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욱, 긍정의 에너지
이진욱이 <수상한 그녀>로 장편영화에 데뷔한다.<나인: 아홉 번의 시간여행> 이후의 차기작치고는 작은 역할이다. 그에게는 지금이, 그리고 어제와 내일이 모두 의미가 있다. 긍정의 힘이다.
“…그 영화 뭐였죠? 그 영화 있잖아요, 그 영화. 눈 큰 여자 나오는 멜로인데…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 나온 눈 엄청 큰 여배우… 이름이 뭐였죠? 아, 앤 해서웨이! 그 영화 제목이 뭐였죠? <가을의 전설> 이후 처음으로 영화 보다 울었어요. 남자를 울리는 영화예요. 제가 정말 좋아하는 영화인데… 거기 88년의 졸업식 장면이 나오는데 오늘 촬영 컨셉이 그 장면을 떠올리게 해요. 그 장면 생각하면서 포즈 취했어요. 그 영화 모르세요?” 질문은 “어젯밤, 시안 보고 연습해왔어요?”였다. 이 남자, 컨셉을 정말 빠르게, 좀 엉뚱하지만 날카롭게 파악한다. 제로백 3초대의 슈퍼카 같은 속도다. 결국 검색해서 찾아낸 ‘그 영화’는 2012년 개봉한 <원 데이>. <수상한 그녀>에서 엿보이는 복고적 감성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보그> 촬영 컨셉이 ‘그 영화’를 떠올리게 했나 보다. 사실 ‘그 영화’에 <보그> 화보처럼 조형적인 패턴 의상과 능글맞은 헤어 스타일, 낡은 TV가 등장하진 않지만, 엉뚱하고 기발한 배우의 머릿속에 뭔가 휙 스쳐 지나갔고, <원 데이>의 88년과 <보그>의 컨셉, 그리고 <수상한 그녀>가 휘뚜루마뚜루 연결된 것이다.
오는 1월 23일, 이진욱의 첫 영화가 개봉된다. 2004년 허진호 감독의 12분짜리 단편 멜로 영화 <나의 새 남자 친구>에 출연한 적은 있지만, 장편 상업영화 데뷔작은 <수상한 그녀>가 처음이다. 칠순의 오말순(나문희)이 신기한 사진관에서 영정 사진을 찍고 스무 살 처녀로 돌아와 꽃처녀 오두리(심은경)로 청춘을 다시 산다는 플롯의 코미디 영화. 이 영화에서 이진욱은 단 15회 차 촬영에만 참여했다. 주연 타이틀을 붙였지만, 분명 조연이다. “카메오라고 해도 될 정도로 적은 분량이에요. 스토리 면에서도 편집해서 덜어내도 무리가 없는 그런 역할. 투자사나 제작사에서도, 프로듀서조차도 저를 캐스팅하기 미안해했지만 감독님이 꼭 저를 고집하셨대요. 그토록 유연한 성격인 감독님이 그렇게까지 주장할 땐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본인은 자신이 사회의식을 내세운 영화만 하는 감독이 아니고 굉장히 웃긴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코미디 장르에 도전하면서도 노령화 문제에 대해 화두를 던지거든요. 신뢰하는 감독이 제게도 관심 있는 문제를 영화로 만드니, 꼭 출연하고 싶었어요.”
<수상한 그녀>는 어디까지나 순혈 코미디 영화다. 이진욱이 <수상한 그녀>를 자신의 방식으로 해석한 이유는 시나리오를 받을 때쯤 읽은 한 기사에 있다. “자식들이 부모로부터 유산을 미리 받은 다음, 부양하지 않고 나 몰라라 해서 부모가 자식에게 반환 소송을 거는 경우가 많다는 기사였어요. 부모는 대가를 바라고 사랑을 베푸는 게 아니지만, 자식으로서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아니 돌아가신 후에도 모시는 게 한국의 문화 아니던가요? 지금 한국은 사회가 점차 개인화되면서 효에 대한 인식도 희박해지는 과도기를 겪고 있어요. <수상한 그녀>는 요즘 사람들이 놓치고 사는 문제를 건드려 웃음 속에서도 마음을 울릴 거예요. 부모님의 사랑, 부모님에게 갚아야 할 사랑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를 관객들에게 던져주는 영화라고 생각해요.” 그는 언젠가 자신도 부모가 될 것이고, 자식에게 사랑을 주고, 그 또한 자식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생각으로 산다. 그렇기에 효에 대한 의식이 희박해지는 세태는 좌시할 수 없는 문제라 생각한다.
