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 추적극 <제보자>의 박해일과 유연석
줄기세포 조작 스캔들을 다룬 영화 〈제보자〉는 미스터리 스릴러가 아니라 ‘진실 추적극’임을 강조한다.
모든 증거가 표백된 실험실에서 묘하게 닮은 두 남자가 서로를 향해 묻는다.
“진실을 밝힐 준비가 되었습니까?”
지금부터의 이야기는 박해일과 유연석의 진술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혹시 오늘 물에 들어가야 합니까?” 촬영을 몇 시간 앞두고 박해일과 유연석의 매니저로부터 번갈아가며 전화가 걸려왔다. 포름알데히드 용액을 잔뜩 채운 수조에 상어를 집어넣은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을 예로 들며 이 새하얀 실험실에 어울릴 만한 수조를 제작하고 싶단 얘기를 꺼낸 후부터 양측은 고민에 휩싸인 듯했다. “걱정 마세요. 두 분의 안전을 담보할 수 없어 작은 사이즈로 준비했으니까요.” “휴, 다행이네요.” 연석의 매니저는 사실 이곳에 도착하기 전, ‘박해일 선배가 물에 들어간다면 우리도 들어가겠노라’ 각오를 다지던 참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만약 조금만 더 밀어붙였다면 아마 이 성실한 남자들은 진짜 모든 걸 내려놓은 채 기꺼이 수조에 풍덩 빠졌을 것이다. 둘은 그런 배우들이다. 영화를 위해서라면, 보다 많은 관객들이 극장을 찾을 수 있다면, 배우로서의 자존감을 무너뜨리지 않는 한 어떤 것이라도 할 각오가 되어 있다. 말을 탄 채 활을 쏘고, 칠십 노인의 분장을 하고, 난생처음 생명공학을 공부하고, 때로는 강제로 배낭여행도 떠난다.
“나영석 PD님이 저한테 티켓이랑 여권 주실 때, 딱 그때 알았어요.” 줄기세포 조작 스캔들을 다룬 이 진지한 영화에 관해 묻고 답하기에 앞서 ‘꽃청춘’ 연석의 지난 라오스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무것도 모른 채 올 블랙 수트로 쫙 빼입고 나온 넘버원 트렌드세터 연석은 그로부터 2시간 30분 만에 납치당하듯 비행기에 실려 비엔티안에 떨어졌다. 그야말로 청춘은 예측 불허! 그는 첫 해외여행에 들뜬 손호준과 갓 스무 살을 넘긴 바로의 억척 엄마가 되어 고군분투했다. 싸구려 숙소에서의 인증샷을 본 정우는 “교도소?”냐고 물었다. <응답하라 1994>에 출연했던 또래 출연진들은 아직까지도 단체 카톡방을 유지하며 연락을 하고 지낸다. <꽃보다 청춘>은 이제 막 방송이 시작된 단계지만 흙탕물 계곡으로 변한 우기의 라오스를 여행해본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이들의 험난한 미래가 예상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서 우걱우걱 밥을 먹고 있는 이 해맑은 청춘에겐 그조차 즐거움인 듯하다. “가보셨어요? 정말 좋지 않아요? 드라마 종영 후, 제대로 된 휴가는 처음이에요. 우린 촬영이라고 생각 안 했어요. 기왕 이렇게 된 마당에 즐겨보자며 진짜 여행을 다녔죠. 비엔티안, 방비엥, 루앙프라방. 전부 일주일 안에 갈 수 있는 코스예요.” 스킨스쿠버를 즐기고 오지도 제법 다녀본 그는 여행의 고수다. 군대 시절 아버지로부터 수동 카메라를 선물 받은 후엔 사진에 취미를 붙여 지난봄 아프리카 아이들을 위한 사진전도 열었다.
