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에서 여인으로, 김연아 2
소년은 남자가 되고, 소녀는 여인이 된다.
은반 위의 요정에서 목련꽃처럼 아름답고 성숙한 여인으로 갓 피어난, 우리의 김연아.
“우는 모습은 이미 너무 많이 보여서 이번엔 안 울고 싶었어요. 어쩔 수 없이 은퇴하는 것도 아니고, 오래전부터 계획해온 일이니까요.” 소치 올림픽이 끝난 후에도 아이스쇼 준비로 쉴 틈이 없었던 연아는 비로소 경기에 대한 부담과 운동 스트레스에서 벗어났다. 부상 위험 때문에 그동안 해보지 못한 것들을 하나씩 시도해볼 생각이다. 예를 들면 자동차 운전면허 따기나 자전거 타기 같은 것. 여행도 가보고 싶다. “파리가 궁금해요.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그동안 경기 때문에 여러 나라를 다니긴 했지만 사실 여행지로 유명한 곳은 파리가 거의 유일했던 것 같아요. 경기는 주로 시골이나 외진 곳에서 열리거든요.” 파리는 연아가 첫 시니어 금메달을 획득한 곳이자 세계신기록을 갈아치운 2009년 시즌 첫 대회가 열린 곳이다. 당시엔 갈라쇼가 끝난 후, 잠시 시간을 내어 몽마르트르 언덕을 구경한 게 전부였다. “그런데 사실 지금은 어딜 가든 좋을 것 같아요.”
체중 조절을 하느라 그간 먹고 싶은 게 많았을 거라는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운동을 하는 동안에도 음식은 실컷 먹었다. “오히려 올림픽을 앞두고 훈련을 해온 지난 2년간은 억지로 먹느라 더 스트레스를 받았어요.” 모든 여자들이 부러워할 만한 이 날씬한 몸매의 소유자는 조금만 부실해도 몸무게가 줄어드는 바람에 삼시 세끼를 꼬박꼬박 챙겨 먹었다고 했다. 근육을 만들기 위해 단백질 섭취는 필수였다. “체중이 줄면 체력이 떨어져 힘들기 때문에 특히 고기는 ‘이걸 먹어야만 힘을 쓸 수 있다’는 의무감으로 먹었죠. 어릴 때와는 조금 다른 체중 조절을 해야 했어요.”
연아의 가느다란 몸은 보기 좋게 균형이 잡혀 있다. 서양의 피겨 선수들과 비교해도 긴 팔다리와 작은 얼굴이 타고난 신체 조건이라면, 라인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탄탄한 근육은 오랜 세월 운동을 해온 성실함의 산물이다. 덕분에 연아는 어떤 옷도 멋지게 소화해냈다. 프린지로 길게 장식된 20년대풍 아이보리색 롱 드레스를 입었을 땐, 발레리나처럼 아름다운 동작을 선보이기도 했다. “예전에 했던 프로그램 안무 중 하나예요. 전 모델이 아니라서 사진을 찍을 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몰라요. 이끌어주면 따라 하는 거죠. 제가 뭔가 예술적인 포즈를 알아서 취할 거라 기대하는 분들이 많은데, 전 그 정도는 아니거든요. 정해진 안무를 잘하는 것일 뿐, 그렇게 창의적이지는 못해요.” 촬영 초반, 어색한 환경과 낯선 사람들에 둘러싸인 연아의 몸이 쉽게 풀리지 않자 패션 에디터는 연아에게 익숙할 만한 피겨 프로그램 음악을 틀어주겠다고 제안했다. “저 클래식 안 좋아해요. 프로그램 음악은 이미 너무 많이 들어서 충분하고요. 이동할 때 차 안에서 음악 듣는 걸 즐기긴 하는데, 전 주로 가요 들어요.” 기품 넘치는 여신님의 가요 사랑!
