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재, 김혜수의 섹시본색
마카오 비밀 카지노에 숨겨진 희대의 다이아몬드를 향한 최동훈 감독의 매혹적인 프로젝트〈도둑들〉은 출발부터 아시아 전역의 화제였다. 드디어 이 한국판〈오션스 일레븐〉의 대표 배우 김혜수와 이정재가 〈보그〉 카메라 앞에서 사상 초유의 섹시한 본색을 드러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던 날, 옆 십자가에 같이 매달린 건 도둑이었다. 도둑은 오래된 직업이다. 사람들이 재물을 모으는 순간부터 도둑은 함께 있어왔다. 어떤 도둑은 돈을 훔치고, 어떤 도둑은 마음을 훔친다. 그리고 어떤 도둑은 세상을 훔친다. 이 영화는 그런 도둑들에 관한 이야기다.” 최동훈 감독의 <도둑들>은 프롤로그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을 풍긴다. 그리고 <보그>는 이제까지 늘 그래왔듯이, 영화 속 캐릭터에서 힌트를 얻어 <보그>만의 방식으로 좀더 웅장하고 화려한 비주얼 시나리오를 만들어 갔다.
어딘지 알 수 없는 초호화 비밀 주택으로 잠입한 위험한 남녀의 ‘한탕 스토리’. 미녀 갱스터 혜수와 젠틀맨 사기꾼 정재는 각자의 꿍꿍이를 안고 거대한 하우스로 들어온다. 빈 집의 지하 카지노에서 도박을 하고, 사랑을 나누고, 언쟁을 벌이고, 고독한 ‘폼’을 잡다가 날이 밝으면 돈을 챙겨 각자의 길로 유유히 떠난다. 이정재, 김혜수와 함께 화보를 찍는다고 생각하니 며칠 전부터 잠이 안 왔다. 김혜수와 이정재는 <보그> 16년 역사상 가장 매력적인 비주얼로 각각 화보 페이지를 장식해왔다. 고풍스런 플라자 호텔의 대리석 바닥에 드러누워 글래머러스한 포즈를 취할 수 있는 여배우가 김혜수 말고또 있었던가. 창간 부록이었던 사진집 <조선희와 사람들> 표지를 장식한 배우는 러닝 셔츠를 입고 수건으로 코를 푸는 이정재였다. 말하자면 그와 그녀는 극과 극의 최고의 모델이었다. 한쪽은 드라마틱하고 풍만했으며, 한쪽은 미니멀하고 내추럴했다. 그들이 <보그>에서 함께 화보를 찍기로 한 것이다.
김혜수는 루즈한 회색 보디수트에 캡 모자를 쓰고 들어와도 눈에 띈다. 이정재는 단정한 체크무늬 셔츠에 잘 빠진 진 차림이었다 (정말 미국 배우처럼 내추럴한 그다!). 드레스와 수트 피팅을 끝내고 드디어 에스트로겐과 테스토스테론이 범벅될 촬영이 시작됐다! 화보 촬영 현장에서 충동적이고 감정적인 역할은 언제나 김혜수의 몫이다. 김혜수는 무슨 옷을 입어도 옷에 몸을 맞추기보다, 몸에 옷을 맞춘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저지 드레스의 풍만한 가슴이 출렁이고, 입술과 턱선이 리듬을 타고 도발적인 윤곽을 드러낸다. 그녀가 가슴이 꼬인 에스까다의 선홍빛 실크 드레스를 입고 카지노 테이블 위에 누웠을 때, 나는 비로소 우리 화보의 컨셉이 ‘위험한 파트너’라는 감을 잡았다.
머릿속의 비주얼 시나리오에 배우가 ‘in’이 되어 들어온 순간 카메라 셔터는 미친 듯이 요동친다. 김혜수가 충동적으로 말을 거는 쪽이라면, 이정재는 정제된 에너지를 발산하는 쪽이다. 김혜수가 분방한 자유를 갈망한다면, 이정재는 세련된 멋과 매너를 추구한다.김혜수가 둥근 면으로 덮쳐온다면, 이정재는 가느다란 선으로 움직인다. 김혜수가 뜨겁고 순진한 요부라면, 이정재는 냉정한 플레이보이다. 김혜수는 액션의 명수고, 이정재는 리액션의 명수다. 그들 모두 자아의 매력으로 200% 충전된 나르시시스트들이다. 한국 남자 배우 중 수트를 입고 아무 포즈를 취하지 않아도 멋있는 사람은 이정재가 거의 유일하다. 핵심은 그가 아무 포즈를 취하지 않아도 멋있다,라는 사실을 본인이 알고 있다는 거다. 대부분의 문제는 (자기 신체에 대한 불안으로)무언가를 하려 들기 때문에 발생하니까.
