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중기, 박보영의 가을의 전설
머지않아 겨울이 오면, 키가 한 뼘쯤 자란 송중기와 박보영이 이 ‘가을의 전설’을 더듬어 숲으로 올지도 모른다. “그때는 우리가 이만큼 사랑했었지”라고. 지금, 길 잃은 양을 품은 늑대처럼, 선하고 그로테스크한 〈보그〉판 늑대 소년이 눈 앞에 먼저 펼쳐진다.
빛의 지배에서 어둠의 지배로 바뀌는 가을 숲 속. 개와 늑대의 시간이 흐르는 황혼 녘. 팀 버튼의 <슬리피 할로우>에서 뽑아 온 듯한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서 있고, <트와일라잇>의 창백한 뱀파이어라도 나타날 듯 주변엔 안개가 자욱합니다. 쉿! 사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홀연히 등장한 생명체는 동그랗고 삐죽삐죽한 무엇! 백발처럼 흰 눈썹과 라스트 모히칸처럼 검게 솟은 머리털, 아! 꽃보다 예쁜 늑대 한 마리군요. ‘소년 늑대’ 송중기가 나무를 탑니다. 작고 단단한 네 발로 바위를 차고 오릅니다. 면도날처럼 예리한 눈빛, 으르렁거리는 낮은 포효… 주변에서 잠자던 사진가 조선희의 고양이까지 덩달아 경계 태세를 취하고, 세트 안으로 생고기라도 던져주려 할 즈음, 멋쩍은 듯 그가, 아하하하 웃음을 터뜨립니다. 송중기, 아름답고 활력 있고 재능 넘치는 청년. 그가 완벽한 늑대인간의 퍼포먼스를 보여주자 스튜디오의 체온은 46˚C로 뜨거워 졌습니다. 아름다운 소년 늑대에게 어울리는 건 다크 그린의 빈티지 스웨터와 벌키한 울 스웨터 한 벌. 이순간엔 <반지의 제왕>에서 볼룸을 연기한 앤디 서키스나 <엘리펀트 맨>의 존 헐트가 부럽지 않습니다. “잡지 화보 촬영, 어색해요. 그래도 하면 할수록 신이 난다니까요. 아하하.”
그순간 송중기를 쌍둥이처럼 빼닮은 한 소녀가 순하게 이파리를 내리고 가을 숲으로 걸어옵니다. 바스락 바스락… 잠자리 날개 같은 흰 드레스를 입고, 겁먹은 눈동자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박보영은 <마지막 잎새>의 병약한 소녀처럼 가느다란 한숨을 토해냅니다. ‘난 충청도 시골마을에서 태어난 평범한 소녀예요. …화려한 조명도 이런 패션 무대도 모든 게 낯설고 얼떨떨한… 여러분은, 이런 절 아세요?’ 소녀가 움츠린채 복화술로 말을 겁니다. 송중기가 겁에 질린 박보영의 손을 잡고 나무아래 그의 은신처로 데려오네요. ‘괜찮아. 두려워하지 마. 내가 널 보호해줄게.’ 영화 속 시절은 1960년대, 이름도 고전적인 철수(송중기)와 영이(박보영). 헛간에 숨어살던 늑대소년과 폐병에 걸려 산장으로 요양 온 외로운 소녀 앞에 대체 어떤 잔혹한 운명이 도사리고 있는 걸까요?
잠시, 그들의 탄생 설화, 프리퀄로 들어가 보죠. 송중기는 충청도 대전에서 상경한 청년입니다. 제사 지내는 모습이 대한뉴스에 나올 정도로 유서 깊은 가문의 피를 이어받은 청년은 이변이 없는 한, 성균관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며 미래의 ‘선비’가 될 재목이었죠. 하지만 이내 타고난 ‘훈남’ 유전자가 성균관 선비를 유혹했어요. ‘담을 넘고 세상에 나가봐! 더 멋진 일이 생길 테니까.’ 6년 전, 이 고지식한 ‘효자’ 아들은 부모의 뜻을 거스르고 자기만의 거사를 꾸몄습니다. “인터넷 훈남들을 모은 잡지 촬영이 첫 시작이었어요. 월세방을 빼서 연기 학원에 등록하고 닥치는 대로 오디션을 보러 다녔죠.” 다행히도 운명은 그의 손을 들어줬다지요. 고려 왕실의 복잡한 남녀상열지사를 다룬 영화 <쌍화점>에서 단박에 꽃미남 호위무사라는 임명장을 받았으니 말입니다. 당대 최고의 꽃미남 조인성의 수하 중 하나였지만, 얼굴만은 무리 중 군계일학이었지요. 그 뒤로 송중기는 다년생 식물처럼 쉬지도 않고 꽃을 피워냅니다. <오감도>에서 신세경과 커플을 이뤘고, <마음이 2>에서는 씩씩한 주인공 강아지 ‘마음이’의 친구로 생애 첫 ‘인간’ 주연을 연기하기까지!