연아는 매번 자신의 공연을 위한 주얼리를 디자인해준 제이에스티나의 진주 귀고리를 특히 마음에 들어 했다. “‛아디오스 노니노’ 때 한 귀고리도 마음에 쏙 들었는데, 오늘 착용한 이 귀고리도 예쁘네요. 주얼리가 점점 더 화려해지고 스타일도 다양해지는 것 같아요.” 새하얀 셔츠 원피스 위에 걸친 헐렁한 트렌치코트 역시 편안한 스타일을 좋아하는 연아에게 어울렸다. “1년에 두 벌 정도 입게 되는 피겨 의상과 운동복은 저에겐 그냥 작업복이에요. 패션에 관심도 많고 쇼핑도 좋아하긴 하는데 선수 생활을 하는 동안엔 별로 입을 일이 없었죠. ‘내가 과연 이걸 입을 일이 있을까?’ 싶어 사려다가도 망설였어요. 요즘은 하나둘 눈이 가네요.” 연아는 수수한 스타일을 좋아한다. 색상도 무채색으로 튀지 않는 옷. 굽이 높은 신발을 신는 일도 거의 없다. 그동안은 피겨를 하기 위해서였다. 잠깐만 하이힐을 신어도 종아리를 비롯한 다리 근육이 틀어지기 때문이다. 지난번 촬영에서도 연아는 잠시 킬힐 위에 올라서자마자 “아킬레스!” 하고 비명을 질렀다. 그래서 이번엔 연아에게 어울릴 만한 예쁜 샌들과 굽이 낮은 구두를 잔뜩 준비했다. “공식적인 행사가 아니면 하이힐은 피했어요. 그렇다 보니까 편한 게 익숙해 잘 안 신게 되는 것 같아요.”
사실 <보그>와 연아의 인연은 꽤 깊다. 첫 만남은 2007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동메달을 딴 후, 캐나다로 전지훈련을 떠나기 전이었다. 두 번째는 미국의 피겨 스타 조니 위어와 함께 디자이너 이상봉의 아틀리에를 찾았을 때였다. ‘2009 페스타 온 아이스’에서 입을 의상을 피팅하기 위한 자리였다. 당시는 연아가 밴쿠버에서 열린 4대륙 선수권대회에서 쇼트 세계신기록을 갱신하고,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마침내 ‘월드 챔피언’이라는 타이틀을 얻은 직후였다. 연아는 그때도 이미 슈퍼스타였다. 5년여의 시간이 흐른 지금은? 세계선수권대회 2연패, 그리고 4대 국제대회 그랜드 슬램 달성. 출전한 모든 대회에서 3위권에 입상하는 올포디움을 달성한 유일한 선수.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는 역대 최고점을 기록했고, 소치 올림픽에서도 은메달을 수상했다. 연아는 피겨계의 전설이 되었다.
촬영장엔 얼음을 가득 채운 샴페인이 도착했다. 김연아의 팬클럽 ‘승냥이’의 회원이기도 한 주류 홍보대행사 직원이 촬영 소식을 듣고 이 멋진 날을 기념하기 위해 샴페인을 들고 찾아온 것이다. 늘 ‘승냥이’가 무슨 뜻인지 궁금했다. 연아의 모든 프로그램과 당시의 사연까지 피겨 전문 해설가만큼이나 줄줄 꿰고 있는 그의 말에 따르면, ‘승냥이’는 2007년 세계선수권이 끝난 후 연아의 미니홈피에 ‘방켓’ 사진이 공개되었을 때, 승냥이 떼처럼 팬들이 그 사진들을 실어 나른 데서 연유한 이름이라고 했다. 이처럼 열정적이고 방대한 팬 집단을 보유한 운동선수는 김연아가 유일할 것이다. 지난 아이스쇼의 경우만 봐도 그렇다. 티켓은 예매가 시작된지 30분 만에 전 좌석이 매진되었다. 23만 명이 동시 접속한 탓에 사이트가 마비되기도 했다. 팬이 곧 그들의 존재 이유가 되는 연예인과 달리, 성적이 중요한 운동선수에게 팬은 조금 다른 의미일 것이다. “맞아요. 응원해주고 저에게 힘을 실어주는 팬분들은 분명 고마운 존재지만, 운동선수가 많은 경기를 하다 보면 매번 다 잘할 수는 없잖아요. 요즘은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지만, 못했을 땐 싫은 소리도 많이 듣게 되죠.”
