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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요가원에서 ‘진짜’ 배운 것

2024.01.11

by 김나랑

    인도 요가원에서 ‘진짜’ 배운 것

    인도의 요가원에 머물렀다. 햄스트링이 파열되고 나머지 공부를 했다. 난 왜 여기 있지. 단절과 수행은 고상한 판타지인가.

    Christoph Ruckhäberle ‘Untitled’, 2023, Oil on Canvas, 200×200cm

    안식월을 맞아 인도로 갔다. 인도 북부 히말라야 산기슭의 작은 마을 리시케시는 세계 요가의 수도라 불린다. 1968년 비틀스도 이곳에 8주간 머물며 요가를 수련했다. 그들이 머문 아슈람은 폐허가 됐지만 관광객에게 비싼 입장료를 받고 있다. 아슈람은 산스크리트어로 일정한 규칙을 지키며 공통의 가치관을 섬기는 커뮤니티를 뜻하나, 요가원을 아슈람이라 부르곤 한다. 함께 숙식하며 요가를 수련하는 공간이다.

    리시케시에는 수백 군데의 아슈람이 있다. 그중 구글 후기가 좋은 아슈람을 예약했다. 요가를 취미 스포츠 정도로 해왔지만, 이곳에서 요가 티칭 자격증을 따기로 했다. 회사에서 7년 일하고 얻은 한 달 휴가를 그냥 쉬면서 보내고 싶지 않았다. 뭐라도 ‘따고’ 싶었다. 휴가는 종종 그런 식이었다. 서핑을 잘하고 싶어서 발리 합숙소에 들어갔고, 스쿠버다이빙 자격증을 준비하다 필리핀 바다에서 실종될 뻔했다. 무서워서 스쿠버다이빙을 다신 못할 것이니, 자격증은 관상용이다. 그래도 뿌듯했다. 나는 아슈람 예약을 끝내고 북유럽으로 이민 가 요가를 가르치는 내 모습을 떠올렸다. 아슈람은 다른 지역에도 많지만 이왕이면 종주국 인도로 가고 싶었다. 세계 요가의 수도라니, 더 멋져.

    인도 기차를 기다리느라 밖에서 변을 봤다는 친구의 경험담을 들을 때만 해도 내 생애 인도 여행은 힘들지 싶었다. 델리 공항에 내리면서부터 내가 얼마나 오만한지 되새겼다. 앞으로 ‘절대’라는 말은 쓰지 말자. 델리에서의 시티 생활은 몇 번의 ‘호구’가 된 것 빼고는 꽤 즐거웠다. 5성급 호텔에 머물고 고급 레스토랑에서만 식사했다.

    델리에서 국내선을 타고 리시케시로 갔다. 밤 10시경 호텔에 도착했다. 직원은 “여기가 네가 예약한 아슈람”이라고 했다. 구글 지도와 다른 위치였고 홈페이지에서 보던 방이 아니었다. 매트리스에 혈흔으로 보이는 검붉은 자국이 있었다. 직원은 매니큐어라고 했다. 이불을 펼치니 노란 얼룩이 많았다. 내 눈치를 보던 직원은 나가며 말했다. “무늬라고 생각해.” 짐을 풀려고 옷장을 열었는데 먼지가 눈처럼 떨어졌다. 한국에서 가져간 물티슈를 그날 절반 정도 쓴 거 같다. 1시간 정도 청소하고 누우니 묵은 땀 냄새가 후끈 올라왔다. 늦었으니 일단 자자.

    리시케시의 11월 밤은 꽤 추웠지만 이불을 덮지 못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남미 여행 때는 빈대와 친구도 했는데 내가 변한 걸까. 아니면 나 지금 그냥 호구인 걸까. 그날 밤 방을 바꾸는 꿈을 꿨다. 아슈람 측이 미안하다고, 착각했다면서.

    다음 날 시장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아슈람 측에 연락했지만, 그곳이 한 달간 내가 쓸 방이었다. 함께 입소할 수련생 10여 명이 있는 왓츠앱 단톡방에서는 아무도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다. 요가 수련하러 온 사람들이라 마음이 넓은 건가. 아슈람 측은 이런 마음을 이용하는 거고? 나는 옮기기로 결심하고 동네의 다른 아슈람을 찾아다녔다. 오토바이와 소 무리를 헤치면서 땀을 뻘뻘 흘리며 다니는 내게 다른 수련생이 한마디 했다. “그냥 받아들여. 네 마음에 따라 얻어가는 게 다를 거야.”