지하 스튜디오에서 서울 시내의 스카이라인이 내려다보이는 고층 발코니까지 움직이면서, 두 사람은 높은 순도의 파트너십을 자랑했다. 금발의 글래머를 깔끔하게 응대하는 미니멀한 신사라니(줄리아 로버츠와 리처드 기어처럼)! 마치 클래식한 외국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클라이맥스는 지하의 차고와 침대 세트에서였다. 노란색 포르셰에서 돈가방을 들고 내린 정재를 맞이하는 혜수는 호피무늬 원피스에 가죽 재킷을 입고 있었다. 역광이었고, 눈이 부셔서 누군가 먼저 총을 꺼내 발사해도 충격적이지 않을 만큼 모든 게 나른했다.
이어지는 침대 신에서 브라톱을 입은 김혜수는 면 팬츠를 입은 이정재의 허리가 자신의 허리보다 날씬하다고 투덜댔다. 나는 그와 그녀가 침대 위에 앉아 함께 담배를 피우며 모략을 세웠으면 좋겠다고 했다. 영화사(케이퍼 필름)의 안수현 PD(최동훈 감독의 부인)가 커다란 아이패드로 두 사람의 동영상을 촬영했다. 그순간 김혜수가 침대 위에 벌러덩 누워버리고, 이정재가 그녀의 목에 총을 겨눴다. 김혜수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건 마치, 담배 주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거잖아?” 그리고 둘은 사이 좋게 여성용 시가를 나눠 피웠다. 그들이사랑에 빠진 연인처럼 보이지 않아서 좋았다. 그들은 언제든 배신할 수 있는 위험한 파트너일 뿐.
최동훈 감독은 <범죄의 재구성> 때부터 이정재와 작업하고 싶었다. “그에게 늘 레이더를 세우고 있었죠. 그러다 김용화 감독(이정재와 <오! 브라더스>를 작업했다)과 함께한 자리에서 드디어 이정재에게 프러포즈 했어요. 뽀빠이는 어려운 캐릭터예요. 미워할 수 없는 기회주의자죠. 촬영 첫날 그가 뽀빠이를 연기하던 순간을 잊을 수 없어요. 이정재는 정말 훌륭한 배우예요. 내 시나리오를 위해 태어난 배우라고 느꼈어요. 그는 정말 특별한 남자예요.” 사진 촬영을 끝낸 이정재는 지금, 마지막 싱글 컷을 위한 수트를 입고 야외 정원의 파라솔 밑에 앉아 있다. “이 옷을 그대로 입고 인터뷰해도 될까요?”라고 그가 말했고, 나는 ‘좋다’고 했다. 그와 함께 앉아 있으니, 2년 전 칸 영화제가 생각났다. 이정재는 <하녀>의 주연 배우로 칸을 찾았고, 그곳에서 국내외 프레스들과 영화인들을 매력적으로 응대했다. 기자들을 초대해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샴페인과 저녁식사를 함께했고, 레드 카펫을 오를 때 김동호 위원장을 부드럽게 에스코트했다.