tvN에서 2013년 3월부터 5월까지 방영되며 수많은 폐인을 낳았던 드라마 <나인: 아홉 번의 시간여행>(이하 <나인>)의 박선우, 역시 tvN에서 2012년 방영되어 20대와 30대는 물론, 40대 여자들까지도 사랑의 설렘에 달뜨게 했던 드라마 <로맨스가 필요해 2012>의 윤석현. 이진욱은 두 캐릭터를 통해 배우로서 자신의 브랜드를 온전히 구축했다. 올해 최고의 배우로 꼽히는 송강호나 하정우, 정우성과 이정재, 황정민도 할 수 없는 독보적인 결을 가진 멜로가 그의 굳건한 담이다. 2006년 <연애시대>로 대중에 인식된 그가 두 드라마를 통해 팬덤을 갖춘 톱스타 영역에 발을 디딘 후 선택한 것이 <수상한 그녀>라니, 팬들에게는 맥 빠지는 선택일 수 있겠다. “드라마와 영화는 배우가 구분되는 것 같아요. 두 매체를 유연하게 넘나들기가 쉽지 않았어요. <연애시대> 이후로 영화가 안 들어온 건 아니었어요. 그런데 영화라는 게 여러 조건이 다 들어맞아야 할 텐데, 여지껏 쉽지 않았어요. 분량 문제도 있고 캐릭터 문제도 민감한 부분이고요. 어떻게 보면 영화에 기회가 없었다고도 할 수 있어요.”
수상하기 짝이 없는 작품 선택이다. 매사에 무리하지 않는 화합형 배우인 이진욱이라 가능했던 결정이다. 누군가를 배려했다기보다는 전체 그림을 본 결과다. “비겁할 수도 있고, 약삭빠른 것일 수도 있는데 저는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거든요. 오두리에게 홀딱 빠지는 PD 승우 역의 비중을 무리하게 늘렸다면 전체 그림이 망가졌을 거예요. 욕심내서 영화의 전체적인 안정이 깨지는 것보다는 제게 주어진 만큼에 만족하는 게 좋아요.” 덕분에 편안한 마음으로 “흐느적 가서” 재미있게 촬영했다.
대신 배우 류승룡과 현재 강원도, 인천, 서울 등지에서 촬영 중인 <표적>(가제)은 그가 류승룡이라는 거대한 장악력과 힘의 균형을 이루는 투톱 영화다. 크랭크인이 다소 늦어지면서 <나인> 이후 그의 휴식기를 연장 시킨 영화이기도 하다. 물이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하는 것이라면, 물때를 놓치는 희생이 될 수도 있는 시기였다. 그러나 이진욱은 희생이라는 단어를 떠올린 적이 없다. “작품을 대할 때 그런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어요. 아직 젊으니까, 몇 달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에요. 크랭크인이 늦어지는 이유를 너무 잘 알고 있는데 마음 졸여 뭘 하겠어요. 좀더 충실하게 영화를 준비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겨서 좋았는걸요.
<표적>을 통해 이진욱은 류승룡이라는 든든한 선배를 얻었다. 배우는 같은 프레임 안에 서는 상대 배우를 통해 훌쩍 성장하곤 한다. “선배님이 그러시더라고요. 대부분 배우들은 감정을 30%밖에 사용하지 못한대요. 감정의 추가 100% 움직일 수 있게 하는 건 배우의 노력에 달렸대요. 냉정한 성격이라, 30년 넘도록 싸울 일도 없고 마음 상할 일도 없었어요. 경험해본 감정도 적었죠. 30%까지밖에 안 되는구나, 를 받아들이고 겸손해지는 법을 류승룡 선배가 가르쳐줬어요. 그러면서 조언까지 해주셨죠. 감정이입이 충분히 되지 않고 몰입이 되지 않더라도 본인과 상대방, 신, 대사, 감독을 믿고, 그동안 배우로 살아온 자신을 믿고 연기를 하면 그것도 충분하다고. 배우는 감정을 전달하는 사람이니까, 본인이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고 해서 스스로를 괴롭히지 말라고.”
