로웠어요. 예전에는 ‘내가 돋보여야지, 조금 자극적이어도 캐릭터가 확실하게 드러나는 연기로 승부해야지’라고 생각했다면 <사이코지만 괜찮아>는 한 걸음 뒤에서 관조적으로 움직였어요. 특별히 힘을 실어 강약을 조절할 필요도 없었죠. 선수들만 모인 경기에서 굳이 나를 드러내려고 애쓰는 자체가 아마추어 같은 생각이 아닐까 싶어요. 기록에만 연연하면 경기의 흐름 자체가 외롭잖아요, 내 페이스대로 완주만 하면 되지. 그런 마음으로 접근하니까 모든 게 쉽게 풀렸어요.
힘을 뺀 김수현과 달리 우리가 마주한 ‘강태’는 굉장히 날이 서 있었어요. 등장도 강렬했지만 끝까지 몰아치는 ‘강태’의 감정을 따라가는 게 어떤 땐 버겁기도 했으니까. 부담감은 덜어냈지만, 캐릭터의 서사는 차고 넘치는 게 강태였죠. 사연도 많았고. 감정 신이 계속 몰아치니까 연기할 때 그걸 다 끌어안고 있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어요. 매회 감정을 쏟아내다 보니 체력적인 부담도 컸고. 강태의 예민함을 표현하기 위해 마르게 꽉 차 있는 몸을 만들고 싶었는데, 그러다 보니 식단 관리도 신경 쓰였고, 운동도 쉴 수 없었죠. 근데 이건 다 개인적인 사이클 안에서 조절하면 되는 거니까 밖으로 드러낼 만한 일은 아니었고. 생각해보니 감정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긴장을 놓은 적은 없었던 것 같네요.
그럼에도 감정을 다루는 강태의 태도는 꽤나 성숙했어요. ‘상태’ 형과 ‘고문영’, 병원 사람들을 대할 때 대화의 온기나 감정의 온도를 아주 잘 조절했죠. 상대를 아끼는 마음이 너무 뜨거워도, 차가워도 안 됐으니까. 강태에게 요구되는 감정 같은 것이 있잖아요. 속도가 너무 빠르면 감정을 다치게 할 수도 있고, 느슨하게 유지하면 놓치는 부분이 생기고, 그걸 조절하는 게 중요했어요. 그런 부분을 카메라 밖에서도 적용하게 되니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에도 균형이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됐죠.
우리가 마주한 문강태는 완벽해 보였는데, 끊임없는 모니터링의 결과물인가요? 저는 현장에 충실한 편인 것 같아요. 촬영장을 벗어난 후의 이불 킥은 제 정신 건강에 아무런 도움이 못 되니까. 하하. 그 많은 스태프를 다시 모아서 재촬영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러다 보니 현장에 머무는 동안 최선을 다해서 더블 체크하는 편이에요. 정작 방송된 후에는 잘 보지 않으려고 해요. 저 신에서 왜 그랬을까, 그 감정이 아닌데… 단점만 찾게 되거든요. 이불 킥 연장전 들어가봐야 감정만 소모될 뿐 해결되는 건 없으니까.
지금 준비 중인 드라마 <그날 밤>은 어때요? 원작이 있는 걸로 아는데, 다른 관점으로 접근이 가능할까요? <크리미널 저스티스>라고 2008년에 영국에서 만든 드라마예요. 영국판은 5부작이라 스토리 전개가 굉장히 스피디하고 그런 만큼 캐릭터의 감정선도 촘촘하게 빨려 들어가죠. 반면에 미국판은 8부작이니까 서사가 좀 더 디테일하게 설명되는 부분이 있고. 각각 장단점이 있어요. 한국판은 현재로선 8부작으로 예정되어 있는데, 아직 방송 시기나 전달 방식은 결정되지 않았어요. 원작에 대한 부담감은 없어요. 아무리 똑같이 연기한다고 해도, 절대로 똑같이 나올 수가 없거든요. 표현하는 배우도 다르지만 일단 언어가 다르고, 연출가의 관점도 다 다르니까. 저는 영국판을 먼저 봤는데, 처음 든 생각은 ‘흠잡을 데가 없다’는 거예요. 주인공을 맡은 벤 위쇼의 연기는 물론 음악, 감정을 담아내는 앵글, 스타일까지 전체적인 톤 앤 무드가 모두 마음에 들었어요. 보통 이런 장르의 드라마는 진범을 찾아가는 과정에 집중되기 마련인데, 이 드라마는 주인공과 그를 둘러싼 주변 사람들의 관계를 담아내죠. 평범한 한 청년이 우연한 사건을 계기로 어떤 상황에 놓이는데, 거기에서 각자의 이해관계가 성립되면서 벌어지는 얘기예요.