“지금의 이정재는 20대의 이정재는 상대도 안 될 만큼 멋있죠. 오십이 되면 그는 더 근사해질 거예요”라고 최동훈 감독은 말했다. “현실의 이정재도 그렇지만 영화에서는 더 멋있습니다. 어떻게 저렇게 걷고 저렇게 행동할 수 있는지 놀라워요. 가령 이런 거예요. 편집을 끝내고 음악을 입히다 보면 이정재 커트를 다시 넣게 돼요. 그의 움직임은 너무 음악적이죠. 배우가 그런 영감을 주지 않으면 감독은 앉아서 애기하는 컷만 찍게 되죠. 그러면 필름의 탄력이 떨어집니다.” 이정재도 자신이 ‘뭔가 반짝 반짝하게 만드는 면’이 있다는 걸 인정했다. “화려하다고 할 수도 있지요. 가령 보석이 있다고 치면 저는 그걸 더 반짝이게 보여주는 파트를 맡게 돼요.” 나는 그걸 일명 ‘뺀질미’라고 부르고 싶다. 정우성이 종종 자신의 화려한 비주얼을 뒤집는 투박한 스타일에 도전한다면(<똥개>나 <태양은 없다>), 이정재는 그 반대다. 자신의 반짝이는 비주얼에 드라마의 뻔뻔한 캐릭터를 매치해서 매력적인 악역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오! 브라더스>나 <태양은 없다> 같은 코믹 연기를 할 때 뻔뻔함이 도드라지는 것 같습니다. <하녀>를 할 땐 뻔뻔함의 극치였죠.” 최동훈 감독은 그의 그런 매력에 찬사를 더한다. “<하녀>를 보면 그는 그냥 돈 많은 남자를 연기하는 배우인데, 스크린에선 진짜 돈이 많은 사람처럼 보인다는 거예요. 와인 마시고, 가학적인 대사를 하고… 그게 전혀 어색하지 않죠. 〈태양은 없다〉에서도 사기꾼 배역이 착착 붙었죠.”
이정재는 <하녀>와 <도둑들>로 이어지는 지금의 캐스팅이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럽다. 왜냐하면 그의 매력이 점점 더 리얼하게 발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건 그가 배역의 핵심을 놓치지 않기 때문이다. “<하녀>의 어떤 대사는 받아들이기 어려웠어요”라고 이정재는 난감하게 웃었다. “전도연 씨에게 성적 취향을 강요하는 대사가 촬영 당일 오전에 갑자기 생겼거든요. 간단히 말해 ‘입에다 사정하겠다’는 식의 철면피 같은 요구 인데, 이걸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됐어요. 일단 대사를 몇 번 연습했죠. 신기하게 입에 붙더라구요. 그래서 촬영을했습니다.” 그 대사는 그 배역의 사악한 이중성을 드러내는 결정적 장면이 됐다. “아내와 아이가 사는 집에서 하녀에게 스스럼 없이 변태적 요구를 할 정도로 뻔뻔한 남자가 완성된 거죠.” 그는 여러 배우와의 앙상블에서 자신이 그런 몫을 해야 한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인정했다. “사람들의 가렵고 아픈 데를 긁어줄 수 있죠. 물론, 저도 멋있는 대사를 날리고 싶어요. 하지만 <태풍>에서 테러리스트를 잡으러 가는 애국주의 청년 은 설득력이 떨어졌다는 것도 압니다. 하하.”
이정재만큼이나 김혜수도 ‘뻔뻔함’에 일가견이 있다. 한마디로 그들은 ‘반짝이는’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다. 밤하늘에 빛 나는 별처럼 스크린에 빛을 뿌려줄 사람들. 최동원 감독은 김혜수와 이정재가 그런 점에서 종종 코스모폴리탄처럼 느껴 진다고 했다. “저런 비주얼과 매너를 가진 한국 배우는 축복이죠.” 그는 침대에서 이정재와 김혜수가 총과 시가를 들고 실랑이를 벌이는 흑백 사진을 아주 좋아했다. 저택의 차고 앞에서 두 남녀가 뜨거운 태양을 피해 대립하는 사진도. “이탈리아 영화의 한 장면 같군요. 제가 찍어보고 싶은 바로 그런 영화죠.” 트레이닝 수트를 입은 이정재를 상상할 수 없듯 ‘반짝이지 않는’ 김혜수 역시 상상할 수 없다. 은색 가발을 쓰고 가죽 재킷을 입은 김혜수를보면 <부르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의 창녀 같기도 하고, 데이비드 린치의 컬트 영화에 나오는 미스터리한 여인 같기도 하다.