혈기 넘치는 유연석이 바다 건너 세상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동안 박해일은 혼자 구석 소파에 길게 누워 이어폰을 꽂은 채 골똘히 뭔가를 보고 있었다. 인터뷰를 위해 다가가자 그는 가져온 배낭 속에 주섬주섬 종이 뭉치를 챙겨 넣었다. “뭘 하던 중이었어요?” “영화 홍보 자료를 좀 보고 있었어요.” “음악 들었어요?” “아뇨, <김용민의 조간 브리핑>인데, 가끔 듣는 방송이죠.” 박해일은 시종 진지하다. 그는 오늘의 촬영 컨셉이 담긴 사진들을 유심히 들여다보곤 간간이 질문을 던지고 또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연석이와 제가 좀 거리를 두고 떨어져 서는 게 긴장감을 연출하는 데 도움이 되겠군요.” 그렇다고 해서 그가 엄청나게 엄격하고 날이 선건 아니다. 오히려 그는 느슨한 분위기를 풍긴다. 햇살 냄새가 밴 익숙한 옷마냥 기분 좋게 편안하다. 다만 조금 미스터리할 뿐. <좋지 아니한가>의 정윤철 감독은 여고생의 짝사랑 상대가 될 만큼 매력적이나 특이한 ‘미스터리 추적 동아리’의 선생님 역할을 그에게 제안하며 “박해일의 일상이 묻어나는 캐릭터”라고 말했다. 박해일은 ‘달의 안 보이는 저편에 외계인이 만든 거대한 구조물이 있다’고 믿는 영화 속 선생님처럼 눈앞에 보이는 지금 여기가 아닌 저 너머의 무언가를 기다리며 사는 사람 같다. 혹은 이미 지나간 뭔가를 곱씹으며 살거나. 은교를 추억하는 시인 이적요처럼, 혹은 분노의 대상을 잃어버린 열혈 운동권 출신의 남일처럼. 봉준호 감독은 괴물을 향해 화염병을 던지는 삼촌 남일이야말로 박해일이라는 사람과 가장 어울린다고도 했다. 어쨌든 그는 어딘가 신기하다. 지인들과 술을 마시거나 혼자 산책하는 것 외엔 별다른 취미도 없다. 일상의 모든 일에 무덤덤한 그가 열렬한 호기심을 갖고 빠져드는 건 오직 연기 뿐이다. “제 일상이란 건 너무나 평범해서 굳이 얘기할 거리도 없고, 어떤 신선한 지점도 없습니다.” 연기만 하기도 벅차다는 그에게 “장인(匠人) 같다”는 농담 섞인 진심을 전하자 그는 멋쩍은 표정으로 답했다. “허허, 이번 추석 때 제가 장인(丈人)을 찾아봬야 하긴 합니다.”
영화 <제보자>는 이토록 다른 성격의 두 배우가 만나 하나의 진실을 추적하는 영화다. 박해일은 줄기세포 조작 스캔들을 파헤치는 시사 프로그램 PD 윤민철을 연기한다. 그는 언론인으로서의 신념과 동물적인 감각으로 이 난해한 사건의 진실을 물고 늘어진다. 집요하게 쫓는 일이라면 박해일이 선수다. 영화 속에서 그는 거의 늘 그랬다. <괴물>에선 괴물에게 잡혀간 조카의 행방을 추적했고, <모던 보이>에선 자신의 집을 털어 달아난 묘령의 아름다운 여인을 찾아 경성을 헤맸으며 <이끼>에선 수상한 시골 마을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 애썼다. <최종병기 활>에선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끌려간 여동생의 흔적을 따라 말을 타고 달려가기도 했다. 최근에 개봉한 <경주>에서조차 그는 7년 전에 봤던 춘화를 찾겠다며 충동적으로 경주에 내려간다. “그렇게 엮으니까 또 말이 되네요. 틀린 얘긴 아니에요. 음, 그럴 수도 있겠군요.” 파랑새를 찾는 남매의 동화처럼 흥미로운 이야기란 대체로 ‘추적 60분’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모든 캐릭터가 ‘틸틸’과 ‘미틸’은 아니다. 이 다채로운 장르의 맹목적인 인물들은 어느 정도 배우 개인의 취향이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인 박해일이 애타게 찾고 있는 건 무엇일까? “매 순간 찾아야 해요. 지금은 오늘 <보그>의 컨셉을 찾고 있습니다. 이만큼 준비하셨으니 그에 부응하는 ‘케미’를 보여줘야 할 텐데 말입니다.” 담배에 불을 붙이며 그가 말했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속을 알 수 없는 조용한 말투로.
