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여덟, 열혈 청년 주원
주원은 드라마 <굿 닥터>가 끝나기도 전에 뮤지컬 <고스트>를 연습했고,
<고스트> 무대에 오르는 동안 영화 <패션왕> 촬영을 마쳤다.
10월 방송될 드라마 <노다메 칸타빌레> 한국판도 곧 준비에 들어간다.
스물여덟의 주원은 열정적인 배우로서 누구보다 밀도 높은 삶을 살고 있다.
잔인한 4월 말 아침, 주원은 일어나자마자 뉴스를 보다가 <보그> 스튜디오로 걸어 들어왔다. 그리고는 패션쇼 기간 중 쇼장 앞을 호령하는 ‘패션왕’들처럼 독특한 패션을 몸에 감고 스튜디오 정글을 호령했다. 웃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고, 시선을 뿜기도 하고 잡아채기도 했다. 카메라와 조명이 있는 한, 쇼는 계속돼야 하니까. “어제 <고스트> 무대에서 이상하게 자꾸 눈물이 나더라고요. 너무 감정이입이 돼서….” 원래 울어야 할 장면에서 진짜로 울었다고, 주원이 말했다. 마치 그를 빌미 삼아 숨겼던 눈물을 쏟아내는 무뚝뚝한 남자처럼. 전설적인 로맨스 영화 <사랑과 영혼>을 뮤지컬로 옮긴 <고스트>에서 샘은 몰리를 사랑해야 하고, 죽어서도 지켜줘야 하고, 그녀를 뒤에서 안아 함께 물레를 돌려야 한다. 울음이 터져도, 세상에 어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더라도 매일 이어져야 하는 쇼다. 물론 감기에 걸려도.
“컨디션 조절에 실패했어요. 드라마 할 때는 매일 밤새우고 며칠 못 자도 괜찮았는데, 뮤지컬에선 안 되네요. <고스트> 오픈 후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다 싶었을 때, 감기가 호되게 왔죠.” 김준현과 김우형이라는 믿음직한 배우가 주원과 함께 트리플 캐스팅으로 공연 중이다. 몸과 목이 중요한 뮤지컬이라면, 차라리 그들에게 하루를 부탁하고 컨디션 회복의 기회를 갖는 것이 평화로운 해법 아닐까? 프로페셔널 배우, 주원은 전혀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예전에도 목소리가 안 나올 때도 공연을 했어요. 언더스터디 배우가 있었지만 그래도 직접 했죠. ‘아파도 내 역할은 내가 제일 잘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목소리가 안 나올 지경이라면 공연의 퀄리티는 떨어지겠죠. 하지만 공연의 흐름이라는, 또 다른 중요한 퀄리티는 누구보다 제가 가장 잘 보장할 수 있으니까요. 제겐 그게 관객에 대한 책임감이에요.” 주원이 왼팔을 걷어 보였다. “여기 링거 자국이 아직도 숭숭 나 있을 거예요.” 흰 살에 난 희미한 자국들이 한참 지났지만 여전히 우물 같았다. “저를 보기 위해 예매하는 관객들도 있으니까요.” 심지어 그중 몇몇 관객들은 온몸에 열이 나고 목이 붓고 콧물도 나오는 희귀한 샘을 본 것을 행운으로 여겼을지 모른다. 주원의 존재감이다.
20부작 드라마 <굿 닥터>가 작년 10월 마지막 방송을 내보내고 있을 때, 주원은 이미 <고스트> 연습실에 있었다. 아침 10시부터 밤 10시까지, 드라마 일정 때문에 2주 늦게 시작한 연습을 매일 했다. 4년 만의 뮤지컬. 드라마와 영화 연기에 익숙해진 배우의 몸을 뮤지컬에 맞도록 적당히 해체했다가 적당히 조립해야 했다. 더군다나 그 몸은 순수한 자아의 자폐(90% 회복된) 의사 ‘시온’의 몸을 다 떠나지 못했다. <굿 닥터>를 촬영하는 석 달 내내, 주원의 몸은 일정한 각도로 구부정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경추와 척추가 비틀어져 고통이 찾아왔고, 지금도 교정 중이다. “시온이는 가슴에 구멍을 뻥 뚫고 떠났어요. 몸 안에 품을 정도로 익숙한 친구였죠. 시온은 과장 없이 섬세한 연기가 필요한 캐릭터였기 때문에 <고스트>와 대비가 많이 됐어요. 뮤지컬 연기는 전에 해본 거니까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새 낯설어져 당황스럽기도 했어요. 한편으로는 ‘꼭 뮤지컬이라고 해서 뮤지컬식 연기를 해야 하나?’ 싶은 생각도 들었어요. 요즘 뮤지컬은 일상적인 톤을 추구하기도 하니까요.” 4년 전 마지막 뮤지컬 무대에 올랐을 때와는 상황이 달랐기에 연출과 연기의 톤을 깊이 있게 의논해볼 수도 있게 됐다. 결론은 중간 지점의 연기. 결과로도, 시도 그 자체로도 만족스럽다. “이전과는 다르니까, 그만큼 잘해서, 좋은 것만 보여야 했어요.” 그 모든 노력 뒤엔 이런 심리도 숨어 있었다. “한동안 뮤지컬을 떠났던 제가 실력이 아니라 티켓 파워 덕택에 주연을 맡은 것이라는 이야기를 절대 듣고 싶지 않았어요.” 주원의 욕심은 어디까지나 성실하다.