김혜수는 최대한 과장되게 꾸밀수록 신이 나서 절정을 향해 달린다. 섹슈얼한 룩이 오히려 그녀에겐 안전장치다. 대한민국 영화사를 장식한 수많은 감독들이 그녀를 뮤즈로 작업했지만(이명세 감독이 겨울 사과처럼 싱그러운 그녀를 꺼내 보이거나(첫사랑>), 김지운 감독이 신도시 안개 속을 헤매는 회색빛 김혜수를 발견할 때나(쓰리-메모리즈)), 김혜수가 가장 김혜수다웠던 건 <얼굴 없는 미녀>부터였다. <얼굴 없는 미녀>에서 그녀는 사자처럼 부풀린 머리에 커다란 선글라스를 끼고 정신과 병원의 네온 계단을 또각또각 오르내린다. 글래머러스한 김혜수는 불안한 경계성 인격장애 환자 역할에 딱 들어맞았다.
“김혜수의 핸디캡이 뭔지 아세요?” 그녀가 몸을 앞으로 당기며 높은 톤으로 웃었다. “전 중간이 없어요. 전 끝과 끝은 있는데 중간이 없죠. 전 그 중간을 채우고 싶은 욕망이 큰데, 눈에 보이는 김혜수는 언제나 극단이죠. 하하.” 김혜수에게 일상의 냄새가 나는가? 김혜수가 밥하는 주부나 생활 전선에 뛰어든 주부 사원을 연기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나? “그게 제 컴플렉스예요. 전 일상성에 취약해요. 드라마 <스타일>의 과장된 박기자를 연기하긴 쉽지만 <한강수 타령>의 보통 기자는 안 맞는 거죠. 맞아요. 전 보편적인 걸 잘 몰라요. 어릴 때부터 배우를 해서가 아니에요. 배우를 안 했으면 오히려 나와 관계없는 사람에게 관심이 아예 없었을 거예요. 저도 언니와 아래위층에 살면서 일상적인 삶을 살아요. 빈둥거리고 며칠을 보내고 반찬통 그대로 밥을 먹고… 매일 전시회나 음악회에 가는 건 아니거든요. 다만 대중과 일상성을 공유하는 데 서로 합의가 안 된 거죠.”
스타 김혜수가 자연인 김혜수를 압도해버리는 이 현상은 김혜수 본인에게도 흥미롭다. “저도 대중이 생각하는 김혜수를 보고 ‘와우~!’ 하고 놀라곤 해요. 뉴스메이커가 되는 김혜수는 너무 자신만만하고 당당해서 미치겠다니까요. 하하하.” ‘반짝이는 글래머’로서의 김혜수를 가장 매력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최동훈 감독이다. 그것도 이미지 과용이 아니라 아주 심플하고 쿨하게 악센트를 살려서. 뜨거운 김혜수를 차갑게 식혀서 장르 안에서 세팅해내는 솜씨는 <타짜>에서 정점을 이룬다. “최동훈 감독의 에너지를 경험한 후 저는 그를 사랑하고 존경하게 됐어요”라고 김혜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사기꾼들의 빠른 몽타주 가 압권인 <범죄의 재구성>으로 최동훈은 천재적인 장르 감독이라는 평을 얻었다. 그리고 그는 김혜수라는 여배우를 상상하며 <타짜> 시나리오의 ‘정마담’을 창조했다. “겁도 났지만 무조건 오케이였죠. 그리고 그 경험은 제 배우 생활의 전환점이 될 만큼 강렬했어요. 배우와 캐릭터의 일치점을 찾아내서 확인하는 감독과 작업한 건 일생일대의 행운이었죠.” 하지만 그녀는 <도둑들> 프로젝트에는 가장 늦게 합류했다. 최동훈 감독은 그녀를 설득하는 데 애를 먹었다고 했다. “그거 아세요? 어떤 사람과 최고의 경험을 하고 나면, 그게 훼손될까 봐 고이 보존하고 싶은 마음…〈타짜>의 경험을 지키고 싶다는 욕망과 다음 작업으로 더 성장하고 싶다는 욕망이 충돌한 거죠. 너무 특별한 과거를 넘어서야 했으니까요.”
최동훈 감독은 김혜수의 열렬한 팬이다. “아름다운 사람이라 멋있는 캐릭터를 만들어주고 싶었어요. <타짜> 이후에도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죠. 혜수 씨를 보면 자기 운명 속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는 여자가 떠올라요. 뭐가 기다릴지 몰라도 목표를 향해 돌진하는… 무모함보다는 페이소스가 있는 사람. 김혜수가 아니면 누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영화 찍으면서도 놀라움의 연속이었죠. 그녀는 동양의 모니카 벨루치예요.”
