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패션과 하이테크의 밀월
서로 궁합이 맞지 않을 듯하던 하이패션과 하이테크가 비로소 접점을 찾았다. e-커머스나 모바일 쇼핑은 물론, 서로 영감과 노하우를 교환하며 공생하게 된 하이패션과 하이테크의 밀월에 대해.
이제 세상은 디지털을 최첨단 기술로 인식하지 않는다. 생활 그 자체다. 패션 역시 이런 시대 분위기를 반영해 적극적으로 하이테크, 디지털, 온라인 시스템을 도입하는 중. 샤넬이 네타포르테를 통해 보석을 팔고, 애플워치가 새로운 패션 액세서리가 되는 세상!
평소 좋아하는 디자이너의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신제품 소식. 우리는 곧장 모바일 스토어에 접속해 사이즈를 고르고 결제한다. 새로운 쇼핑 정보를 민첩하게 전달하는 SNS 커뮤니티는 소셜 쇼핑이라는 새로운 쇼핑 습관으로 우리의 삶을 하루가 다르게 길들이고 있다. 그 가운데 올해 가장 두드러지는 모바일 대표 트렌드 키워드는 ‘옴니채널’이다(고객이 쇼핑 가능한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모든 쇼핑 채널을 말한다). 각 매장의 장단점을 하나로 모아 어디서 쇼핑하든 같은 매장을 이용한 것처럼 느끼게 하는 것. 다양한 경로를 넘나들며 아이템을 검색하고 살 수 있게 만드는, 지극히 고객 중심의 서비스다.
‘옴니채널’ 시대를 향해 달리는 하이패션 선두 주자는 단연 버버리 하우스다. 트렌치 코트를 즐겨 입는 전 세계 멋쟁이들의 스타일을 담아 아트 오브 더 트렌치(artofthetrench.burberry.com)라는 디지털 플랫폼을 운영하는가 하면 모든 컬렉션을 라이브 스트리밍으로 생중계하는 데다 온라인 매장에서 가능한 경험을 오프라인 매장에서도 성사시켰다. 디지털 환경이 완벽히 구현된 런던 리젠트 스트리트 매장에서는 무려 500개의 스피커와 100개의 스크린으로 오디오 비주얼을 경험할 수 있다. 심지어 마이크로칩이 달린 옷을 거울 가까이 가져가면 옷에 대한 모든 정보를 보여주는 스크린으로 바뀐다. 게다가 전 직원이 아이패드 앱을 통해 고객이 뭘 샀고 또 뭘 좋아하는지와 같은 정보를 토대로 맞춤 쇼핑 경험을 제공하는 건 이곳의 명물 서비스다. 물론 이런 경험이 즉각적 매출을 목적으로 하는 건 아니다. 고객과의 소통을 바탕으로 브랜드를 강화하는 게 목표다.
버버리는 3년 전부터 열렬한 디지털 마케팅을 펼쳐왔지만 다른 브랜드는 상황이 달랐다. 아이템을 제대로 만져보지 않고 사야 하는 온라인 숍이 브랜드 철학과 맞지 않는다며 애써 거부해온 것. 그런 하이패션 브랜드들의 태도가 최근 들어 싹 달라졌다. 콧대가 높기로 치면 하늘 높은 줄 모르던 최상급 브랜드들이 온라인 시장에 뛰어들 만반의 준비를 마친 것. 옴니채널 트렌드와 맞물려 하루가 다르게 모바일로 빠져나가는 매출과 하이패션 온라인 시장의 무시무시한 성장이 온라인 시장을 더는 거부할 수 없게 만들었다. 아울러 하이패션 브랜드의 온라인 판매 채널을 담당하는 ‘육스’와 ‘네타포르테’ 합병이 이를 부추긴 것도 사실이다. 그로 인해 하이패션 브랜드들이 온라인 시장에 재빨리 적응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기류가 형성됐다.
