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의 파블로 코폴라
발리가 달라졌다.
160년이란 오랜 전통을 지닌 스위스 출신 브랜드가 젊은 재능 덕분에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
변화의 중심에 있는 파블로 코폴라를 만났다.
“알렉산더 맥퀸, 디올, 버버리, 셀린, 톰 포드 등에서 일했지만,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부모님께서 알고 계셨던 유일한 브랜드는 발리뿐이었죠.” 160년 전통을 자랑하는 스위스 브랜드의 디자인 디렉터가 된 파블로 코폴라가 웃으며 말했다. 1851년 칼 프란츠 발리(Carl Franz Bally)가 스위스 북부 지방의 작은 마을 쉐넨베르트에서 구두를 만들며 시작된 이 브랜드는 오랜 역사만큼이나 널리 알려진 브랜드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강렬한 인상을 남기지 못한 디자이너들의 잦은 교체, 패션 브랜드로서 뚜렷하지 못한 이미지, 수많은 경쟁 브랜드들의 등장으로 그 힘을 점점 잃어가고 있었다. 그런 발리에 변화가 찾아왔다. 지난해 액세서리 디렉터로 스카우트된 후 올 초 기성복 컬렉션까지 맡게 된 파블로 코폴라가 변화의 주인공. 그의 동시대적 감각과 새로움이 더해진 발리 컬렉션은 프레스와 바이어들 사이에서 지금 호평을 받고 있다. 톰 포드가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를 론칭하기 위해 가장 먼저 영입했던 인재였던 코폴라는 발리라는 브랜드 위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새로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보그 코리아>가 런던의 발리 디자인 오피스에서 이 운 좋은 디자이너를 만났다.
Vogue Korea(이하 VK) 우선 당신에 대한 소개를 부탁한다.
Pablo Coppola(이하 PC) 부모님은 우루과이 출신이다.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났고, 우루과이·브라질·미국·스페인·프랑스·영국까지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성장했다. 예를 들어 중학교는 미국의 뉴저지에서, 고등학교는 스페인에서 졸업했고, 파리에서 패션 공부를 했다.
VK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브랜드에서 줄곧 액세서리 디자이너로 일했다고 들었다.
PC 올해 초 발리 디자인 디렉터로 임명되기 전 발리에서도 액세서리 디렉터로 일했다. 그리고 ‘승진’ 소식을 들었다. 너무 기뻐서 가장 먼저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자랑하고 싶었다. 가방 디자인을 위해 이곳에 왔기 때문에, 발리의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는 부담감은 없었다. 작은 프로젝트로 시작해 전체를 맡게 됐기에 오히려 쉬웠다.
VK 역할이 훨씬 커졌다는 것이 부담스럽지는 않았나?
PC 반대로 아주 자연스러웠다. 발리는 액세서리에 ‘정박’한 브랜드다. 만약 기성복이 중심에 있는 브랜드였다면, 쉽게 도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발리 CEO인 프레데릭(Frederic de Narp)이 내게 맡긴 임무는 발리의 정체성을 찾는 것이었다. 출신은 액세서리 디자이너이지만, 발리를 위해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지녔다고 자신한다. 또 오랫동안 패션계에서 일하면서 레디투웨어라는 ‘기계’와 함께해왔기 때문에 익숙하기도 하다. 내게 익숙한 공기라고나 할까.
VK 디자인 디렉터는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을 해야 하나?
PC ‘네버 엔딩 스토리’다! 다양한 제품 구성과 제작은 물론, 광고 이미지와 카탈로그 촬영, 그리고 곧 오픈할 런던 플래그십 스토어 디자인 등 모든 것에 관여한다. 특히 요즘엔 런던 매장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David Chipperfield)가 디자인한 이곳은 새로운 발리를 위한 공간이 될 것이다. 곧 한국에도 이곳의 컨셉을 닮은 공간을 오픈할 수 있길 바란다. 그 덕분에 요즘엔 거의 사무실에서 살다시피 하고 있다.
VK 발리의 새로운 모습이 기대된다. 발리의 오랜 역사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나?
PC 처음 발리 아카이브를 방문했던 때를 잊을 수 없다. 그야말로 ‘헉’ 하고 숨이 멎을 정도였다. ‘발리 박물관’엔 창립자인 칼 프란츠 발리가 수집한 무려 3만4,000켤레가 넘는 신발이 소장돼 있었다. 기원전 3,000년 것부터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로마 등의 신발은 물론 아시아, 아프리카, 미국 토착민들의 신발까지. 브랜드의 역사는 물론, 지구촌 모든 신발들을 만날 수 있었다. 여기에 20세기 초반 발리를 유명하게 만든 그래픽한 광고 포스터까지. 발리라는 브랜드에 푹 빠져 돌아왔다.
VK 모든 패션 하우스들이 그들의 아카이브에 자부심을 갖고 있기에 그 말이 별로 와 닿진 않는다.
PC 하하. 솔직한 멘트다. 디자이너라면 누구나 오래된 하우스의 신발을 복제하는 것엔 관심이 없을 테고 나 역시 그렇다. 하지만 발리 아카이브에는 구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구두를 만드는 도구, 가죽 박스, 고객의 편지 등이 가득했다. 그 속에 포함된 작은 디테일들을 새롭게 적용하고 싶을 뿐이다.
VK 지난 2월 밀라노에서 선보인 첫 번째 여성복 컬렉션이 꽤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PC (룩북 사진으로 도배된 사무실 한쪽 벽을 가리키며)이것이 그 컬렉션이다. 숄더백, 캐리올, 보스턴백 등 모든 카테고리의 백을 디자인해보고 싶었다. 옷과 백 모두 심플한 디자인으로 완성했다. 특히 백들엔 훌륭한 퀄리티의 가죽에 미묘한 디테일을 더했다.