이진욱은 감정의 진폭을 넓힐 수 있었던 작품으로 <나인>을 꼽는다. “<나인>은 제게 크립토나이트예요. <나인>을 생각하면 전 울어요. 약점이자 고향이죠. 살면서 그런 작품을 또 만나기란 쉽지 않으니까요. 한 인물에 대한 집중과 몰입도가 그렇게 높은 작품은 쓰여지기도 어렵고, 만나기도 어렵다고 봐요. 그보다 처절하고 비장하고 슬프고 우울할 수가 없어요. 극치를 맛봤죠. 감정의 추가 100% 오가는 것을 경험한 작품이에요. <나인> 촬영이 끝난 직후엔 어떤 해탈감 때문에 이젠 연기를 안 해도 되겠구나 하고 생각할 정도였어요. 송재정 작가도 드라마 종영 직후에 절필해야겠다고 얘기할 정도였고요. <나인>은 그만큼 충만감이 컸어요. 물론 저도, 작가님도 다음 작품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하고 있지만요, 하하!”
이진욱에게 연기적 경험을 넓혀준 또 한 명의 배우는 정유미다. 2012년 <로맨스가 필요해 2012> 당시 두 사람은 화면 위의 자연스러운 케미스트리가 과해, 실제 연애 중임이 기정사실화되기도 했다. 서로가 배우로서 신뢰를 가진 상태에서 카메라 앞에 서면 진심을 다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근묵자흑의 바람직한 사례로, 좋은 배우와 함께 연기를 하면 그 좋은 기운에 물이 든다. 정유미가 딱 그랬다. “척하면 척으로 원초적인 교감이 이뤄졌던 상대 배우죠. 자연스러움을 가장했지만 모두 계산된 장면들이죠. 특히 키스 신은 마음 하나 바꾼 거였어요. 진짜로 안 할 이유가 없다, 이건 연기다 하는 공감대가 상대 배우와 합의가 되면 그게 가능해요. 어느 정도 수위의 키스 신을 연기할 것인지 우리끼리 드러내놓고 계산해요. 그렇게 하면 자연스러움이 나오죠, 연기가 그래서 재밌어요.”
멜로에 강한 배우, 작품마다 상대 배우와의 리얼한 케미스트리로 열애설을 몰고 다닌 남자. 이진욱이 갓 데뷔했을 때, 그는 “여자 친구 생기면 손잡고 나타나서 내가 이렇게 연애를 하고 있다! 하고 당당히 밝힐 거예요” 하고 말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돌아오는지를 아프게 경험한 후 생각은 180도 바뀌었다. “그녀와 헤어진 후 <스파이 명월> 때였어요. 드라마 시작하기 전에 기자들을 만나 홍보하는 자리였는데, 그런 자리에선 웃고 있을 수밖에 없잖아요? 아무도 그녀에 대해 묻지 않았고, 저도 얘기하지 않아서 겨우 미소를 유지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한 기자가 대답을 기대하지 않는 질문을 던지더군요. 헤어졌는데 어떻게 웃음이 나오냐는 투였어요. 악의적인 의도가 보이는 눈빛이었죠. 다른 상황이었다면 아무렇지 않게 잘 넘길 수 있었을 텐데 그 자리에서는 너무 당황스러웠어요. 표정이 허물어지는데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고 그냥 멍하니 서 있게 되더라고요. 옆에서 한예슬이 “상처가 되는 말이잖아요!” 하고 말해줘서 그 순간을 모면했지만, 정말 상처가 됐어요. 그 후로 절대 공개 연애는 제 인생에 없으리라 생각했어요.” 하지만 상처는 상처받지 않는 기술을 가르쳐준다. 지금 사귀는 사람이 있냐고 물었을 때, 이진욱은 “끊임없이 연애는 해야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하고 매끄럽게 답하고 빠져나갔다.
