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트렌드

하이엔드와 스트리트의 만남, 분더샵맨

2016.03.17

하이엔드와 스트리트의 만남, 분더샵맨

하이엔드와 스트리트 문화의 강렬한 만남.
한 자유로운 영혼이 콧대 높은 백화점의 남성 멀티숍을 도발했다.
신선하지만 세련되고, 진지하지만 멋진 방식으로.

사방이 유리로 된 피팅 룸 안에서 포즈를 취한 양승호. 그가 분더샵맨 인테리어에 영감을 얻은 이미지들과 구체화된 매장 내부의 주요 장치, 인피니티 월.

“백화점 매장은 한자리에 고정돼 있는, 정체된 인상을 주기 쉽죠. 살아 있는 생물체처럼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을 주고 싶었어요.” 분더샵맨 매장을 둘러싼 스마트 글라스(전력을 통해 투명-반투명-불투명으로 투명도를 조절할 수 있는 유리) 벽은 한 장씩 차례대로 투명해졌다 우윳빛으로 뿌예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근사하게 표현하자면 SF영화에 나올 법한, 기계장치로 만든 회색 곤충이 매장 주위를 돌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전체가 한꺼번에 깜박이거나, 반투명한 상태에서 한 장씩 불투명해지는 버전도 있어요. 문제는 프로그래밍하는 데 두 달 정도 걸린다고 하더라고요.” 프리 오픈 날, 양승호는 조금 못마땅한 표정으로 아직 완벽하게 조작되지 않는 스마트 글라스의 조그마한 작동리모컨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지금 패션계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건 콧대 높은 척하지 않는 쿨한 거리 문화다. 힙합 뮤지션에게서 빌려온 것인지, 스케이트 보더들에게서 영감을 얻은 것인지는 더 이상 중요치 않다. 뜯겨져 나간 포스터 같은 공격적인 문양의 스웨트셔츠, 너덜너덜한 스트랩 장식의 데님 팬츠, 편한 야구 점퍼, 유틸리티 재킷과 스니커즈들이 엄청난 속도로 고급스러운 수트와 매끈한 가죽 구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신세계 백화점 본관 6층에 새로 오픈한 분더샵맨(청담 플래그십 스토어와 신세계 백화점 강남점에 이은 세 번째 매장)은 내로라하는 하이엔드 브랜드의 고급스럽고 점잖은 매장들 사이에서 가장 자유롭고 급진적인 셀렉션을 선보이는 곳이다. 이 매장의 컨셉을 정하고 구체화한 인물은 바로 YG의 대표 스타일리스트 중 한 명인 양승호. 젊고 스트리트적인 감성의 매장을 구상하던 신세계 분더샵 팀은 모든 고민을 한 방에 해결해줄 수 있는 해결사로 그를 선택했다. 2014 F/W와 2015 S/S 두 번의 시즌을 함께 했으며, 인테리어부터 제품 바잉, 디스플레이, 매장 음악까지 이 매장에 실현된 모든 것들이 그의 머릿속을 거쳐 구체화됐다.

“익숙한 백화점 내에 완전히 새롭고 낯선, 초현실적인 공간을 만들자는 취지였죠. 매장 외부 벽도 원래는 원웨이 미러(원웨이 글라스. 한쪽에서는 투시가 가능하고 반대쪽에서는 거울로만 보인다)를 사용하려고 했어요. 바깥쪽에서는 안이 훤히 보이지만, 매장 안에서는 밖이 보이지 않고 피팅 룸처럼 사방에 거울이 있는 거죠. 내부가 너무 산만해 보일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결국 스마트 글라스로 대신했지만요.” 아쉬운 대로 원웨이 미러는 계산대 뒤 ‘인피니티 월(Infinity Wall)’을 설치하는 데 사용됐다. 실제 설치물의 두께는 고작 10cm 남짓이지만, 빨려들어갈 듯 끝을 알 수 없는 무한한 공간처럼 보인다. 일반 거울과 원웨이 미러 두 장을 마주 보게 세우는 간단한 작업으로 만들 수 있는 마술적인 효과! 2NE1의 스타일리스트로 유명해진 스물일곱 살 청년은 전문적으로 인테리어 공부를 하진 않았지만, 건축가 아버지와 인테리어 디자이너인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3차원 공간에 대해 본능적인 감각을 갖춘 듯하다.

정식 오픈일에 매장을 방문한 양승호의 지인들. 지드래곤, 마스타 우, 태양, 서인영. 인피니티 월 앞에서 다 함께 포즈를 취한 이들은 왼쪽부터 투애니원 스타일링을 함께하는 이현종, 스타일리스트 이세준, 양승호, 이수혁, 홍종현.

첫인상을 결정짓는 매장 인테리어를 둘러봤으니 본격적으로 옷을 감상할 차례. 익숙한 하이엔드 디자이너 브랜드들 옷을 넘기다 보면 젊고 낯선 이름들이 모난 돌처럼 뾰족하게 튀어 오른다. 지방시 그래픽 디자인을 맡았던 사무엘 맥윌리엄스(Samuel McWilliams)의 샘 MC(Sam MC), 바자 14(Bazar 14), 일본의 유명 그래픽 아티스트 스케이트씽(Sk8thing)의 C.E, 칸예 웨스트의 스타일리스트였던 버질 아블로(Virgil Abloh)의 오프-화이트(Off-White), 후드바이에어 등은 분더샵맨의 스핀 오프 버전을 위해 양승호가 신중하게 고른 브랜드들.

