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오뜨 꾸뛰르 리포트 1
누가 꾸뛰르를 모함했나? 충격과 쇼맨십은 사라졌어도 장인 정신을 앞세운 파리 오뜨 꾸뛰르의 영토는 건재하다. 예전처럼 고객과 향수 비즈니스 중심으로 다시 나아갔을 뿐. 그건 꾸뛰르의 본분이다.
17년 동안 거의 매 시즌 파리 프레타 포르테를 보러 갔지만, 오뜨 꾸뛰르는 세 번째다. 그것도 빅 쇼들을 의무감을 갖고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런 만큼 꾸뛰르에 뭔가 다른 변화를 기대했다. 이를테면 지방시 시절 알렉산더 맥퀸이 보여줬던 행위예술와 판타지를 오가던 쇼, 빅터앤롤프가 시도했던 치밀하게 계산된 패션 퍼포먼스, 디올 존 갈리아노가 보여줬던 한여름 밤의 꿈 같던 쇼… 하지만 이제 꾸뛰르는 예전의 꾸뛰르가 아니다. 고객들을 철저히 의식한 살롱 쇼거나, 아틀리에의 장인 정신의 최대치를 보여주는 실험적 무대거나, 향수 홍보를 위한 프레젠테이션의 장이다. 이 방법이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라, 꾸뛰르의 환상과 쇼맨십이 사라졌다는 것, 고객과 비즈니스에 집중하는 시대로 나아갔다는 뜻이다. 하지만 쇼적인 재미가 사라졌다 해도 여전히 꾸뛰르는 중동과 중국 부자들, 그리고 레드 카펫 여신들의 사랑을 받을 것이며, 전통적인 빅 하우스들은 그들의 콧대 높은 이미지와 자존심, 향수 판매를 위해서라도 꾸뛰르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4일간의 <보그> 꾸뛰르 다이어리는, 그러니까 2014년 봄 오뜨 꾸뛰르 현주소에 대한 생생한 리포트다.
Chanel
샤넬 쇼는 언제나 천장 높이가 100m쯤 되는 그랑 팔레에서 한다. 왜냐면 파리 패션쇼에서 가장 큰 세트가 필요한 쇼니까. 그동안 샤넬 꾸뛰르 쇼를 위해 라거펠트는 언제나 퓨처리스틱한 접근법을 취했다. 4층 높이 흰색 원형 탑이 스르르 위로 올라가면서 나선형 계단에 모델들을 세워 장관을 연출한 2006년 봄 쇼, 파이프오르간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했지만, 실은 우주선처럼 보인 알루미늄 기둥들을 바벨탑처럼 세운 2008년 가을 쇼, 어마어마하게 큰 샤넬 트위드 재킷 세트를 만든 2008년 봄 쇼 등등. 때론 빙하, 숲, 지구 종말 이후의 세계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모든 것이 하얗다는 사실만 같은 뿐. 무대 중앙엔 웅장하게 반짝이는 흰색 튜브가 있을 뿐이었는데, 대신 관객석에 꽤 신경을 썼다. 딱딱한 나무가 아닌, 푹신한 쿠션 벤치에다 앞줄과의 간격이 꽤 넓어 프런트 로가 아니라도 모델이 발끝까지 다 보였다.
쇼가 시작되자 라거펠트의 의도가 드러났다. 흰색 튜브가 회전하자(회전무대는 샤넬이 즐겨 쓰는 장치), 프랑스인 팝 스타 세바스티앙 텔리에와 그가 이끄는 소규모 오케스트라와 함께, 흔히 나이트클럽 댄서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등장하는 완만한 곡선의 하얀 계단이 양쪽으로 눈에 들어왔다. 라거펠트는 스타일닷컴 인터뷰를 통해 이렇게 설명했다. “이번 세트는 얼음 궁전이자 또 다른 행성의 나이트클럽입니다. 무도회장 분위기도 섞었죠.” 행성이라! 하긴 라거펠트는 철저한 미래주의자로, 과거 단 한 번도 과거지향이었던 적이 없었다(어쩌면 그는 모험심 강한 전 세계 억대 부자들과 마찬가지로 우주 여행 티켓을 이미 주문해놨는지도 모르겠다). 의상들은 늘 샤넬 아카이브에서 꺼낸 아이템들이지만, 거기에 젊고 스포티한 감각, 스트리트 캐주얼 시크를 더해 변형시켰으며, 미래지향적 세트를 통해 샤넬의 미래주의를 강조했다.
