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핑 에르메스
말의 해. 말과 깊숙이 관련된 패션 명가 에르메스가 파리 그랑 팔레에서 ‘점핑 에르메스’를 개최했다.
말과 기수가 한 몸이 된 채 점프하는 일러스트가 그려진 초대장을 받았을 때,
누구라도 가슴이 벅차 올랐을 것이다.
청명한 하늘이 파리의 봄을 알리던 지난 3월 14일. 컬렉션 기간 동안 패션쇼장으로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던 그랑 팔레가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그랑 팔레는 1900년 만국박람회 이후 57년까지 승마 경기가 열리던 곳). 말과 관련된 패션 명가 에르메스에서 매년 봄 개최하는 ‘점핑 에르메스(Jumping Hermès)’의 다섯 번째 승마 대회가 바로 그곳 그랑 팔레에서 성대하게 열린 것이다.
점프하는 말과 기수를 일러스트로 그린 포스터가 붙은 파리 그랑 팔레 입구. 에르메스가 마련한 이 멋진 행사의 오프닝에 초대된 각 나라 프레스들과 VIP 고객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오늘따라 건물 위쪽을 장식하고 있는 조각가 레시퐁의 두 쌍륜마차가 유독 눈에 띄었다. ‘부조화를 물리친 조화’, ‘시간을 앞서가는 불멸성’이란 제목이 붙은 두 알레고리를 표현한 조각 작품은 조금 뒤 그랑 팔레 안에서 벌어질 일들을 예고하는 것 같았다.
입구에 들어서자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야말로 상상 그 이상! 색색의 종이 리본이 길게 드리워지고 에르메스 리본 테이프가 장식된 양쪽 관중석 너머, 눈부신 자연광 아래 펼쳐진 모래 경기장은 타임머신을 타고 1900년대 만국박람회 시절로 돌아간 듯 ‘와우!’ 하고 감탄사를 내뱉게 했다. 그랑 팔레의 동그란 유리 지붕 밑, 생동감 넘치는 빛의 에너지로 충만한 그곳에서 열리는 승마 대회라니! 천재 디자이너의 빅 쇼를 앞둔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자, 이제부터 눈앞에 보이는 것은 ‘말의, 말에 의한, 말을 위한’ 에르메스의 모든 것들이다. 매년 봄 이맘때쯤 열리는 ‘점핑 에르메스’ 승마 대회는 파리의 봄을 알리는 최고의 행사로 자리 잡은 지 오래. 사흘간에 걸쳐 열리는 이 행사는 세계 최고 기수들을 초대해 국제 장애물 점핑 경기를 치른다. 최고 난이도의 승마 경기(CSI 5*등급)로, 774톤 모래와 18개국 40명 기수들이 동원되며, 상금 총액이 66만2,000유로(한화로 9억5,214만원이 넘는)나 되는, 굉장한 볼거리와 화젯거리를 제공하는 마장마술 대회다. 경기에 참가하는 말만 해도 100여 마리. 말 한 마리를 위해 하루 물 40리터와 곡물 5kg, 건초 7kg이 사용되며, 말들의 휴식을 위해 지푸라기 20톤과 수의사 다섯 명, 대장장이 한 명, 마부 50명이 동원된다.
세계 최고의 점핑을 보여줄 말들이 울타리 안에서 기수들과 몸을 푸는 사이, 관객들은 경기장 옆 에르메스가 준비한 다양한 팝업 스토어에서 벌어지는 볼거리들로 또한 즐겁다. 에르메스의 마구 장인 및 가죽 자르는 장인의 작업을 직접 볼 수 있는 미니 아틀리에, 말에 대한 모든 서적을 총망라한 특별 서점과 작가들의 사인회, 리미티드 에디션으로 제작된 비르지니 자맹이 디자인한 실크 스카프 ‘브리드와 그리-그리’ 시리즈, 승마와 관련된 용품들(승마복, 안장, 채찍 등)을 판매하는 팝업 스토어까지. 여기에 아이들을 위한 작은 놀이 공간(말 가면을 쓰고 동영상을 촬영할 수 있는)까지 마련됐다.
에르메스가 마구로부터 시작된 패션 하우스라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에르메스는 왜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이면서까지 승마 대회를 개최할까? 그 해답은 포부르 생토노레 24번가에 위치한 에르메스 박물관으로 가면 얻을 수 있다. 이번엔 진짜 타임머신을 타고 만국박람회가 개최되기도 한참 전인 1837년으로 가보자. 당시 포부르 생토노레 24번가에서 시작된 마구상 티에리 에르메스의 마구 제품들은 샹젤리제의 마차 제조인들에게 아주 유명했다. 당대 가장 뛰어난 기수들이면 누구나 찾는 안장이 티에리 에르메스 제품이었다. 이후 1923년 에밀 모리스 에르메스는 하우스의 출발점이 되었던 24번가의 유서 깊은 건물을 사들여 경매장에서 건진 말에 관련된 온갖 소품들로 방들을 가득 채워나갔다. 이 귀한 수집품 중에서도 알프레드 드 드로가 그린 커다란 마차와 말, 주인을 기다리는 하인의 그림은 에르메스 로고의 시작이 된 역사적 작품. 61년 출시된 에르메스의 상징적인 향수 깔레쉬 패키지에도 같은 그림이 그려져 있다.