군 생활을 기점으로도 이진욱은 큰 변화를 겪었다. 유아독존의 외골수가 세상에 나와 깨지고 배우는 과정을 군대에서 겪었다. “사춘기 이후로 제가 냉랭하고 무감각하다고 생각하며 살았어요. 부재중 전화나 문자 등에 그때그때 응답하지 않고 쌓아놨다가 내킬 때 전화를 거는 쪽이었죠. 그만큼 다른 사람과의 소통을 원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김지석 등과 군대에서 어울리며 충격을 받고 자신이 깨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죠. 남들은 다 나보다 많은 걸 알고, 나보다 많은 것을 경험해봤다는 걸 그제야 알게 됐어요. 덕분에 성격이 많이 바뀌어서 이젠 사람 만나는 걸 즐겨요. 나는 한참 사람을 더 잘 알아야 한다는 걸 받아들였죠.” 보그 패션 나잇 아웃, 브랜드의 론칭 행사, 그리고 영화제 파티에서 이진욱을 만나는 일이 잦았던 것도 그런 변화된 모습이다. 생색만 내고 금세 가버리는 연예인들이 대부분인 반면, 이진욱은 오래 머무르며 행사 자체를 즐기는 모습이었다. 행사장은 그에게 소통의 학습장이다. “배우의 능력을 어디에 쓰겠어요. 그런 자리에서 나를 만난 것만으로 즐거워하는 사람들과 조금 나누는 거죠. 지금이 좋아요. 미리 걱정 안 해요. 그게 싫어지면 저도 다른 연예인들처럼 금세 가버리면 될 텐데요, 뭘.”
그의 전성기는 지금일 수도 있고, 지금부터일 수도 있다. 어쩌면 <나인> 최종회가 방송되던 그 시간이었을 수도 있고, <표적>이 개봉될 어느 목요일일 수도 있다. 전성기가 과거, 혹은 현재일 것이라는 생각은 배우뿐 아닌 누구에게라도 삶의 깊은 곳으로부터 오는 공포심을 불러온다. 이진욱은 그 공포심을 힘으로 산다. “힘들 때마다 생각해요. 이 작품이 내게 마지막일지도 모른다고. 불만이 있고 아쉬운 작품이라도, 그 작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 정말 소중해져요. 공포심을 받아들이면 공포스럽지 않아져요. 저는 제가 앞으로 쭉 발전할 배우라고 믿어요. 저는 이제껏 그렇게 빨리 발전한 적이 없었던 배우죠. 스타성의 행운은 항상 로또가 아닌, 연금처럼 조금씩 꾸준히 들어왔죠. 올해보다는 내년이 나으리라 믿어요. 조금씩 나아지는 과정을 겪었고, 앞으로도 쭉 그러리라 믿어요.”
누구나 그렇듯, 선택하지 않은 꿈도 있다. 그는 원래 농업과학을 공부하고 싶어 했다. 종자를 개량하고, 더 효율적인 농사가 가능해지도록해주는 기술 말이다. 어쩌면 그곳에 행운의 로또가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선택하지 않은 꿈에 대한 미련은 없다. “배우는 좋은 직업이에요. 배우로서의 이진욱에게 다가오는 모든 리액션을 즐겨요. 제가 원하는 건 그런 거예요. 농업 연구원이 됐더라면 나를 만족시키지 못한 채 살았을지 몰라요. 꿈을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한 아쉬움이 든다면, 연구원 역할을 연기로 경험해보면 돼요. 어때요, 배우는 정말 좋은 직업이죠?” 배우 이진욱에게는 매 순간이 전성기다. 어제가 그랬고, 오늘이 그렇고, 내일 역시 그럴 것이다. 분명 긍정의 에너지다.
- 에디터
- 스타일 에디터 / 김미진, 컨트리뷰팅 피처 에디터 / 이해림(Lee, Herim)
- 포토그래퍼
- HYEA W. KANG
- 스탭
- 헤어 / 백흥권, 메이크업 / 김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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