관계망이 촘촘하게 얽혀 있군요. 힘없는 이 친구 주변으로 판사와 검사, 변호사 같은 권력을 동반한 힘 있는 사람들이 모여들죠. 그러면서 다들 다른 목소리를 내고 강하게 밀어붙이는데 정작 당사자인 이 친구는 자신의 일인데도 자기 목소리를 낼 기회가 별로 없어요. 심지어 부모한테까지도. 이리저리 끌려다니면서 감정도 다치고 상처도 받는데 강하게 찌르지 못하는 그 친구가 좀 답답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그래요. 그래서 감정적으로 동의하는 부분이 있죠.
작품 선택은 김수현의 목소리가 100%라고 들었어요. 지금까지는 필모그래피의 성적표가 꽤 우수한 편이죠. 지금까지는 안정적인 환경에서 모험을 즐기려고 노력했죠. 하하. 앞으로는 모험하는 쪽에 더 힘을 실어보려고 해요. 내 안의 저항 정신을 깨우려고 노력하는 중이고요. 언제나 좋은 결과를 손에 쥘 수는 없잖아요. 그런 행운이 언제까지 저를 감싸주기도 어려울 테고. 지금까지는 선택과 결과가 일치하는 부분이 많았죠. 앞으로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있지만 그래도 조금은 그 주기를 벗어나볼까 싶기도 해요. 욕심도 버리고 양보하는 법도 알게 되니 시야가 넓어지더라고요.
첫 인터뷰에서 한 말이 기억나요. 어떤 상황에 놓이건, ‘아님 말고…’의 마인드로 다가서면 후회를 줄일 수 있다고. 20대 초반에 그 이치를 깨닫기란 쉽지 않은데 말이죠. 인생의 바이브에서 나온 짬인가요. <크리스마스에 눈이 올까요?>에서 제가 내뱉은 첫 대사였어요. 상대역에게 다가가서 ‘다쳤니?’ 한마디를 툭 던지는 거였는데 그걸 잘 표현하고 싶었죠. 마음은 쓰이나 너무 친근하게 다가서면 안 되는 신이었는데, 어미 톤을 바꿔가며 엄청 다양하게 연습해도 원하는 느낌이 안 사는 거예요. 고민 끝에 ‘다쳤니(아님 말고)’라는 느낌을 넣었는데 물론 실제 대사에서 괄호 안의 내용은 감정만 담고 묵음 처리했죠. 그제야 전달하고자 하는 마음이 살더라고요. 그때 느낌이 좋아서 그 뒤로 고민되는 상황이 생기면 그 말을 적용하게 됐어요. 아님 말고… 내가 하고 싶은 감정은 전달하되 상대의 반응엔 그다지 연연하지 않아도 되니 여운이 없더라고요.
조금 더 사적으로 접근한다면, 허용 가능한 김수현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요. 재미있어할 만한 내용이 없는데… 일상의 사이클도 거의 변화가 없어요. 운동하고 집에 있고 그게 다예요. 집에서는 주로 게임을 하거나 만화책을 보는 게 전부죠. 시험 범위만 방대하고 정작 문제 출제는 비켜가는 느낌이라니까요. 하하.
최근 SNS 계정에 올라온 사진을 보니 손에 카메라가 들려 있던데, 처음 파리 촬영 때도 손에서 카메라를 놓지 않았어요. 게임하는 손으로 카메라를 잡으면 어떤 걸 담아내나요. 저에게 카메라는 기록의 의미보다, 담기는 것에 대한 공유의 의미가 더 큰 것 같아요. 요즘 들어 갑자기 카메라를 좋아하는 건 아니고, 좋아하는 것의 범위에 몇 가지가 꾸준히 반복되는 것 같아요. 볼링, 자전거, 게임, 헬스, 만화책, 스키 정도. 그때그때 주어지는 상황이나 여건에 따라 약간의 집중도가 올라가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이 정도가 주로 저의 손을 타는 것들이죠. 스키는 어차피 시즌 운동이니까 겨울에만 즐길 수 있고, 그 외에는 주기적으로 관심이 가거나 꽂힐 때 움직여요.
빤하지만, 집-운동-집이라는 사이클을 반복한다는 거군요. 빤하지만… 그래요. 게임하다 배고프면 밥 볶아 먹고, 달걀 삶아 먹고. 그러다 답답하면 자전거 타고 한 바퀴 돌고 오죠. 그게 주로 늦은 밤이나 새벽이어서 문제지만.
새벽에 움직이는 올빼미족이면, 자신만의 야식 레시피 같은 것도 있을 법한데. 하는 쪽보다는 먹는 걸 즐기는 쪽이라서요. 아, 달걀 반숙에 자신 있습니다. 6분 48초의 마법이라고 할 수 있죠. 적당히 부드럽고 ‘살캉’한 반숙의 느낌을 살리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를 거예요.
늦은 밤이에요. 오늘 야식은 마법의 달걀 반숙이겠군요. 아뇨. 오늘은 <보그> 덕분에 꿀잠 각입니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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