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무대를 휩쓴 한국 남자 모델 군단
글로벌 럭셔리 비즈니스에서 남성복이 절반을 차지하는 지금, 지난 7월 남성복 패션 위크에서 가장 흥분된 순간이라면? 한국 남자 모델들이 맹활약했다는 것! 바야흐로 패션계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던 백인 전성시대는 사라졌다. 그 중심에 있는 한국 남자 모델들을 〈보그〉가 만났다.
이봄찬, 임재형, 전준영, 도병욱, 류완규, 박경진, 김병수, 김양훈, 민준기, 김도진, 김정우, 조환… 무작위로나열된 이름이 혹시 여러분의 오빠나 남동생인가? 아니면 남자 친구라도 끼어 있나? 혹은 새로 선발된 국가대표 농구 선수 명단처럼 보이나? 그것도 아니면 다가올 서울 컬렉션에 서게 될 남자 모델들? 마지막 추측이 정답에 가깝다. 그들은 6월 12일 런던을 시작으로 피렌체, 밀라노, 파리, 뉴욕으로 이어진 2016 S/S 남성복 컬렉션에서 맹활약한 한국 남자 모델 이름이니까. 지금껏 한혜진부터 수주로 이어지는 한국 여자 모델들의 국제적 활약상에 익숙한 팬이라면 20대 청년들의 인해전술이 믿기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이다. 그래서 <보그>는 여자들 곁에서 호위 무사나 보조 출연자처럼 서 있던 남자 모델에게 의미를 부여하기로 했다. 패션계에는 새로운 모델 집단이 출현해 종종 새로운 순간을 선언하는데, 2015년 우리가 목격한 가장 행복한 장면 중 하나가 이 청년들을 유럽 빅 쇼에서 마주친 순간이었다.
이봄찬은 1월 밀라노 패션 위크에서 비비안 웨스트우드 쇼에만 섰다. 그때만 해도 머리카락을 ‘빡빡’ 민 모델 초년병. 그러나 6개월 후 전혀 다른 인생이 배우 이준기를 닮은 그에게 레드 카펫처럼 펼쳐졌다. 런던, 밀라노, 파리의 투 플러스급 런웨이 17개에 발탁돼 비약적 도약을 이룬 것. 루이 비통, 디올 옴므, 드리스 반 노튼, 폴 스미스, 3.1 필립 림, 질 샌더, 마르니, 버버리 프로섬 등등. “다가올 남성복 경향과 제 이미지가 잘 맞았던 것 같아요. ‘소년’ 트렌드와 맞닿아 모델 역시 소년답고 병약한 이미지가 대세였거든요.”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권투 장갑보다 작은 얼굴, 가늘고 긴 몸매, 2차 성징이 진행 중인 듯한 용모, 여기에 장난기 많은 남고생을 보는 듯한 스물한 살짜리 청년의 재능과 사교성이 루이 비통의 킴 존스부터 디올 옴므의 크리스 반 아쉐까지 사로잡았다(키 189cm에 몸무게 60kg! 이쯤에서 여자 독자들의 한숨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저는 말이 많은 편이에요!” 아몬드 같은 얼굴로 눈웃음을 치는 이봄찬이 경상도 사투리를 섞어가며 말한다. “꽤 사교적이죠. 사실 동양인들 특유의 예의범절을 따지다 보면 유럽 현지에서 자기 어필이 힘들어요.” 다음 시즌엔 뉴욕이 그의 새로운 목적지다. “고 1 때 부터 록 밴드를 하고 있어요. 일렉트릭 기타와 보컬을 맡았죠. 뉴욕에 정착하면 모델과 록 밴드 일을 병행하고 싶어요.”