그런데 모델들의 발걸음이 그 어느 때보다 경쾌하고 빨랐다. 이유는 편안한 신발 때문! 죄다 꽉 끼는 코르셋 미드리프를 허리에 두르긴 했어도, 20cm쯤 되는 플랫폼이나 아찔한 스틸레토가 아닌, 납작한 스니커즈를 신었으니 경쾌할 수밖에. 물론 꾸뛰르인 만큼 스니커즈엔 트위드, 스팽글, 레이스, 파이톤 소재 등이 장식됐다. 말하자면 꾸뛰르 스니커즈! 가격은 상상을 초월한다(3,000유로 정도? 샤넬 꾸뛰르 쇼에 초대된 지디와 태양이 먼저 주문했을지 모르겠다). 정말이지 이번 샤넬 꾸뛰르 컬렉션은 10대와 20대 젊은 샤넬 고객들에게 대환영받을 듯. 샤넬 룩을 젊고 발랄하게 소화해내고 싶은 부자 아가씨들에게 ‘딱’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코코 샤넬은 여성들을 코르셋으로부터 해방시킨 인물 아닌가. 그런데 라거펠트는 볼레로나 크롭트 톱, 미니스커트나 레깅스에 코르셋 같은 미드리프를 더하다니! 그게 바로 패션의 재미있는 아이러니다. 코코는 코르셋을 없앴고, 라거펠트는 코르셋을 입히고. 코르셋과 스니커즈는 서로 상충되는 요소지만, 그게 컬렉션의 중심 역할을 하며 활동적이고 에너제틱한 느낌을 줬다. 만약 스니커즈에 벙벙한 트랙 수트를 입었다면, 아무리 샤넬이라도 피트니스 센터에 갈 때나 입겠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어쨌든, 모델들은 하얀 계단 위에서 요정처럼 깡충거리며 뛰어내려왔고, 생긋 미소 지으며 관객들과 카메라맨들을 쳐다봤다.
오프닝 모델은 요즘 라거펠트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카라 델레바인. 피날레 모델은 카라 델레바인과 (고양이 슈페트와 함께 라거펠트의 애정을 듬뿍 받고 있는) 허드슨 크로닉(공방 컬렉션에 늘 등장하는 남자 모델 브래드 크로닉의 아들). 라거펠트가 함께 등장해 ‘신부와 어린 조카와 할아버지’ 신을 연출하는 것이 샤넬의 피날레 풍경이다. 참, 이번 샤넬 쇼에도 한국 모델 수주와 곽지영이 모델로 등장했다. 샤넬 블랙 재킷 사진집 시리즈 II에도 등장한 플래티넘 골드 머리 수주는 은색 튜브 드레스에 시스루 숄을 둘렀고, 곽지영은 반짝이는 깃털과 프린지 장식 짧은 이브닝 드레스에 스니커즈를 신고 나왔다. 65벌을 각자 한 번씩 입고 등장하기에 모델 수는 65명. 그 가운데 아시아 모델은 여섯 명, 흑인 모델은 세 명. 그래도 한국인이 두 명 나왔으니 뭐, 섭섭한 숫자는 아니다.