김연아는 그저 유명인이 아니라 국민 여동생, 국민의 딸이었다. 주니어 시절부터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던 아사다 마오와 연아가 비교될 때면 이야기는 한 개인이 아니라 민족의 문제로 귀결되곤 했다. 때로는 비장한 분위기마저 풍겼다. 연아는 곧 한국의 자존심이었다. 성적 이상의 압박감과 부담감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제가 실수를 해도 ‘실망했다’는 소리 없이 꾸준히 좋아해주시는 분들이 가장 감사해요. 해외 경기인데도 직접 찾아와주시는 분들도 고맙고요. 가끔은 ‘내가 그 정도일까?’ 신기한 생각이 들기도 해요.” 연아는 아무래도 쑥스러운 듯 말끝을 흐렸다. 팬들이 자신을 그토록 좋아해주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고 했다.
연아 역시 누군가의 팬이다. 세계선수권을 다섯 차례나 제패한 미셸 콴은 스케이트를 막 시작한 꼬마 연아의 우상이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피겨 선수로 좋은 성적을 거뒀을 뿐 아니라 에너지 넘치고 감동적인 연기를 보여줬어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아름다운 선수로 남아 있죠. 피겨 선수로서뿐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자신이 목표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계속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고요.” 어린 시절엔 상상도 못했던 일들이 일어났다. 미셸 콴은 소치 올림픽 당시 연아의 연기를 보고 “숨이 멎는 줄 알았다”고 극찬했다. 연아와 함께 ‘강남스타일’의 말춤을 추고 있는 사진을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적도 있다. 둘은 이제 같은 길을 걷는 동료다.
지난 5월 6일, 연아는 안드레아 보첼리의 ‘Time to say goodbye’의 선율에 따라 마지막 춤을 췄다. 피날레 곡이 끝나고 여왕의 작별 인사를 끝으로 화려했던 무대 위의 조명은 꺼졌다. “어릴 때부터 지금껏 거의 똑같은 패턴으로만 살아왔어요. 이제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될 거라 생각하니 기대가 되는 한편 두렵기도 해요. 솔직히 제가 아는 게 운동밖에 없잖아요. 제가 다른 걸 해도 잘할 수 있을까요? 그래도 걱정보단 기대가 더 큰 것 같아요.” 오랫동안 운동을 해온 사람들은 특유의 균형 감각을 가지고 있다. 그건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자기 자신과 싸워 이기는 법을 안다. 여자로서 연아의 꿈은 “나 자신으로 행복하고 즐겁게 사는 것”이다. 연아는 걱정없다. 여왕은 얼음 궁전의 문을 열고 세상을 향해 한 걸음 나섰다. <보그>와의 다음 만남에서 연아는 또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글쎄요. 나이 든 모습? 흐흐. 어쨌든 스포츠계에서 계속 활동하고는 있겠죠. 피겨는 제가 제일 잘했던 거고 또 제일 잘 아는 거니까. 피겨를 끝까지 놓지는 않을 거예요. 후배들에게 도움도 주고 싶고요.” 아름다운 동화의 마지막은 늘 이렇게 끝났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모쪼록 연아가 그토록 원하던 자유 시간을 마음껏 누릴 수 있길 바란다. ‘아디오스, 그라시아스!’
소녀에서 여인으로, 김연아 1 www.vogue.com/YunaKim1
- 에디터
- 패션 에디터/ 이지아, 피처 에디터 / 이미혜
- 포토그래퍼
- LEE GUN HO
- 스탭
- 헤어 / 한지선, 메이크업 / 홍성희, 세트 스타일링 / 최서윤(Da;r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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