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로의 봉
봉만대의 열차가 출발했다.
봉준호의 블록버스터 〈설국열차〉를 빌려 ‘떡’과 ‘살’로 반죽한 패러디 〈떡국열차〉다.
에로 외길 20여 년. 그는 지금 어디로 진격 중인 걸까.
‘에로 거장’ 봉만대를 만나 야하고 웃긴 얘기를 나눴다.
<설국열차>의 식량 양갱은 개떡이 되었다. 꼬리 칸의 젊은 지도자 커티스(크리스 에반스)는 ‘커져쓰(김구라)’로 변신했고, 절대자의 하수 메이슨(틸다 스윈튼)은 ‘매일선(이영진)’이 되어 나타났다. 열차 속 혁명의 무기가 되는 화학약품 크로놀은 개떡을 뭉쳐 만든 떡 몽둥이가, 열차의 바퀴를 굴리는 동력은 섹스로 얻은 ‘희열 에너지’가 대신한다. B급 정서로, 야하고 웃기게 변주한 <설국열차>다. 지난 2월 27일 인터넷 사이트 비퍼니 스튜디오스(BeFunny Studios)에서 공개된 이 영상은 봉만대 감독이 ‘유사 종친’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를 패러디해 만든 <떡국열차>다. 기후변화로 세상이 꽁꽁 얼어버린 서기 2069년. 운 좋게도 열차 안에 살아남은 이들이 ‘열차 칸의 계급’과 맞서며 ‘진정한 떡의 의미’를 찾아 진격한다. “일단 웹에서 공개하는 웹 드라마 형식이고, 8분 정도씩 12부작이다. ‘커져쓰’가 어떻게 머리 칸까지 나아가는지, 각 열차의 칸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가 주 이야기가 될 거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를 비꼬는 게 아니라 약간 뒤틀어서, 좀 다른 맛의 이야기를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시작했다.” 당연히 그 ‘다른 맛’이라 함은 봉만대의 영화답게 에로다. 꼬리 칸의 사람들은 ‘떡을 치자, 떡. 철퍽철퍽, 질퍽질퍽, 쿵따리 쿵쿵 떡’이라 노래하며 움직이고, 절대자 알포도(이무영)의 침실엔 옷을 입은 듯 만 듯한 여자 둘이 대기하고 있다. 봉만대 감독은 “이야기 안에 에로틱한 장면이 어떻게 들어갈 수 있을까? 에로스가 액자처럼 포개지는 느낌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했다. 현재 프리세일 형식으로 1·2화까지 공개된 <떡국열차>는 2주 만에 10만 뷰를 넘겼다.
봉만대는 항상 에로의 꼭대기에 있던 남자였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만든 비디오 장편 <이천년>은 에로스와 리얼리티를 촘촘히 꼬아 빚은 수작이었고, <아파바(아름다운 파도와 바다)>, <연어>, <모모> 등은 지금도 AV 업계에서 자주 언급되는 작품들이다. 1999년 5월 도쿄에 건너가 한일 합작으로 만들었던 데뷔작 <도쿄 섹스피아>를 비롯해 그가 연출한 AV 비디오 작품은 약 20여 편. 그는 AV 업계에서 충무로로 진출한 유일한 에로 감독이기도 하다. “나도 곰곰이 생각해봤다. 내가 언제부터 에로 감독이 되고 싶었나?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니 고등학교 때 여자 친구한테 에로 영화 감독이 되겠다고 한 적이 있더라. 나도 내가 에로에 재능이 있을 줄은 몰랐다.(웃음)” 하지만 그렇다고 봉만대가 벗기는 것만 잘하는 감독은 아니다. 2003년 그가 충무로로 영입돼 만든 영화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은 격정적으로 폭발했다 식어가는 사랑을 세세히 그린 작품이었고, 5부작 TV 영화인 OCN의 <동상이몽>은 남녀의 현실적인 일상을 서로 다른 다섯 개의 에로틱한 상상으로 변주해낸 작품이었다. 심지어 그의 영화들은 꽤 여성적이라 여성주의 평론가들의 의외의 환대를 받기도 한다. “성격 자체가 마초적이지 못하다. 아스팔트 위의 꽃을 보고도 한참 예쁘다 생각하기도 하고,(웃음) 여성적인 부분이 있다. 나는 비디오를 만들 때도, 충무로에서 영화를 연출할 때도, TV 영화를 만들 때도 계속 똑같이 얘기해왔다. 에로라기보단 그저 남녀가 서로 기분 좋게 손 붙잡고 극장에 가서 볼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남사스러워도 본인의 표현을 그대로 적으면, 그러니까 봉만대의 영화는 ‘꼴림’이 아닌 ‘끌림’, ‘세움’이 아닌 설‘ 렘’의 영화인 거다. 그는 야한 만큼 웃기기도 했던 최신작 <아티스트 봉만대>에 이어 올 8월엔 에로틱 로맨틱 코미디 <그녀는 관능소설가>를 연출할 계획이다.
