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진희의 신념
지진희는 인생이 자신에게 공정한 기회를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이 금속공예를 계속 했어도 멋진 아티스트가 됐을 거라고 확신한다. 세종대왕과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좋아하는 마흔 살의 남자. 드라마 〈동이〉의 숙종으로 열연 중인 지진희의 아름다운 신념.
공석에서 지진희를 만난 건 세 번째다. 사석에서 지진희를 만난 건 훨씬 많다. 지진희는 재능 있고, 너그러우며, 자신감에 차 있었고, 다정하며, 솔직했다. 10년 전 〈줄리엣의 남자〉라는 드라마의 주역으로 데뷔했을 때부터, 그는 여기자들 사이에서 소리 없이 인기를 끌었다. 수많은 신인 배우들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연예계에서 그다지 연기 실력이 출중하지도 않았던 한 남자 배우일 뿐이었는데도 말이다. 전직 그래픽 디자이너였고, 사진 어시스턴트였으며, 배우가 된 뒤로도 로모 카메라와 직접 만든 모형 비행기를 들고 다니며 몽상적인 표정을 짓는 남자. 처음부터 그는 언제 뜨거나 떨어질지 몰라 조바심을 치는 자기도피적이고 과장된 연예인 부류가 아니었다. 근성이 좋은 평범한 직업 배우였고, 비범한 중력을 지닌 남자였다. 몇 년 전 첫 영화 〈H〉에 함께 출연한 염정아는 인터뷰 자리에서 지진희에 대한 호감을 적극적으로 표현했다. 당시에 홍보 담당자는 농담처럼 귀띔했다. “지진희 씨에게 여자 친구가 없었다면 그녀가 대시했을지도 몰라요.” 나는 그때 지진희의 여자 친구가 얼마나 매력적인 여자일까, 궁금했다. 그리고 몇 년 후 여자 친구에서 아내가 된 이수연을 통해 사적인 지진희를 알게 되었다(이수연은 남자 지진희라고 할 만큼 깊은 눈매에 정직한 턱선과 흰 피부를 지닌 총명하고 아름다운 여걸이다).
재작년 가을, 지진희는 트레이닝복을 입고 평범한 SUV차량을 몰고 잠실의 어느 외진 아파트 가로등 앞에서 우리를 기다렸다. 영화 촬영을 끝내고 약간의 피로감이 섞인 얼굴로 가을 여행을 떠난 아내를 마중 나왔고, 동행인 친구들을 집까지 바래다 주겠다고 격의 없는 호의를 보였다. 그 뒤로 몇몇 친구들이 모인 술자리에서 지진희는 카메라를 들고 나를 포함한 지인들의 얼굴을 파파라치 카메라로 찍어서, 흑백 사진으로 인화해주곤 했다. 그가 찍은 사진은 거친 입자 속에서도 심도가 뛰어나서 피사체가 된 인물들은 독특한 깊이로 빛났다. 사람들의 사라진 옆얼굴이나 표정을 발견해내는 포토그래퍼 지진희의 사진들은 감동적이었고 재미가 있었다.
인생은 신나고 근사했다. 우리는 종종 케이크와 청포도와 어란을 앞에 두고 축제 분위기에 젖었고, 머릿속은 너무 많은 약속과 의리, 즐기고 싶다는 계획으로 가득했다. 지진희만 빼고. 그는 다음날 새벽부터 있을 운동과 촬영을 위해 항상 먼저 다섯 살 난 아들을 데리고 일어섰다. 지진희는 대화를 독식하거나 침묵하지 않으면서 진심을 피력하고 간간히 농담을 던지고, 사람들의 빈 와인 잔을 살뜰하게 채워주면서 동시에, 아들 영준이의 친구 노릇도 잊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특별한 사람이라고 의식하지 않았고, 그래서 주변인을 진짜 그의 ‘이웃이나 친구’ 라고 느끼도록 만들었다. 그가 배우라는 걸 인식할 때는 그의 아내가 약간의 유머와 자긍심을 섞어 그를 ‘우리 대배우 지진희 씨’ 라고 부를 때뿐이었다. 지진희는 아내의 격려를 존중했지만, 배우로서도 사람들이 자신을 객관적으로 봐주는 걸 더 좋아했다.
