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other Vogue – ④ 편혜영
지난 20년 동안 숱한 아티스트를 뮤즈로 삼아온 〈보그〉는 이달 ‘Another VOGUE’라는 테마 아래 뮤즈에게 주체가 되어달라고 요청했다. 아티스트 20팀에게 ‘보그’ ‘패션’ ‘트렌드’ ‘서울’ ‘20’이라는 다섯 가지 키워드와 함께 작품으로 지면을 가득 채워달라는 러브콜을 보냈다. 기꺼이 〈보그〉의 컨트리뷰팅 에디터가 된 아티스트 20팀은 각자의 방식으로 키워드를 해석했고, 촉감도 모양도 향기도 다른 스무 가지 작품을 보내왔다. ▷ ④ 편혜영
편혜영, Pyun Hye Young – 메리 고 어라운드
8월 이후, 그를 잊기로 했어. 그것은 간단해 보였어. 나는 사랑은 원했지만 나 자신을 잃고 싶지는 않았거든. 그는 고집이 셌어. 나도 마찬가지였지.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는 사랑을 베푸는 기분으로 결국 모든 것을 그의 뜻에 따랐어. 내가 원하는 걸 말하지 않게 된 거야. 그러자 차츰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모르게 되었지. 나쁜 선택을 했어. 그에게 자주 화가 났고,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자주 우울해졌거든. 어느 날은 사소한 걸 트집 잡아 나를 배려하지 않는다고 그를 몰아세웠어. 그는 어리둥절해하다가 이유도 모른 채 일단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 사과했어. 물론 얼마 후에는 내가 다시 사과해야만 했지. 그런 일이 자주 반복되었어. 나도 그랬지만 무엇보다 그가 좀 지쳐 보였어.
그래도 우리는 예정대로 함께 여행을 떠났어. 특별한 계획은 없었지. 공원이 유명한 도시였기 때문에 몇 곳을 둘러보자는 게 유일한 계획이었어. 그는 여행이 끝난 후 공원 디자인 프로젝트에 합류하기로 되어 있었거든. 사실 그는 공원을 좋아하지 않았어. 무용하고 심지어 게으른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라고 생각했어. 나는 그런 일들을 좋아했기 때문에 공원이라면 언제나 환영이었지만, 여름의 공원은 별로였어. 그늘에 인색하잖아. 사람들은 가로등 아래 모이는 벌레처럼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 모여 있을 거잖아. 그래도 군말 없이 그가 정한 목적지를 따라다녔어. 그가 언제라도 여행을 관두자고 할까 봐 겁이 났어.
낮에는 두어 군데 공원에 가고, 밤이면 숙소 근처의 바에서 차가운 맥주를 마셨어. 숙소에 들어가면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침대에 엎드려 누워 책을 읽었어. 아파트를 빌렸기 때문에 집주인의 책을 마음껏 꺼내 읽을 수 있었어. 그는 날마다 조금씩 외국어로 된 <정글 북>을 읽었고, 나는 발행된 지 오래된 <보그>를 읽었어. 죄다 몇 개월 전의 잡지들이었는데, 어느 것을 읽어도 좋았어. 시간과 계절과 국적이 느껴지지 않는 사진들을 보고 있자니, 덩달아 내가 어디에 있는지 의아한 기분이 들었어. 그게 좋았어. 현재가 아니라 미래나 과거의 어느 때에 속한 기분 말이야. 낯선 포즈와 옷, 액세서리로 무장한 모델들이 나를 다른 곳으로 데려가는 것 같았어. 게다가 그들은 언제 봐도 그저 모델 자신처럼 보였어. 디자이너와 브랜드, 패션과 액세서리가 아니라 모델이 먼저 보인다는 게 신기했지. 언제나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 그건 무척 어려운 거잖아. 그런데도 그들은 그렇게 보였어. 조금 부러웠지.