VK 어떤 디테일이 숨어 있는가?
PC ‘젠틀맨즈 코너’란 단어를 아는가? 클래식한 남성용 구두의 굽에서 모서리를 자른 디테일을 가리키는 말이다. 바지 밑단이 신발에 걸리지 말도록 하는 배려에서 시작됐다. ‘젠틀우먼’을 위한 숄더백 디자인을 고민하다가, 모퉁이를 살짝 자른 디자인을 적용했다. 그 디테일은 재킷 포켓에도 숨어 있다. 그런 식으로 연결하다 보니 또 하나의 이야기가 탄생했다. 기자들과 고객들에게 이 메시지를 전달하다 보니, 작은 디테일은 중요한 디자인으로 변해 있었다.
VK 심플하고 현실적인 옷, 배려와 디테일이 숨어 있는 액세서리, 나무랄 데 없는 스타일도 훌륭했지만, 커스틴 오웬과 나타샤 보노빅 등 90년대 모델들을 무대 위에 올린 점도 눈에 띄었다.
PC 발리 우먼은 35세, 45세, 혹은 50세일 수도 있다. 좀더 성숙한 여인들이다. ‘성숙한’이라는 단어는 내게 전혀 부끄러운 단어가 아니다. 성숙한 여인들이야말로 자신의 스타일을 정확히 알고 있다. 그렇기에 90년대 모델들을 캐스팅했다. 자신만의 라이프스타일이 있는 그녀들에겐 아이도 있고, 나이를 먹은 만큼 약간의 주름도 있다. 하지만 그녀들은 스스로를 정확히 알고 있다.
VK 심플한 디자인은 무엇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인가?
PC 개인적으로 60~70년대를 좋아한다. 하지만 현실적인 여성이 과거의 옷을 입기란 어렵다. 70년대 특유의 하이웨이스트 팬츠를 입으면 왠지 데이비드 보위의 노래를 불러야 할 것 같지 않나. 그래서 허리선을 살짝 내리고, 헐렁하게 만들었다. 구두처럼 옷에서도 배려를 잊지 않았다.
VK 아트 바젤에서 새로운 발리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라고 들었다.
PC 코르뷔지에가 디자인한 빌라를 사서 그 안에 피에르 잔느레(코르뷔지에의 사촌으로 모더니즘의 대표적 건축가이자 가구 디자이너. 라프 시몬스가 좋아하는 디자이너로도 유명하다)의 가구들로 가득 채웠다. 발리라는 브랜드를 다른 방향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프로젝트다. 이 작업은 스위스 바젤에서 시작해 마이애미로 이동하고, 그 후엔 상하이로 간다. 각 도시의 아티스트가 코르뷔지에 하우스를 채우게 될 것이다. 예전에 밀라노 쇼룸 역시 잔느레 가구들로 채워 프레젠테이션 공간을 꾸몄다. ‘미스 발리’ 혹은 ‘미세스 발리’가 지낼 만한 공간을 마련해 우리의 미학을 알리려는 의도다.
VK 이제 곧 밀라노에서 내년 봄, 여름 컬렉션을 발표해야 한다.
PC <보그 코리아>에만 특별히 보여주겠다. (책상 뒤에 숨겨둔 이미지 보드를 꺼내며)지난가을 컬렉션이 모든 것을 절제한 컬렉션이었다면, 봄 컬렉션엔 색상을 더해 흥미진진한 디자인을 선보이고 싶다. 편안하고 자유로운 분위기를 위해 데님도 더했다. 보헤미안풍의 시티 룩, 악어가죽 옷을 입은 로커 룩, 남성적인 톰보이 룩, 그리고 60년대풍의 가죽 스커트 등등! <보그>의 의견이 궁금하다.
VK 아주 세련되고 도회적이다. 컬러가 특히 매력적이다. 어떤 여성이 이 옷을 입길 바라는가?
PC 나의 패션 우상인 카린 로이펠트! 맥퀸과 톰 포드에서 일할 때 만난 그녀의 매력과 존재감이란! 특히 자신만의 방식을 유지하며 새로운 도전을 해나가는 모습이 정말 멋지다.
VK 액세서리에서 출발해 자연스럽게 전체를 맡았다 해도, 발리는 당신에게 새로운 도전이다. 봄 컬렉션을 위한 도전은 무엇인가?
PC 미우치아 프라다는 늘 자신이 싫어하는 것을 가지고 일하고 있다,라고 고백한 적이 있다. 정말 공감한다. 요즘 다들 ‘백팩’이 핫하다고 하는데, 내가 아는 멋쟁이 중 백팩을 메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오히려 난 백팩을 디자인하고 싶다. 그것이야말로 내게 도전일 테니까.
VK 아주 근사한 발리 백팩을 기대해 보겠다.
PC 기대해도 좋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을 하는 건 어렵지만 한편으론 즐겁다. 난 모든 일을 웃으며 즐기면서 하고 싶다. 패션 일은 사람 목숨을 좌지우지 하는 심각한 일도 아니고, 우주 로켓을 만드는 것처럼 어렵고 복잡한 일도 아니다. 나만의 아이디어를 담아 열심히 하면 좋은 결과가 나타날 수 있으니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다. 게다가 진심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으니, 난 얼마나 운이 좋은 편인가. 하하.
- 에디터
- 패션 에디터 / 손기호, 현지 취재 / 여인해(패션 칼럼니스트)
- 포토그래퍼
- PARK YONG BIN
- 사진
- Courtesy of Ba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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