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의 힘
터져버릴 듯한 옷장 속에서 절망을 경험한 뒤 발견한 새로운 삶의 방식. 그리고 지금 세계 최고의 ‘정리 전문가’가 전하는 따뜻한 말 한마디.
시작은 프라다 코트였다. 오렌지 스티치 장식이 어깨와 밑단을 따라 곱게 자리한 네이비 코트. 1년 전 구입한 후 고작 두 번 정도 입었을 뿐인 그 코트가 내 옷장 속에서 종적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더 놀라운 건 친구가 “너 그 프라다 코트는 어쨌어?”라고 묻기 전까지 그 존재마저 잊고 있었다는 것. 그제야 옷방 안에 주저앉아 모든 외투를 꺼내보고, 수납장 안까지 모두 뒤졌지만, 그 흔적을 찾을 순 없었다. 혹시나 해서 단골 세탁소와 수선집까지 수소문했지만, 그 코트는 내 인생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하루키였다면 ‘프라다 코트 행방불명’ 따위로 단편소설을 써내지 않았을까.
사실 코트뿐만이 아니었다. 마르세유의 작은 숍에서 구입한 ‘프로퍼 갱’의 프린트 티셔츠도, 피렌체 아울렛에서 건져 올린 랑방의 도톰한 스웨터도 모두 내 옷장에만 들어가면 행방불명이었다. 지난 2월 치앙마이로 휴가를 갈 땐 1시간 넘게 옷장을 뒤져서야 겨우 불과 두 달 전 선물 받은 올레바 브라운 수영복을 찾을 수 있었다. 대체 내 옷장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옷이 많다고 자랑하는 건 아니다. 또래 남성에 비해서는 분명 옷이 많지만, 패션 환자들 사이에선 명함도 못 내밀 정도다. 그렇지만 언젠가부터 총 세 칸으로 나뉜 옷장에 새 옷을 더할 땐 ‘거는 것’이 아니라 ‘밀어넣는 것’에 가까웠다. 왼쪽 칸 위에 자리한 겨울 외투들 위로는 먼지가 쌓여 있고, 그 아래 바지 칸은 이제 더 이상 공간을 찾지 못해 입지 않는 바지들이 바닥 아래 쌓이고 있다. 셔츠로 가득한 오른쪽 위칸 역시 상황은 비슷했다. 일단 구겨져 들어간 옷을 다시 찾을 방법은 묘연하다. 배구공처럼 돌돌 말아 밀어 넣은 스웨터는 겨우내 눈에 띄지 않다가 여름이 다가오면 머리 위로 툭 떨어지고, 셔츠 위에 또 다른 셔츠와 재킷을 겹쳐 걸어 넣으면 더 이상 내가 무슨 옷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덕분에 쇼핑도 엉망이었다. ‘내겐 그레이 브이넥 스웨터가 지금 당장 필요해’라는 결심과 함께 프라다 니트를 사왔더니, 품번까지 똑같은 제품이 태그도 뜯지 않은 상태로 이미 옷장 속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경험은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기기 어렵다.
프라다 코트 사건을 겪고 나서 일종의 ‘계시’를 경험했다. 이대로는 살 수 없었다. 해법을 모색하기 위해 우선 서점으로 향했다. ‘처음 시작하는 미니멀 라이프’ ‘아무것도 없는 방에 살고 싶다’ ‘버리고 비웠더니 행복이 찾아왔다’ 등의 자극적인 제목이 나를 유혹했다. 그렇지만 정작 책 내용을 살피자 한숨이 나왔다. “우리는 온갖 물건을 소유하고도 삶에 만족하지 못했다. 우리는 행복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더 많은 물건을 사들였지만 공허는 채워지지 않았다.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더 많은 빚, 더 큰 불안감, 더 깊은 공포, 더 큰 외로움, 더 깊은 죄책감, 더 큰 압박감, 더 깊은 편집증, 더 깊은 우울이었다.” 미니멀리스트 선언을 한 남성의 책을 펼쳤다가 바로 덮어버렸다. 소비주의적 사회에 전투적인 선전포고를 하고 싶진 않다. 쇼핑의 즐거움을 포기할 순 없는 일. 지난주 꼼데가르송 치노팬츠를 산 건 최근 내가 한 일 중 가장 잘한 일만 같다. 곧 따뜻해진 날씨는 치노 팬츠를 위해 완벽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내게 있어 미니멀리스트는 헬무트 랭이면 충분했다.
