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여정, 욕망의 얼굴
김대승 감독은 신작〈 후궁; 제왕의 첩〉에서 탐욕의 끝을 보여주고자 했다. 격렬한 운명의 공간인 궁에서 생존과 자존의 줄타기를 한 조여정은 그 지옥을 경험했다. 마치 익스트림 스포츠를 끝낸 듯 연대감으로 충만한 두 주인공을〈 보그〉가 만났다.
작년 가을 부산영화제에서 조여정을 만났을 때, 그녀는 곧 <후궁: 제왕의 첩(이하 <후궁>)> 촬영에 들어갈 거라고 귀띔했다. “두 남자의 사랑을 받는 정말 매혹적인 역이에요. 김대승 감독과 영화를 찍을 수 있다니 꿈만 같아요”라고 말할 땐 두 볼이 복숭앗빛으로 발그레하게 빛났다. 하얀색 샤워가운을 입고 바다가 보이는 객실 침대에 걸터앉은 조여정은 ‘지옥 같은’ 궁으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 휴식을 취하는 듯 보였다. 그리고 그날따라 더 연약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사진가 조선희가 촬영한 <후궁>의 티저 포스터는 강렬했다. 카메라를 바라보며 ‘무아지경’의 표정을 보여줬던 <하녀>의 전도연 이후로 처음보는 격동의 클로즈업. HMI 조명을 받아 머리카락 한 올까지 살아 있는<후궁> 포스터 속 조여정은 ‘욕망의 맨홀’에서 막 고개를 쳐든 숨가쁜 얼굴이었다. “눈빛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어요”라고 사진가 조선희는 감전된 듯한 표정으로 전했다. 오늘 <보그>가 조여정과 김대승 감독을 함께 부른 데는 이유가 있다. 전작인 <혈의 누>에 이어 <후궁>으로 ‘염치 없는 자들의 지옥’을 완성해낸 염세주의적 작가 김대승과 전작 <방자전>에 이어<후궁>으로 선정적인 여론재판의 통과제의를 마주한 담대한 여배우 조여정은 현재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열쇠와 자물쇠 같은 관계이기 때문이다. ‘정사 신’이 강렬한 영화를 찍은 후 감독과 여배우는 잠정적으로 동맹 관계다. 서로의 예술적 후원자이자 연기적 보호자가 된달까. 자칫 여배우에게 ‘노출’이라는 심리적 트라우마가 제대로 치유되지 않을 경우(에로배우처럼 편파적으로 몰아가도 안 되지만, 극한의 노동과 용기에 대한 평가가 없어도 허무하다), <색, 계>의 ‘시옷’자도 꺼내지 말라던 탕 웨이와 왕가위 같은 소원한 관계가 될 수도 있다.
조형이 예쁜 몸부터 작은 두상까지 조여정은 속이 꽉 차 보였다. 그녀는 부산에서 내가 선물한 책 <시, 나의 가장 가난한 사치>에 실린 시를 읽는 게 연기 연습에 도움이 됐다고 치하했다. “심보선의 ‘슬픔이 없는 15초’나 문정희의 ‘아내’ 같은 시들이 참 좋았어요.” 시와 함께 트위터도 요즘의 그녀를 설명하는 데 중요한 키워드다. “영화에 대한 기대감을 보여주는 사람도 있고, ‘또 벗었다’라는 데만 관심을 두는 사람도 있죠. 어쨌든 전 상업영화를 했고, 관객들이 극장에 오는 게 중요해요. 제가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을 했다고 생각하거든요.”