유연석은 줄기세포 연구소의 팀장 심민호를 맡았다. 세계 최초로 인간 배아줄기세포 추출에 성공하며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른 이장환 박사(이경영)와 함께 줄기세포를 연구하며 비윤리적인 과정에 갈등한 그는 박사의 논문 조작 사실을 방송국에 알린다. “제 또래지만 삶의 무게가 굉장히 무거울 거예요. 아픈 딸아이도 있거든요.” 아빠의 마음을 헤아리는 동시에 생명공학도 따로 공부해야 했다는 유연석은 직접 수의과대 연구실을 찾았다. “그 캐릭터가 살았던 공간을 실제로 눈으로 보고 관찰하고 싶었어요.” 그는 그곳에서 줄기세포 배양을 실습하고 연구원들과 얘기도 나눴다. 연구에만 몰두해온 이들의 삶은 스무 살 때부터 연기만 해온 그와는 180도 달랐다. 연구실이라는 갇힌 공간에서 같은 일상을 반복해온 연구원들의 정적인 생활과 달리 유연석은 활동적이다. 칠봉이를 연기하기 전부터 친구들과 사회인 야구단을 만들어 2년 정도 활동하기도 했다. 운동으로 다진 탄탄한 몸 덕분에 그의 별명은 ‘어깨 깡패’다. 영화 속에선 일부러 헐렁한 옷을 입어 몸을 감춰야만 했다. “생각하던 것보다 제가 굉장히 외향적이라는 걸 연구원들을 보면서 많이 느꼈어요. 서로 다른 환경에서 10년 이상 살아온 사람들끼리 만나보니 모습이나 행동이 꽤 다르더라고요.” 지금까지 그가 맡아온 캐릭터들과도 전혀 다른 인물이다. 그는 그래서 더 욕심이 났다고 했다.
박해일이 출연한다는 사실도 중요한 한 가지 이유가 되었다. “<늑대 소년>이 끝나고 난 후에 조성희 감독의 소개로 사석에서 자리를 함께한 적이 있어요. 감독님이 박해일 선배와 독립영화 <짐승의 끝>을 함께하셨거든요. 정말 좋아하던 배우를 만나 인사를 나눈 것만도 설렜는데, 같은 카메라 앵글 속에서 배우 대 배우로 만나 눈빛과 대사, 호흡을 주고받았어요! 행복한 시간이었죠.” 그는 박해일의 필모그래피를 모조리 외우고 있다. “어느 하나의 캐릭터로 규정할 수가 없잖아요. 장르적인 측면에서도 그렇고, 또 상업영화뿐 아니라 독립영화도 계속해오고 있어요. 일관되지 않은 그런 면이 좋아요. 저 역시 그런 배우가 되고 싶고요.” 유연석의 말처럼 몸만 큰 천진한 열세 살 소년부터 엉큼한 청년, 칠십 먹은 노인을 10년 사이에 모두 소화해낸 배우는 지금껏 없었다. 선량한 시골 우체부와 잔혹한 연쇄살인 용의자를 동시에 오갈 수 있는 얼굴도 드물다. 가만히 보면 두 사람은 묘하게 닮기도 했다. 유약하리만큼 순해 보이지만 소년 같은 얼굴이 내뿜는 섬뜩함과 차가움이 있다. “요즘 닮았다는 얘길 종종 들어요.” 둘 사이의 미묘한 차이라면 유연석은 반듯한 모범생이고, 박해일은 아웃사이더의 이미지라는 것. 강줄기 하나로 나뉜 강남과 강북 같다. <건축학개론>의 강남 선배처럼 유연석은 실제로 강남에 산다. “으하하. 네, 지금은 그래요. 경기고등학교를 다녀서 어릴 때 집도 그랬고. 하지만 사실 그 영화를 찍을 땐 강북에 살았어요. 다시 강남으로 넘어온 지는 얼마 안 됐죠. 처음으로 혼자 사는 공간이 생기면서 가구도 제가 만들었어요.” 연극영화과를 다닐 때 무대 세트를 만들며 목공 일을 배웠다는 이 재주 많은 남자는 책장과 식탁, TV 장식장까지 전부 직접 만들어 채웠다. 박해일은? “강북에 살죠.” 그렇다면 아마도 서촌이나 북촌, 혹은 서울 외곽의 조용한 전원 마을일 것이다. 추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아뇨, 마포예요. 아파트 단지 많은. 종로 쪽은 사람 많지 않나요? 그렇다고 너무 깊이 들어가 살고 싶진 않고요. 아직 젊다 보니. 허허.”