주원은 타인에게 어떤 말이든 기분 좋은 풍악처럼 들리게 말하는 놀라운 능력을 갖고 있다. 그의 휴식은 “하루는 한강에서, 하루는 조용한 카페에서, 하루는 집 앞 시끄러운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친구와 온갖 수다(연기, 철학, 연애 등의 식물성 화제)를 떠는 것”이다. 뮤지컬 연습실에서나, 영화와 드라마 촬영장 세트에서나 그는 언제나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곤 한다. “배우들, 스태프, 감독님과 일 얘기하고, 밥 먹고 수다 떠는 게 제일 재미있어요. 말하다 보면 현장에서 밤을 새워도 힘든 줄 몰라요.” 하지만 하지 말아야 할 말은 끊고, 할 말은 정확히 하는 영민한 사회성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어떤 말이든 좋게 하는 스타일이에요. 특히 상대가 기분 나쁠 것 같은 말은 유화해서 해야 한다는 점을 항상 의식하고 있어요.” 그 성격, 그 말투로 연습실에 섞여 기분 좋은 공동 작업을 축조하는 주원을 떠올려봤다. “제 장점이죠” 하며 주원이 싱긋 웃는다.
“어딜 가나 마찬가지예요. 나쁘게 말해 좋아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배우는 자신의 얼굴을, 감독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영화, 드라마, 뮤지컬을 만들고 있는 거예요. 일을 그르치길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죠. 적을 만들 필요도 없고, 적이 될 필요도 없어요. 서로 믿기만 하면 돼요!” 아무것도 자신을 해치지 않을 거란 안정감에서 비롯된 온유한 신념 덕분에, 주원은 어디서나 스스럼없이 단점을 꺼내 보일 줄 아는 사람이다. “전 이런건 잘하지만 이런 건 부족하니까 채워주세요” 하고 도움을 청할 줄 아는 솔직한 모습은 상대로 하여금 공격성을 해제시킨다. 그의 주변엔 평화의 후광이 보이는 듯했다.
얼마 전에는 <패션왕>도 크랭크업했다. 기안84의 웹툰이 가진 파괴적 엽기 코드에 오기환 감독의 감성이 더해진 이 영화는 하반기 중 개봉될 예정이다. <패션왕> 현장에서 주원이 증명해야 할 것은 부끄럽지 않은 실력뿐 아니라 현장을 부드럽게 이끌어가는 친화력이었다. 면면을 보자면 에프엑스의 설리, 안재현, 박세영, 김성오가 주요 인물. 학교를 배경으로 수많은 신인급 배우들이 대거 출연하는 <패션왕> 현장에서 주원은 배우로서 고참급이었다. “감독님, PD 형이 ‘네가 중심을 잘 잡아줘야 해’ 하고 말씀하셨죠.” 한쪽에선 부담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는 기꺼이 영화 현장이 낯선 그들에게 먼저 다가가 말을 걸고 어두운 길을 같이 걸어주는 길동무가 돼줬다. <별에서 온 그대>로 다음 스타 자리를 예약한 신예 안재현에게도 주원은 친절한 안내자가 됐다. “재현이와 동갑이더라고요. <제빵왕 김탁구>를 하면서, 그리고 하고 나서 느낀 아쉬움에 대해 얘기한 기억이 나요. 재현이가 느끼는 막막함을 제 경험을 통해 풀어주고 싶었어요.”
친절한 무게중심 덕분에 더없이 단란했던 <패션왕> 현장에서 스태프들은 힘들어하는 사람이 보일 때마다 입을 모아 응원했다. “카메라 팀을 사랑하자!”고 복창하는 식이다. 가끔 “주원을 사랑하자!” 하는 구호도 무전기 너머로 들려왔다. “감독님에 따라 분위기가 많이 달라지는 것 같아요. 오기환 감독님은 성격이 포용적이셔서 각자의 일을 치열하게 하면서도 분위기는 여유 있는 현장이 만들어질 수 있었죠.” 뮤지컬과 영화를 오가며 겪었을 육체적인 고통이 없지 않았지만, 주원에게 <패션왕>은 흐뭇한 기억이고 기대되는 영화다. “현장 편집본만 봐도 속도감 있고 흥미진진할 정도로 촬영을 잘 마쳤어요. 모니터를 볼 때마다 ‘와, 재밌다!’ 하는 생각이 들었죠.”