과거의 경력을 이야기할 때도 그는 기자들이 자기 나이를 깎거나 과거에 어시스턴트가 아닌 포토그래퍼였다고 잘못 기재한다고 불평하곤 했다. 저는 그런 배려를 바란 적이 없어요. 그들이 잘못 쓸 뿐이죠.” 〈동이〉에서 엉뚱하면서 지략이 뛰어난 행동형 임금 숙종으로 인기를 얻으면서도, 그는 자신보다 머지않아 장희빈과 동이의 공교육 사교육 대결이 더 흥미진진해질 거라고 얘기한다. 이하 감독이 연출한〈집 나온 남자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그는 라디오 생방송 중 ‘이혼 하겠다’ 고 선언하는 찌질한 철부지 영화 평론가로 목에 깁스를 한 채 아내를 찾아나선다), 그는 함께 출연한 양익준과 이문식을 더 앞에 세우곤 했다. 그는 절대로 다른 배우들과 기싸움을 벌이지 않는다.
지진희는 항상 인생이 자신에게 공정한 기회를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이 금속공예를 계속 했어도 멋진 아티스트가 되었을거라고 확신했다. “공예를 할 때도 입체적으로 생각하면서 머릿속으로 돌려봐요. 남들이 6시간에 끝낼 것을 저는 1시간 만에 끝내는 식이었어요. 저는 대학에 갈 생각도 없었어요. 4년이라는 시간은 낭비였어요. 부모님께도 말씀 드렸죠. ‘모두가 믿지 않아도 날 믿어달라’ 고.”
조금 전 사진가 오중석의 스튜디오에서 드라마틱한 이미지의 사진을 찍고 모두의 감탄을 이끌어 내고도 지진희는 자신의 사진을 보기를 거절했다. “제가 사진을 보면 사진가들이 부담스러워 하더라구요.” 그리고 인터뷰를 위해 찾은 카페에서도 가족들과 함께 이곳의 빵을 시식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다. “이 집 빵이 정말 맛있어요. 아내와 아이에게 꼭 먹게 해주고 싶은데, 시간이 여의치 않았어요.”
냉정함과 관대함, 그리고 자신감은 지진희의 직업 생활과 가정 생활을 이루는 중요한 테마다. 인간 관계를 쌓겠다는 목표로 들어간(집에서 가장 가까운) 2년제 대학 시각디자인과, 그리고 아르바이트로 시작한 제일기획의 그래픽 디자이너 생활, 우연한 기회에 들어선 사진가의 어시스턴트, 그리고 서른에 시작한 배우, 이탈리아 와인 기행을 책으로 써낸 작가까지. 매 시간 그는 조바심이라는 게 없었다. 그는 자신을 믿었다. 언젠가 결혼이 방황을 끝내는 데 특효라는 친구의 말에 그가 단호하게 대꾸하는 것을 들었다. “글쎄요, 저는 인생에서 한 번도 방황해본 적이 없는데요.”
그 말은 하나의 충격이었으며, 지진희를 해석하는 중요한 키워드이기도 했다. 방황해본 적이 없다니? “전 뭘 해도 최고가 될 수 있다는 신념이 있어요. 그래서 차분히 그 길을 걸어갈 뿐이에요.” 그는 평생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세종대왕과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롤 모델로 삼았다. 알다시피 그들은 방황할 겨를이 없었다. 모든 위대한 아티스트들은 자신의 미적인 신념을 굽히지 않는다. 그는 자신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절대 쉬운 방법을 선택하지 않도록 자극했다.