여름밤은 무척 길었기 때문에 때로 그와 함께 공원을 스케치하기도 했어. 그의 말에 의하면 공원을 디자인하는 일은 간단했어. 우선 대략적인 동그라미를 도화지에 가득 차게 그려. 반듯하게 그릴 필요는 없어. 그런 공원은 없으니까. 공원은 건축물이 아니라 틈이야. 그가 말했어. 여분의 공간에 만든다는 뜻이었어. 그렇게 생각하면 좀 시시하다고 그가 덧붙였어. 천만에. 나는 건물보다 공원을 좋아해. 그런 사람들이 훨씬 많을걸. 그는 내 말을 잘 듣지 않았어. 근사하고 멋진 건물을 디자인하고 싶은데 기껏 동네 공원이라는 것에 풀 죽은 모습이었어.
제법 반듯하게 동그라미를 그리고 나면 거기에 시설물을 그려 넣으면 되었어. 시설물? 내가 되물으니 그는 공원에 있었으면 하는 걸 아무거나 그리라고 했어. 그러고는 생각할 시간을 준다는 듯 잠깐 나를 쳐다봤어. 나는 물었어. 공원을 디자인할 때 가장 중요한 건 뭔데? 원래 질문을 하는 사람은 나름의 대답을 짐작하고 있잖아. 주변 건물들과의 조화나 시설물들 간의 균형. 그게 내가 생각한 답이었어. 그는 날 힐끔 쳐다보고는 간단히 대답했어. 당연히 예산이지. 나는 당황해서 되물었어. 돈이라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어. 그것 말고 또 뭐가 있겠느냐는 듯이.
공원에 대해 내가 원하는 건 딱 하나였어. 예산과 상관없이 회전목마만 있으면 그만이야. 그걸 어떻게 그려 넣어야 할지 모르겠어서 주춤거리고 있는데, 그가 말했어. 보통 사람들이 공원 하면 제일 많이 떠올리는 건 분수야. 어째서 분수? 나는 되물었어. 분수에 매혹을 느껴본 적이 한 번도 없거든.
그는 대답했어. 분수는 일단 싸고, 공원을 다이내믹하게 만들어. 공원은 무척 정적인 공간이잖아. 분수는 거기에 율동감을 만들어주거든. 사람들이 드나들면 동적인 느낌이 나지만 텅 빈 공원에서 그런 느낌을 받기는 힘들잖아. 그렇다고 트레비 분수 같은 건 곤란해. 물줄기 아래 석상 조각을 배치하는 방식은 이미 구식이야. 뭐든 심플해야 해. 물 기둥의 높이나 물이 뿜어져 나오는 속도, 색상으로 율동감을 주면 돼. 사람들은 패션만 트렌드에 민감하다고 여기지만 공간은 더 예민해.
아무래도 공원엔 회전목마, 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어서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그려 넣지 않았어. 요샌 지압용 빨판이나 간단한 운동 기구를 설치하기도 해. 내가 머뭇거리자 그가 재촉하듯 얘기해줬어. 내가 그리고 싶은 게 뭔지 물어보지는 않고 왜 남들이 설치하는 것만 얘기해줄까, 생각했어. 하긴, 그는 언제나 나를 궁금해하지 않았어.
상상 속에서 나는 조금은 낡았지만 단단해 보이는 목마들이 위아래로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천천히 한 바퀴 도는 회전목마를 그려 넣었어. 그는 힐끔 내 스케치북을 보았지만, 왜 아무것도 그려 넣지 않았는지 묻지 않았어. 아마 또 별생각 없군, 이렇게 생각한 모양이야. 그래도 나는 이런 일을 좋아했어. 그가 하는 일에 관한 얘기를 듣고 서툴지만 함께 해보는 것 말이야.
