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뇌르 정신
에르메스가 전시 〈Wanderland〉를 통해 산책법을 제안한다. 아무런 목적 없이 지팡이를 휘휘 돌리며 느긋하게 걸으면 된다. 19세기로부터 소환된 플라뇌르 산책법이다.
외국어로 된 자료를 읽다 보면 우리 말로는 도저히 대체할 수 없는 단어가 종종 있다. 에르메스가 11월 19일부터 12월 11일까지 한남동 디뮤지엄에서 선보이는 전시 <Wanderland(파리지앵의 산책)>를 관통하는 단어 ‘플라뇌르(flâneur)’도 그렇다.
프랑스어 사전은 플라뇌르를 ‘한가롭게 거니는 사람’으로, 영어 사전은 ‘게으름뱅이’ ‘놈팡이’ ‘한량’이라 해석하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긍정적으로, 영어권에서는 부정적인 어감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로운데 이는 결국 문화의 차이다. 장 자크 루소는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에서 행복은 타인과 연결되어 있되 가질 수 있는 고독, 평화로운 삶, 자연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색으로부터 온다고 했다. 이는 게으름과 몽상의 기쁨에 대한 찬양이었다. 1863년 샤를 보들레르는 <르 피가로>에서 “플라뇌르는 도시를 경험하기 위해 도시를 걸어 다니는 자”라고 묘사했고, 이후 발터 벤야민이 플라뇌르의 여러 유형을 소개하면서 이 단어는 아티스트들에게 영감의 원천으로 자리 잡았다.
에르메스 아티스틱 디렉터 피에르 알렉시 뒤마는 장 자크 루소의 정신을 현재로 소환했다. “대도시 거리를 걷다 보면, 아무 목적 없이 어슬렁거리는 아트가 실종된 것 같다. 카페나 벤치에 앉아 있는 게 제일 멋지다. 모두가 몹시 바쁠 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시간이 가는 것만 보고 있는 것. 이것이 오늘날 럭셔리다.” 근면이 선이고 게으름이 악이었던 우리 사회에서 플라뇌르를 대체할 단어가 없는 건 너무도 당연하다. 생업에 쫓기지 않고 마음 내킬 때 한가하게 도시를 산책할 수 있는 사람은 시상을 떠올리며 달빛 아래 산책을 즐기던 선비들뿐일 것이다.
에르메스는 플라뇌르의 산책길 파리를 통째로 전시장으로 옮겨온다. 광장, 카페, 쇼윈도, 거리 등 산책하며 들를 수 있는 공간으로 방 11개를 구성했다. 방 구석구석에는 예상치 못한 것을 발견하는 즐거움이 가득하다. 상징성이 높은 요소도 있고 그냥 가볍고 재미있는 요소도 있다. 가로등은 자연스럽게 거꾸로 설치되어 있고, 조용한 줄만 알았던 응접실 찻잔 세트는 갑자기 빙글빙글 돌아가고, 카페 커피 잔 속에서 춤추고 있는 발레리나를 발견할 수 있는 식이다. 플라뇌르의 필수품인 지팡이를 주제로 한 방에서는 지팡이가 마법의 도구처럼 등장하는 영상이 방영된다.
이번 전시의 흥미로운 지점은 디지털 장치가 산책의 즐거움에 주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파리의 고저택 입구에서 갑자기 은하수가 쏟아지고, 우산에서 흘러서 생긴 물웅덩이에 하늘이 비친다. 카페에서 발견한 물병 속을 들여다보면 사람의 눈이 나를 응시하기도 하고 작은 에펠탑이 갑자기 거울 밖으로 튀어나오기도 한다. 에르메스가 여러 명의 작가들과 함께 작업하면서 의도한 부분이다. 큐레이터 브뤼노 고디숑은 “이번 전시에 새로운 기술을 사용했는데, 전시 마지막 부분의 배경은 식스시그마 매핑이라는 장치를 사용했고, 그 장치는 초대 작가인 니콜라 투르트 (Nicolas Tourte)의 시적인 설치물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라고 부연 설명했다.
서울 전시는 런던 사치 갤러리, 파리 센 강 포르 드 솔페리노, 두바이 분수대 선착장에 이은 네 번째 전시다. 주제처럼 전시 자체도 지구촌을 산책하는 셈인데, 에르메스는 전시를 해당 도시에 맞추는 기획을 더했다. 큐레이터 브뤼노 고디숑은 하나의 방을 비워두고 각 지역의 예술가가 그가 구상하는 파리의 모습으로 방을 채우고 있다고 설명한다. “전시가 열리는 나라의 에르메스 팀과 함께 모든 기획 단계를 긴밀하게 상의했습니다. 시노그래퍼 위베르 르 갈과 저 그리고 아티스틱 디렉터가 다 함께 작가들의 포트폴리오를 보고 한 명의 작가를 선택합니다. 런던에서는 셉트 (Cept), 파리에서는 2SHY 그리고 두바이에서는 칼리드 메자이나(Khalid Mezaina)가 방을 채웠습니다. 서울 전시에는 제이플로우(Jayflow) 작가가 선정되어 현재 작업 중입니다. 그의 작업을 지금 당장 공개할 수는 없지만, 파리의 지하철을 주제로 작업하고 있다는 힌트만 살짝 드릴게요.”
이번 전시에서 감상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주요한 지점은 에밀 에르메스의 수집품이다. 에밀 에르미스는 창립자 티에리 에르메스의 손자로 1900년대 초반 옷, 가방, 하물며 실크 스카프에 승마 레퍼토리를 적용해 크리에이티브한 변화를 일궈낸 인물이다. 그는 엄청난 열정을 가진 수집가이기도 했는데 말과 관련된 물건이라면 어디든 찾아가 무엇이든 모았다고 전해진다. 12세에 처음 우산을 구입하고 수집에 집착하기 시작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에르메스는 평생 그가 수집한 소품, 그림, 책 등을 모아 1937년 박물관을 열었고, 이번 전시에는 ‘승마’와 ‘산책’과 관련된 에밀 에르메스의 ‘이상한’ 아카이브를 만나볼 수 있다. 큐레이터 브뤼노 고디숑은 이번 전시를 1년 가까이 준비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 에밀 에르메스 컬렉션의 담당자 메네우 드 바즐레르의 안내로 에밀 에르메스의 소장품을 발견했을 때를 꼽았다.
파리 산책을 앞둔 우리에게 큐레이터 브뤼노 고디숑이 전하고 싶은 말도 다르지 않다. “산책이 당신을 유혹할 만한 경험이 되려면 여유 있고 열린 태도여야 합니다. 세계 어느 곳을 산책하더라도 고정관념을 뛰어넘을 수만 있다면, 플라뇌르의 훌륭한 배경이 될 수 있습니다. 플라뇌르는 여유로운 산책의 움직임, 여기저기 돌아다니기 그리고 산책이 불러일으키는 모든 감정을 포함합니다. 열린 마음으로 전시에 와주세요. 미로를 탐험하는 마음으로 체험해보는 거죠!”
- 에디터
- 조소현
- 포토그래퍼
- COURTESY OF HERMÈ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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