그때 지난해 <뉴욕타임스>에서 읽었던 곤도 마리에(Marie Kondo)의 기사가 떠올랐다. 일본의 정리 컨설턴트인 그녀는 이미 미국과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인생이 빛나는 정리의 마법> <인생의 축제가 시작되는 정리의 발견> 등 그녀가 지은 네 권의 책은 전 세계에서 600만 권이 넘게 팔려나갔다. 이른바 ‘곤마리’ 정리법을 전수하기 위해 앱은 물론 정식 교육 프로그램을 개설해 ‘곤마리 정리 전문가’를 양성할 계획까지 세운 새로운 시대의 ‘라이프 구루’. 〈타임〉이 뽑은 2015년 100대 인물인 그녀는 미국 <보그>와 함께 에디터의 옷장을 정리했고, <뉴요커>는 함께 쇼핑에 나섰다. 이제 미국에서 그녀의 이름은 정리를 뜻하는 동사로 쓰일 정도가 되었다. 2017년엔 “난 다음 주에 우리 집을 ‘곤도 마리에’ 할 거야”라고 말하는 게 자연스러워졌다.
우선 그녀의 책 네 권을 샀다. 그녀를 택한 건 단순히 유명세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리의 발견>의 첫 번째 챕터 제목은 ‘정리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지는 말자’였다. “물건을 줄이고 깨끗한 공간에서 사는 것만이 정리의 목적이 아니다. 설레는 매일, 설레는 인생을 사는 것. 그것이 정리를 통해 얻는 최대의 효과다.” 정리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를 나에게 이 구절은 꽤나 큰 위로가 되었다. 그다음 그녀는 내게 “정리를 하고 싶은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그리고 내가 꿈꾸는 아침, 집에 돌아온 저녁의 모습, 이상적인 생활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평소 ‘자기 계발’ 서적에는 콧방귀만 뀌던 나도 속삭이듯 말을 건네는 그녀의 책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물론 곤도의 방법이 모두 이처럼 자상하지만은 않다. 그녀를 따라 생활을 정리하고자 한다면 꽤나 커다란 노력을 필요로 한다. 이른바 ‘정리 축제’를 시작하기 위해선 굳은 마음가짐을 지녀야 한다. 때로는 “어중간하게 정리하면 평생 정리할 수 없다” “마음이 설레는 물건만 남기고, 나머지는 전부 과감히 버리자” 등으로 우리를 엄하게 다루기도 한다. 그녀의 가르침대로 내가 가진 모든 옷을 꺼내놓고선 남길 옷을 고르는 것은 생각만으로 아찔해진다. 하지만 “의류, 책, 서류, 소품, 추억의 물건순” 등 정리하는 순서와 “왼쪽에는 긴 옷, 오른쪽에는 짧은 옷” 등 수납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등 자세한 조언도 놓치지 않는다. 여기에 티셔츠와 양말 접는 법(티셔츠는 사각형으로 접어 세우고, 양말은 절대 뒤집지 않는다), 카드 명세서와 가전제품의 보증서 등을 버리는 법까지(물론 모두 버리는 것이 원칙이다).