봉만대의 음지의 수작 중에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 테이프>(스티븐 소더버그의 동명 영화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란 작품이 있다. 1990년대 문민정부 시절 퇴폐로 몰리며 사라져간 에로 비디오 업계의 질펀한 관계를 소재로 한 작품인데, 이 영화에서 봉만대는 묘한 장면을 몇 개 찍었다. 그는 아스팔트 바닥에 찰흙으로 스마트폰을 고정한 뒤 그 위를 트럭이 달리게 해 ‘아스트랄한’ 차의 질주 신을 만들었고, 베드신에선 스마트폰을 배우 입에 거의 넣다시피 해 초접사의 에로틱한 장면을 얻어냈다. 에로이기에 떠올릴 수 있는 아이디어였고, 현장의 노하우가 있기에 가능한 활용이었다. 2013년 작 <아티스트 봉만대>에서도 그는 스마트폰을 적극 이용했다. “새로운 매체, 플랫폼에 비교적 빨리 적응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 얼리어답터 수준은 아닌데 매체 차이 때문에 망설이며 시간을 낭비하진 않는다. 어디에도 없는, 다양한 아이디어가 필요한 에로 현장에 오래 있으면서 얻은 경험 덕도 있을 거다.” 봉만대는 가볍다. 그는 에로로 예술 한다며 홀로 외로운 독방에 틀어박히는 타입이 아니다.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으로 충무로에 데뷔한 뒤 그는 당시에는 매우 희귀했던 TV 영화 <동상이몽>을 연출했고, 이후 남의 영화에 배우로도 종종 출연하며 자신의 쓰임새를 십분 발휘했다. 그리고 <떡국열차>로는 웹 드라마에 뛰어들었다. “이준익 감독님이 예전에 ‘너의 가벼움, 존재의 쾌활함을 더 보고 싶다’는 얘기를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현재의 내가 그러고 있지 않나 싶다.”
자신의 길은 지키되 세상의 열차를 유연하게 갈아타는 일. 이건 쉬운 일이 아니다. 에로 출신의 감독이 충무로에서 영화를 만들 때, 극장용 영화를 연출하던 사람이 인터넷용 무비를 만들 때 대중이 갖고 있는 편견이 무엇보다 큰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봉만대는 그 경계를 자신만의 능글맞은 리듬으로 유려하게 헤엄쳐왔다. 이런저런 이유로 사람들이 에로의 현장으로 들어왔다 떠나갔을 때 그는 ‘하고 싶은 이야기’에 대한 끈을 잡고 자리를 지켰고, 작품 하나 없이 ‘3년 동안 바닥을 친 시기’도 있었지만 마음속 의지 하나만으로 버텨냈다. “1990년대 IMF가 터지고 문화 쪽 사람들은 타격이 어마어마했다. TV, 방송, 광고 쪽 사람들이 다 AV 쪽으로 넘어왔다. 그 쪽에 일이 없어지니 별수 없었겠지. 그러다 금 모으기로 분위기가 나아지자 다시 다 떠났다.” 그 텅 빈 에로의 현실을, 씁쓸한 에로 감독의 위치를 봉만대는 안다. “에로는 지금까지 산업에 끼어 있는 느낌이었다. VCR이 보급되면서 가정용 에로 비디오로 퍼졌고, 그게 죽으니 인터넷 세상과 만나 번성했고, 또 지금은 모바일이다. 이제는 에로라는 게 어느 산업에 기생하는 장르가 아니라 홀로 독립적으로 충분한 콘텐츠로 인정받았으면 좋겠다.” 이 마음은 아마 그가 고교 시절 여자 친구에게 “에로 영화 감독이 되겠다” 선언하던 때부터 품고 있던 진심일 거다. 당연한 얘기지만 봉만대는 에로 연출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어엿한 영화감독이기도 하다. “에로 영화 현장이 참 힘들다. 하겠다고 한 배우들도 막상 촬영장에 오면 한숨을 그렇게 많이 쉰다. ‘내가 괜한 걸 하겠다고 한 건 아닐까?’, ‘이 감독이 어디까지 벗기려나?’ 걱정이 많은 거다. 이건 에로 콘텐츠 장르에 대한 사회의 인식이 그만큼 빈약하기 때문인 거다.” 그래서 봉만대 감독은 근래 <라디오스타>, <속사정 쌀롱> 등 TV 오락 프로그램에도 출연하며 스스로를 노출한다. 건강한 성, 양지의 에로를 위함이다.