이번 샤넬 쇼는 두 번 열렸다. 아까도 말했듯이 좌석이 널찍해서 그 많은 고객들과 프레스들을 다 소화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한국 프레스들은 10시 쇼였는데, 고객과 셀럽을 초대한 12시 쇼에는 글로벌 패셔니스타로 완전히 자리 잡은 지디와 태양이 초대돼 소동이 일었다. 아시다시피 지디와 태양은 소문난 샤넬 여성복 고객. 여성복, 남성복 가리지 않고 무차별 소화해내는 지디가 평소 샤넬 옷과 액세서리를 좋아하기에 샤넬 측에서 초청한 것. 근데 다들 태양이 지디인 줄 알았고 모피 모자를 푹 눌러쓴 지디는 얼굴이 안 보여 누구인지 몰랐다는 후문. 어쨌든 그들을 알아본 파파라치와 카메라맨들이 사진을 찍느라 야단법석을 떨었고, 두 사람은 등장부터 퇴장까지 시선을 끌며, 샤넬 쇼에 초대된 다른 셀럽들(특히 틸다 스윈튼과 릴리 알렌), 그리고 라거펠트와 기념 촬영까지 했다. 은발의 라거펠트가 지디와 태양 사이에서 팔짱을 끼고 촬영한 사진에서 그가 지디와 태양을 바라보는 흐뭇한 표정이라니! 슈페트나 허드슨을 바라보는 표정도 비슷하지 않을까?
Christian Dior
라프 시몬스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꾸뛰르 쇼를 직접 보진 못했기에, 이번에는 꼭 그 거대한 플라워 벽이나 식물 천장에서 나는 싱그러운 꽃 냄새를 맡으리라 생각하며 쇼장에 들어섰는데 웬걸! 꽃은 온데간데없고 대신 하얀 회벽 동굴(50년대 도예가 발랑틴 슐레겔(Valentine Schlegel)의 작업에서 영감을 받았다)이 프레스들을 맞았다. 하긴 쇼장인 로댕 미술관 외벽을 금색 거울 효과를 내는 두꺼운 알루미늄 포일로 둘러쌀 때부터 알아챘어야 했는데. 그런데 그 동굴 천장에 뚫려 빛을 내는 구멍들이 수상했다. 동그라미도 아니고 세모도 아닌, 무정형 네모. ‘이게 쇼와 연관이 있을 거다’란 생각은 십수 년간 쇼를 지켜본 프레스의 직감. 아닌 게 아니라 이번 디올 꾸뛰르 쇼의 키워드는 ‘가벼움’, 디테일의 핵심은 복잡한 수공예 기법을 동원한 ‘컷워크(cutwork)’였다. 그러니까 천장 구멍은 컷워크에 대한 암시. 오프닝부터 오간자 소재에 천장과 똑같은 컷워크가 들어간 하얀 드레스가 등장했다. 뒤이어 등장한 것은 좌우가 비대칭이고 앞뒤가 다른 드레스들!
모델들이 휙 하고 스쳐 지나갈 때마다 드레스들은 풍선처럼 부풀거나 나풀거리거나 뒤로 끌리며 아름다운 A라인 옆모습, 혹은 풍성한 뒷모습(힙 아래 검정 고무 밴드를 넣은 흰색 컷워크 드레스!)을 드러냈다. 라프 시몬스의 말대로 이번 쇼는 움직임에 관한 것. 그는 스타일닷컴 인터뷰를 통해 “무슈 디올은 의상의 움직임을 사랑했어요. 저는 60년대 사회 움직임이 활발히 일어난 이후 20~30년간 그가 더 활동했다면 어떤 옷들을 발표했을까 생각했어요”라고 말했다. 거의 모든 의상들이 움직이고 흔들렸으며, 그걸 강조하기 위해 미니 드레스에 풀 스커트 같은 트레인이 붙여지거나, 앞은 짧고 뒤를 길게함으로써 걸을 때마다 리드미컬하게 움직였다. 이번에도 슬림한 팬츠 위에 튜브톱 드레스를 입은 시그니처 룩이 등장했고, 바 재킷도 컷워크 디테일이 들어간 채 등장했다. 박지혜와 김성희도 나왔는데, 특히 지혜가 입은 네이비색 컷워크 드레스는 아름다웠다.
