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여행가방
돌길 위도 부드럽게 구를 튼튼한 바퀴 네 개? 천보다도 가벼운 특수 소재 하드 케이스? 혹은 무조건 많이 들어가는 널찍한 공간? 내게 꼭 맞는 여행 가방을 찾고 있는 여자들의 취향에 대한 보고서
“공항 컨베이어 벨트 앞에 서 있으면 6명 중 4명이 리모와야.” 남성지 패션 기자 A는 얼마 전에 다녀온 출장에서 동료 기자들이 너나 없이 그 비싼 여행 가방을 들고 다닌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리모와 열풍에 합류하기 전에 저렴한 가격 대비 질이 꽤 좋다고 평가받는 제품부터 써볼 생각이다. “리모와도 갖고 싶긴 한데, 무인양품 캐리어를 먼저 써보려고.” 나란히 앉아 있던 여성지 패션 기자 H가 맞장구쳤다. “그래, 그게 괜찮다며? 바퀴를 고정할 수 있는 스토퍼도 있대.” H는 몇 년 전 아메리칸 투어리스터에서 구입한 29인치 사이즈의 폴리카보네이트 러기지를 사용하고 있다. “해외 출장 때문에 집 근처 매장에서 급하게 샀는데 막상 써보니 가볍고 튼튼해서 좋더라.” 세상의 모든 여행 가방은 가볍고 튼튼하고 바퀴가 잘 구르지만 사람들은 각기 다른 기준과 경험을 적용한다. 내게 맞는 여행 가방을 찾고 있다면 다른 사람들의 경험이 때로 도움이 될 것이다.
라이프스타일 브랜드에서 일하는 친구 J는 뮤직 페스티벌이나 공연을 보기 위해 일본, 미주, 유럽으로 1년에 평균 6~7번 해외여행을 다닌다. 이미 7월 포틀랜드, 8월 도쿄 행 비행기를 예약했고, 12월엔 런던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낼 계획. 여행지에서는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돌아올 땐 늘 책과 LP판으로 가방을 가득 채운다. 여행 가방의 역사는 바퀴 두 개 달린 샘소나이트의 패브릭 소재 러기지로 시작해서 4~5년 전 비에 젖을 일도 없고 천보다 가벼운 하드 케이스로 갈아탔다. 그녀 역시 ‘미국인 여행객(아메리칸 투어리스터)’. “바퀴 두 개에서 네 개로 갈아타는 건 신세계야. 가방 위에 보스턴백을 하나 더 얹어도 힘들이지 않고 이동할 수 있거든.” 그녀 역시 리모와에 대한 로망이 있다. “살사 무광택 블랙 29인치를 살 거야. 근데 지금 쓰고 있는 게 망가지지를 않네.” 10년 전만 해도 여행 가방의 로망은 리모와가 아니라 샘소나이트와 아메리칸 투어리스터였다는 사실. 그러나 요즘엔 합리적인 가격대에 질과 모양새 모두 고루 무난하고 믿을 만한 걸 살 수 있는 대중적인 여행 가방 브랜드가 됐다.
<보그>의 해외 출장 대부분을 도맡아 처리하는 여행사 대표 이호석은 1년에 30회 이상 해외에 나간다. 고장이나 파손보다 바퀴가 닳아서 여행 가방을 바꾸는 수준. 여러 브랜드의 여행 가방을 고루 사용해봤을 뿐 아니라 어떤 타입의 여행객들이 어느 제품을 선호하는지도 꿰뚫고 있다. “일등석을 타는 VIP 고객들이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게 있죠. 32인치보다 더 큰 사이즈에 패브릭 소재로 된 투미 러기지입니다. 일등석은 수하물 무게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보통 그걸 두 개씩 갖고 다니죠.” 투미 코리아의 이현정 차장은 짐이 많은 할리우드 배우들도 이 모델을 선호한다고 덧붙였다. “모델명은 ‘월드와이드 트립 익스펜더블 케이스’예요. 34인치죠. 정사각형의 ‘익스텐디드 트립 가먼트 백’도 연예인들이 많이 사용하는 모델입니다. 가방을 펼쳐서 밴에 걸어 놓을 수 있거든요. 해외에 화보 촬영을 가는 패션 기자들도 종종 협찬을 요청하는 제품이죠.”
이 대표에 의하면 의사나 변호사, 회계사 같은 전문직 종사자들이 공항 유니폼처럼 세트로 갖추는 것 또한 투미 러기지와 백팩 세트다. 볼펜꽂이, 명함 칸, 도큐먼트 포켓 등 수납 공간이 세분화돼 있고 백팩과 서류 가방에도 기내용 트렁크처럼 끌 수 있도록 바퀴가 달려 있는 게 장점. 출국 직전까지 일을 하다 갈 수 있기 때문에 CEO들에게 적당하다는 게 이현정 차장의 설명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도 투미의 바퀴 달린 서류 가방을 끌면서 입국하는 모습이 자주 포착되곤 합니다.”