마치 <패션왕>에서 각성 전의 우기명이 그랬던 것처럼, 주원도 이제 가까스로 패션에 관심을 갖게 됐다. “패션의 한 부류는 누가 입어도 예쁜 정답 같은 옷이에요. 이제까지 제가 알던 옷이죠. 그리고 패션왕이 추구하는 특이하지만 예쁜 옷은 따로 있어요. 창의적인 부류예요. 이번에 한 컷 촬영하는 데에도 의상을 열 몇 벌씩 피팅해보면서 어느 정도 패션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남자에게도 레깅스 차림이 이렇게 편할 줄, 배기 팬츠가 유난히 두꺼운 제 허벅지에 이다지도 잘 맞을 줄, <패션왕>이 아니었다면 여태 몰랐을 거예요!”
주원의 나이 올해 스물여덟. 패션에 눈을 뜨기에도 좋은 나이지만, 육체적으로 강건한 시기다. 물론 꽃미남 배우의 계보를 잇기도 한다. “전 아직 ‘예쁘다’ ‘귀엽다’ 하는 칭찬이 듣기 좋고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그가 나르시시스트라는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제 얼굴이 마냥 꽃미남은 아니에요. 예쁘장한 얼굴이라고만 보기엔 덜 예쁘죠. 지금 제겐 남성미가 굉장히 필요해요. 그래서 군 생활을 겪은 후엔 ‘멋지다’ ‘섹시하다’란 칭찬이 듣기 좋고 어울리게 되길 기대해요. 스스로 그만큼 준비하고 있고요.” 내년으로 예정된 군입대와 3년 뒤엔, 지금보다 더 남성적으로 변화할 얼굴만큼이나 많은 것들이 변해 있을 것이다. 더 이상 단수여권을 매번 받지 않아도 될 것이고, 지레 미안해서 안 만들고 있다는 여자 친구도 마음껏 그리워하며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쯤이면 30대를 갓 시작한 절정기의 남자가 되어 “더 무르익고, 더 자신감 있고, 더 많은 것을 속에서부터 내보이며” 배우로서 삶의 다음 단계를 살기도 할 것이다.
“한두 살 나이를 먹으면서 그만큼씩 더 많은 것들이 보이게 될 거예요. 제대하고 서른 몇 살이 되면 생각의 폭이 얼마나 더 넓어질까요! 더 자신감이 붙고, 더 잘하고 싶어질 거예요. 촬영 현장도, 상대의 연기도 더 넓게 보일 테고요. 그때가 참 기대돼요!” 삶은 길면 100년. 20대의 10년은 그중 찰나에 불과한 시간이다. 주원에겐 더욱이 그렇다. “큰 목표가 있기 때문에, 이 시간이 더욱 짧게 느껴져요. 제 인생 정점이 언제일까요? 이미 지났을지도 모르고 지금일지도 몰라요. 배우로서의 삶의 정점도 언제인지 지금은 모르죠.” 배우로서 앞으로의 삶을 살아갈 주원의 10년은 각각의 성취 과제로 빼곡히 채워져 있다. “딱 세 가지예요. 우선은 좋은 가정을 꾸리고 싶어요. 이순재 선생님처럼, 아흔 가까이 돼서도 연기하고 싶어요. 그리고 ‘선생님’이 돼서 제자를 가르치고 싶어요. 보수적인 연기 교육 환경에서 느꼈던 아쉬움을 제자들에게는 자유로움과 상상력으로 대신 선사해주고 싶어요. 가르치는 동안 저도 많은 것을 배워갈 수 있겠죠.” 그리고 큰 목표를 이뤄가는 동안, 떠난 후에 알아채게 되는 과거의 정점이 그에게 허무를 가르치기도 할 것이다. 언제고 아버지 역을 하고, 옆집 아저씨가 되고, 할아버지 역할을 하기도 할 테니까. “그 상황이 닥치면 ‘지나간 그때가 정점이었구나’ 하고, 비교하고 힘들기도 할 거예요.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연기를 계속해나가는 거죠.”
주원은 트위터 프로필에 ‘사람 냄새 나는 배우가 되겠다’는 말을 남겼다. 하필이면 왜 그런 얘기를 써놨을까. 모든 배우가 하는 관용구 같은 말. 주원이 살아가는 배우로서의 삶이 온전한 답이 돼줄 것이다. 배우로서의 삶 속에서 더 좋은 직업인과 남자가 되고 싶은 젊은 배우. 더 높은 정점을 남겨둔 채 지금 행진 중인, 주원의 스물여덟이다.
- 에디터
- 스타일 에디터 / 손은영, 컨트리뷰팅 피처 에디터 / 이해림(Lee, Herim)
- 포토그래퍼
- HYEA W. KANG
- 스탭
- 헤어 / 김승원, 메이크업 / 오미영, 세트 스타일링 / 다락(Da;r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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