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ong Way To Go
혁오의 첫 정규 앨범 〈23〉이 세상에 나오는 데는 꼬박 2년이 걸렸다. 기다려온 이들에게는 길고 까마득한 기다림이었다. 그리고 오혁 자신이 여기까지 오는 길 또한 그러했다.
VOGUE KOREA(이하 VK) 녹음하러 베를린에 다녀온 후로 처음 만나는 거다.
OH HYUK(이하 OH) 베를린, 좋더라. 그렇지만 매일 정해진 스케줄대로 움직였다. 기상-합주-녹음의 반복. 회사원처럼 산 기분이다. 아침 10시부터 밤 11시까지 매일매일 야근한 거라고나 할까.
VK 구경할 시간도 없었겠다.
OH 컨디션 회복하느라 하루 쉰 날 저녁에 멤버들과 함께 블레스(Bless) 매장에 갔던 게 유일하다. 숙소에서 4분 거리에 매장이 있었다. 쇼핑하면서 매장 스태프에게 우리 소개를 하며 혁오 배지를 줬다. 그런데 그 다음에 우리를 알아보고 연락이 오더라. 이후 블레스 본사에서 제품을 선주문할 수 있게 해줬다. 베를린에서 찍은 사진은 어떤 것 같나?
VK 그런 걸 왜 묻지?
OH <보그>와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정제된 느낌보다는 <Man About Town> 같은, 인디 매거진 느낌이 나니까.
VK 그런 사진도 <보그>에 실을 수 있다. 그 순간을 즐기면서 찍었을 것 같은데.
OH 그렇다. 사진가와 스타일리스트, 나의 취향이 잘 맞아서 재미있었다. 촬영한 동네가 인도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이었는데, 유모차를 끌고 가던 한 부부가 갑자기 내 옆으로 오더니 포즈를 취하기에 같이 사진도 찍었다.
VK 흠, 아쉽게도 그 컷은 들어가지 못했다.
OH 어.(웃음)
VK EP <22> 이후로 정규 앨범 <23>이 나오는 데 꼬박 2년이 걸렸다.
OH 만족할 때까지 작업했다. 아마 들으면 우리가 많이 성장했다는 걸 느낄 수 있을 거다. 우리가 돈 쓰고 애쓴 보람이 있구나라는 걸. 내부 평가로는 음악이 어려워졌다는 평도 있지만, 음악적으로는 굉장히 만족한다. 사운드가 특히 마음에 든다.
VK 베를린에서는 사운드 엔지니어 노르만 니체(Norman Nitzsche)와 동고동락하며 지낸 거 같더라. 그는 당신이 좋아하는 얼렌드 오여 앨범의 믹싱 작업에도 참여했다.
OH 아주 많은 걸 배웠다. 음악에 대한 지식은 물론, 접근 방법에 대해서도.
VK 작년 11월에도 그와 베를린에 있었던 걸로 아는데.
OH 사실 그때는 내가 일방적으로 노르만의 페이스에 휘말렸다. 그의 사운드 자체가 나쁜 건 아니었지만 내가 원하던 게 아니었고, 그의 의견에 반박하기에는 내가 가진 음악에 대한 지식이 충분치 않았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는 내 의견을 완전히 무시했다! 당연히 그의 음악이 아니라 내 음악이니까 그와 싸워야 했다.
VK 싸움의 결말은?
OH 앞서 말한 대로 그의 기에 눌려서 이도 저도 아닌 결과물이 나왔다. 그래서 지난 2월에 현제, 인우, 동건과 함께 재작업을 하러 간 거다. 무리를 이뤄서 든든했고 책임감도 느껴졌다. 아침에 일어나서 멤버들, 엔지니어와 함께 커피 마시고, 담배 피우고, 기분 좋게 녹음을 시작했다. 그러다가도 저녁 식사 후에는 노르만과의 긴장 상태가 반복되곤 했다. 그렇게 이번 앨범이 나올 수 있었다.
VK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노래를 꼽아달라. 사람들은 이번 앨범에도 ‘위잉위잉’ 같은 곡이 있기를 기대할 거다.
OH ‘위잉위잉’ 같은 유의 곡은 단 한 트랙도 없지만 마음속의 ‘위잉위잉’ 같은 건 있다. 애착이 가는 곡 말이다. 타이틀곡 ‘톰보이(Tomboy)’와 ‘지정석’이 가장 마음에 든다. 요즘 음악은 자극적이라서 오래 듣기 힘들다. 외국 음악 차트를 봐도 비슷비슷한, 강하고 자극적인 음악, 엉덩이를 흔드는 노래뿐이다. ‘톰보이’는 이를테면 ‘MSG를 뺀 음악’이고 ‘지정석’은 사이키델릭 록에 가까운 노래다. 가사는 일본인가 중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썼다. “비행기 안이야 / 슬퍼 슬퍼 / 음악은 왜 이리 / 슬퍼 슬퍼 / 바깥보다 실내를 비추우는 / 검은 창가석에 앉아 나는 / 슬퍼.”