루이 비통 쇼에 섭외된 모델 38명 가운데 아시안은 고작 두 명. 이봄찬과 함께 캐스팅된 전준영은 스물두 살로 남자 모델치곤 아담한 편이다 (186cm의 키에 64kg의 몸무게가 그나마 여자 독자들에게 현실적인 남자로 받아들여질 듯). 해외 데뷔 시즌이었던 그에게 20개의 런웨이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눈치다. “런던에서 코치. 밀라노에서 보테가 베네타, 닐 바렛, 안토니오 마라스, 돌체앤가바나. 그리고 파리에서 루이 비통, 겐조, 3.1 필립 림. 아, 새로 시작된 뉴욕 남성복 패션 위크에서는 어디에 섰지?” 그는 여전히 똘망똘망한 눈으로 믿기지 않는 듯 지난여름을 추억했다. 그러더니 원하고 생각하다 보니 몸과 마음이 그쪽으로 반응하게 됐다고 덧붙인다. “제가 해외 컬렉션에 나간다고 하자 주위에서는 전혀 기대하지 않는 눈치였어요. 저 역시 이런 결과를 상상조차 못했죠. 그래서 무척 위축됐는데, 지금은 그저 신기할 뿐이에요.” 이봄찬에 비해 이목구비가 더 굵고 짙은 그는 파리를 휩쓴 소년 트렌드 외에 중국을 추가한다. “중국 대륙을 겨냥한 옷이 아주 많았어요. 그러다 보니 아시안 모델들이 자주 등장하게 됐죠.” 전준영 역시 싱글싱글 자주 웃는 타입. “맞아요, 해외 패션 전문가들과 대화하며 저는 자주 웃었어요. 이런 기질은 사실 타고났거든요!”
이렇듯 요즘 남자 모델들은 자신의 장점과 강점에 대해 잘 안다. 그러나 189cm의 장신에 67kg의 몸무게를지닌 박경진은 독학하다시피 유럽으로 떠나 자신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 케이스다. “패션 위크에 참여하는 브랜드와 디자이너를 모조리 알아야 한다는 마음에 패션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손으로 툭 치면 와르르 무너질 듯 창백하고 마른 이 청년은 트렌드 조사는 물론 모델 경향을 습관적으로 파악했다. 독학의 결과는? 엠포리오 아르마니 쇼의 오프닝! “제 신체와 외모가 잘 맞을 만한 브랜드 위주로 공부했죠.” 상냥하고 젠틀한 태도와 말투, 그리고 고운 피붓결이 더없이 아르마니답다는 게 현지 패션 관계자들의 평. “엘레강스하다는 칭찬을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엠포리오 아르마니 카탈로그 표지 촬영까지 마쳤죠. 저 자신도 미처 몰랐던 이미지예요. 특히 엠포리오 쇼 오프닝에선 선글라스를 끼고 나왔는데, 스태프들이 저의 턱 선을 좋아하더군요. 다음 시즌엔 파리에서도 이런 장점을 잇고 싶어요. 기회가 된다면 선글라스 광고까지. 하하!”
한편 ‘레오’라는 이름으로 활약하는 임재형은 이미 서울에서도 <GQ>나 ‘김서룡’ 무대를 통해 꽤 얼굴이 알려진 모델이다. 한 번에 여러 얘기를 하는 듯한 눈빛과 신장 189cm에 체중 68kg이라는 모델로서 최적의 조건은 뜻밖에도 지난 1월 유럽에선 전혀 먹히지 않았다. 그러나 이봄찬과 마찬가지로 그의 2016 S/S 시즌은 모델 이력 가운데 최고의 순간이었다. “에르메스, 드리스 반 노튼, 릭 오웬스, 겐조 등등. 언젠가 디올 옴므쇼에 섰던 모델 김영광을 보며 품은 꿈이 드디어 저에게도 이뤄진 거죠.” 비로소 힘을 뺀 그의 눈빛에 해외 패션 관계자들이 홀딱 반한 것. 게다가 이름만들어도 으리으리한 쇼 외에 요즘 핫한 ‘Y/프로젝트’까지 접수했으니, 다음 시즌은 예고된 성공이다.
임재형이 영어 공부의 중요성에 대해 얘기하는 사이, 김병수는 카메라 셔터 소리에 맞춰 슬쩍슬쩍 몸을 움직이며 표정을 바꾸고 있었다. “‘비스트’의 장현승 닮지 않았나요?” 스타일리스트가 카메라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만큼 ‘요즘 얼굴’인 데다 말수가 적은 사진가가 칭찬할 만큼 모델로서 본능적 감이 있는 인물이 스물다섯 살의 김병수다. 그러나 외국어와 요리를 배우기 위해 호주에서 공부하던 이력이 전부일 뿐. “재료만 있으면 웬만한 한식은 뚝딱 만들 수 있어요.” 하지만 멜버른에서 우연히 본 패션쇼 하나가 그의 인생의 방향을 꺾을 줄이야! “사진가 형과 유럽에 놀러 갔는데, 모델 캐스팅 현장을 보자마자 즉석에서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여기저기 밀어 넣었죠.” 그 결과 조르지오 아르마니가 세컨드 브랜드를 두 벌 입혔고, 이번에 처음 열린 뉴욕 남성복 패션 위크에서는 로버트 겔러의 호출을 받았다. 비슷한 듯 전혀 다른 한·중·일의 느낌이 모두 있다는 평판 속에 그는 스스로의 변화무쌍함을 깨달았다. “그래서 저는 모든 쇼에 다 설 수 있고, 또 모든 옷이 어울리지 않을까요?”