쇼가 끝나자마자 백스테이지로 들어가 디테일을 꼼꼼히 확인해야 했다. 그랬더니 과연! 단순히 ‘컷워크’라고 표현하기엔 너무 아까운 정교한 펀칭 디테일들이 많았다. 예를 들어 드레스 전체에 폴카 도트 도안을 그린 후 위쪽 반만 오려내고, 뚫린 부분엔 망사를 대고, 꽃잎처럼 펼쳐진 반쪽과 동그라미 주변엔 온갖 스팽글로 벚꽃이 활짝 핀 것 같은 효과를 낸 드레스. 폴카 도트의 뚫린 반쪽 네트 위에 스팽글을 촘촘히 장식하고 나머지 반쪽은 나풀거리게 놔둔 드레스, 성긴 네트 소재 위에 스팽글 장식 레이스 꽃을 촘촘히 붙인 투피스, 옷 전체에 진보라색 수국이 활짝 핀 것 같은 톱과 팬츠…
결론은? 하늘색 니트 스웨터를 입고 머리를 짧게 깎은 시몬스는 이제 완전히 디올에서 확실한 정체성과 자신감을 찾았다. 여성들을 존중하고 그들에게 자유를 부여하는, 자신의 장기인 테크닉과 건축미를 충분히 강조한 컬렉션! 드레스들의 디테일과 실루엣을 살펴보느라 눈에 잘 띄지 않던 금색 리본 목걸이, 덧버선같이 생긴 비즈 장식 플랫 슈즈만큼이나, 이번 컬렉션은 여자라면 누구에게나 매력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Valentino
발렌티노 정원에 아름다운 나비가, 우아한 오페라 여주인공들이, 주체 못할 아이디어들이 활짝 폈다! 살로몬 호텔에서 열린 발렌티노 쇼에서 아시아 프레스들이 배치된 방 입구엔 하늘로 날아오르는 나비 떼가 그려져 있었다(물론 그곳에도 소규모 카메라 부대가 배치돼 있었다). 오프닝 룩으로 음표 프린트의 시폰과 오간자 드레스, 깃털과 레이스 가운 드레스, 아담과 이브와 선악과 자수 드레스가 등장할 때만 해도 발렌티노다운, 우아한 레이스 드레스들의 행진인 줄 알았는데, 섣부른 판단이었다. 쇼는 점점 광역대로 주제를 넓혀갔다. 백조, 비단뱀, 공작새 자수가 어깨에서 허리로, 허리선에서 아래로 늘어진 튤 드레스들 양쪽으로 등장한 것은 밀림 속 사자, 호랑이, 코끼리, 고릴라, 사슴을 가죽으로 장난기 넘치게 패치워크한 캐시미어 회색 롱 드레스와 코트들! 그리고선 갑자기 분위기를 환기시키듯 미니멀한 소박한 실크 크레이프 아이템들(우아한 롱 드레스, 숄을 걸친 얌전한 니렝스 시스, 프린지 헴라인의 음전한 투피스 등)이 나오더니 프린지 장식 브로케이드 드레스, 황금색 레이스 드레스, 병풍 자수를 놓은 팬츠 수트로 이어졌다. 한 가지 컨셉으로 전개해도 머리가 터질 지경일 텐데 세 개 이상 컨셉을 믹스시키다니!
