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꾸뛰르 다이어리 – ② 꾸뛰르 주간 둘째 날
파리 오뜨 꾸뛰르를 취재하기 위해 오랜만에 파리에 왔다. 익숙한 호텔 풍경과 쇼장의 열기, 익숙하지 않은 파리의 여름과 달라진 중국인들의 위상, 프레타 포르테와는 다른 꾸뛰르 쇼의 사소한 풍경들… 한여름 파리 꾸뛰르 주간엔 어떤 일들이 벌어졌나? ▷ ② 꾸뛰르 주간 둘째 날
7월 4일, 꾸뛰르 주간 둘째 날
10시 첫 쇼는 스키아파렐리 쇼. 발렌티노 출신 베르트랑 기용의 꾸뛰르 쇼다. 방돔 광장에 위치한 호텔 데브레 입구는 온통 핑크색! 안으로 들어서니 무대 전면과 바닥은 색색의 마름모꼴 프린트가 수채화 컬러로 칠해졌고, 투명 아크릴 의자 위엔 화사한 나비들이 인쇄된 프레스 키트가 놓여 있었다.
엘자 스키아파렐리의 예술적 영감이 발렌티노 하우스 출신 디자이너와 어떻게 만날까? 흑인 여자 옆얼굴과 눈동자, 입술 등 스키아파렐리식 금색 모티브들이 검정 수트와 드레스에 장식되더니 이내 해학적인 동물 모티브 자카드 드레스와 코트로 이어졌다. 중간중간 해와 달, 여자 얼굴이 피카소의 입체적 그림처럼 들어간 드레스들도 등장했고, 다시 풍성한 나비 프린트 드레스와 별자리와 서커스, 동물 프린트 드레스들로 이어졌다. 서커스 피에로와 동물들을 스팽글로 장식한 검정 수트, 나비와 별과 새와 서커스 동물들이 총출동한 검정 드레스, 스팽글 극락조 드레스도 대단히 공들였지만, 플리츠 드레스들도 아름다웠다.
엘자 여사의 1938년 서커스 쇼에서 영감을 받은 쇼. 하지만 발렌티노 꾸뛰르의 상징적 모티브들이 슬쩍 등장한 쇼. 순간 발렌티노의 피엘파올로 피촐리가 내 앞을 휙 스쳐 지나갔다. 스태프였던 기용의 쇼를 보러 온 것이다. 그는 과연 어떤 코멘트를 할까? 피촐리의 평가가 어떻든 결과는 훌륭했다. 완벽한 테일러링과 수공예의 절정! 스키아파렐리는 꾸뛰르의 본질을 제대로 보여줬고, 그 옷들은 전 세계 부호들의 사랑을 톡톡히 받을 것이다.
12시 두 번째 아이리스 반 헤르펜의 ‘세이자쿠(Seijaku)’ 쇼는 캣워크 쇼가 아닌 인상적인 퍼포먼스로 진행됐다. 일본 사운드 아티스트 가즈야 나가야의 젠 보울(Zen Bowl) 공연(놋그릇들을 바닥에 죽 늘어놓고 쇠막대기로 건드려 소리를 내는 연주)과 자욱한 연기와 어울린 새벽 여명 같은 빛. 그 효과적인 장치 속에서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예언 소녀들을 떠올리는 10명의 모델들은 꼿꼿이 선 채 두 팔만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디자이너가 그간 선보인 테크니컬하고 미래지향적 룩의 연결 선상에서 봐도 드레스들은 혁신적이도록 창의적이고 아름다웠다. 액체 실리콘에 하나하나 공기를 주입해 만든 공기 방울 드레스, 갑각류 이미지의 필름 코팅 3D 플리츠 드레스, 머리카락보다 훨씬 가는 실로 짠 플리츠 오간자 드레스… 딱 10벌밖에 안 되지만 하나하나 너무나 아름다운 드레스들이었다.
5시 오늘 네 번째 쇼는 파리 꾸뛰르의 지존, 디올이다. 혜성처럼 떠오른 꾸뛰리에 라프 시몬스가 너무 많은 일 더미에 떠밀려 디올의 수장 자리를 포기한 후 디올 하우스는 발렌티노 하우스처럼 스태프 출신의 루시 마이어와 세르주 루피외에게 그 자리를 맡겼다. 애비뉴 몽테뉴에서 열린 그들의 첫 꾸뛰르는 어떤 모습일까?
클래식 주자들의 현악 3중주 연주에 맞춰 쇼가 시작됐다. 검정과 흰색으로 통일된 얌전하고 예쁜 쇼. 아주 많은 검정 드레스와 아이보리색 드레스, 아래위가 흑백으로 나뉜 수트들이 등장했고, 변형된 뉴 룩과 바 재킷도 등장했다. 무엇보다 온갖 스커트 종류가 실루엣과 소재를 바꿔가며 등장한 것이 인상적이었고, 나풀대는 스커트 자락 밑으로 모델들의 발을 행복하게 만든 납작한 스트랩 샌들도 눈길을 끌었다. 후반부엔 금빛 스팽글이 장식된 검정 재킷이나 드레스들이 많았는데 그것도 요란하지 않았다.
옷을 고르러 온 젊은 디올 고객이 아닌, 냉정한 프레스의 입장에서 쇼는 밋밋하고 평범했다. 모델들의 워킹이 끝난 후 인사하러 나온 루시와 루피외는 분명 앞날이 기대되는 선남선녀였지만 막강한 디올 하우스를 끌고 갈 힘은 없었다. 패션계에선 발렌티노의 여성 디자이너가 디올 하우스의 새로운 수장이 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 회전문 신드롬은 꾸뛰르라고 예외는 아니다. 갈리아노의 화려하고 극적인 디올 시대를 똑똑히 목격한 나로서는 그 시절의 디올 꾸뛰르가 그리울 뿐. 한여름 밤 꿈처럼 환상적인 디올 말이다.
7시 30분 지암바티스타 발리 쇼장. 젊은 남자 바이올린 연주자의 미니 콘서트 직후 쇼가 시작됐다. 퍼프 소매가 달린 프릴과 레이스 드레스의 나날이었다. 드라마틱한 헴라인의 레이스 드레스, 트레인이 길게 끌리는 퍼프 소매 엠파이어 드레스, 크리스털 장식 시폰 드레스, 색색의 풍성한 튤 드레스들까지. 예전보다 훨씬 예쁜 프린세스 룩이었다. 저렇게 공주 같은 옷을 누가 입을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 비슷한 옷을 입고 나타난 고객들이 쇼장엔 차고 넘쳤으므로. 특히 젊고 부티 나고 예쁜 중국 고객들은 앞으로 더 늘어날 것이므로.
- 에디터
- 이명희 (두산매거진 에디토리얼 디렉터)
- 포토그래퍼
- JAMES COCHRANE, LEE MYUNG HEE, INDIGIT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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