남자 모델에게 런던과 뉴욕 패션 위크는 파리, 밀라노, 피렌체에 한정된 활동 영역에서 처녀림이다. 김정우는 서울 패션 위크나 한국 남성지에서 크게 주목받는 모델은 아니었다(이날 스튜디오에 모인 다른 모델들도 거의 마찬가지). 그래서 크리스토퍼 섀넌, 던힐, 타이거 오브 스웨덴 등 런던 패션 위크의 중요한 무대에 섰던 그를 보며 패션 기자들은 다들 한마디씩 건넸다. “누군가 했더니 너였구나. 한국인이었어!” 모델로서 그의 공식 일정인 2016 S/S 런던 패션 위크는 엘리트 에이전시와 함께 전략적으로 짠 기획이었다. “저의 체형과 얼굴이 잘 어울릴 컬렉션 위주로 공략했습니다. 파리는 가냘픈 이미지, 밀라노는 남성적 이미지가 우세한 반면, 런던은 뭔가 또 달랐으니까요.” 김정우는 이미 글로벌 남자 톱 모델 반열에 오른 김상우 덕을 좀 봤다고 후일담을 전한다(정사각형의 얼굴에 볼이 Y자로 훅 파였으며 눈웃음을 치는 청년). “서양인이 보기에 각진 턱과 홀쭉한 볼이 김상우와 비슷하게 보인 걸까요? 그와 저를 혼동하는 경우가 꽤 많았으니까요. 일단은 칭찬으로 들었죠. 하하!” 사실 그는 준비된 톱 모델이다. 작년 8월 엘리트 모델 서울 대회에서 1등, 또 세계 본선 대회에서는 최종 다섯 명의 우승자 안에 뽑힌 유일한 동양인이었으니까.
이렇듯 전에 없이 많은 한국 남자 모델들이 유럽과 뉴욕으로 왕창 몰려갔다(스포츠에 일가견이 있는 여자라면 메이저리그에 출현한 박찬호, 류현진, 추신수 등의 코리안 특급이 떠오를 것이다). 밀라노 남성복 패션 위크 때만 해도 오픈 캐스팅 때 한국인이 열다섯 명, 중국인은 열 명(거의 30여 명에 달하는 한국 모델들이 이번 시즌 유럽으로 떠났다). 그야말로 역대 최고! 라이선스 남성지에서 패션 디렉터로 여러해 일하면서 한국 모델들의 흥망성쇠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스타일리스트 이현범은 이렇게 전한다. “박성진, 박형섭 등 성공한 한국 모델에게 익숙해진 외국 에이전시들이 1~2년 전 부터 ‘코리안’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해외 에이전트는 연예계 스타로 만들려는 한국 모델 에이전시와 달리 ‘모델’을 찾는 데다, 한국에는 차고 넘치도록 좋은 모델 유전자를 지닌 인재가 많았다는 것. “그들은 현재 한국 패션계가 좋아하는 ‘소년’이 아닌 까닭에, 한국에서는 에이전시 계약이나 활동에서 실패했더라도 외국에서 그토록 원하던 하이패션계를 체험하며 스스로에게 희망을 갖게 됐습니다.”