대표적인 예가 샤넬이다. 온라인 시장에서 늘 팔짱 끼고 한 걸음 물러서서 지켜보던 샤넬은 4월 15일 네타포르테에 숍인숍을 열어 파인 주얼리 캡슐 컬렉션을 팔았다(온라인에서 샤넬 보석을 살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하다니!). 3주만 진행된 익스클루시브 판매를 흥미진진하게 지켜본 업계 전문가들은 샤넬이 네타포르타를 통해 온라인 시장을 테스트한 게 분명하다고 평했다. 아닌 게 아니라 실제로 샤넬은 내년에 온라인 시장 진출을 앞두고 있다. 자회사인 파라펙시옹이 소유한 세 개 공방의 제품, 장갑 브랜드 코스와 모자 브랜드 메종 미셸, 그리고 캐시미어 하우스 배리 니트웨어를 각자의 웹 사이트에서 판매할 예정. “브랜드 전략의 변화는 아닙니다. 굳이 매장에 오고 싶지 않은 기존 고객을 배려한 서비스의 진화일 뿐이죠.” 온라인 시장 진출에 대해 샤넬 하우스는 입장을 전했다. “어떤 고객들은 더 빨리 보고 싶고 자신이 원하는 게 뭔지 정확히 알고 있기에 굳이 매장에 오고 싶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라고 샤넬 패션 부문 사장 브루노 파블로브스키는 덧붙였다. “그럴 때 온라인 마켓은 고객의 요구에 대한 더 좋은 대응이 될 수 있죠.”
이렇듯 하이패션 브랜드들이 디지털 시장을 하나둘씩 경험하는 지금, 디지털 제품 역시 하이패션을 탐하고 있다. 2014년 최고의 버즈워드는 ‘웨어러블 테크놀로지’였다. 구글이나 애플, 삼성이 스마트폰이나 스마트 워치의 ‘웨어러블’한 특성상 패션에 눈을 돌리게 된 것. 웨어러블한 디지털 기기는 디자이너와 협업을 거침없이 시도했다. 아시다시피 구글 글래스는 다이앤 본 퍼스텐버그가 디자인했고, 인텔은 오프닝 세레모니와 스마트 팔찌도 제작했다. ‘그닥’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삼성 역시 2004년부터 꾸준히 디자이너들과 작업을 성사시키고 있다. 다이앤 본 퍼스텐버그를 시작으로 안나 수이, 조르지오 아르마니, 니콜라스 커크우드, 알렉산더 왕, 모스키노, 케이트 스페이드와 스페셜 에디션, 또는 액세서리를 함께 만들었다. 작년부터는 패션쇼도 후원한다. 올해엔 파리, 상하이, 서울 패션 위크를 공식 후원하면서 갤럭시S6와 갤럭시S6 엣지 신제품 프레젠테이션을 아예 패션쇼 형식으로 발표했다(파리 패션 위크에서는 카린 로이펠트, 지지 하디드, 릴리 도날슨 등을 초대해 엣지를 공개했다).
누가 먼저 내놓느냐의 순서에 따라 성패가 좌우되는 하이테크 시장의 특성상, 애플은 아예 하이패션계의 거물들을 스카우트하기로 작심했다. 이브 생 로랑의 CEO 폴 드네브, 버버리의 CEO 안젤라 아렌츠와 버버리 디지털 인터랙티브 디자이너 체스터 치퍼필드를 차례로 영입한 것(‘야후’ 역시 ‘야후 스타일’을 대대적으로 론칭하며 <W> <엘르> 등에서 오랜 이력을 쌓은 패션 디렉터 조 지를 불러들였다). 2년 전, 애플의 대대적인 패션계 인사 스카우트를 두고 기업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애플의 하이패션 진출을 예감했다(그때쯤 네티즌 수사대에 의해 1986년에 잠깐 선보였던 컬러풀한 ‘Apple’ 로고와 한 입 베어 먹은 무지개 색상의 사과 심벌을 활용한 패션 아이템 자료 사진이 발굴돼 화제가 됐다). 그리고 올해 전 세계에 출시돼 선풍적 인기를 끈 애플워치는 이를 방증했다. 디지털 기기에 아날로그 시계의 전통을 교묘하게 더해, 하이패션 시계 애호가들을 겨냥한 것(시계 마니아들이 좋아하는 IWC와 브라이틀링 일부 모델에 쓴 사슬 모양의 밀라니즈 루프 밴드도 적용했다). 급기야 미국 <보그> 최신호엔 패션 화보 형식의 광고를 무려 12페이지나 실으며 하이패션 침투를 노골적으로 선언했다.