“제겐 무엇이든 경험하고 싶다는 자신감과 헝그리 정신이 있어요. 그냥 뭐든지 닥치는 대로 부딪히고 싶다는… 허세를 싫어하고, 호불호가 분명해서 건방지단 소리도 듣지만, 그래도 절대 대충대충은 안 했어요. 전 부모님께 제 기질의 8할을 물려받았어요. 가장 큰 반항이 연기였어요. 그래서 부모님 통장에 입금도 해드리고 싶었고, 그분들의 자랑스러운 둘째 아들이 되고 싶었어요.” 그리고 마침내 경영학도 ‘성균관 유생’ 송중기가 꿈꾸던 것 이상의 대박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이 터지고 맙니다. 누더기 늑대소년이 되기엔 너무 아까운, 뽀얀 피부에 검정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유들유들한 조선 ‘날라리’ 선비. 그런데 그 한량이 스스로 <캐리비안의 해적>의 흐느적거리는 조니 뎁과 <전우치>의 능글맞은 강동원 캐릭터를 황금 비율로 섞어낸 모습이었다니, 놀랍지 않은가요? 그곳에서 성향이 전혀 다른 보헤미안 유아인과 애매모호한 애정 행각을 일으키며 (“지금도 아인이랑 만나면 늘 어색해요. 하지만 분명 좋은 친구죠”). 베스트 커플상도 나눠 받으며.
오히려 비주얼적으로는 야성의 ‘늑대인간’에 안성맞춤인 유아인이 반항아 <완득이>로 산동네에서 이름을 떨칠 때, 그는 영화 <티끌 모아 로맨스>의 옥탑방에서 구두쇠 한예슬의 시한부 애완동물이자, 자본주의 서울의 스캐빈저(Scavenger, 청소동물)로 살며 ‘88만원 세대’의 궁상맞은 로맨스를 그려냈죠. “저는 지금도 돈에 관심이 많아요. 돈이 궁해야 진짜 연기가 나온다고들 하지만, 저는 작품으로 돈을 버는 일은 찌질하게 느껴져요. 돈은 최선을 다해 주님(광고주)에게서 받고, 저는 앞뒤 안보고 연기만 하고 싶거든요.” 사업으로 자수성가한 송중기의 아버지는 지금도 아들에게 진심으로 묻곤 한다지요. “아들아! 커피 광고하면 우유광고는 못하는 거 아니냐? 드라마 20부작보단 50부작이 낫지 않겠니?” “아버지는 저랑 비슷한 분이세요. 어머니는 음담패설을 나눌 정도로 친밀한 분이죠.” 그가 가족에 대해 얘기하는 것 좀 더 들어보세요. 자신의 첫 기억은 눈 쌓인 울릉도에서 부모님을 찾다가 어두운 산장에서 당신들의 아름다운 ‘행위’를 목격한 것이고, 첫 좌절은 갈비를 먹고 싶다는 자신의 소망이 여동생의 도토리묵에 의해 무참히 꺾였을 때랍니다. 가끔 중학생 여자 팬들이 촬영장에 찾아와 “송중기, X나게 잘생겼다”고 저희들끼리 박수를 치면, 불러다 “너희들 X이 무슨 뜻인지 알기나 하니?”라고 조근조근 나무랄 줄도 아는 충청도 양반. 그렇게 느물느물하고 낙천적인 성정으로 산전수전다 이겨낸 젊은 ‘파계’ 선비가, 어느날 제발로 숲으로 저벅저벅 들어가 남루한 늑대의 탈을 씁니다. 닳고 해진 발바닥으로 숲을 헤매고, 아리도록 예쁜 여자 ‘인간’을 만나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진짜 ‘사랑’을 시작하려 합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엄지 공주’ 박보영은 충청북도 증평에서 태어났습니다. 증평이란 마을은 손바닥처럼 작아 동네 사람들은 그야말로 ‘보영이네’ 집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 알 정도였죠. 보영이는 선머슴처럼 해가 뜨면 친구들과 산에 누가 빨리 오르나, 뜀박질을 하며 무럭무럭 자랐습니다. 커가면서 눈이 크고 콧날이 오똑해진 보영이는 마을의 눈부신 마스코트였죠. 그럴수록 소녀는 매일 보는 동네 사람 말고 저 멀리타지 사람의 얼굴을 보고 싶어 애가 탔어요. “오죽하면 제 꿈이 이것저것 아르바이트를 실컷 해보는 거였어요. 꽃집, 극장, 음식점… 도시를 맘껏 순례하면서요.” 군인이었던 아버지가 말렸지만, ‘국민 여동생’이 될 운명을 거스를 순 없었죠. 알을 깨고 태양을 향해 비상하는 아프락사스처럼, 그게 날개가 녹아 내릴 만큼 힘든 배반이라는 것도 모른 채, 소녀는 고향을 떠나 배우가 됐습니다. 송중기가 “내 여동생보다 더 닮았다”고 인정한 꽃소녀 보영이.