    다음 날 첫 수업. 선생님은 아슈람의 위치가 갑자기 바뀐 것은 어쩔 수 없었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집처럼 여기는 곳이 집이 된다.” 나는 요가 수련생이라는 캐릭터에 이입하며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방이 아니라 선생님을 보고 이 아슈람을 선택한 거라며. 사실 둘러본 다른 곳의 컨디션이 비슷했다. 그날 저녁, 시장에서 새 이불과 요를 샀다. 세계 각지에서 온 수련생들이 방에서 열심히 인센스를 피우는 걸 보면 내 방만 특별한 건 아니었나 보다. 다들 이곳을 집처럼 만들기 위해 노력 중이었다. 그날 밤 내 발꿈치를 봤다. 까만 때가 발꿈치를 따라 원을 그렸다. 맨발로 다녔기에 굳은살이 박여서 씻어도 잘 지워지지 않았다. 침대 가지고 뭐라 했는데 내 발이 더 더러웠다.

    아슈람 생활은 새벽 6시에 시작해 오후 6시 저녁 식사로 끝났다. 산스크리트어로 된 노래를 30분간 부르면서 새벽을 연다. 선생님은 꼭 샤워를 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참석하랬지만 그러기엔 너무 추웠다. 그 뒤로는 각종 수업이 이어졌다. 신체적인 요가 수련뿐 아니라 철학, 해부학, 아유르베다, 호흡, 명상 등을 배웠다. 너무 피곤해서 명상 수업 때는 졸곤 했다. 중간에 명상 수업이 껴 있어서 고마울 지경이었다.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들으려니 더 힘들었다. 견갑골, 과신전 같은 영어 단어는 태어나서 처음 들었다. 여기 와서 휴대폰을 안 보려고 했는데 검색하느라 수업 시간 내내 끼고 있었다. 미국인 수련생은 자신도 힘들기는 마찬가지라고 했다. 인도 영어 발음이 익숙지 않다면서. 너무 많은 걸 바라는구나, 나는 차마 말하지 못했다. 이곳에선 부정적인 말은 금지였다.

    하루 두 번 식판에 자율 배식이었다. 다들 두세 번씩 갖다 먹었다. 비건식이라 그런지, 머리를 많이 써서인지 자주 배가 고팠다. 식사 때는 잡담 금지, 밥을 20번씩 씹어 넘겨야 해서 나중엔 침 맛이 났다. 그래도 내 입에는 꽤 맛있었는데, 하나둘 수련생들이 땅콩버터를 들고 식당에 나타났다. 나도 점차 한국에선 먹지도 않던 초콜릿을 생존 간식처럼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그래야 눈이 떠졌다. 오후 1시부터 3시까지 휴식 시간에는 쓰러져 잤다. 다른 수련생도 첫 2주간은 거의 외출이 없었으니 모두에게 쉽지 않은 적응 기간이었나 보다.

    그때쯤 주변 아슈람에서 벌써 이탈자가 나왔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다들 한두 군데씩 아프기 시작했다. 나는 식판을 들고 계단을 내려오다가 굴렀다. 와장창 소리가 나는 바람에 다들 뛰어왔는데 창피해서 일어나려다가 아파서 주저앉았다. 너무 피곤해서 정신을 놨던 거 같다. 네덜란드 간호사인 수련생 페라가 주방에 얼음을 요청했지만, 냉동실이 없었다. 페라는 나를 부축해 방으로 데려간 뒤 빨래 통에 차가운 물을 받아왔다. 그러고는 그냥 갈 줄 알았는데 옆에 앉아서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네팔에서 싱잉볼 수업을 받고 인도로 넘어왔으며, 간호사이긴 하지만 살사를 출 때 가장 행복하다고 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나를 봤다고 말했다. “네가 목으로 숨을 쉬더라.” 숨이 짧다는 건, 그만큼 내가 조급해 보인다는 것. 페라는 강박을 좀 내려놓으라는 말을 에둘렀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열심히 하고 싶어.”

    얼마 뒤엔 오른쪽 햄스트링(허벅지 뒤쪽)이 파열됐다. 너무 아파서 다리를 펼 수 없었다. 선생님이 가진 ‘호랑이연고’는 소용없었고, 한국에서 가져간 파스는 진즉 다 썼다. 검색해보니 한 달 정도 푹 쉬라는데, 여기까지 와서 그럴 수 없었다. 통증을 참고 요가를 했다. ‘난 가끔 눈물을 흘린다.’ 싸이월드 명언이 떠올랐다.