나는 공원 한가운데 투명한 회전목마를 설치하고 -실은 그리지 않고- 회전목마를 중심으로 여러 갈래의 길을 그려 넣었어. 길은 제각기 다른 곳으로 향하지. 회전목마에서 내린 후에는 원하는 곳 어디라도 갈 수 있는 거야. 길 양쪽으로는 나무가 심어져 있어. 봄에는 역시 벚나무가, 여름에는 노란 꽃이 피는 모감주나무와 꽃이 화사한 불두화가, 가을에는 단풍나무가 제격이지.
그를 따라다니는 동안 내가 상상하던 공원은 한 번도 만나지 못했지. 회전목마가 한가운데에 놓인 공원 말이야. 만약 회전목마를 만난다면 그는 탈까. 그는 천천히 가거나 가만히 앉아 있는 걸 좋아하지 않잖아. 그런 일을 게으르거나 시간을 낭비하는 거라고 생각하지. 어디로든 목적지를 두고 걸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바로 그야. 매 순간 허투루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놀리거나 비아냥거리기도 쉽지 않았지. 그는 성실하고 꾸준했거든. 시간이 생기면 책을 읽거나 디자인을 위한 그림을 그리거나 음식을 먹거나 회의를 하거나 회사 일을 하거나 친구들을 만났어.
그날 우리는 두 군데 공원에 갔어. 처음 간 공원은 한쪽 끝에 거대한 미술관이 있었어. 나는 거기 보고 싶은 그림이 있었는데, 다행히도 그 역시 그렇다고 했어. 우리는 미술관에 갔어. 거긴 무척 넓어서, 3층에 달하는 미술관을 샅샅이 보고 나왔을 때는 상당히 지쳐 있었어. 그래서 숙소 쪽으로 걸었어. 우선 쉬고 싶었거든.
가는 길에 뜻하지 않게 작은 공원을 만났어.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공원이어서 그는 좀 반가워했고 나는 실망했어. 그는 멈추지 않고 공원을 둘러보기 위해 걸었어. 나는 무척 힘들었지만, 그래도 그의 손을 잡았어.
공원 중앙을 향해 걷다가 나는 낮게 탄성을 내질렀어. 거기에 회전목마가 있었어. 잎이 무성한 느티나무들이 회전목마를 둘러싸고 있었어. 목마는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지. 두살배기 아이가 타도 끄떡없는 속도로 말이야. 아직 어두워지기 전인데도 천장에 달린 전구가 반짝거렸어. 오래되었지만 튼튼해 보이는 목마들이 긴 장대에 매달려 규칙적으로 위아래를 오가며 천천히 도는 게 너무 근사했어. 나는 그걸 타겠다고 했어. 기다리는 어린아이들이 제법 많았기 때문에 그는 다음에 타는 건 어떻겠느냐고 대꾸했어. 나는 기다리겠다고 했어. 그는 대꾸하지 않았어. 나는 그쯤에서 그가 눈에 띄게 말수가 줄어들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어야 했어.
묵묵히 삼십 분쯤 기다린 후에 회전목마를 탈 수 있었어. 나 혼자 탔어. 한 바퀴 돌아 그가 있는 곳으로 왔을 때 나는 마구 손을 흔들었어. 그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았어. 나는 목마를 지탱하는 기둥을 꼭 잡았어. 다시 한 바퀴를 돌았을 때는 그가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았어. 사방으로 고개를 돌려 그를 찾았지. 저 앞쪽에, 회전목마를 등지고 난 산책로 사이를 걸어가는 그가 보였어. 그는 천천히 공원을 벗어나고 있었어. 아니, 나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어쩌면 무료함을 이기지 못해 그저 산책을 하는 것일 수도 있었어. 그런데 다시 한 바퀴 돌아 그 자리로 왔을 때 그는 이미 산책로에서도 보이지 않았어.
그가 완전히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자 왠지 마음이 편안해졌어. 그가 보이지 않을까 봐, 사라져버릴까 봐 마음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게 오히려 나를 편하게 한 거야. 회전목마가 멈춘 후, 나는 다시 표를 끊었어. 그리고 얼마간 기다렸다가 또 탔어. 그에게 나를 기다리지 않고 충분히 멀리 갈 만한 시간을 주고 싶었어.