그렇게 뻔뻔하고 반짝거리는 두 배우는 최동훈 감독이 ‘설계한’ 룰에 따라 홍콩과 마카오와 부산을 도는 초특급 프로젝트에 합류한다. 한 팀으로 활동 중인 한국의 도둑 뽀빠이(이정재)와 예니콜(전지현), 씹던껌(김해숙), 잠빠노(김수현). 미술관을 터는 데 멋지게 성공한 이들은 뽀빠이의 과거 파트너였던 마카오박(김윤석)이 제안한 홍콩에서의 새로운 계획을 듣게 된다. 여기에 마카오박이 초대하지 않은 손님, 감옥에서 막 출소한 금고털이 팹시(김혜수)가 합류한다. 이들은 인생 최고의 반전을 꿈꾸며 홍콩으로 향한다. 여기에 4인의 중국 도둑이 이 계획에 합류한다. 목표는 마카오 카지노에 숨겨진 희대의 다이아몬드 ‘태양의 눈물’. 위험천만한 계획이지만 2천만 달러의 달콤한 제안을 거부할 수 없는 이들은 ‘태양의 눈물’을 훔치기 위한 작업에 착수한다. 비밀스러운 마카오박과 그런 마카오박의 뒤통수를 노리는 뽀빠이, 마카오박에게 배신당한 과거의 기억을 잊지 못하는 팹시와 눈 앞의 현찰을 챙기고 보는 예니콜, 그리고 한국 도둑들을 믿지 않는 중국 도둑들까지…. 도둑들은 서서히 자신만의 플랜을 챙기기 시작한다.
김혜수와 이정재는 6개월 전에 촬영이 끝난 <도둑들>을 떠올릴 때 마다 나른한 흥분을 느꼈다. “가장 완벽한, 환상에 가까운 호흡, 행복한 앙상블이었어요”라고 이정재가 좌우 균형이 완벽한 눈웃음을 지었다. 그들은 입을 맞춘 듯 다른 배우들을 칭찬했다. 줄을 타는 전지현이 얼마나 활력이 넘치는지(“그녀에게 분명 이 영화가 전환점이 될 거예요. 너무너무 특별한 배우예요”-김혜수), 고층 빌딩에서 벌이는 김윤석의 액션 신이 얼마나 눈부신지, 이정재가 얼마나 폼 나고 다이내믹하게 움직이는지, 김혜수의 물속 신이 얼마나 다급하게 환상적인지…, 그들 자신, 배우에게 반한 배우들이다.
“홍콩에 처음 도착했을 때가 생각나요. 팹시가 마카오박 모르게 와서 단독 대면하는 장면이었어요. 20년간 버려진 건물이었는데 공기가 정말 달랐죠. 전 발코니에 서 있었어요. 거기 홍콩의 뷰가 펼쳐지고 따뜻한 바람이 불었죠. 배우에겐 현장이 어떤 컨디션으로 운용되고 있는가가 중요해요. 거긴 정말 팹시의 공간이었죠.” 김혜수는 자신이 감동하는 습관이 있다고 인정했다. “마카오박의 대사 중에 이런 게 있어요. ‘기적이 우리의 전공이죠.’ 전 그 대사가 정말 좋아요. 영화 작업을 하다 보면 그런 순간을 만날 때가 종종 있죠.” 김혜수는 자신이 <도둑들>의 일원이 된 걸지나치게 자랑스러워 했다(놀랍게도 그녀는 배우로서 자신을 약간 평가절하하는 습관이 있다).
그리고 이정재가 연기하는 뽀빠이를 보고 이 영화의 감이 왔다고 했다. “뽀빠이는 계략이 있지만 한계가 명확한 캐릭터예요. 그런데 이정재가 충동적이고 감정적인 인물로 만들어냈죠. 영화 초반에 그가 한국 도둑들의 리더로 촬영하는걸 보러 부산에 갔는데… 가슴이 뛰었어요. 이게 우리 영화구나. 나도 그 도둑들 중 한 명이구나. 벅찬 기분이 느껴졌어요.”