정리의 문턱에 서서 난 그녀에게 메일을 보냈다. 완벽하게 정리된 삶을 사는 것은 어떤 건지 궁금해졌다. 또, 지금 왜 그녀가 이토록 인기인지도 알고 싶었다. 미국과 일본을 오가며 거대한 현상이 되어버린 그녀는 자신의 법칙처럼 간소하지만 명료한 답을 보내왔다. “물건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행복한 것이라는 이전 세대의 생각이 한계에 왔다고 생각합니다. 저렴한 가격의 대형 마트와 인터넷 쇼핑의 발전으로 간단히 물건을 살 수 있게 되었고, SNS가 등장하면서 얻는 정보가 많아졌습니다.” 이러한 소비 중 진정으로 기쁨을 주는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는 이들이 많아졌다는 것이 그녀가 신드롬에 가까운 인기를 누리는 이유 중 하나. “많은 사람들이 꼭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잔뜩 가지고 있습니다. 그 결과 많은 물건을 갖고 있는 것, 그것을 관리하는 것에 생각이나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겨서, 지쳐버리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모든 것에 지쳐버린 사람들에게 자신이 구세주라 생각하는 것일까? “곤마리 방식을 단순히 집을 정리 정돈하는 것이 아니라, 정리를 통해서 사고와 판단력을 키워 인생을 바꾸는 일종의 자기 계발 또는 심리 테라피로 여깁니다.” 여기에 버리는 물건이라도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처분하는, 즉 물건에도 영혼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영미권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방식이었을 것(그녀는 물건을 버리기 전에 꼭 그 물건을 두 손으로 만지면서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하길 권한다). 그리고 물건 속에서 ‘설렘(영어로는 ‘Joy’로 번역되었다)’을 찾는 것도 신선한 발상. “한때 저는 정리는 ‘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매일 여러 가지 물건을 계속 버린 결과, 매일 무언가 버리지 않으면 안 돼, 라는 일종의 노이로제 증상이 생겼고, 고등학생 때는 큰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기절한 적도 있습니다(그녀는 어릴 때부터 온갖 정리법의 마니아였음을 고백했다).” 버릴 물건이 아니라, 남겨놓는 물건을 찾게 된 것은 그 이후. 덕분에 정리는 물건에서 좋지 않은 점, 싫은 점을 찾아내는 부정적인 작업에서 좋아하는 물건이나 설레는 물건을 찾아내는 긍정적인 경험으로 바뀌었다. 강박증적인 요즘의 미니멀 라이프 열풍과 반대되는 이야기.
그녀의 답변을 읽다가 내 옷장을 다시 떠올렸다. 과연 20년 전에 샀던 랄프 로렌의 더플 코트는 대체 왜 아직 내 옷장 속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일까? 7년 전 신인 디자이너에게서 구입했던 네이비 피코트는 단 한 번도 내게 설렘을 주지 않은 것 같은데? 구체적인 아이템을 떠올리자, 어떤 것을 버리고, 어떤 것을 남기게 될지에 대한 확신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내게 격려를 잊지 않았다. “정리라는 작업 자체에 손이 잘 가지 않더라도 우선은 정리와 관련된 것, 어떤 것이라도 좋으니 작은 행동으로 시작해보세요. 그것만으로 정리라는 산이 꽤 낮아집니다.” 혹시 그 산 너머에 내 프라다 코트가 숨어 있는 건 아닐까? 가능성은 낮지만, 그 기대만으로도 가슴이 떨리는 건 사실이다. 우선 동네 슈퍼에 간 김에 ‘폐기물 봉투’를 사두었다. 적당한 날이 오면 나도 내 인생을 ‘곤도 마리에’ 해볼 작정이다.
“일단은 작은 것이라도 좋으니 작은 행동이라도 실천하여 당신의 멋진 ‘정리 여행’을 시작해보세요.” 곤도는 뛰어난 사업가답게 메일 끝에 “곤마리 애플리케이션’의 다운로드 링크를 잊지 않았다. “정리와 함께 당신의 인생이 더욱 두근두근해지길 바랍니다!”
- 에디터
- 손기호
- 포토그래퍼
- LEE SHIN G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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