두 번째 탔을 때는 그를 찾는 대신 내가 가고 싶은 길을 골랐지. 어느 쪽 산책로의 나무들이 곧고 짙푸르게 자랐는지 살폈지. 그는 어디로 갔을까. 그리고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회전목마는 오르락내리락 돌지만 언제나 그 자리를 빙글빙글 맴돌지. 앞으로도 뒤로도 가지 않고 말이야. 서둘 필요도 없고 초조할 필요도 없는, 산책의 리듬과 유사하게 나를 조금 들어 올렸다가 내려놓았어.
아무리 좋아도 언젠가는 멈추기 마련이지. 드디어 회전목마가 멈췄고, 나는 천천히 목마에서 내려와 그가 아까 걸어간 것과 반대쪽 산책로로 갔어. 어딘가에서 그가 나를 보고 있지 않을까 하고도 생각했어. 아니었어. 그에게서 전화가 걸려오지 않았어. 문자메시지도 오지 않았어. 내가 가려는 길은 나무 그늘에 가려져 끝이 보이지 않았고 지명도 쓰여 있지 않았어. 길은 넓었고 울창한 나뭇잎 때문에 조금 시원했고 사람은 많지 않아 고적했어. 그게 나를 편안하게 했어.
천천히 걸어서 숙소에 도착했지만 그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어. 나는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아직 보지 않은 <보그>를 다시 펼쳐 천천히 들여다봤어. 언제나 자기 자신처럼 보이는 모델들. 나는 그들을 뚫어져라 보다가 그가 두고 간 스케치북을 열어보기로 했어. 그는 결코 먼저 스케치북을 보여주지 않았어. 공원 스케치로 가득 찬 스케치북에는 회전목마가 있는 공원이 하나도 없었어. 분수가 있고 몇 종의 놀이 기구가 있고, 생태 학습장이 있고, 작은 습지가 있는 공원이 있었어. 아마 그는 언제나 예산에 맞는 일을 성실하고 꾸준히 해나갈 테지.
나는 천천히 스케치북을 덮고 짐을 꾸렸어. 신기하게도 여행 기간 중 조금도 짐이 늘지 않았어. 다행이었어. 거리에는 해가 아직도 남아 있었어. 그래도 밤이고 이 도시에 아는 사람은 없지만, 곳곳에 게스트하우스가 있고 그런 곳은 값도 싸다는 걸 알고 있어서인지, 하나도 겁이 나지 않았어. 나는 결국 원하는 공원을 만났잖아. 내가 상상하는 것은 세상 어딘가에 있다는 걸 확인했잖아. 걷다 보면 언젠가는 반드시 원하는 게 나타난다는 걸 알게 되었고 말이야.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상상은 그가 상상하는 것과 많이 다르다는 것도 깨달았지.
다음 날 우리는 만났어. 그는 사과하지 않았고 나도 사과하지 않았어. 우리는 예의 바르게 웃고 잠깐 얘기를 나눴어. 일정을 바꾸지 않았기 때문에 돌아오는 비행기도 함께 탔어. 하지만 그게 다였어.
돌아와서는 그를 만날 수 없었어. 그는 곧장 공원 프로젝트에 합류했고 그 일은 얼마간 그를 무척 바쁘게 할 것이었어. 나는 언젠가 그가 디자인한, 내가 상상한 것과 전혀 다른 공원을 가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어. 어쩐지 이미 가본 것 같고 여러 번 다녀본 것 같은 공원 말이야. 그곳에 결코 회전목마는 없겠지. 세상 곳곳으로 향한, 나무 그늘로 가득한 산책로도 없겠지.
아직 8월은 오지 않았어. 하지만 곧 올 거야. 시간은 언제나 술술 가버리곤 하니까. 반드시 8월이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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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
- 조소현
- 글
- 편혜영
- 일러스트레이션
- 조성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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