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eak the Fashion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서 열리는 꼼데가르송 회고전. 패션의 경계를 허무는 은둔의 아티스트 레이 가와쿠보가 스포트라이트 아래에 섰다.
꼼데가르송은 우리에게 패션을 새롭게 보는 시선을 제시한다. 1969년 이 브랜드를 설립한 레이 가와쿠보의 영향력은 바로 이런 데서 솟아난다. 그녀의 옷은 단순히 ‘섹시하다’ ‘편안하다’ 등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보그 코리아>가 ‘꼽등이 드레스’라 부르곤 했던 1997년 봄 컬렉션 ‘Body Meets Dress, Dress Meets Body’는 우리 사회가 용인하는 옷의 형태를 고민하게 했다. 종이 인형의 옷을 닮은 2012년 가을 컬렉션은 온통 3D를 외치는 세상에 2차원적인 패션의 신세계를 선사했다. 그녀의 디자인 속에 카다시안 자매를 만족시킬 만한 아찔한 그물 드레스 혹은 운동하러 갈 때 입어도 좋을 만한 트레이닝 팬츠는 없다. 패션이 단순히 돈을 주고 사는 물건 혹은 사이즈에 맞게 걸쳐 입는 필수품에 국한되지 않음을 증명하는 디자인. 때로는 상상력에 날개를 달아주고, 우리가 사는 사회에 물음표를 던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디자이너의 힘이라는 것도 깨닫게 된다.
지금 가와쿠보의 힘을 확인할 수 있는 전시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서 열리고 있다. <Rei Kawakubo/Comme des Garcons: Art of the In-Between>이라는 이름의 전시는 1983년 열린 이브 생 로랑 전시회에 이어 살아 있는 디자이너에게 바치는 두 번째 회고전이다. 총 아홉 개의 테마 아래 의상 150여 벌이 새하얀 미로를 닮은 전시관에 자리하고 있다. 그녀가 처음 파리에 진출한 1981년 선보인 의상부터 지난 2월 무대에 올린 작품까지 모두 이곳에서 만날 수 있다. 여기엔 당연히 1997년, 2012년 컬렉션을 비롯한 명작도 포함되어 있다.
정작 가와쿠보는 이번 전시가 자신의 순수한 비전만으로 이루어지진 않았다고 고백했다. 미국 <보그>와의 인터뷰에서 “그건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서 열리는 꼼데가르송 쇼가 아니라 꼼데가르송을 위한 메트로폴리탄 쇼예요”라고 살짝 불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건 다른 사람의 손과 눈을 통해 작품을 배열하고 해석하는 것이 불편한 아티스트 기질 때문인 것. 이러한 회고전이 마땅치만은 않은 듯했다. “이번 전시는 뭔가로 향해 가는 길 위에 있는 것입니다. 최종적인 것은 아닙니다. 아무것도 보장된 건 없어요. 전시회 이후에 제가 아무것도 만들 수 없다면요? 어쩌면 회사가 내리막길을 걸을 수도 있고요. 무엇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확신할 수 있는 건 그녀가 건설한 ‘꼼데 제국’의 해가 쉽게 지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 가와쿠보는 결코 스스로를 아티스트라 부르는 걸 허락하지 않는다. 전시 오픈을 위해 <뉴욕 타임스> 기자와 마주 앉은 그녀는 스스로를 ‘비즈니스우먼’이라 정의했다. 자신의 파리 컬렉션 이외에 준야 와타나베, 케이 니노미야, 그리고 치토세 아베(사카이를 시작하기 전 꼼데 가르송에서 일했던)를 포함한 디자이너들을 발굴하고 홍보해왔다. 알라이아, 발렌시아가, 구찌를 비롯해 가와쿠보와 그녀의 스태프가 발굴한 작은 브랜드를 취급하는 ‘꼼데’만의 백화점인 도버 스트리트 마켓도 있다. 여기에 하트 로고로 유명한 플레이, 블랙 의상만 취급하는 블랙, 향수와 지갑, 운동화와 백팩 등의 상업적인 라인도 차례대로 구비해두었다. 전세계 매장은 130여 개를 넘어섰고, 도버 스트리트 마켓은 런던을 비롯해 도쿄, 뉴욕, 싱가포르 등에 다섯 개 지점이 있다.