이 모든 것이 삶에 대한 엄격하면서도 낙천적인 지진희의 접근 방식이었다. 전 사이더스 HQ의 본부장이었던 박성혜가 10년 전 지진희를 발탁한 사건은 유명하다. 모 캔커피 광고 촬영 차 한국에 온 금성무가 지정된 촬영 시간에 칼같이 가버리자 산더미처럼 남은 촬영 분량에 얼굴이 하얗게 된 감독이 현장에 있던 스태프를 우연히 발견하고는 “오케이, 너라면 되겠다” 하고 만세를 불렀다니, 그 짝퉁 금성무가 바로 사진 조수로 현장에 참여한 지진희였다. 그를 만나보고 반한 박성혜가 쫓아 다니며 배우 해보라고 권했을 때, 매번 거절하다 1년이 되던 날 지진희가 말했다. “한번 해볼게요. 1년 안에 배우를 느끼게 해주세요. 나는 그렇게 시간을 많이 할애할 수 없어요.” 그리고 1년은커녕 2년 동안 어떤 연예 활동도 없이 그저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그는 그 기간에 단 한마디의 불평도 하지 않았다.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그가 배우가 되라는 프러포즈를 받아들인 직접적인 이유는 IMF가 터져 스튜디오에 감원 바람이 불자, 생계형 유부남들 대신 그가 스스로 직장을 그만두었기 때문이었다.
지진희는 이후 〈줄리엣의 남자〉 〈러브레터〉 〈대장금〉 〈파란만장 미스김 10억 만들기〉 〈봄날〉 〈스포트라이트〉 〈결혼 못하는 남자〉로 대중의 사랑을 얻으며 조금씩 스타로 발돋움했고, 영화 〈H〉 〈퍼헵스 러브(합작 영화, 진가신)〉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 〈오래된 정원〉 〈수〉〈평행이론〉 〈집 나온 남자들〉을 통해 뛰어난 배우로 조금씩 성장해갔다. 그리고 얼마 전 〈동이〉로 그토록 바라던 왕의 지위에 올랐다. 그는〈동이〉의 숙종으로 〈러브 액추얼리〉의 휴 그랜트 같은 인간적인 매력이 살아 있는 정치가를 연기하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의 노력은 성공적으로 평가 받고 있다. 지진희의 부모님과 장인, 장모, 아내, 그리고 아들은 그가 왕이 된 것을 무척 기뻐했다. 그는 자신이 가족이 기뻐하는 일을 해냈다는 것을 자랑스러워 한다. 한편으로는 “제가 혼자 지냈다면 산에서 칠보 공예나 하면서 지냈을 거예요” 라고 얘기하면서.
그는 2009년과 2010년을 매우 바쁘게 보냈다. 〈결혼하지 않는 남자〉로 뻔뻔하고 자기 중심적인 독신남 역할을 유머러스하게 소화했고,〈평행이론〉으로 팽팽한 스릴러 연기를 했으며, 〈집 나온 남자〉로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의 뒤를 잇는 소심한 지식인 역할을 깔끔하게 완성해냈다. 그것은 그에게 전력질주에 가까웠다. 배우가 된 지 10년이 지나면 톱이 되어 있을 줄 알았던 지진희식 ‘신념’ 은 냉혹한 자체 평가에 의해 벽에 부딪혔고, 그래서 그는 다음 10년을 바라보기로 했다. 술을 끊고 운동을 시작했기 때문에, 그는 현재 아주 멋진 복근을 갖고 있다. 마흔이 되면서 암벽 등반도 시작했다. 그는 그것이 미래 10년을 위한 투자라고 생각한다.