조여정과 김대승 감독의 만남을 설명하기 위해선 김대승의 지난 영화인 <혈의 누>와 조여정의 <방자전>을 되짚어봐야 한다. <혈의 누>는 조선시대 외딴 섬마을에서 벌어지는 연쇄 살인 사건을 통해 집단적 탐욕에 사로잡힌 마을 사람들의 광기에 카메라의 칼을 들이댔다. 합리적인 외부 수사관(차승원)의 눈으로 그려진 섬은 은혜와 자비를 잊고 서로를 잡아먹는 ‘지옥’의 아귀다툼이었다. 비슷한 이름의 김대우 감독이 연출한 <방자전>은 자존감 있는 방자(김주혁)와 자격지심 강한 이몽룡(류승범), 두 남자의 구애를 받는 조여정이 등장한다. 기술과 진심이 뒤섞인 연애의 난장판 속에서 조여정은 권력의 섹시함에 눈뜬 매력적인 여인을 완성했다. 그리고 예상했다시피, 이 두 영화가 교차되는 지점에서 두 사람이 만났다. 영화적 공간으로 궁지에 몰린 인간 본성의 사악함과 치졸함을 드러내는 공간으로 섬 대신 궁이 선택되면서, 왕과 다른 남자 사이에서 생명을 건 ‘정사’를 벌이는 여인 <후궁>이 탄생한 것이다.
“처음에 시나리오가 왔다고 했을 때 의아했어요. 이렇게 큰 프로젝트가 왜 나한테 왔을까? 많이 돌다가 왔구나, 그렇다면 노출이 있나 보네. 여배우들이 고생할 이유는 그거밖에 없거든요. 그런데 김대승 감독이라면 명분 없는 노출을 하실 분이 아니잖아요? 궁에 사는 첩의 이야긴데 갇혀 지내는 사람들은 욕망이 한쪽으로 표현되는 게 당연하죠.” 차분한 분위기를 내뿜는 외유내강한 심성의 조여정은 그 역에 적역이었다. “살려고 발버둥치다가 모두가 가여워지는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었어요”라고 김대승은 말한다. 물론 처음부터 <후궁> 역의 타이틀 롤에 조여정이 거론된 것은 아니었다. “많은 여배우들에게 이미 상처를 받은 터라, 프로듀서가 조여정을 거론할 때도 설마 했어요. 여정 씨가 한다고 했을때도 믿기지 않았어요.” 보통의 여배우들은 ‘연기보다 벗기로 승부를 봤다’고 평가절하하고 싶어 하는 냉소적인 대중과 거리를 두기 위해 당분간 더 ‘노출’을 꺼려하기 때문이다.
“저는 여배우고 연기에 목말라 있었어요. 그러면 됐죠. 이미지 메이킹은 두세 배로 힘들어질지도 모르지만, 그건 매니지먼트가 해야 할 몫이잖아요”라고 조여정은 담담하게 말했다. 임권택 감독 밑에서 오래 일한 이 뚝심 넘치는 감독은 “절대 여정 씨를 다른 쪽으로 자극하는 것으로 밀고 가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터였다. “그녀의 용기가 너무 고마웠어요. 그리고 촬영이 끝난 지금은 그녀가 더 궁금해졌어요. 저 어리고 작고귀여운 배우의 심중에 뭐가 들었길래 벗겨낼수록 더 깊은 이야기가 쏟아져 나오는 걸까?” 김대승 감독은 조여정을 통해 온 우주의 기운이 한 곳에 집중되는 기분을 여러 번 맛보았다고 했다. “감정의 온오프가 빨라서 촬영 스태프를 기다리게 하지 않아요. 오히려 내가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동동거려도 그녀는 감정을 간직한 채 그대로 기다려줬죠.”
조여정을 보면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 느껴진다. 스스로를 불안해 하거나 타인을 불쾌해 하는 구석이 조금도 없다. 그녀의 눈빛이 그걸 말해준다. “다 요가 덕분이에요”라고 그녀가 웃었다. 요가와 깊은 눈빛이 대체 어떤 상관 관계가 있단 말이지? “2003년부터 요가를 했어요. 아무리 노력해도 기회는 오지 않고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다 내려놓고 요가를 시작했어요. 1시간 30분씩, 매일 1년을 반복했죠. 절대 어떤 일에도 타협하지 않는 게 중요해요. 그런데 1년 동안 하루 1시간이 넘도록 거울 속의 내 눈을 쳐다보면 깨달음이 와요. 다른 사람 맘도 이해되고요.”