이정재는 영화에서 콧수염을 붙이고 범죄 냄새 물씬한 바다를 누빈다. 짧은 머리에 콧수염을 붙이고 점퍼를 입고 요트와 카지노장을 움직이는 이정재라니, 상상만으로 근사하지 않은가? “뽀빠이로 사는 동안 정말 재미있었어요.” 성대에 모래 알갱이를 섞은 드라이한 목소리로 이정재가 말했다. “모두가 다이아몬드를 들고 튀려는 욕망이 있지만, 뽀빠이만 그 욕망을 들키죠. 제 대사 중에 이런 게 있어요. 마카오박(김윤석)이 예전에 왜 날 배신했냐고 묻는 장면인데 제 대답이 압권이죠. ‘도둑이 그럴수도 있지, 뭐.’ 하하하. 정말 뻔뻔하지 않나요? 도둑에게 뭘 바래? 그거야말로 우리들의 정체성이죠.”
<도둑들>은 초호화 캐스팅으로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오션스 일레븐>을 연상시킨다. 내가 그에게 김윤석이 <오션스 일레븐>의 조지 클루니라면 당신은 브래드 피트 격이라고 하자, 이정재는 굉장히 멋쩍어 했다. “그들은 미국 스타일이고 우린 완전히 한국 스타일이에요. 제가 이 영화에서 좋아하는 장면은 화려함보다는 쓸쓸함의 냄새가 나죠. 마카오에서 1차 작전이 실패하고 홍콩으로 가는 배 안에서 도둑들을 잡은 신이었어요. 화려했던 날은 한순간에 가버리고 착잡한 심정으로 홍콩으로 돌아오는…, 아! 이게 인생이구나, 싶은 감정이 휘몰아치죠.”
나는 인생에서 그런 ‘씁쓸함’을 여러 번 겪어야 진짜 매력적인 남자가된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그리고 이정재는 드라마 <모래시계>, 영화 <젊은 남자>로 시작해 지난 20년간 여러 번의 부침을 겪었다. 레스토랑 사업가로 변신하기도 했고, 수트 비즈니스에 손을 대기도 했다. 30대 후반에는 잠시 배우의 본분을 잊고 살았지만, <하녀> 이후로 다시 촬영장으로 돌아와 활어 같은 매력을 뿜어내고 있다. 다행히도 이정재를 대신할 수있는 배우는 이정재뿐이었다.
“90년대에서 2000년대로 넘어가는 영화사의 한 챕터에 제가 있었죠. 제겐 참 고마운 추억이고 경험이에요.” 박광수 감독의 <이재수의 난>에서 봉두난발을 하고 실패한 혁명가가 된 이정재, 김성수 감독의 <태양은 없다>에서 수트를 빼입고 압구정동 보석 가게에서 다이아몬드를 훔치던 이정재(<도둑들>의 다이아몬드와는 비교할 수 없이 작지만!), 이재용 감독의 <정사>에서 유부녀와 파격적인 섹스를 나누던 청년 이정재, 그리고 곽경택 감독의 <태풍>에서 해적과 싸우며 애국적인 장광설을 늘어놓던 국정원 요원 이정재까지. 그리고 변함없이 패션계의 사랑을 받으며 청담동 파티장에 모습을 드러내던 자연인 이정재. 미니멀한 페이스에 악센트 같은 풋풋한 웃음을 간직한 만년 소년.하나의 완벽한 캐릭터가 탄생하기까지, 배우들의 인생은 저 멀리서그 캐릭터를 향해 천천히 달려왔다는 걸 알고 감탄하게 된다. 도둑질은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모토를 가진 금고털이 팹시와 부드러운 얼굴 이면에 강렬한 욕망을 숨긴 도둑 뽀빠이처럼. 이정재와 김혜수, 그들이 대한민국 관객의 마음을 훔치는 진짜 도둑이어서 좋다.
- 에디터
- 피처 에디터 / 김지수
- 포토그래퍼
- 오중석
- 스탭
- 스타일리스트 / 황정원(김혜수), 권혜미(이정재), 헤어 / 박선호, 메이크업 / 고우리(김혜수), 배혜랑(이정재)
- 기타
- 세트 스타일링 / 그녀들의 만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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