박물관 곳곳을 살펴보면 더 흥미로운 빈티지 소품들이 나온다. 나폴레옹 3세 아들이 타던 작은 목마, 티에리 에르메스가 부인에게 선물한 이니셜이 새겨진 첫 번째 가방, 그녀가 입었던 승마복(마돈나가 공연 때 빌려 입기도 했던!), 명문가 귀족들이 자신들의 가문을 상징하도록 특별 주문 제작한 에르메스 마차와 마구들에 관한 디자인 스케치와 실크 패브릭 샘플들(현재 에르메스 스카프의 원조 격!), 첫 번째로 만들어진 에르메스 스카프, 일본과 중국, 태국에서 가져온 이국적인 마구 컬렉션, 석가모니를 모시던 말 이야기를 듣고는 수집을 시작한 동양의 말 석상들…. 말하자면 포부르 생토노레에 있는 에르메스 박물관은 에르메스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그대로 연결된 공간이다.
“박물관에는 우리의 영혼뿐만 아니라 에르메스의 뿌리가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할아버지께서 구입한 진귀한 보물들을 외면할 수 없을뿐더러, 때로는 그것들의 짝을 찾기 위해 더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더라도, 우리는 이곳에 모든 열정을 쏟아부을 겁니다.” 생전에 장 루이 뒤마 회장은 이 위대한 에르메스 유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동안 에르메스를 거쳐간 마르탱 마르지엘라와 장 폴 고티에는 물론, 현재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크리스토프 르메르 역시 이곳을 수시로 찾아 컬렉션의 영감을 얻는다. 지금까지 에르메스 스카프에 활용된 수많은 주제들 대부분이 이곳 소장품에서 비롯됐음은 물론이다.
다시 ‘점핑 에르메스’가 열리고 있는 그랑 팔레 현장으로 가보자. 마장마술이 열리던 경기장이 이번엔 에스메스의 또 다른 테마인 ‘메타모포시스’를 위한 퍼포먼스의 장으로 텅 비워졌다. 웅장한 음악에 맞춰 등장한 것은 진의 시황제 무덤 속에서 잠자던 흙으로 빚어진 군대. 40여 년 전 중국의 한 농부에 의해 발견된 시황제의 군대가 에르메스의 오렌지빛 생명수를 마신 듯 2000년이 넘는 긴 시간의 터널을 지나 우리들 앞에 나타났다. 이 역사적 순간은 프랑스의 유명 안무가이자 공연 기획자이며, 베르사유 기마술 아카데미 관장인 바르타바의 연출에 의한 것. 기마술 아카데미 단원들은 시황제의 군대처럼 완벽하게 분장하고는 말을 타고 달리며 모래바람을 일으켜 극적이고 화려한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평화를 사랑하는 승마 예술의 황제, 바르타바가 완성한 극의 시나리오는 이랬다. 일본에서 라자스탄, 몰다비아에서 케랄라, 한국에서 티베트까지, 그의 지휘 아래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영원불멸의 기마병과 말들. 마침내 파리의 웅장한 그랑 팔레 유리 지붕 아래서 무겁게 그들을 가두었던 흙을 떨쳐내고 무기와 함께 거대한 역사까지 내려놓고는 인간으로 환생해 관객들을 향해 힘차게 걸어온다는 설정. 베르사유 아카데미의 여성 기수들과 어린 무용수들이 말과 함께 혼연일체가 되어 선보인 공연은 관객들을 잠시나마 환상의 세계로 안내하기에 충분했다.
그랑 팔레에서 펼쳐진 사흘간의 시간은 말과 관련된 모든 것이 시각, 후각, 촉각을 통해 전해진 시간들이었다. 말의 숨소리, 작은 북소리처럼 들리던 말발굽 소리, 말과 흙냄새…. 여기에 세계 최고 승마 선수들이 말과 하나가 된 아찔한 순간들, 특히 그들이 공중에 떠 있던, 시간이 멈춘 듯한 순간과 장애물을 넘는 아슬아슬한 순간들까지.
“말이 예술가이면 기수는 안무가이고 마구 장인은 자신의 재능으로 안장을 감독하는 사람이다. 말과 기수의 균형이 안장에 의존한다”라는 에르메스의 신념처럼, 브랜드의 장인 정신은 사람과 말 사이에서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하우스의 뿌리로 돌아간 에르메스, 승마 대회의 전통을 되살린 그랑 팔레, 그리고 패션과 문화가 하나가 된 ‘점핑 에르메스’. 사흘간의 행사를 끝내고 햇살 가득한 샹젤리제 거리를 걸었다. 오늘따라 파란 파리의 하늘 아래 봄 햇살을 머금은 청명한 공기를 훅 들이마시자, 오렌지빛 미소가 절로 번졌다.
- 에디터
- 패션 에디터/ 이지아
- 기타
- Courtesy of Her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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