그 결과 ‘꽃소년’과에 속하는 글로벌 신인 모델 여섯 명은 물론, 정반대 이미지의 ‘상남자’들이 유럽에서 또 하나의 동양인 그룹을 형성하게 됐다. 교포, 사무라이, 축구 선수 등 이국적이고 거친 인상의 김양훈은 첫눈에 상대를 주눅 들게 하는 포스. 그러나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 나면 짐 캐리처럼 씩 웃는 입꼬리, 건강하게 그을린 탄력 있는 피부, 북방계 특유의 쫙 찢어진 눈매, 재치 있는 말솜씨에 단숨에 말리게 된다. 그런 마초 이미지와 키 188cm, 몸무게 70kg의 좋은 체격이 돌체앤가바나를 사로잡았음은 물론이다(그에게 돌체앤가바나의 올가을 옷을 입히던 스타일리스트는 ‘잘빠진 조랑말’에 비유했다). “코리안 갱스터!” 그는 해외 친구들이나 패션 전문가들이 장난삼아 자신을 이렇게 불렀다며 웃었다. “돌체앤가바나 룩북은 두 시즌째 촬영하고 있어요. 한번 촬영하면 보통 사흘을 그들과 동고동락하는데, 저의 웃는 입 모양이 귀엽고 예쁘다고 도메니코 돌체가 칭찬하더군요.” 그는 올드 스쿨 클래식을 선호해 평소에도 머리에 포마드를 발라 2 대 8로 빗질해 넘기며, 클래식하고 남자답게 옷을 입는 편. “그래서 돌체앤가바나, 조르지오 아르마니 등이 선호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이미지가 한정돼 보이면 안 되니까 다음 시즌부터는 저를 무장 해제시키고 싶습니다.”
류완규는 왕년의 슈퍼모델 스콧 반힐이 오프닝을 연 베르사체 무대에서 21세기 액슬 로즈로 변신했다. 그전엔 홍콩으로 날아가 여러 잡지를 촬영했고, 파리에서는 상하이 탕 가을 광고에 캐스팅되는 등 모델로서 국제적 감각을 습득했다. 배드 보이의 전형인 그의 이목구비는 패션계의 배드 걸로 통하는(물론 성품과 인간성은 몹시 착하다) 도나텔라 베르사체의 눈에 쏙 들었다. “시크하고 섹시해요!” 도나텔라로부터 들은 칭찬을 그가 그대로 재현했다. 한국에서는 몸집 좋은 모델 축에 속하지만, 베르사체 상남자들 사이에 자신이 제일 말랐다고 전한다. “그래도 도나텔라는 저에게 섹시한 옷을 입히라고 지시했죠.” 그와 함께 도나텔라의 부름을 받은 아시안 모델은 도병욱이다. 류완규에 비해 키는 2cm 작지만(187cm) 몸무게는 1kg이 더 나간다(72kg). 베르사체, 돌체앤가바나는 물론, 브리오니, Z 제냐, 비비안 웨스트우드 등 밀라노 빅 쇼가 그를 원했다. ‘찐한’ 외모의 상남자답지 않게 그는 점잖고 침착하다. 그건 미묘한 눈빛 덕분이기도 하지만 27세라는 성숙함에서 비롯된 태도다. “동양인인데 동양인 같지 않은 이목구비에 눈빛이 깊어 보인다고 저를 얘기하더군요. 렌즈를 낀 듯하다고.”
상남자 패거리에서 우두머리쯤 되는 모델이라면 단연 김도진이다. ‘꽃소년’ 그룹과는 비교 불가능한 그의 풍채는 상남자들 틈에서도 눈에 띈다. 요즘 한국에서 보기 드문 전형적 ‘숫컷’ 남성상은 런던 벨스타프를 비롯한 몇몇 무대에서 더없이 강력해 보였다. “해외 모델 관계자들은 동양 모델들을 비슷비슷하게 여기고 있어요. 그래서 그들과 차별을 두기 위해 저는 근육질로 몸을 더 단련하고 짙게 태닝도 하고 있습니다.” 김도진과 이란성쌍둥이처럼 보이는 민준기에게 이번 아르마니 무대는 서울에서 김서룡 쇼에 섰던 것과 같이 의미심장한 순간이었다. “저의 조건으로는 평생 설 수 없을 듯한 무대들이었어요. 하지만 반전이 왔죠!” 그래서 다음 시즌에는 거의 삭발에 가깝게 짧게 유지하던 머리를 길러 또 다른 가능성을 시험할 거라고 다짐한다.
사실 삭발은 남자 모델들이 감행할 변신의 강력한 한 방(여자 모델들이 변화의 순간에 염색을 하거나 단호하게 커트하는 것처럼). “데뷔 쇼가 카루소였습니다. 그때 삭발로 등장했죠. 유럽에 처음 갔을 때 그때 각오를 되살리고 싶었습니다. 처음이기에 잃을 것도 없고 도전만 있었으니까요.” 동양에서 온 키 189cm에 몸무게 69kg, 여기에 화살처럼 날렵하고 날카로운 얼굴에 삭발까지 한 스물두 살의 조환에겐 우아하기 짝이 없는 보테가 베네타의 토마스 마이어가 러브콜을 보냈다. “캐스팅 장소에 가지 않았어요. 그저 제 사진만 보고 연락이 왔죠.” 사실 이번 보테가 베네타 쇼는 지난 시즌 광고 모델이기도 한 박성진을 시작으로 오프닝 아홉 명이 모두 ‘빡빡이’ 모델이었다. 이게 조환에게 적절한 타이밍이 됐다.