당신도 알다시피 이제 마흔은 아주 멋진 나이다. 관리가 잘 된 마흔에서 쉰까지 남자는 참을성이 있고, 명예를 지킬 줄 알며, 여자와 가정을 존중하고, 섹시하기까지 하다. 20대와 30대는 오히려 사춘기에 가깝다. 30대 초반에 〈줄리엣의 남자〉에서 첫 주연을 했을 때, 청년 지진희는 경험 없는 초급 연기로 카메라로 얻어맞기 직전까지 갔다. 숨막히는 방송 현장은 이 고도의 감정 노동자들을 거칠게 몰아붙였고, 지진희는 여배우에 대한 저급한 처우에 분노하며 방송 종영 후 감독에게 남자 대 남자로 대들었다. 욕설이 오가고, 술상이 뒤집어지며, 신인 연기자의 미래는 암울해지는 듯했다. 다행히도 다음날, 감독은 지진희의 정의로움을 남자 대 남자로 인정했다. 그 후로 지진희의 남자다움은 많은 감독들을 매료시켰다. 〈대장금〉의 이병훈 감독, 〈오래된 정원〉의 임상수 감독이나 〈수〉의 최양일 감독은 신념이 강하고 인내심 있는 남자로서 그를 신뢰했다. 임상수 감독은 황석영 원작의〈오래된 정원〉에서 그를 장기복역수로 수십 년간 감옥에 가둔다. 비전향 장기수로 1평 반의 감옥 속에서 혼자 조용히 늙어간 지진희((상대역은 염정아였다). 그가 흰머리로 웃을 듯 말듯한 표정을 지을 때, 남자가 섹스를 하지 않아도 섹슈얼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는다. 동생을 죽인 자를 향해 지옥도에 가까운 폭력을 보여주는 하드보일드 클래식 〈수〉가 개봉됐을 때, 국내 액션 감독들은 지진희의 처절한 움직임에 자신들이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패닉 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그는 수십 명을 상대로 사방이 피칠갑이 되도록 싸운다. 무엇이든 지진희는 끝까지, 생명이 위험해질 때까지 자신을 밀어붙인다. 임상수는 ‘지진희가 죽을 수도 있다’ 는 생각이 들어서 촬영을 중단한 적이 있다고 했다.
〈피와 뼈〉로 세계적인 거장으로 인정받는 최양일 감독도 〈수〉가 끝나고 지진희에게 말했다. “나를 계단으로 밟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라.” “임상수는 말투도 눈빛도 손짓조차 섹시하지요. 최양일 감독은 거대한 산입니다. 산전수전 공중전을 다 겪은 큰 할아버지예요.” 지진희를 통해 나는 남자 감독들을 예술가로서가 아니라 담백한 남자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나는 가끔 〈대장금〉이 끝난 후 팬클럽 창단식에서 지진희가 했다는 말이 떠오른다. “나는 민경호가 아니고 지진희다. TV속의 민경호를 사랑해서 온 사람은 가달라. 여러분은 지진희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약속할수 있는 건 나는 더 나은 배우가 될 거다. 그러니 여러분은 인간 지진희를 지지하는 사람이 되어달라.” 캐릭터 이미지에 기댄 ‘왕자병’ 스타들이 창궐하는 시대에, 지진희는 대중들에게 정면으로 환상을 깰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유명 인사, 돈, 일로 인한 스트레스로부터 스스로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연기는 여전히 잘 못해요. 엄밀히 얘기하면 예전보다 나아지고 있어요. 정말 행복한 건 점점 더 나아질 거라는 거죠”라고 지진희는 안정적인 보이스 톤으로 말했다. 내가 볼 때 결혼과 가족은 이 남자를 더 근사하게 업그레이드 시켰다. “결혼을 안 했다면 지금보다 더 자유롭고 연기를 잘 할 수도 있었을 테지요. 하지만 결혼으로 내가 아닌 가족의 눈으로 세상을 봅니다. 흔들림 없이 더 오래 갈 수 있게 된 거지요.”
지진희는 그의 표현대로라면 ‘되게 예쁘고 설레게 하는’ 아내와 ‘멋있고 질투 나는’ 아이와 함께 성숙한 가정을 이루고 있다. 이 세상에서 ‘사랑’ 과‘충성심’은 보기 드문 덕목이다. 나는 촬영장으로 떠나는 그를 향해 매일 90도로 감사를 담은 인사를 하는 지진희의 아내와 항상 아빠를 이기고 싶어 하는(아빠보다 힘이 약하고 돈을 벌 수 없다는 사실을 슬퍼하며) 지진희의 아이가 그 누구보다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이 연예계에서 가장 사려 깊고 무엇보다 더 나은 미래를 향해 가는 가장을 가졌으니 말이다. 그가 바로 지진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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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
- 김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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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탭
- 스타일리스트 / 고병기, 희진, 헤어 & 메이크업 / 라끌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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