둘 다 주인공의 어린 시절 역할로 영화에 데뷔하기도 했다. 유연석은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에서 과거의 우진이었다. “딱 스무 살 때였어요. 저 보고 유지태를 닮았다고 했던 누나가 그 영화의 의상팀으로 들어가면서 오디션을 보라고 추천했죠. 기회가 좋았어요.” 그땐 자신이 계속 영화를 찍게 될진 몰랐다. “하지만 연기를 계속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어요. 아주 어릴 때부터 배우를 갈망했거든요.” 그때부터 지금껏 그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배우로서의 역사를 성실히 쌓아왔다. 하지만 흔히 말하는 주연배우급으로 등극한 건 드라마 <응사>로 뜨거운 인기를 얻은 최근의 일이다. 그 동안 흔들리지 않고 나아갈 수 있었던 건 자신의 꿈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생각하는 대로 되지 않아 힘들 때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포기하고 싶진 않았어요. 시작한 이상 제가 좋아하는 일을 평생 하며 살겠다고 마음먹었으니까.” 요즘 그는 인기 절정이다. 이미 촬영을 끝낸 영화만 해도 두 편이 더 있다. 임수정과 공동 주연을 맡은 <은밀한 유혹>과 한석규, 고수 등과 나란히 제일 앞에 이름을 올린 <상의원>이다. 만약 윤리적인 문제만 없다면 자신과 똑같은 복제인간을 하나 만들고 싶을 만큼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가끔 저 대신 일을 보내면 좋겠죠. 그리고 저 자신을 관찰하고 싶어요. 저를 보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저에 대해 얘기해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데 저라면 그렇게 할테니까요. 물론 내면은 다를 테니, 일단 친하게 지내야겠죠.”
박해일은 임순례 감독의 <와이키키 브라더스>로 영화에 데뷔했다. 이번 영화가 그에게 더욱 남다른 이유다. 나이트클럽을 전전하며 현실에 찌든 꿈을 안고 살아가는 4인조 밴드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인생을 담은 그 영화에서 박해일은 주인공의 학창 시절을 연기했다. 음악을 향한 열정과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가만히 있어도 빛나던 소년이었다. 빨가벗은 사내아이들이 텀벙거리며 바닷물 속으로 들어가 화면 가득 반짝이는 잔 물방울을 일으키는 눈부신 장면은 지금 봐도 너무나 아름답다. “하지만 전 작게라도 제가 나왔던 영화를 다시 보는 걸 반가워하는 스타일이 아닙니다. 물론 소장은 하고 있어요. 언젠가 한번은 미친 척하고 틀어봐야 할 시기가 오겠죠.” 당시 그의 나이는 스물다섯이었다. 첫 만남은 알려진 대로다. 그 무렵 대학로에 열풍을 일으킨 연극 <청춘예찬>을 본 조연출이 감독에게 그를 추천했다. ‘아무리 어려 보여도 어떻게 영화 속 고등학생과 매치가 될까’ 반신반의하던 임순례 감독은 교복을 입은 박해일을 보고 바로 캐스팅했다. 놀라운 건 그때나 지금이나 거의 변함없는 그의 외모다. 유난히 빛나는 눈동자도 그대로다. 그에게선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다. “속은 썩어나가죠. 감사합니다. 아직 철이 안 들어서요.”
감독과 배우가 14년 만에 다시 만나 작품을 한다는 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기회가 아니다. 매년 숱하게 쏟아졌다 사라지는 신인 배우와 신인 감독들 중에 이런 멋진 재회의 기쁨을 누리는 이들이 몇이나 될까? “그래서 더 반가웠죠. 살다 보면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때가 되어 만나게 되는 경우가 있잖아요.” 지난해 늦가을, 임순례 감독의 전화를 받은 박해일은 시나리오도 보지 않은 상태에서 제안에 응했다. “감독님에 대한 신뢰죠. 영화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감독 역시 배우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박해일은 두 편 이상 함께 작품을 한 감독들이 꽤 있다. 봉준호와 정지우 감독, 그리고 최근 <아바타>를 뛰어넘는 경이로운 흥행사를 써가고 있는 <명량>의 김한민 감독이다. “<최종병기 활>을 찍을 때도 이러이러한 영화를 준비할 거라곤 말했어요. 잘되길 바랐죠. 배우 입장에선 그렇게 얘길 나누던 감독의 계획이 실현된 걸 봤을 때 남다른 기분이 들거든요. 같이 하건 안 하건, 그런 걸 떠나서. 좋은 결과에 대한 문자를 주고받았죠.”