봉만대 감독은 두 번의 10년을 살았다. 영화 현장에 들어와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을 찍기까지 10년, 충무로 진출작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 이후 <아티스트 봉만대>까지의 또 10년. 그리고 지금은 세 번째 10년의 초반부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10년 단위로 설명했다. “의도적으로 계산하며 산 건 아닌데 돌아보면 그렇게 나뉘는 것 같다.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을 만들 때, 서른셋의 나는 좀 거친, 날것 같은 구석이 있었다. 근데 지금은 다듬어져서 부드러워지는 것 같고. 그래서 <아티스트 봉만대>는 유쾌하게 완성됐다. 지금 작업 중인 <그녀는 관능소설가> 역시 밝을 거고.” 그는 2011년 올레국제스마트폰 단편영화제를 하며 무게를 덜어냈다고 했다. 올해로 5년째 이 영화제의 부집행위원장을 하고 있는 그는 새로운 매체, 다양한 감독과의 교류 속에서 어깨에 짊어졌던 기존의 책임감을 잊고 자잘하지만 색다른 재미를 찾았다. “스트레이트만 날릴 순 없어요. 그전에 잽, 잽, 잽도 있는 거죠.” 그래서 <아티스트 봉만대>를 보면 자신을 유머 소재로 마음껏 활용하며 놀고 있는 광대 봉만대가 있다. 연출은 물론 직접 출연도 한 이 영화에서 그는 에로 현장의 리얼리티, 구질구질한 현실을 참고 살아야 하는 감독의 애환을 유머와 성을 섞어 표현했다. “마지막 장면을 찍을 땐 나 역시 짠했다. 우리 고모는 내가 다 찍어놓은 파일이 담긴 노트북을 바다에 집어 던지는 장면에서 울었다고 했고.” 일종의 자기 선언이자 에로 영화 현장의 ‘웃픈’ 드라마인 <아티스트 봉만대>는 그렇게 봉만대의 두 번째 분기점이 됐다. “‘니들이 에로를 알아?’라고 외치는 장면에선 정말 속이 다 후련했다. 영화를 찍고 나니 내 안에 억눌려왔던 어떤 마음이 치유된 기분이었다.”
8년 전 봉만대는 서울에서 열린 핑크 영화제에서 일본 AV 영화의 거장 다카하시 반메이와 만나 대담을 나눈 적이 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사람들이 에로 영화를 바퀴벌레라 부른다는 우스갯소리를 했다. 낮에는 보이지 않고 밤에는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의 봉만대를 보면 그 농담은 수정되어야 할 것 같다. 우리는 이제 확실히 낮에도 에로를 마주하고, 그 에로는 바퀴벌레처럼 징그럽지 않다. 오히려 때때로 귀엽기도 하다. 이건 분명 에로의 봉, 봉만대가 쌓아 올린 업적일 거다.
- 에디터
- 피처 에디터 / 정재혁(JUNG, JAE HYUK)
- 포토그래퍼
- CHA HYE KYUNG
- 스탭
- 스타일리스트 / 임지윤 헤어 / 안미연 메이크업 / 이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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