와우! 대관절 한국 청년들이 왜 느닷없이 패션 종주국에서 이토록 대세가 된 걸까? 남성복 전문가 이현범은 한국 모델들의 ‘탁월한 비율’을 맨 먼저 꼽는다. “중국은 중국인이라는 강력한 이점이 있지만 체구가 커서 피팅이 쉽지 않아요. 일본은 혼혈이 많아 아시안이라는 느낌이 덜한 데다 키도 작고 자국 매거진의 서양 모델 선호 현상으로 모델 수가 턱없이 부족합니다. 여기에 비해 한국인은 아시아인 특유의 외모에 우월한 몸매가 최고 장점이죠.” 그는 한국인 특유의 흥, 열정 등도 경쟁력이라고 덧붙인다. “한국 모델들은 유럽 현지에 오래 머물며 영어 회화에 집중합니다. 심지어 2~3주 만에 영어 실력이 일취월장하는 경우도 자주 봤죠. 덕분에 디자이너와 소통이 충분히 가능해졌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 애프터 파티나 SNS 등 패션쇼 이외의 마케팅이 중요해지면서 디자이너들은 ‘놀 줄 아는’ 모델들을 필요로 하게 됐다. “한류를 바탕으로 다른 아시안 모델과 달리 거대한 팬을 거느린 한국 모델이야말로 그 조건을 충족시키고도 남죠.” 또한 이미 월드와이드 톱 모델이 된 제이 유의 소속사 런던 스톰 에이전시의 사이먼 챔버스에 따르면 다양성이 한국 남자 모델에게 절호의 찬스가 된 듯하다. “현재 패션계에서는 다양성이 주요 골자입니다. 다양성에 대한 관심이 모든 인종, 국적, 민족을 포함하는 쪽으로 향하고 있죠. 그래서 우리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배경을 지닌 모델들을 찾기 위해 거리를 샅샅이 뒤지고 있어요.”
보시다시피 한국 남자 모델들은 새로운 글로벌 시장이 개방되며 다민족, 다양성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는 순간에 일제히 출현했다. 아울러 중국의 럭셔리 제품 수요에 부응해 새로운 아시아 모델들을 찾으려는 움직임의 덕을 본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반면 모델 자신들은 보다 실제적이고 가벼운 시각에서 자신들의 우월함을 파악하고 있다. “모델 전체를 봤을 때 동양인은 10%에 불과해요.” 그중에서도 한국 모델은 유난히 눈에 띈다고 김양훈은 얘기한다. “보세요, 우린 다들 옷을 잘 입어요! 중국 모델들이 ‘추리닝’만 입고 다니는 것과 다르죠. 남들이 볼 때 그들이 농구 선수인지 모델인지 어떻게 알겠어요. 민준기와 저는 얼마 전 남성복 패션 위크 스트리트 패션의 15인에 뽑혔지만, 중국 모델은 한 명도 없었죠.” 그의 말에 김도진도 동의한다. “동양 모델들 가운데 좀 꾸몄다 싶으면 다 한국인이었다고 서양 모델 친구들이 그러더군요. 원중킴, 성진 팍, 노마 한 등도 다 그랬다고.“ 이건 꽤 중요한 대목이다. 패션에서는 누가 옷을 잘 만들고 또 누가 잘 입느냐가 관건이니까. 그래서 서울에서도 멋쟁이로 소문났던 임재형은 현지 디자이너들을 만나러 갈 때마다 브랜드 각각의 취향에 맞게 입고 간 것이 나름의 전략이라고 귀띔한다.