대부분 “샘, 뭐라고요?”라며 재차 물을 정도로 조금 낯설지만 그와 주변 친구들-빅뱅, 투애니원, 테디를 비롯한 YG 패밀리들과 중고등학교 친구였던 지드래곤, 이수혁 등-에게는 그동안 해외 매장에서 사거나 직접 제품을 받아서 입었던 익숙한 레이블이다. 샘 MC(그의 첫 번째 컬렉션 의상을 씨엘이 월드 투어 콘서트 때 입었다), 바자 14과 일본 그래픽 아티스트 스케이트씽의 C.E는 국내에선 분더샵맨 매장에서만 유일하게 판매하고 있다. “평소 제가 즐겨 찾거나 감각 있다고 생각하는 패션 매장의 공통점은 하이엔드와 젊은 스트리트 브랜드들이 적절하게 섞여 있는 곳이에요. 기존 매장에 젊고 신선한 기운을 불어넣는 방법은 기존 브랜드에서는 보다 젊은 디자인을 선택하고, 여기에 스트리트 신에서 영감을 얻은 신예 디자이너 브랜드를 추가하는 거죠.”

분더샵맨 바이어 팀과 양승호가 처음부터 죽이 잘 맞았던 건 아니다. 초반, 브랜드의 성격이 극적으로 드러나는 쇼피스를 선호하는 그와 철저하게 실제 판매 여부에 입각해 결정을 내려야 하는 바이어 팀은 의견 조율에 난항을 겪었다. 본인뿐 아니라 함께 작업하는 YG 아티스트들 모두 런웨이에서 바로 가져온 옷을 입을 정도로 디자인이 강한 스타일을 선호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판매할 수 있는 옷’에 대한 감이 부족했다는 걸 본인도 인정한다. “그 시즌을 대표하는 키 룩을 매장에 가져다 놓으면 멋있을 거라는 건 알았지만, 실제 판매가 어렵다는 건 이해하지 못했으니까요.”

다른 분더샵맨 매장과 달리 젊은 스트리트 감성으로 충만한 아이템과 의류들. 산다라 박, 카이 디자이너 계한희와 일본에서 활동하는 99%is-의 디자이너 박종우, 모델 박형섭도 양승호가 디렉팅한 분더샵맨 매장을 보러 왔다.

그가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된 것만큼이나, 기존 방식에 젖어 있던 바이어 팀 또한 새로운 점을 깨닫게 됐다. 분더샵맨의 유럽 담당 바이어 이지연은 그저 다르다는 이유로 시도하지 않았던 브랜드를 어떻게 흡수할 수 있는지에 대해 배웠다고 말했다. “시블링은 멋진 니트 브랜드지만, 분더샵맨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참고로 이번 시즌 바잉 리스트에는 포함되지 않았어요”). 양승호 실장이 생로랑의 블랙 턱시도 재킷과 입으면 얼마나 멋질지에 대해 쉽고 명쾌하게 설명해줬죠. 그동안은 어렵게만 생각했는데, 조금만 다르게 보면 성격이 다른 브랜드를 소개하는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던 거죠.” 일본과 미국 담당 바이어 정현진은 일본에서 눈여겨봐야 할 스트리트웨어 디자이너들에 대해 양승호와 자주 카톡을 주고받았다. “함께 가지 못한 대신, 요즘 주목하고 있는 레이블에 대한 정보를 실시간으로 전해준 게 많은 도움이 됐어요.” 양승호는 의지와 방향성이 더없이 확고한 편이다. 누구나 그와 공통된 의견을 가졌다면 그의 저돌적인 목표의식과 추진력에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울 테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그의 의견에 설득되는 편이 낫다. 분더샵맨 팀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정식 오픈 날인 10월 1일, 기대했던 ‘웨그’ 넘치는 오픈 파티는 없었다. 저녁 7시부터 그의 친구들이 조용히 매장을 찾았다. 디자이너 계한희와 99%is-의 박종우를 시작으로 이수혁, 홍종현, 산다라 박, 서인영, 태양이 불투명한 우윳빛으로 변한 유리벽 안쪽으로 들어섰다. 매장 안에는 특별히 오늘을 위해 곳곳에 설치한 스피커에서 YG 프로듀서 테디가 골라준 플레이리스트의 음악이 흘러나왔다. 더 위켄드의 ‘King of The Fall’, 메이셉 락키의 ‘Multiply’, FKA 트윅스의 ‘Two Weeks’ 등 테디는 매장 분위기를 꼼꼼히 살펴본 후 시간대별로 분위기에 맞게 선곡표를 구성했다.

이들은 찬찬히 옷을 둘러보거나 다 함께 스마트폰 카메라를 향해 포즈를 취하고, ‘그들만의 브랜드’를 발견하며 반가워하는 시간을 가졌다. 스피커의 음악 소리에 리듬을 타던 태양은 매장을 놀이터 삼아 곳곳을 구경하며 한참을 머물다 떠났다. 확실히 이곳은 패셔니스타들의 새로운 놀이터가 될 것이다. “스타일리스트를 하면서 얻은 인지도와 어릴 적부터 친했던 친구들이 전부 성공했다는 게 도움이 될 수도 있겠죠. 저 역시 그게 저의 일부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런 점이 분더샵맨 매장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으로 작용하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이곳은 매장 자체로 평가받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하니까요. 물론, 평가는 온전히 그 사람의 것입니다. 전 제가 하고 싶은 걸 했다는 데 만족해요.” 요란하지 않게 오픈 이벤트를 치른 그날 밤, 반짝이는 그의 눈빛은 그가 아직 흥분 상태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에디터
    패션 에디터 / 송보라
    포토그래퍼
    CHA HYE KYUNG, JO HUN J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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