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style

발리에 이런 거 입고 오지 마요

2020.08.13

by 조소현

    발리에 이런 거 입고 오지 마요

    자유롭게 여행 떠날 날을 기다리며, 바캉스 룩에 대한 고찰.

    여름이 다가오면 온갖 매체에서 ‘바캉스 룩’ 콘텐츠가 쏟아진다. 그걸 지켜보는 나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른다.

    ‘안 돼! 그거 아니야! 그러지 마요!’

    나는 동남아 관광지에 산다. 휴가 분위기에 들떠서 평소라면 입지 않을 회심의 아이템을 걸치고 거리로 나섰다가 시선 세례를 받고 ‘당장 호텔로 돌아가서 이 옷을 벗어 던지고 싶다’는 표정으로 진땀 흘리는 사람을 자주 본다. 안다. 남의 옷차림을 지적하는 건 난생처음 가보는 여행지에서 현지 분위기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돌아다니는 것보다 훨씬 부끄럽고 못난 짓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쳐다보지 않기 위해, 아무런 판단을 내리지 않기 위해 애쓴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이제 막 도착한 단기 관광객이군’ 혹은 ‘저 사람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데 내 느낌일 뿐인가’라는 의식의 흐름까지 막을 수는 없다. 게다가 상대가 한국인이면 스타일을 결정하기까지 그가 참고한 자료가 너무 훤히 보여 미안할 지경이 된다.

    생각해보자. 발리 길거리에서 잔꽃무늬 맥시 드레스나 가슴과 허리 사이 어딘가 고무줄이 들어간 시폰 드레스 같은 걸 입은 동양인은 십중팔구 한국인인데, 나는 이런 룩을 한국 패션 잡지나 유튜브, 쇼핑몰에서 이른바 패션 에디터나 스타일리스트라는 사람들이 동남아 휴양지에 적합한 차림새라고 추천하는 장면을 자주 본다. 여행을 앞두고 그 동네선 뭘 입어야 되나, 날씨는 어떤가, 남들은 어떤 걸 입나 궁금해서 찾아본 사람들은 차츰 특별한 곳에서는 특별한 의상이 필요하다는 착각에 사로잡힌다. 화려한 드레스와 볼드한 액세서리, 낭만적인 밀짚모자로 트렁크를 가득 채우는 게 좋은 아이디어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휴가 내내 럭셔리 리조트에만 머물겠다면 그것도 괜찮다. 하지만 ‘리조트 룩’과 ‘바캉스 룩’은 엄연히 구분해야 한다. 누사두아의 최고급 리조트와 프라이빗 해변을 떠나 진짜 세상으로 나서는 순간 낭패감이 당신을 사로잡는다. 혹은 대한민국이 과도하게 ‘여성스러움’에 대한 집착이 강한 나라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레포츠로 유명한 동네로 여행 오면서 한국형 ‘여신 룩’, 여릿여릿 ‘여친 룩’, 낭만 히피 룩만 챙겨왔다가 기가 죽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리하여 당신은 현지 도착 하루 만에 그런 옷이 지긋지긋해진다. 아는 사람 없는 동남아에서라면 아무거나 입을 용기가 날 줄 알았는데 어딜 가나 한국인이 바글대고 모두 나를 쳐다보는 것만 같고 더우니까 멋 부리기도 귀찮다. 결국 당신은 비상용으로 챙겨온 너덜너덜한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고 응급 쇼핑에 나선다.

    내가 남 말할 처지는 아니다. 나는 발리에서 연예인 여름 화보 촬영을 진행한 적도 있고, 업계 친구들이 진행하는 것을 본 경험도 많다. 카메라 앞 모델들은 크루즈 룩을 떨쳐입고 하이힐 위에서 당당한 포즈를 취한다. 하지만 촬영이 끝나고 놀러 나갈 땐 그들도 티셔츠와 반바지, 플립플랍이다. 이 사기극은 소비자들이 리얼웨이 룩을 위해 참고하는 공항 패션에서부터 시작된다. 공항 패션은 그나마 실용 캐주얼이 컨셉이지만 그것도 결국 협찬과 스타일링의 함정을 벗어나지 못한다. 네이버, 인스타그램, 유튜브, 핀터레스트에 ‘바캉스 룩’을 쳐 넣는 순간 당신은 패션업계의 거대한 ‘작전’에 말려들기 시작한다. 나도 한때 이 작전의 공범이었던 셈이다. 그래놓고 친구들이 발리에 놀러 온다고 하면 “멋 부리지 말고 티셔츠와 반바지만 챙겨서 가볍게 와. 어차피 네 몸매 보는 사람 없으니까 시원하고 편한 게 최고야”라고 당부한다.

    당신은 정말 쇼츠와 티셔츠 차림의 청춘이 가득한 해변에서 혼자 맥시 드레스에 밀짚모자를 쓰고도 새색시처럼 보이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여행지에서 ‘역시 중국인들은 옷차림이 과하다니까’라는 시선을 신경 쓰지 않을 자신 있나? 언제나 모자란 것보다 과한 게 문제다. 특히 여행 기분에 휩싸이면 쉽게 오버하게 된다. 물론 당신이 저녁도 주말도 없는 대한민국 노동자라서 반들반들한 무채색 합성섬유 정장밖에 없다면 여행을 위한 쇼핑이 따로 필요하긴 할 거다. 그래도 한국에서 주말에 친구들 만날 때 입지 않을 옷은 사지 마라. ‘이건 휴양지 갈 때마다 입겠지?’ 틀렸다. 휴양지에서만 입을 것 같은 옷은 휴양지에서도 입지 않게 된다. 특히 여행지 날씨가 30도 넘어가면 멋 부리는 태도 자체가 촌스럽게 느껴진다. ‘발리 여행 사진을 보면 너풀너풀한 드레스 입고 정글에서 그네 타고 그러던데? 과하면 어때, 나도 인생 사진 찍을래.’ 생각하는 당신, 좋다, 너풀너풀 드레스 사라. 하지만 카메라 밖에서도 여행은 계속된다는 것, 여행지도 그 나름 일상의 공간이라는 것도 기억해두자.

      이숙명(칼럼니스트)
      에디터
      조소현
      사진
      A Befendo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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