한편, 이들 못지않게 해외 출장이 잦은 여행 전문가 이호석 대표는 의외의 브랜드를 꼽았다. “러기지는 투미처럼 짐이 많이 들어가는 게 최고죠. 개인적으로는 구조가 복잡하면 오히려 불편하게 느껴져서 백팩은 디자인이 깔끔하고 색깔도 다양한 만다리나 덕을 사용합니다.” 만다리나 덕은 1970년대 오렌지색 소프트 캐리어 ‘워크’를 선보이면서 컬러풀한 트렁크로 인지도를 높였다. 최근엔 <꽃보다 할배>의 최지우 덕에 다시 한 번 주목받는 중. 만다리나 덕 마케팅팀 최지원 과장이 꼽은 인기 아이템은 다음과 같다. “최지우 씨가 사용한 ‘워크’ 네이비 컬러 31인치는 품절됐어요. 패브릭 소재라 얇은 하드 케이스보다 무게는 좀 나가지만 방수와 오염방지 처리를 했고, 커버 전면의 큰 포켓은 수납성이 좋죠. 최근엔 컬러풀한 하드 캐리어인 ‘로고 덕’을 찾는 여자 고객들도 많습니다.”
이탈리아 패션 브랜드 마케팅팀 과장 S가 해외에 나가는 목적은 출장이 3분의 2. 여행 가방은 미팅 때 입을 실크나 울 소재의 포멀한 의상과 무거운 하이힐로 가득하다. 게다가 정리벽이 있어 최대한 구겨지지 않도록 돌돌 말거나 일일이 더스트 백에 담아 움직이지 않게 차곡차곡 정리하는 강박적인 스타일. “내부 수납 공간이 잘 나눠져 있는 게 마음에 들어요. 디자인이 포멀한 룩에 잘 어울린다는 것도요.” 그러나 그녀가 리모와만 세 개째 쓰고 있는 이유는 따로 있다. “사실 제 의지로 산 건 첫 번째 리모와뿐이에요. 살사 에어 60리터였는데 운반 중에 손잡이가 찢어지는 바람에 대한항공에서 똑같은 걸 사줬거든요. 그런데 다음 번 대한항공을 탔을 땐 모서리가 깨졌죠. 또 동일한 걸로 보상한다길래 제가 추가 금액을 부담해서 좀더 튼튼한 모델로 업그레이드했어요.” 총알도 뚫지 못 할 것 같은 외양과 달리 내구성이 약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녀는 매번 헤비태그(Heavy Tag)가 붙을 정도로 자신의 짐이 무겁고, 무거울수록 수하물이 험하게 다뤄진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견고하니까 이 정도라고 생각해요. 가장 최근에 바꾼 건 지퍼 대신 잠금장치 세 개가 달려 있죠. 고가의 샘플 의상을 가져갈 일이 많으니 좀더 안전한 게 좋잖아요?”
리모와 코리아의 정찬희 과장은 2011~2012년 무렵 하드 케이스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면서 리모와의 인기도 함께 높아졌다고 설명했다. “리모와는 여행 가방의 하이엔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방탄유리 소재인 폴리카보네이트를 처음 사용한 것도 리모와죠. 90여 가지 공정 과정이 장인의 수작업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제작 시간이 오래 걸리고 수량도 한정적입니다.” 리모와를 사는 사람들의 성별, 연령, 직업군은 천차만별이고 압구정 갤러리아백화점 매장에서는 20대 여자들의 구매가 가장 많다고 그는 전했다. “최근에 출시된 보사노바 라인은 충격을 많이 받는 모서리에 가죽을 덧댔습니다. 내부는 충격을 흡수할 수 있도록 퀼팅 처리한 소재로 마감했으며, 모델에 따라 수트를 넣을 수 있는 가먼트 백과 조정 가능한 칸막이가 장착돼있죠.”
이쯤 되면 자연스럽게 루이 비통이 떠오른다. 리모와가 현대적인 여행 가방의 하이엔드라면, 루이 비통은 여행의 정신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이 비통 러기지의 클래식한 모양새는 여행을 가볍게 해준다기보다 그 자체로 부담을 더하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홍보우먼 H는 8년째 이 가방만 끌고 다닌다고 수줍게 털어놨다. “사실 해외에 나갈 일이 그리 많진 않아요. 제가 쓰는 건 루이 비통 타이가 라인의 페가세 트렁크죠. 26리터인데, 워낙 짐을 최소한으로 꾸리는 편이라 일주일까지도 충분해요. 물론 짐이 늘어날 경우를 대비해서 접을 수 있는 토트백을 가지고 다니지만요.” 그녀는 심지어 바퀴도 두 개인 이 가방을 끌고 삭막한 텍사스와 방대한 북유럽 등지를 돌아다녔다. 그녀가 소박하게 꼽은 장점은 수하물 벨트에서 찾기 쉽고, 유행을 타지 않아 오래 사용할 수 있으며, 그동안 생긴 가죽 표면의 스크래치가 운치 있다는 것. “물론 가방이 가볍고 기능이 다양하면 좋을 거예요. 그렇지만 여행을 하는 이유가 여행 가방에 좌우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해요. 누구와 함께 가고 누구를 만나는지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여행 가방은 여행 기분을 내는 데 일조하고, 나만의 공항 패션을 완성하며, 소중한 나의 소지품들을 보관한다. 그리고 여행이 보편화되면서 단순한 짐가방의 개념을 넘어섰고, 여행의 질을 좌우하는 중요한 기준 중 하나가 됐다. 그러나 H의 말처럼 그게 여행의 전부도 아니다. 어떤 여행가방을 고를 것인지는 각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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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
- 송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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