애플이 하이패션 시장을 공략하자 전통과 역사와 장인 정신을 고집해온 시계 명가들이 드디어 용단을 내렸다. 고민의 결과는 지난 3월 스위스 바젤 아트 페어를 통해 아날로그식 외모에 첨단 기술을 더한 스마트 워치로 드러났다. 프레드릭 콘스탄트의 오롤로지컬, 몬데인의 헬베티카는 블루투스로 스마트폰과 연동돼 퍼스널 트레이너가 된다. 또 브라이틀링의 B55 커넥티드는 비행시간을 자동 체크해 해외 현지 시간을 자동으로 반영하는가 하면, 불가리의 디아고노 마그네시움은 신용카드처럼 쓰는 데다 심지어 자동차 문을 여닫을 수 있다. 어디 이뿐인가? 구찌의 스마트 밴드는 애플워치의 기능을 따라잡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스마트폰 없이 통화하고 메시지와 이메일을 주고받을 수 있으며 사진 촬영까지 가능하다. 그러니 까르띠에나 피아제 역시 최고급 시계의 격전장인 제네바 박람회 SIHH를 위해 비장의 스마트 워치를 준비하고 있을지 모른다. 하이패션 브랜드들의 하이테크 전쟁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니까.
‘보그닷컴’ 인터내셔널 에디터 수지 멘키스는 올해 상반기 최고의 패션 뉴스 중 하나인 육스와 네타포르테의 합병을 보도하며 이렇게 썼다. “나는 온라인 판매가 전체적으로 작은 기업에게는 축복이라 믿는다. 그리고 네타포르테와 육스의 합병은 다채롭고 창의적인 패션에 긍정적으로 작용하리라 확신하게 됐다.” 또 지난 세기말에 론칭해 2010년까지 미국 <보그> 온라인 콘텐츠 허브 역할을 했던 ‘스타일닷컴’도 올가을쯤 e-커머스 사이트로 바뀐다. 스타일닷컴이 집중하던 모든 패션 위크 콘텐츠는 이제 ‘보그닷컴’으로 바통을 넘기기로 한 것(voguerunway.com). 대신 콘데나스트 기자들이 직접 큐레이팅한 아이템을 직접 구매할 수 있는 사이트로서 대대적 개편을 준비 중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 미국패션디자이너협회는 <인스타그램의 디자이너들: #패션>을 발간했다. 여러분이 하루에도 수십 번 왕래를 반복하는 정사각형 디지털 이미지들이 종이에 인쇄돼 하나의 물질로 완성된 것. 인스타그램 공동 설립자 케빈 시스트롬은 책의 서문에 이렇게 썼다. “4년간 인스타그램 커뮤니티는 이미지를 통한 감정적 교류로 우리에게 많은 영감을 전해줬습니다. 이 교류에 있어 패션계만큼 더 멋지게 생명을 불어넣은 분야는 없었죠.” 이제 하이패션과 하이테크는 누가 누구의 갑과 을이 아닌, 서로가 서로에게 영감을 주는 동맹이자 협업으로 발전하고 있다.
- 에디터
- 이정윤
- 포토그래퍼
- Courtesy 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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