영화는 지난겨울 내내 서울과 부산 전국을 오가며 촬영됐다. 영화라는 세계의 시작점에서 감독과 배우로 만난 두 사람은 각자의 길 위에 뚜렷한 흔적을 남기며 여기까지 왔다. 교복을 입은 채 “불놀이야”를 멋지게 불러 젖히던 20대의 박해일은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하지만 영화에 대한 이들의 열정은 변함 없다. “오히려 여전한 게 더 인상적이었죠.” 박해일에게 임순례 감독이 같은 기억을 공유한 영화계 동료라면 유연석에겐 엄마였다. 실제로 그는 임순례 감독을 엄마라고 불렀다. “엄마처럼 느껴졌거든요. 굉장히 푸근하고 재미있으세요. 심민호가 쉽지 않은 캐릭터라 걱정하면 격려해주시고, 긴장하면 부드럽게 농담도 해주시고. 리액션해야 할 부분에 대해서도 정확히 말씀해주셨어요.” 이 붙임성 좋은 청년에겐 영화에 출연한 모두가 한 가족이다. 극 중 아내 역할을 맡은 류현경과는 네 편이 넘는 작품을 함께하기도 했다. 하늘 같은 선배인 이경영도 그의 가족 사랑을 피해갈 수 없었다. 이경영과는 <은밀한 유혹>까지 바로 연이어 같이 출연하게 되었다. “이젠 사석에선 아버지라고 부를 만큼 가까워졌죠. 나이 차는 많이 나는데 소년 같은 감성이 느껴져서 친구 같을 때도 있어요.” 도대체 이 집안은 족보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물론 선배들 입장에선 이런 그가 밉지 않을 것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사랑 받는 법을 알고 있다. 박해일과 유연석은 촬영 중 짬이 날 때마다 선 채로 한참씩 이야기를 나눴다. “추석 때 뭘 하냐, 앞으로 바빠질 텐데 잘하자.” 그런 류의 사소하면서도 진지한 얘기들이 오갔다. 박해일은 유연석을 살뜰히 챙겼다. “지금 굉장히 무서운 속도로 달려가고 있지만 앞으로가 더 궁금한 배우예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다 괜찮은 친구이기도 하고요. 이번 영화에서도 굉장한 집중력을 보여주죠.”
한때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한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제보자>는 조연에 머물던 소수의 양심 있는 사람들과 카메라 뒤, 언론의 입장에서 또 다른 국면의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은 많은 문제가 남아 있지만 화성 연쇄살인 사건을 모티브로 한 <살인의 추억>에도 영화적인 결론은 있었다. “결국 못 잡은 걸로 끝났죠. 어쨌든 전 제가 범인이 아니라 생각하고 연기했습니다.” <제보자>가 다루는 문제는 현재진행형의 이야기이며 머지않은 미래에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다. “진실을 밝힌다는 게 쉽진 않은 일이죠. 어쩌면 자기가 가진 모든 걸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한 번쯤 고민해봐야 할 문제들이죠. 배우로서의 필모그래피를 떠나 저 역시 사회 구성원으로서 이에 대한 화두를 던져볼 필요가 있었어요.” 상처받지 않기 위해 좀처럼 진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던 <혜화, 동>의 한수보다 훨씬 멋진 남자로 성장한 유연석이 말했다. 한 아이의 아빠이기도 한 박해일은 좀더 멀리 본다. “도덕책에서 얘기해온 것들이 안 지켜지는 경우가 너무 많아요. 뉴스만 봐도 그렇잖아요. 아무리 세상이 발전해 인간이 원하는 건 다 할 수 있어도 지켜야만 하는 것은 있어요. 돌려줄 건 감안해야죠.” 언젠가 박해일은 선혈이 낭자한 잔인한 공포보다 사람의 잔혹한 기운에 의해 다가오는 공포가 더 무섭다고 말한 적이 있다. 도심 한복판에 지옥의 문처럼 검은 문이 생기고 매일 또 다른 괴담이 흘러나오는 요즘 우리 사회가 그렇다. 덮어두어선 안 되는 진실이 무언지 우린 이미 알고 있다. 다만 침묵하고 있을 뿐이다. 영화는 어떻게든 끝이 나겠지만 현실에서의 결론은 관객들의 판단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다. 용감한 두 배우는 먼저 이야기를 시작했다.
- 에디터
- 피처 에디터 / 이미혜
- 포토그래퍼
- KIM YOUNG JUN
- 사진
- 세트 / 다락(Da;rak), 스타일리스트 / 정주연·양승희@D12.(박해일), 지경미(유연석), 헤어 / 정준·봄@라뷰티코아(박해일), 하나@아우라(유연석), 메이크업 / 김규리@라뷰티코아(박해일), 성혜@아우라(유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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