의문은 백스테이지 입구에 배치된 친절한 이미지 보드를 보고야 풀렸다. 이 성실한 듀오 꾸뛰리에가 영감을 얻은 대상은 온갖 오페라 여주인공들. 보드판엔 <투란도트>, <라보엠>, <라 트라비아타> <카르멘> <동물의 사육제> 등의 포스터와 함께 민화 속 동물 그림들, 이브와 선악과 그림, 오페라 여주인공들과 연결되는 동서양 여인들 이미지 사진들이 뒤섞여 있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익숙한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2007년 6월호 <보그 코리아> 표지 모델 송혜교! 파올로 로베르시가 찍은 그 아름다운 사진이 발렌티노 보드판에 떡하니 붙어 있었다. 혹시 ‘황진이’라고 설명돼 있나 확인했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조금 섭섭했지만, 그들 눈에는 줄리앙 디스가 완성한 과장된 쪽머리의 송혜교가 오페라 여주인공쯤으로 보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어쨌든 그 책이 어찌어찌해서 그들 손에 들어갔고, 그게 아름답게 보인 것이다). 결국 오프닝의 음표 드레스는 베르디의 <라트라비아타>, 온갖 민화 속 동물 패치워크는 생상스의 <동물의 사육제>, 실크 크레이프 드레스와 캐시미어 케이프는 푸치니의 <라보엠>, 은회색 기퓌르 레이스 엠브로이더리 플리츠 튤 가운은 비제의 <카르멘>을 위한 것. 아이디어를 위해 머리를 쥐어짰을 것 같았지만, 의외로 쉽게 풀어갔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번 발렌티노 꾸뛰르 쇼의 아이디어와 기교는 풍요롭고도 굉장했다! 로마 오페라 하우스의 세트 장인들을 동원한 것도 적절한 선택. 쇼장을 빠져나오면서 다른 방에도 가보니 벽에도, 바닥에도 밀림과 동물 그림들이 그려져 오페라 속 여주인공이 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결론은? 마리아 그라지아 치우리와 피에르파올로 피치올리의 옴니버스 패션 오페라 공연의 대성공!
Schiaparelli
로샤를 떠난 마르코 자니니의 첫 스키아파렐리 꾸뛰르 쇼! 쇼장 입구는 지난 시즌과 같이 철제문을 벚꽃으로 장식한 모습. 그 앞에서 이네스 드 라 프레상주가 시크한 팬츠 수트 차림으로 활짝 웃으며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과연 자니니는 초현실주의적 스키아파렐리를 어떻게 해석했을까? 오프닝 룩부터 궁금증이 풀렸다. 스텔라 테넌트의 옷은 풍성한 드레이프 튜브톱 드레스. 뒤를 이어 화이트 러플을 장식한 재킷과 팬츠, 폴카 도트 무늬 시스루 가운과 브로케이드 보디수트 등이 나왔다. 비록 스티븐 존스의 헤어피스와 컬러 헤어가 악센트가 됐지만, 지나치게 얌전하지 않나 생각이 드는 순간, 자니니가 의도한 바가 ‘파격’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채야 했다. 드레이핑 검정 드레스, 불타는 붉은 머리 모델이 입고 나온 반짝이 스트라이프 드레스, 아이보리색 크롭트 재킷의 꽃처럼 부풀린 소매 장식, 토인 소녀 프린트 할렘 팬츠, 연분홍 폴카 도트 블라우스와 촘촘한 러플 풀 스커트, 부풀린 소매만 검정 두체스 새틴으로 처리한 자카드 팬츠 수트, 웨딩 룩으로 변신한 팬츠 수트까지.
사실 스키아파렐리를 재해석하기란 누구도 쉽지 않다. 붉은 바닷가재나 신발모자의 파격을 기대하는 이들에게 대체 어떤 충격을 선사하겠는가! 대신 그는 약간 트위스트된 우아한 여성미에 집중했다. “스키아파렐리는 섬세하게 역설적인 사람이었어요. 우아하지 않은 취향을 가진 우아함의 전형이었죠.” 그런 우아함을 위해 그는 3주나 투자해 연분홍 폴카 도트 러플 풀 스커트를 만들었고, 고급 취향을 저급하게 표현하기 위해 시스루 가운데 브로케이드 쇼걸 보디수트를 매치했다. 몇몇 모델을 제외하곤 10년 전에 활동하던 나이 든 모델이라는 것도 신선했다. 스텔라 테넌트, 커스틴 오웬, 안로르 너츠 등등. 또 스티븐 존스의 밀짚모자들은 조형미가 넘쳤다. 딱 20벌만 선보인 짧은 쇼가 끝난 후 굉장한 것을 기대한 프레스들은 “좀 심심하다”며 자니니의 선택을 걱정했지만, 셀럽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장 폴 고티에, 이네스 드 라 프레상주, 엘 맥퍼슨, 카를라 브루니, 장 폴 구드 등등. 부디 친구들의 바람대로, 멋진 구레나룻의 자니니가 스키아파렐리의 우아함과 함께 초현실적 파격도 멋지게 부활시키기를!