<후궁>의 타이틀 롤을 맡은 조여정을 촬영하기 위해 나는 스타일리스트에게 ‘강렬한 조명에 가터벨트, 뷔스티에 등의 서양 골조와 어우러진 하드고어적인 한복 비주얼을 생각해볼 것’이라는 문자를 보냈다. 하지만 사전에 내 설명을 들은 조여정의 매니저는 ‘가터벨트’라는 단어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다. 그는 내가 영화 전체를 보지 못하고서 ‘노출’에만 포커스를 맞춘다고 예민하게 굴었다. 물론 나는 이 영화가 ‘자존과 생존’을 건 ‘지옥 탈출기’이며, 그녀가 권력 싸움의 광풍 속에서 ‘정사’라는 마지막 조커를 쥐고 게임을 벌이는 비극의 주인공이라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그래서 섹시해서는 안 될 이유가 있나? 몇 번의 줄다리기 끝에 에로틱한 ‘후궁’이 아닌, 모던한 ‘여왕’의 느낌으로 촬영 컨셉은 정리됐다.
김대승 감독은 머리에 부직포를 뒤집어쓰고 뷔스티에에 한복 저고리를 입은 조여정을 보고 감탄했다. “덴마크로 간 조선 궁녀라고나 할까요”라고 내가 농담을 했다. “감독들은 이야기로 전체를 끌어가지만, 패션은 한 컷에 모든 걸 담는군요. 근사해요!” 조여정은 김대승 감독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고, 그에 대한 존경심으로 눈이 반짝거렸다. 대중의 취향과 투자자의 계산, 감독의 안목과 배우의 운대가 교묘하게 맞물려 결정되는 ‘캐스팅’ 때문에 지금도 얼마나 많은 여배우들이 가슴앓이를 하는 있는지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들의 관계가 무척 아름답게 보였다. 온몸을 던진 연기를 보여준 여배우에게 차기작 시나리오가 줄을 선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오히려 감독들은 더 난감해 한다. 전도연, 강혜정, 김옥빈, 김민정, 김민희 같은 투지가 강한 여배우들이 공통적으로 겪은 고충이다. 몇 년 전 <방자전>의 김대우 감독은 조여정에게 약속했다. “여정 씨가 갖고 있는 미를 내가 세상이 놀라도록 뽑아낼게요. 춘향이인 당신이 예쁘면 세상이 행복할 거예요.” 그러나 조여정의 경우도 쉽게 두 번째 ‘사용설명서’를 쓰려는 감독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는 대학 동기인 서영희와의 에피소드를 예로 들었다. <김복남 살인 사건>의 서영희는 그 작품으로 국내외에서 갈채를 받았고, 영평상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저는 그 친구의 영화에 대한 오랜 짝사랑을 알지요. 기다리다 지치고… 기나긴 시간을 견딘 후에 갈채를 받았어요. 초연하게 상을 받는 모습에 어찌나 눈물이 나든지… 나중에 우연히 만나서도 서로 웃으며 그랬어요. ‘그런데 우린 다음 작품이 없어…’ 하하.”
그러니까 조여정에게나 김대승 감독에게나 둘은 서로가 구세주였던 셈이다. 그리고 김대승은 그녀에게 ‘상처와 욕망의 얼굴’을 끄집어냈다. “섹스 신은 물론이고 힘든 신들이 너무 많았어요. 이 여자가 궁지에 몰려 갈수록 영화적 감정은 점점 클라이맥스에 이르죠.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감정 노동이 극심했을 거예요. 놀라운 건 이 여배우가 처음부터 끝까지 침착했다는 거예요.” ‘애 얼굴을 한 어른’이라는 표현은 그녀를 설명하는데 적절하다. “내가 따지면 감독님이 생각을 펼칠 수가 없잖아요. 그분의 손발이 돼서 표현하는 게 배우의 역할이라고 생각했어요.” 이야기를 나눌수록 조여정이라는 여배우의 진가가 드러났다.