    멕시코에서 온 알렉스도 허리 통증으로 거의 벽에 기대앉아 있었다. 그는 리시케시에만 수차례 온 20년 차 요가 선생님이다. 알렉스는 내게 햄스트링 파열에 오히려 행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자신도 허리가 아픈 덕분에 다른 이들을 관찰하고 또 다른 깨달음을 얻었다고. 그것이 우리가 철학 수업에서 배운 산토사(Santosa)란 개념이라고. “미안한데, 알렉스. 나는 부상을 극복하고 싶어”라고 말하며 그를 실망시켰다.

    쉬지 않고 요가를 했기에 마지막까지 아픈 채 퇴소했다. 아마 다치고 바로 며칠 쉬었다면 회복됐을 수 있다. 알렉스는 이런 미생을 알아보고 리시케시의 유명한 선생님들 강의나 사원에 나를 데려가곤 했다. 그를 따라다니면서 이 세계에서 안정을 찾은 사람들을 만났다. 이미 알지만 실천한 적 없는 조언을 들었다. “알렉스, 너처럼 되려면 난 얼마나 걸릴까?”라고 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질문도 강박이었다.

    여러 경험으로 잠시 감화됐다가도 나는 나. 체력이 회복되던 3주 차부터는 주얼리 쇼핑을 다녔다. 가게 주인과 친해져서 내가 문 열고 들어가면 그는 짜이를 배달시켰다. 실기 시험을 통과한 날엔 탄생석 팔찌를 샀다.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면서. 그 팔찌는 시장에서 잃어버렸다. 이 또한 하늘의 가르침인가 싶었다. 이곳에 오래 머무는 동안 생각이 수백 번씩 바뀌었다. 감화됐다가 다시 서울의 내가 됐다가. 나뿐 아니라 다른 수련생도 이즈음 체력이 회복됐는지 카페에도 가고 밤에 디스코 파티도 열고 주말엔 래프팅도 했다. 우린 11월 30일, 마지막 축복 의식을 치르고 자격증을 나눠 가졌다.

    그곳에선 축복 의식이 많다. 꽃목걸이를 걸고 선생님이 축복해주는 것이 다지만 다들 진지했다. 우는 이도 많았다. 사람 마음은 다 비슷하구나. 다들 나아지고 싶구나. 이런 의식은 나도 울기 직전으로 이끌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껏 무조건적인 축복을 해준 이는 엄마였다.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엄마에게 잘하자고 했다. 동생은 “누나, 향수병 시작이구나”라며 생사나 자주 알리라고 했다.

    한국으로 돌아오고 이틀 뒤 회사에 출근했다. 어제도 출근한 것 같았다. 하긴 한 달이 긴 시간은 아니다. 책상에 두고 간 마들렌에 곰팡이가 피었을 뿐 달라진 환경은 없다. 나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아슈람에서 졸업식을 마치고 델리로 돌아올 때 택시 기사를 험담했다. 5시간 거리를 13시간 동안 운전하면서 본인 볼일을 다 봤기 때문이다. 아슈람에서 온갖 좋은 철학을 배워도 나는 나였다. 다만 ‘그럴 만한 일이 있겠지’ 이해하려던 시도가 변화라면 변화였다.

    이런 작은 변화마저 몇 달이면 사라질지도 모른다. 귀국 후 자동 조종(Auto Pilot) 상태로 자꾸 돌아가려 한다. 파일럿이 비행기를 자동 조종 상태로 두듯이, 쏟아지는 카톡과 업무, 뉴스에 습관처럼 살아간다. 다행히 이전만큼 괴롭진 않다. 이전엔 이리 살아도 될까 싶었는데, 직장인이라면 업무는 수행해야 하고, 잡지 에디터니까 세상 돌아가는 정보를 흡수한다. 이 상황을 받아들이면서 그 양을 조절하기로 했다. 그러니 내 인생에 죄책감이 덜 든다.

    다만 아슈람 선생님이 말했듯이 매일 1시간은 오로지 나를 위해 투자한다. 1시간 동안 요가를 할 수 있고, 피곤하면 누워서 호흡을 관찰한다. ‘종일 세상사에 몰두하느라 바쁜데 1시간은 낼 수 있잖아?’라면서. 이마저 얼마나 갈지 모른다. 또 한 달간 수련 여행을 떠나야 할지 모른다. 그러려면 3년을 더 일해야 한다. 그래야 안식월이 주어진다. ‘3년 더 일할 수 있어서 행복해’라고 말해야 하나. 알렉스에게 물어보고 싶은데 그는 멕시코로 돌아갔다. 이젠 내가 나에게 답해야 한다. (VK)

      그림
      Christoph Ruckhäber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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