Gaultier Paris
단언컨대, 한때 장 폴 고티에의 천재적 재능(자유자재로 아이템들을 믹스해 아주 섹시하고 우아한 ‘파리지엔 시크’를 표현해내는 능력!)을 의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비록 지금은 모던 페미니티 스타일링의 여신 피비 파일로에게 밀려나 ‘올드 디자이너’ 그룹에 슬쩍 섞였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쇼는 길고 긴 캣워크를 리도 쇼 무대처럼 신나게 활용한 멋진 꾸뛰르 쇼였다. 쇼걸처럼 진짜 깃털(꿩 깃털과 타조털)과 가짜 나비 헤어피스(오간자로 만든 각양각색 나비들)를 머리에 장식한 짧은 앞머리의 무희들이 요염한 캣워킹으로 걸어 나왔으니까(헤어피스는 두말할 것도 없이 필립 트레이시 작품!). 미국 보그닷컴 기사에서 고티에는 “삶은 나비예요. 모델들은 파리의 나비들이죠. 밤중에 그녀들은 쇼걸이 될 거예요”라고 말했다. 의도는 캣워크에서 분명히 드러났다. 아마도 그는 가식이라곤 전혀 없는 솔직한 성격임이 분명하다. 대놓고 나비와 쇼걸 모티브가 분명한 옷들을 온갖 다양한 테크닉과 아이디어를 동원해 적나라하게 펼쳐냈으니까. 그래서 컬렉션엔 나비 날개 칼라 재킷과 블라우스, 나비 코사지 장식 오렌지색 망사 드레스, 꽃잎처럼 펼쳐지는 꽃 프린트 홀터넥 프릴 드레스, 하얀 나비가 날개를 활짝 편 블라우스와 가죽 레이스 스커트(린지가 입은), 제비나비 두 마리가 앉은 것 같은 시폰 오간자 드레스, 엠브로이더리 나비 모티브가 패치워크된 오간자 톱 등이 등장했다. 또 쇼걸 이미지를 위해선 타조털이나 꿩 깃털 헤어피스를 하늘 높이 치켜 올린, 리도 쇼 주인공 무희를 위한 발끝에서 물결치는 탱고 드레스들(특히 오렌지색 깃털 헤어피스와 어울린 오렌지색 시폰 롱 드레스, 조안 스몰스가 입은 어깨에 수십 마리 나비들이 겹쳐 앉은 레이저 커팅 기법의 가죽 레이스 드레스, 진주와 비즈 프린지로 연결된 누드 플래퍼 드레스, 땅바닥까지 끌리는 거대한 흰색 타조털 헤어피스에 흰색 레이스 보디수트!)이 줄줄이 등장했다.
고티에의 시그니처 아이템들도 물론 있었다. 프릴 장식 스트라이프 튜브톱에 가죽 레이스, 화이트 랩 셔츠와 빨강 그물 스커트(시폰 러플이 요란하게 물결치는), 역시 풍성한 러플이 물결치는 가죽 트렌치 슬리브리스 코트 드레스! 그래도 가장 요란스럽게 휘파람을 받은 모델은 벌레스크 요정, 디타 본 티즈. 유난히 새하얗고 작은 그녀가 허리를 꽉 조인 제비나비 코르셋 미니 드레스와 가터벨트 차림으로 사뿐하고 섹시하게 걷는 모습이란! 피날레에서 장 폴고티에가 언제나처럼 무대 위로 ‘또르르’ 굴러 나와 그녀의 가는 허리를 움켜잡고는 장난스럽게 웃던 모습도 관객들을 즐겁게 했다. 비록 프런트 로가 아닌, 넷째 줄 자리였기에 그 모습을 똑똑히 볼 수는 없었지만.
- 에디터
- 에디터 / 이명희
- 포토그래퍼
- CHA HYE KYUNG
- 기타
- James Cochrane, Indigital, Courtesy of Chanel, Arma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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