VK 비행기를 타고 있는 슬픈 사람의 노래 같다.
OH 일을 하다가도 이유 없이 슬퍼질 때가 있지 않나. 내겐 지난해가 그랬다. 의욕도 없고 재미도 없었다.
VK 그래도 지난해 국내외 활동도 많았고 사람도 많이 만나고 신곡도 간간이 냈다. 특히 <응답하라 1988> OST ‘소녀’는 큰 히트를 쳤다.
OH 간간이 활동하는 게 더 힘들다. 앨범이 늦어진 것에 대한 죄책감도 있었고. 예전에는 팀의 규모도 작고 예산도 적으니까 내가 컨트롤할 수 있었는데, 이번 정규 앨범은 스케일이 커서 나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 너무 많았다. 앨범이 늦어진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내가 해결할 수 있는 거라면 잠을 안 자고라도 어떻게든 해결했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 더욱 무기력해진 기분이었다.
VK LA에서 촬영한 뮤직비디오도 스케일이 크더라.
OH 퀄리티 높은 영상을 만들고 싶었고 소정의 목적은 달성한 거 같다. 리한나, 카니예 웨스트의 뮤직비디오를 맡았던 프로덕션 업체 프리티버드(Prettybird)에게 맡겼다. 우리는 나름 많은 비용을 들였다고 생각했는데, 그들에게 우리는 가난한 인디 가수 수준이었다. 비욘세의 안무 영상 촬영에 10억원이 드니 그럴 만도 하다.
VK 새 앨범에서 ‘Jesus Lived in a Motel Room’이라는 제목이 눈에 띈다.
OH 난 모태 신앙의 크리스천이다. 예수님이 만약 나를 만나러 서울에 오면 어떨까 상상을 해봤다. 예수님이니까, 인터컨티넨탈 같은 고급 호텔에서 자진 않을 거다. 우리 집 근처에 있는 허름한 여관방에 머물겠지. 그래서 예수님이 모텔 방에 있다 이런 의미다. 가스펠에 가까운 곡이라고도 할 수 있다.
VK ‘완리(Wanli万里)’는 중국어로 불렀나?
OH 그렇다. 한국어로는 ‘만리’다. 예전에 중국에서 학교 다닐 때 당나라 시인인 이백, 두보 이런 사람들 시를 배웠다. 중국 시가 가지고 있는 형태와 느낌을 살렸다. 웅장한 베이스음도 넣었다. “전방의 달이 참 기묘하다. 바다 위의 배들은 다 보이지 않는구나 / 어제의 후회는 잊었다 / 오늘의 일도 다 잊었다.” 뭐 이런 내용이다.
VK 중국 팬들에게 반응이 좋을 것 같다.
OH 그렇지만 언제나 사드가 문제다.
VK 이번 앨범도 다양한 아티스트, 친구들과 함께했다.
OH 앨범 커버를 쭉 그려왔던 노상호는 이번 앨범의 아트 디렉팅을 맡았고 다다이즘(한다솜, 김가영, 정다운)은 사진과 동영상을 담당했다. 박광수 작가는 ‘톰보이’의 애니메이션 뮤직비디오를 만들어줬고, 보드게임으로 작업하는 김영수 작가와는 실제로 보드게임을 만들었다. 그래픽 디자이너 김기조가 밴드의 새로운 로고와 심벌 작업을 했고 LA에서 촬영한 뮤직비디오는 김성욱 감독의 작품이다. 앨범에 참여한 작가들은 전부 우리와 함께 성장하고 싶은 사람들이다. 다다이즘처럼 개인적으로 친한 이들도 있지만 공통점은 10년 뒤에 잘될 사람들이라는 거다. 우리도 아직까지 무언가를 이뤘다고 할 순 없으니 10년 뒤에는 어느 지점이나 위치에 도달해야 하는 것처럼, 함께 클 수 있는 작가들과 함께했다.
VK 패션 쪽에서 함께 작업해보고 싶은 사람도 있나?
OH 정말 많다. 언더커버의 준 다카하시, 더 솔로이스트의 타카히로 미야시타, 꼼데가르송 등. 일본 디자이너만 생각해도 이 정도고 서구권으로 넘어가면 훨씬 많다. 주얼리 디자이너 코디 샌더슨(Cody Sanderson)과도 재미있는 걸 기획 중이다. 앨범 발매 시기에는 99%is의 바조우와 협업 제품을 공개할 예정이다.
VK 구체적으로 알려줄 수 있나?
OH 99%is 옷이 일반 대중들이 사기에는 가격대가 높은 편이다. 그래서 부담 없이 살 수 있는 아이템을 계획 중이다. 앨범 이름이 ‘23’이니까 23개 한정 제품을 만들까도 생각 중이고. 내가 협업을 하는 첫 번째 이유는 개인적으로 디자이너를 ‘리스펙트’하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내가 입고 싶은 옷을 만들고 싶어서다. 아이디어와 이미지는 내 머릿속에 있지만 내가 직접 그걸 구현할 순 없으니까.