영화 <울 학교 이티> 촬영 현장에서 이한위가 ‘제2의 문근영’이라고 치켜세웠지만, 그땐 아무도 이 진흙 속의 진주를 주목하진 않았어요. 그러던 어느 겨울, 문제의 <과속 스캔들>이 터집니다. 입소문이 꼬리를 물어 800만 흥행 축포를 터뜨리면서. 삼대가 모인 사연은 분명 라디오 드라마같은 삼류인데, 보영이가 연기한 싱글맘은 너무 씩씩하고 뻔뻔해서 모두들 품에 꼭 안아주고 싶어 했지요.
젊은 아빠 차태현에게 “어렸을 땐 반항을 안 했어~ 임신을 했지. 흐흐.” 웃으며 사람 잡다가, “왜 내가 없어야 하는데? 여기 있잖아. 내가 여기 있는데, 왜 내가 없어야 하냐고!” 따지며 쇠꼬챙이로 심장을 찌르기도 하고. 스물두 살 꿈 많은 싱글맘 보영이가 아들 석현이를 잃어버리고 마스카라 번진 눈으로 극장을 헤맬 땐 피에로가 된 디바의 눈, 새끼 잃은 어미의 눈이 뿜어내는 울부짖음으로 객석에선 감정의 대지진이 일어났었죠. 이게 무슨 기적 같은 일일까요? 그때 보영이의 연기는 연기가 아니라 ‘진실한 착각’이었어요. “<과속 스캔들>할 때 석현이를 온 종일 품에 끼고 있었어요. 말도 가르치고 버릇 없으면 야단도 치고 저도 어린데, 아이랑 있어본 적도 없는데… 그냥 그렇게 지냈어요. 석현이 잃어버리는 장면을 찍을 땐 감독님이 제 100m 이내로 모두 접근 금지를 시키셨어요. 지금 생각해도 <과속 스캔들>은 제 인생의 가장 큰 행운이에요.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너무 많은 사랑을 받아 ‘이건 진짜 인생의 과속이다’ 싶어 고민도 하고….” 그렇게 보영이에겐 아직 ‘연예인 조미료’ 냄새가 나지 않습니다. 여전히 긴장한 시골 여학생과 있는 기분이랄까요.
아직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순진무구한 그녀가 송중기를 길들이러 숲으로 들어왔습니다. “전 철수(송중기)에게 하나부터 열까지 다 가르쳐줘요. 밥 먹는 예절부터 숟가락, 젓가락 사용법까지,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알려주면서 정작 세상과 쌓은 담을 허무는 건 저 자신이죠.”