가와쿠보가 없는 꼼데가르송엔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디자이너는 최근 이러한 미래를 종종 생각한다고 <뉴욕 타임스> 인터뷰에서 고백했다. “똑같을 순 없겠죠. 하지만 똑같을 수도 있죠.” 이러한 고민은 그녀의 작업에도 영향을 끼친다. 그녀는 2014년 봄 컬렉션부터 더 이상 ‘옷’을 컬렉션에서 선보이지 않겠다고 알렸다. 대신 그녀는 실루엣과 형태, 옷의 기능을 닮은 추상적인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그녀의 고집이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녀가 없다면 분명 패션이라는 단어가 지닌 울림의 진폭은 확연히 작아지고 말 것이다.
다시 프레스를 상대로 프리뷰가 열린 5월 1일 오전 11시로 돌아가보자. 그녀를 목격하기 위해 문 닫은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을 찾은 기자들은 커피를 즐기며 레이 가와쿠보를 기다렸다. 물론 절대적인 금언주의자인 그녀가 기자회견 무대에 오르진 않았다. 미국 <보그>의 안나 윈투어와 파트너이자 남편인 아드리안 조프 사이에 조용히 등장한 그녀는 짙은 선글라스를 쓴 채 무표정하게 자리를 지키기만 했다. 앤드류 볼튼과 미국의 일본 대사였던 캐롤라인 케네디(케네디 대통령의 딸)가 차례대로 가와쿠보의 영향력에 대해 설명했고 디자이너는 다시 조용히 사람들을 피해 사라졌다. 그녀를 가까이에서 살펴보기 위해 내가 엿들은 그녀의 단 한마디는? 자신을 향해 VIP 문을 열어준 경비원에게 남긴 “Thank you”.
그날 가와쿠보의 전시를 살펴보는 기자들의 걸음에는 조심스러움이 담겨 있었다. 그 누구도 큰 소리로 자신의 감상을 소리치지 않았다. 작은 감탄사가 곳곳에서 들려왔지만, 주로 그들은 아이폰을 든 채 새하얀 미로와 같은 공간(가와쿠보가 도쿄에서 직접 디자인하고 프로토타입을 제작해 완성한)을 헤맸다. 탄생과 죽음, 존재와 무존재, 패션과 안티-패션 등의 주제로 나뉜 옷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에는 일종의 경외심이 담겨 있었다. 반면 일부 기자는 그녀의 전시가 때로는 패션계 ‘외부인’들에게 오해를 살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반문했다. “패션 인사이더들에게 그녀의 작업은 놀라운 예술과 같아요. 하지만 소매도 지퍼도 존재하지 않는 저 코트를 패션의 우스꽝스러운 태도로 잘못 해석하는 이들도 존재하지 않을까요?” 한 지적인 에디터의 질문에 나를 포함한 주위 기자들은 잠시 고개를 갸우뚱했다.
같은 날 밤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앞에선 그녀를 위한 파티가 열렸다. 뉴욕의 오스카 시상식이라 불릴 정도로 패션계와 문화계의 수많은 스타들이 참석하는 ‘MET 갈라’가 펼쳐진 것. 리한나는 2016년 가을 런웨이에 등장했던 동그란 꽃잎 드레스 차림으로 거장에게 경외를 표했고, 안나 클리블랜드와 스텔라 테넌트 역시 가와쿠보의 헤어를 담당하는 아티스트 줄리앙 디스의 팔짱을 낀 채 그날 밤의 스타로 주목받았다. 그리고 파티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고집했던 주인공 가와쿠보는 하얀색 바이커 재킷을 입고, 작은 왕관까지 머리에 더한 채 등장했다. 카메라를 향해 포즈를 취하기도 하고, 그녀에게 다가와 경배하는 스타들과 인사를 나누기도 하는 의외의 모습을 보였다. 비록 자신에게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가 불편해 보이긴 했지만, 소란스러운 풍경을 흥미롭게 바라보는 건 분명했다. 그녀는 지난 40년간 매일 새벽부터 자정까지 일하는 것이 지옥에 사는 것만 같고, 자신의 일을 힘든 노동이자 지독한 고문이라 말하곤 했다. 하지16만 그날 밤은 짙은 선글라스 뒤로 비로소 미소가 비치는 것 같았다.
- 에디터
- 손기호
- 포토그래퍼
- ANNIE LEIBOVITZ, GETTYIMAGES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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