피와 정사의 현장을 함께한 이 예의 바른 두 예술가들 앞에서, 나는 무언가 ‘굉장히 감동적인’ 것 대신 충분히 견딜 만한 가치가 있는 ‘공포’와 가슴 치는 ‘연민’이 이 영화의 핵심 정서라는 것을 감지했다. <후궁>의 배경은 권력이 불안정했던 조선 초기. 수많은 인물들이 권력욕으로 끓어 넘치는 지옥의 궁에서 성적 에너지는 곧 권력의 속성이다. 이곳에서 왕의 욕정은 감출 필요가 없는 승은이다. 피비린내 나는 ‘반란’을 제외하면 ‘승은’이야말로 궁에서 일어날 수 있는 미세한 권력 생성의 전조다. 하지만 인간적으로 보면 후궁에게도 왕의 간택이 은혜였을까? 아버지의 권력 욕에 의해 후궁으로 간택된 여인 ‘화연’은 사랑하는 남자와 야반도주하다 발각돼 궁으로 끌려 들어간다. 암투 끝에 보위에 오른 왕은 화연에게 집착하고, 살기 위해 제왕의 첩이 된 화연 앞에는 사가에서 내쳐진 그 남자가 내시가 되어 나타난다. 그들 모두 각자의 욕망으로 궁에 모였다. 궁은 살아남기 위해 권력을 가져야 하는 곳. 의지와 상관없이 후궁이 된 화연 역시 어느새 생존투쟁의 한복판에 놓이게 된다.
“<혈의 누>가 염치에 대한 영화였다면, <후궁>은 탐욕에 대한 영화예요. 그들은 서로에게 물어요. 그렇게 왕이 되니까 좋아? 그렇게 승은을 입으니까 좋아? 결국 제가 그리고 싶었던 건 지금 우리 시대의 모습이에요. 자본주의 경쟁사회에서 서로 밟고 올라서는 우리의 모습… 이겨야만살아남을 수 있다는 게 끔찍한 거죠. 아무도 구원 받지 못하는 지옥…자존을 잃는 순간 죽는 사람도 있고, 자존을 버리고 생존을 택하는 사람도 있어요. 궁극적으로 무엇이 세상을 힘들게 하는가,를 은유적으로 보여주고 싶었어요.” 김대승은 그의 스승인 임권택 감독과 많이 닮았다. 비정한 역사관과 함께 특히 배우를 대하는 자세는 모두 스승에게 배운 것이다. “예전엔 추울 때 스태프들도 배우와 똑같이 얇게 입고 촬영했어요. 내가 따뜻하면 배우가 추운 걸 모르거든요. 배우가 바닥을 뛰어야 하면 조감독들이 손으로 그 바닥을 다 훑었어요. 배우는 그만큼 소중한 존재예요.” <후궁>의 전 촬영 과정은 “나는 당신(조여정)을 아낄 것이다”라는 김대승 감독의 약속이 지켜지는 과정이었다. 그의 뚝심과 그녀의 뚝심은 서로를 받쳐주었다. 또한 장남처럼 듬직했던 김민준과 막내처럼 살가웠던 김동욱은 ‘나는 주인공이다=나는 책임과 희생을 다해야 한다’는 등식을 몸소 실천한 사나이들이었고. “연기는 남의 얘기를 듣고 반응하는 건데, 세 배우가 모두 남의 얘기에 귀 기울일 줄 알았죠.” 감독은 수시로 배우의 온도를 체크하고, 배우는 감독의 창작 의지를 지켜주고자 하는 촬영 현장은 생각만 해도 가슴 벅차다.
조여정이 옷을 갈아입고 카메라 앞에 설 때마다 감독과 나는 그녀를 응원하러 갔다. “정말 이야기가 많은 눈이지요?” 김대승이 나에게 동의를 구했다. 물론, 스펀지처럼 모든 걸 흡수하려는 눈이다. 그리고 조여정의 간절한 바람대로 두 사람은 한 프레임 안에서 라스트 컷을 찍었다.
- 에디터
- 피처 에디터 / 김지수
- 포토그래퍼
- 조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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