박보영이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릅니다. 진짜 ‘순이’처럼 순하게. “밤새도록 창밖에 해님이 뜨길 기다려요. 아침이면 그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 믿으며. 고마워요. 내 눈 앞에 나타나줘서….” 짐승인지 사람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단 한 명의 관객 앞에서 부르는 노래지만, 그순간만큼은 기어가던 벌레도 발을 멈추고 귀를 기울입니다. “철수는 저를 지키기 위해 모든 위험을 감수해요. 영이가 위험에 처했을 때, 철수의 눈이 어떻게 변하는지 보셨어야 해요.” 한마디 대사도 없이 몸으로만 연기했던 송중기에게 이 영화는 더없이 소중합니다. “순이가 위험에 처할 때 저는 야수로 돌변해요. 마음은 <가위손>이나 <렛미인>인데, 몸은 <동물의 왕국>이었죠. 이 영화는 철수와 영이, 그리고 그걸 바라보는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예요. 어쩌면 제가 소녀의 손을 잡고 세상으로 들어왔다 도망 나가는 이야기, <가위손>에서 쫓겨나는 에드워드처럼, 소녀를 사랑해서 내 세계로 데리고 가려고 할 때, 저를 쳐다보는 마을 사람들의 눈이 너무 슬퍼요. 나를 괴물, 살인마로 처단하는 그 눈빛이 말할 수 없이 슬퍼요.”
송중기가 느끼는 슬픔과 박보영이 느끼는 슬픔은 화성 여자, 금성 남자처럼 다릅니다. “저에게 이 영화는 ‘미안해, 기다리라고 해놓고’예요. 한쪽은 그 약속만 믿고 기다리는데, 한쪽은 까맣게 잊고 살았던…, 슬프지만, 아프지만 그게 이기적인 인간과 짐승의 사랑의 차이일까요?”
충청도 출신 오누이지만 숭중기와 박보영은 닮은 듯 너무 다릅니다. <성균관 스캔들>과 <과속 스캔들>, 각자 다른 ‘스캔들’로 대중을 흔들었다해도. 송중기는 자신을 착한 남자라 자부하고(연애보다 일이 우선이긴 하지만), 박보영은 아직 감정 조절이 힘들어 연애를 버거워합니다. 송중기가 야누스적인 매력이 있다면, 박보영은 ‘괴로워도 슬퍼도 한결같은’ 이웃집 여동생입니다. 송중기가 자신감 있고 머리 좋은 현실적인 남자라면, 박보영은 걱정이 많고 본능적이고 초현실적인 여자입니다. 송중기는 <늑대 소년>으로 ‘동물 연기’에 대한 칭찬을 듣고 싶어 하고, 박보영은 감독님의 ‘순이’가 제대로 나왔을까 그것만 노심초사합니다. 요즘엔 그와 그녀가 무슨 고민을 하나 들어볼까요? “저만의 성인식을 언제 어떻게 치러야 할까, 그게 고민이에요. 조인성 형이 조폭으로 <비열한 거리>에 서고, 원빈 선배님이 <아저씨>가 됐던 것처럼, 저도 사내로서 통과의례를 거쳐야 하지 않을까요?” 송중기에게 원조 꽃미남 강동원의 선택을 참고하라고 하고 싶네요. <늑대의 유혹>이나 <의형제>나, 장르를 초월해서 그 순정만화적인 비주얼이 얼마나 매력적이던가요?
“전, 매일 똑같은 꿈을 꿔요. 마스크를 쓴 사람에게 쫓기는 꿈이요. 무서워서 눈을 뜰 때가 많아요.” 박보영에겐 빨리 극적인 긴장에서 빠져 나오라고 하고 싶네요. 배우는 보통 사람들의 삶을 대신해 살지만, 그들의 인생을 책임지는 사람은 아니라고. 암전이 되고 영화가 시작되면 그때가 당신도 ‘애썼다’고 스스로를 위로할 타이밍이라고. 착한 늑대 송중기와 울보 소녀 박보영이 사랑의 동화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둘 사이에 고여 있는 사랑의 경험은 서로를 어떻게 품을지 예측할 수 없지만, 그 사랑이 어떨까 조바심을 낼 필요가 있을까요? 길 잃은 양을 품은 선한 늑대처럼, 짐승의 본능도 잊은 채. 상상을 초월하는 선하고 그로테스크한 <보그>판 늑대 소년이 눈 앞에 먼저 펼쳐졌습니다.
- 에디터
- 피처 에디터 / 김지수
- 포토그래퍼
- 조선희
- 아트 디자이너
- 세트 스타일링 / 그녀들의 만물상
- 스탭
- 스타일 에디터/손은영, 헤어 / 이혜영(송중기), 박지선(박보영), 메이크업 / 김지현(송중기), 서지영(박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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