VK 오혁과 패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아닌가?
OH 앨범만 내면 상관없지만 난 공연을 하고 퍼포먼스를 해야 하는 사람이니 음악과 패션은 같이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음악이 패션보다 좀더 좋은 것도 아니라서 나한텐 똑같이 중요하다.
VK 해외 패션쇼도 가고 싶어 하는 걸로 알고 있다.
OH 가면 재미있을 거 같다. 단순히 초대받은 셀러브리티로 참석하는 건 의미가 없는 거 같긴 하지만 그렇게라도 가고 싶은 쇼가 있었다. 지난 2월 라프 시몬스의 첫 캘빈 클라인 쇼였고 초대장도 받았다.
VK 왜 안 갔나?
OH 베를린에서 녹음 작업 중이었다. 갈지 말지 진심으로 고민했다. 그 대신 보그닷컴에서 런웨이 사진으로 봤다.
VK 시몬스의 쇼에 대한 평가는?
OH 생각보다 무난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내가 역사의 순간을 놓친 게 아닐까 걱정했다.
VK 보고 싶은 또 다른 쇼가 있다면?
OH 베트멍. 할머니도 나오고, 두 명이 나란히 걸어가고 그러더라고. 그들은 아이디어가 샘솟는 것 같다. 무슨 약을 먹기에 저런가 싶을 정도로. 갑자기 웨딩드레스가 나오고, 자유분방한 게 꼭 우리 앨범 같다고 생각했다.
VK 한국에 어떤 브랜드가 생기면 좋을까?
OH 헤리티지 플로스(Heritage Floss) 같은 브랜드. 예전부터 좋아했던 브랜드다. 흔하지만 특별하게 만드는 게 가장 어렵다. 헤리티지 플로스는 역사가 깊은 브랜드는 아니지만 유행을 따르지 않고 나름의 장인 정신도 있다. 혁오밴드가 덜 유명했을 때 협찬해달라고 연락했다가 무시당한 적도 있다. 지금은 친해져서 함께 협업 제품을 만들기도 했다.
VK ‘베리드 얼라이브(Buried Alive)’의 태극기 마크 백팩도 한창 메고 다녔다.
OH 베리드 얼라이브를 만든 스트리트 브랜드 편집숍 휴먼트리(Humantree)가 10년 만에 없어졌다는 기사를 봤다. 기분이 이상하더라. 요즘의 패션 신은 예전만큼 재미있지 않은 것 같다. 옛날에는 보폭 자체가 ‘성큼성큼’이어서 한 발짝 갈 때마다 ‘우와!’라고 외쳤는데, 요즘은 (검지와 중지로 걷는 시늉을 하며) 이런 느낌이다. 뭘 입어야 할지도 모르겠고. 최근엔 영국 브랜드에 관심이 간다. 서구권과 아시아권의 중간 같은 특유의 느낌이 있다.
VK 마틴 로즈(Martin Rose), 키코 코스타디노프(Kiko Kostadinov) 같은 영국 디자이너를 직접 만나기도 했다.
OH 마틴 로즈는 조카가 내 팬이어서 나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 게 신기했다. 수염이 북실북실한 스티븐 만(Stephen Mann)이라는 영국 스타일리스트도 만났는데, 한국에 돌아와서 보니 꽤 유명한 사람이었다. 스트리트 패션계의 원조라고도 평가받더라.
VK 역시 당신은 스트리트 패션을 사랑하는군.
OH 그렇지만 패션 피플이 될 자질은 없는 것 같다.
VK 당신이 생각하는 진정한 패션 피플은 누군가?
OH 지드래곤과 씨엘. 둘은 패션을 진심으로 즐긴다.
VK 그래도 당신은 결국 뮤지션이다. 어떤 뮤지션이 되고 싶나?
OH 처음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혁오의 모토가 있는데, ‘재미있는 걸 멋있게 오래 하기’다. 이미 다음 앨범을 구상 중이다. 주제는 아마도 ‘진실한 사랑과 행복을 찾는 방법’이 될 거다.
VK 이유는?
OH 지금 나에겐 진정한 사랑도, 행복도 없기 때문이다.
VK 수업에 빠지고 홍대 앞 고래다방에서 할 일 없이 죽치던 시절이 그립진 않나?
OH 그 이후의 삶은 내가 늘 ‘최선’이라고 생각한 선택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과거의 선택이 지금을 만들었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재미있긴 하겠지만 그때로 돌아가고 싶진 않다. 과거로 돌아가서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면 몰라도 말이다.
- 에디터
- 남현지
- 포토그래퍼
- BENEDICT BRINK
- 메이크업 아티스트
- 야나 칼가예바(Jana Kalgajeva)
- 프로덕션
- 로사 커튼(Rosa Curtain)
- 스타일링
- Hyukoh Styling T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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