김원중, 박성진의 이름이 언급됐으니, 이쯤에서 패션 수도에 이름을 날린 한국 남자 모델 계보를 살펴보자. “1세대는 2007년 F/W 비비안 웨스트우드에 깜짝 등장해 패션지 단신 뉴스를 장악하며 아키라라는 이름으로 활동한 김기범. 또 그와 함께 2009년 S/S 시즌에 파리로 날아가 디올 옴므에 섰던 김영광, 그리고 랑방,보테가 베네타 무대에 오른 윤진욱이 있습니다.” 특히 윤진욱은 <GQ Style> 독일판 표지와 갭 광고 모델로 발탁된 데 이어, 다음 시즌에도 러브콜을 받았지만 오토바이 사고로 단발성에 그쳤다고 이현범은 기억한다. “2세대는 2010년대를 연 현재 톱 모델들. 수려한 외모와 완벽한 영어 실력과 끼를 갖춰 보테가 베네타 광고까지 찍은 박성진, 개성 있는 외모와 유럽 팬까지 보유한 박형섭, 배우로일하며 J.W. 앤더슨, 발렌시아가 등과 일한 이수혁, 중국에서 드라마 촬영을 시작한 꽃미남 김태환, 프라다 쇼에 섰던 김원중, 불혹에 아르마니, 에트로 등 밀라노 디자이너들의 총애를 받은 김성현 등등.” 그다음 2.5세대로 해외파 노마 한, 제이 유, 나대혁, 김상우가 있다. “그들은 각각 뉴욕과 런던에서 지내며 누구보다 글로벌한 사고와 독특하다 하기에도 모자랄 특별한 외모로 맹활약 중입니다. 그리고 지금 20~30여 명의 모델들이 3세대로 각광받고 있죠.”
이건 국제적으로 한국 모델의 가치 상승인 동시에, 한국 남자들이지닌 세련된 패션 감도의 현재 지표다. 사실 지금 한국에서 남자 모델의 인기는 아이돌 그룹 뺨칠 정도다. 팬들에게 아이돌 멤버들이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라면, 남자 모델들은 손대면 닿을 듯한 거리에 있는 우월한 종족. 그래서 서울 패션 위크 때가 되면 쇼장 주위는 아이돌 콘서트장 저리 가라 할 만큼 소년 소녀 팬들이 몰린다. 그건 한국만의 특수 상황. 또 지금 한국에서 남자 모델이 되려고 에이전시에 등록한 소년과 청년들은 1,000명이 넘는다(작년부터 여자 모델을 추월한 수치). “연예인이 되고 싶은 요즘 젊은 남자애들은 그 첫 관문이 모델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차승원은 둘째치고라도 조인성, 소지섭, 현빈 삼인조는 물론, 주지훈, 김우빈, 성준 등의 모델 시절 활약상을 훤히 꿰뚫고 있죠.” 모델이나 연예 기획사 사람들은 패션에 관해 한국보다 앞선 일본에도 이런 현상은 드물다고 전한다. “그들은 모델과 연예계가 분리되고 구분돼 있어요. 그러나 한국은 ‘모델에서 배우로’라는 공식이 생겼을 정도입니다. 연기보다 비주얼을 중요시하는 풍조도 한몫했고요.” 그래서 남자 모델들 가운데 배우를 발굴해온 드라마 작가도 꽤 있다고 어느 모델 에이전트는 전한다. “훤칠하고 잘생긴 유전자와 세련된 태도를 가공하면 스타를 만들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해외 컬렉션에 선다는 게 한국 모델들에겐 왜 그토록 중요할까? 패션 전문가들은 서울 디자이너의 한계나 중국의 패션 시장 잠식 앞에서 모델이야 말로 글로벌 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는 매력적인 패션 콘텐츠라고 전한다. “아시아인 가운데 월등히 좋은 외모를 지닌 청년들이 해외 컬렉션에 대거 입성해 한국 패션의 엔진이 되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남자 모델들에겐 새로운 기회의 장이죠. 모델에서 연예인으로 가는 1세대 방식에 해외 활동이 가능한 글로벌 이미지가 더해져 좀더 현대적인 셀러브리티로 완성되고있어요.” 최근엔 연예 기획사에 소속된 모델 출신 연기자들에게 모델 활동을 제약하던 부분도 사라지고 있다고 이현범은 전한다. 그러면서 해외 패션 위크 취재 때 겪은 아이러니를 슬그머니 언급한다. “해외 패션 위크에 가면 기자들의 자리는 자꾸 뒤로 밀리는데, 모델들은 더 앞으로 나오고 있어요! 그것만으로도 한국 패션에 미치는 긍정적 의미는 있죠.”
- 에디터
- 신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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