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드

예약이 너무해

2016.03.17

예약이 너무해

예약을 하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앞둔 레스토랑은 지금 떨고 있다. 예약만 해놓고 사라지는 예약자들 때문이다.

의상 / 휴고 보스, 브리오니

밸런타인데이와 함께 크리스마스이브는 레스토랑이 최성수기를 맞이하는 날이다. 그런데 이날 예약이 꽉 찬 레스토랑은 웃을까 울까 망설이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떨고 있다. 예약이 아무리 많다 한들, 당일 예약자가 레스토랑을 찾아 매상을 올려주기 전까지는 백지수표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백지수표가 부도수표가 될 확률은 대략적인 체감 통계로 20~40%이다.

예약 시간 15분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은 예약자들이란 대개 전화를 하고, 문자를 남겨도 답하지 않는다. 개중에 스스로가 배려심 깊은 고객이라고 생각하는 몇몇 예약자는 예약 시간 ‘10분 전’에 ‘매너 있게’ 예약 취소 전화를 해주기도 하지만, 레스토랑 입장에선 그것이 고마울 리가 없다. 예약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우연히 들어온 ‘워크인’ 손님이 그 자리를 채우거나 급하게 들어온 예약으로 채울 수도 있다고? 아니다. 모두가 만반의 계획을 세우는 크리스마스이브 같은 날에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더군다나 레스토랑은 그 테이블을 빈 채로 두는 게 속 편하다. 1시간이나 늦게 나타나 “길이 너무 밀려서 조금 늦었는데 예약한 테이블이 없다니 무슨 소리냐!”는 컴플레인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서다. 소란이 일어나서는 안 될 날이다. 그래서 레스토랑은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오매불망 예약자를 기다린다.

갑작스럽거나 일방적인 예약 불이행은 레스토랑에 직접적으로 경제적인 피해를 준다. 레스토랑은 메뉴 가격의 30~40%를 재료비로 지출한다. 비용이 그 비율을 넘어서면 적자다. 대충, 두 명이 10만원짜리 디너 코스를 주문하고 10만원짜리 와인을 곁들인다고 하자. 30만원의 매출 중 순이익을 러프하게 50%인 15만원으로 잡으면, 레스토랑이 한 테이블을 비워두기 위해 지출하는 비용이 15만원이다. 예약은 그 15만원을 담보로 한 구두계약의 의미다. 예약자가 나타나지 않음으로써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하면 레스토랑에는 그 15만원이 오롯이 손해로 돌아온다. 그 손해가 쌓이면 예약은 만석인데 빈 테이블 때문에 그날의 정산은 적자가 되는 기묘한 상황이 생긴다. 선도가 생명인 재료를 준비했다면 다음 날 쓸 수도 없으니 그 비싼 것을 레스토랑 직원들이 울면서 야식으로 먹어치운다.

레스토랑의 억울한 단심가는 올해도 분명 반복될 고질적인 문제다. 비단 크리스마스, 밸런타인뿐 아니라 1년 365일 내내 레스토랑은 같은 일을 매일 겪는다. 파인다이닝에서 식사하는 것이 연례행사인 우리에게 ‘예약 문화’는 아직 낯설기만 하다. 1,000인분의 설렁탕을 끓여놓고 오는 손님에게 파는 식당을 경험해본 게 전부니까, 레스토랑과 예약자 사이에서 예약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직 잘 모른다. 그래서 예약을 줄 서지 않는 방편 정도로 자신의 입장에서만 가볍게 본다. 몰지각이 지나친 경우 여러 곳의 레스토랑을 예약해놓고 그날 기분 따라 골라 가는 예약자도 있다. 일방적인 손해를 그냥 당하고 있어야 하는 셰프들은 트위터에 격한 욕을 남기며 공포감을 조성하거나, 뒤에서 몰래 레스토랑끼리 ‘블랙리스트’를 공유한다. 올 초에는 한 레스토랑 오너가 화가 난 나머지 잠수 탄 예약자의 신상을 트위터에 공개해버려 낯 뜨거운 분탕질까지 일어났다.

대안이 될 수 있는 것은 예약 보증금(디파짓) 제도다. 예약을 꼭 지키겠다는 의미로 레스토랑에 일부 금액을 먼저 지불하는 계약금이다. 외국에서는 아주 일반적인 예약 제도다. 엘본 더 테이블, 줄라이 등 레스토랑에서는 디파짓 입금 확인 후 예약이 확정된다. 2006년 시작된 현대카드 고메위크도 2012년 가을 11회부터 디파짓 제도를 도입했다. 평상시 디파짓 제도를 시행하고 있는 레스토랑 말고도 오룸다이닝 등 37개점이 고메위크 기간 중 디파짓 제도를 도입했다. 아직까지는 ‘식사 한 번 하겠다고’ 선입금하는 수고를 불편하고 불쾌하게 받아들이는 반응이 일반적이다. 계약을 파기할 마음이 없는 선량한 예약자들에게는 성가신 절차가 생긴 셈이기도 하다. 그래서 올봄 열린 12회 때는 주최 측인 현대카드에서 디파짓을 전액 부담해봤다. 결산해보니 예약 불이행 발생률은 평균 28%였고, 단일 레스토랑 최고치는 34%였다. 현대카드는 그 손해를 다 떠안았다. 올 가을 13회 고메위크에서는 그래서 다시 디파짓을 예약자 부담으로 돌렸다. 13회 고메위크에서 현대카드 ‘마이메뉴’ 앱을 통한 예약 건의 취소율을 결산해보니 약 24%로 드러났다. 현대카드는 마이메뉴 앱을 해외의 오픈테이블(opentable.com) 같은 간편한 예약시스템을 갖춘 앱으로 확대해나갈 계획이다. 간편한 예약 시스템이라는 것은 계좌 이체가 아니라 예약과 동시에 디파짓 결제가 가능한 형태의 예약 시스템을 말한다.

디파짓 제도마저 어지러운 예약 문화의 대안이 되지 못할 경우 레스토랑들이 취할 수 있는 태도는 정해져 있다. 아예 예약을 받지 않는 것이다. 이 역시 외국에 흔하다. 레이디가가가 아니라 레이디 가가 할아버지가 와도 1시간씩 기다려야 얻어 먹을 수 있는 콧대 높은 레스토랑이 차고 넘쳐난다. 테이블을 받기 전에 간단한 알코올 음료를 마시며 대기할 수 있는 바를 갖춘 외국 레스토랑이니까 정착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한국 실정에서 이렇게 돼버리기가 십상인 것을 생각하면 아찔하다. 12월 24일, 레스토랑 밖에서 벌벌 떨고 있기엔 너무 추운 때다. 거기에 눈이라도 와서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된다면 그야말로 낭패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입으려고 산 아크네 무톤이 푹 젖어버릴 테니까. 그러니까 예약 문화의 초기 정착 단계인 지금, 그 문화를 잘 만들어둘 일이다. 레스토랑의 몫보다는 전적으로 예약자의 몫이 크다. 예약을 하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 예약은 엄연한 약속이다.

    스탭
    글 / 이해림(프리랜스 기자), 스타일리스트 / 한상은
    기타
    취재 협조 / 현대카드 CHA HYE KY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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