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순위 아이템이 된 ‘블로퍼’
반 토막 난 기형적 신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 만들다 만 신발 같다고? 한 번도 필요하다고 느끼지 못했지만, 어느새 0순위 아이템이 된 ‘블로퍼’에 대해.
매 시즌 트렌드에 휘둘리지 않고 그들만의 리그를 개척하고 있는 더 로우의 메리 케이트와 애슐리 올슨 자매가 2년간 꾸준히 ‘밀고’ 있는 아이템은? 앞쪽 절반은 로퍼, 뒤쪽 절반은 슬리퍼의 형상을 한 ‘백리스 로퍼(Backless Loafer)’. 2014년 봄, 이탈리아 수제화 브랜드 ‘엔초 보나페(Enzo Bonafe)’와 협업을 통해 처음 탄생했을 때, 이 반쪽자리 신발은 꽤 어색해 보였다. 클래식한 가죽 로퍼와 침실에서 신을 법한 슬리퍼는 절대 어울리는 조합이 아니었으니까. 같은 해, 올슨 자매는 CFDA ‘올해의 액세서리 디자이너 상’을 수상했지만, 몇몇 패션 골수팬을 제외하고는 두 사람이 만든 독특한 신발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몇 시즌 동안 묵묵히 백리스 로퍼를 선보이고 있는 올슨 자매의 외로운 싸움에 드디어 든든하고 강력한 지원군이 나타났다. 바로 구찌의 알레산드로 미켈레다. 지난 2월 밀라노에서 공개된 그의 데뷔 쇼에서 가장 화제가 된 건 안쪽에 캥거루털을 더한 백리스 로퍼였다(앞쪽은 분명 홀스빗 로퍼지만 뒷부분은 뻥 뚫린 디자인). 미국 ‘보그닷컴’의 모든 에디터들은 이번 시즌 ‘머스트 해브 아이템’으로 이 신발을 꼽았고, 마크 제이콥스부터 케이티 그랜드까지 누구보다 먼저 ‘득템’한 패피들은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인증샷’을 올려 부러움을 샀다. 알렉사 청을 비롯 2016 S/S 패션쇼를 찾은 패피들이 가장 많이 신고 있었던 것 역시 이 신발이다.
많은 사람들이 백리스 로퍼의 존재에 관심을 보이자 얼마 전 정식 명칭이 생겼다(지금 이 순간에도 신조어가 생겨나는 곳이 패션계다). 이름하여 ‘블로퍼(Bloafer, Backless와 Loafer의 합성어)’. 엄밀히 말하자면 아빠의 사무실용 신발로 활용되던, 일명 ‘정장 슬리퍼’, 혹은 ‘구두 슬리퍼’와 별다를 게 없는 디자인이지만, ‘블로퍼’라 불리는 순간, 패션계의 ‘잇 아이템’으로 재탄생했다. 지난가을 ‘Tibi’의 에이미 스밀로빅은 1~2cm쯤 되는 나무 굽을 더해 앞코가 뾰족한 블로퍼를 여러 컬러로 선보였는데 공식 웹사이트는 물론 네타포르테 등 여러 쇼핑 사이트에서 눈 깜짝할 사이에 ‘완판’을 기록했다. 디자이너 자신조차 이 신발이 재생산에 들어가고 선주문에 선예약까지 받게 될 줄은 예상치 못 했을 것이다. 또 스웨이드와 매끈한 가죽 소재의 컬러 블록이 돋보이는 랙앤본, 화려한 뱀피를 더한 프렌치 커넥션, 다채로운 색상을 선보인 로베르 끌레제리 등등, 정말이지 지금 당장 사서 신을 수 있는 블로퍼는 한두 켤레가 아니다.
패션계의 수많은 경우처럼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질 유행 같다고? 2016년 봄 컬렉션에서도 심심찮게 등장했으니 걱정 마시길. 구찌 가을 컬렉션의 모피 트리밍 블로퍼는 이번 봄 컬렉션에도 등장했고, 이번 시즌부터 파리에서 쇼를 발표한 더 로우에서는 자연스럽게 주름 잡힌 실크 버전을 볼 수 있었다. 이 밖에도 실내용 슬리퍼처럼 더없이 편안한 발렌시아가, 메탈 장식을 더한 프로엔자 스쿨러, 묵직한 플랫폼과 만난 보테가 베네타 등등. 그런가 하면 몇몇 디자이너의 또 다른 아이디어는 평범한 로퍼의 뒤꿈치 부분을 접어서 블로퍼처럼 신는 것이다(모로코 전통 신발에서 명칭을 따와 ‘바부슈(Babouche)’라 불린다). 부모님 눈에 띄면 멀쩡한 신발을 왜 일그러뜨리느냐며 그야말로 ‘등짝 스매싱’이 날아올 법하지만, 구찌부터 아크네 스튜디오, 빅토리아 베컴까지, 무심하게 구겨 신은 로퍼는 더없이 쿨해 보인다.
그렇다면 이 요상하면서도 끝내주게 멋진 신발을 어떤 옷에 매치하는 것이 좋을까? 우아한 미디 스커트부터 각선미를 드러내는 스키니 진, 지난 시즌부터 다시 인기를 끄는 복고풍 플레어 팬츠, 날렵하게 재단한 시가렛 팬츠까지, 웬만한 하의와 무난하게 어울린다는 사실이 블로퍼의 치명적 장점이다(<그녀는 예뻤다>에서 고준희가 즐겨 입으며 대중에게 꽤 친숙해진 ‘파자마 룩’과도 안성맞춤). 다만 어떤 소재, 어떤 실루엣을 선택하든 발목이 드러나는 크롭트 버전을 입는 게 관건이다. 발뒤꿈치를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블로퍼만의 특징인 만큼, 짤막한 하의를 매치해 이왕이면 확실하게 드러내는 게 멋지다. 그러나 블로퍼를 신을 때 꼭 필요한 건 따로 있다. 엄동설한에도 맨발로 돌아다닐 용기! 블로퍼는 맨발로 신을 때 가장 근사하니까.
- 에디터
- 임승은
- 포토그래퍼
- JAMES COCHRANE, INDIGITAL, COURTESY 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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