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 & Masterpiece
프랭크 게리의 건축이 위대한 건 아름다운 건물을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건축을 해방시켰기 때문이다. 그는 건축의 굴레를 벗어남으로써 예술의 언어를 획득했고, 세상에 기여하는 혁신적 건축까지 가능케 했다.
로스앤젤레스 공항에 내려 입국 심사대에 섰다. 이민국 직원이 물었다. “무슨 일로 LA에 왔나요?” “인터뷰 때문에요.” “누굴 인터뷰하나요?” “프랭크 게리를 만날 예정입니다.” 그러자 그 라틴계 남자는 나를 바라보았다. “와우! 나도 그의 팬이에요. 좋은 시간 되길 바랍니다.” 그가 LA의 사우스 그랜드애비뉴에 자리한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이 주말에 애인과 갈 만한 곳이라는 것 이외에 무엇을 알고 있는지, 그 풍부한 곡선의 해체주의를 실감하는지는 모를 일이다. 어쨌든 이 도시에서만 60년 이상 살아온 프랭크 게리는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의 프라이빗 투어를 받는 퍼렐 윌리엄스나 그에게 집 설계를 의뢰하는 존 발데사리 같은 스타뿐만 아니라 예술이나 건축 따위가 관심사가 아닌 보통 사람들에게도 알려진 인물이다. 일련의 일화는 종종 프랭크 게리를 ‘Starchitect’로 단정 짓게 한다. 물론 그는 이 말을 싫어할 것이 뻔하다. 그가 매우 유명할지언정 스스로 반짝이기 위해서 반짝이는 건물을 지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스타 건축가’라는 단어의 광채는 건축을 대하는 철학을 폄훼하곤 한다. 그러나 그가 진짜 성공했다고 단언할 수 있는 까닭은, 그가 아직 현장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나긴 삶을 관통하며 자신이 단순히 ‘Starchitect’가 아닌 이유를 증명해왔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태도는 의도된 게 아니라 건축가로서의 고민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이다. 실용성을 떠나 건축이 인간의 진보에 기여하는바는 과연 무엇일까? 건축이 예술적 감성과 문화적 사건, 그리고 더 나은 세상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우리는 어떤 건물을 지어야 하는가? 1929년생인 프랭크 게리의 인생은 순탄하지 않았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트럭 배달 일을 하던 소년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고, 이후에는 이름까지 바꾸게 된다. 수십 년 후에 이룬 놀라운 성과와는 상관없이 수차례 큰 경제적인 어려움도 겪었고, 건축계로부터 이단아 취급을 받기도 했다. 그는 60세의 나이에 건축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받고, 70세에 건축가들의 로망인 미국건축가협회 골드 메달을 수상했으며, 87세에 외교관 역할을 한 미국 예술가에게 주어지는 Leonore and Walter Annenberg 상을 받았다. 나이가 숫자에 불과하다면, 그의 나이는 이미 거의 모든 일을 경험했거나, 무엇이 세상을 움직이고 멈추게 하는지를 충분히 목격했음을 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랭크 게리는 “더 좋은 건물을 지어야 한다는 법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며 다음 프로젝트를 늘 기대하고 있다.
‘비밀 보장’은 건축가의 임무 중 중요한 하나이기 때문에, 애석하게도 ‘게리 파트너스(Gehry Partners)’ 사무실의 곳곳을 촬영할 수는 없었다. 이 거대한 우주선 같은 공간은 1, 2층으로 나뉘어 있는데, 여기엔 그의 일과 인생이 모두 녹아 있다. 진행중인 프로젝트 수십 개의 단서가 되는 건축 모형부터 유명인들과 함께 찍은 사진, 건축가로 함께 일하는 아들이 그린 그림, 70대가 될 때까지 선수로 활약했음을 인증하는 하키 유니폼 등등. 회의실 앞에는 심슨 가족의 한 장면이 액자로 걸려 있었다. 그는 이 풍자적인 만화의 한 에피소드에 등장하는데, 극 중 괴팍한 늙은 건축가는 건물을 쇠공으로 쳐서 찌그러뜨린다. 개인적으로 프랭크 게리식의 유머 감각, 특히 자기 풍자의 순간을 매우 좋아한다. 이를테면 연극 무대에서 화가가 되고 싶어 했던 기념품 판매원을 연기했다는 게리 말이다. 그는 정신 분열 환자를 위한 병원을 보여주며 “전 제가 이 일을 하기에 매우 적합하다고 생각했습니다”라며 웃을 수도 있다. 테드 강연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산타모니카에 지은 이 집은 참 많은 악평을 얻었습니다. 성인 만화에 실리기도 했죠.” 이런 자기 풍자의 재능을 발휘할 줄 아는, 소위 ‘성공한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자신을 농담거리로 둘 수 있다는 건 실패 혹은 실패를 언급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다는 것과 동의어이며, 그 이면에 더 굳건한 목표와 철학이 있다는 의미다. 그는 한 번도 시도한 적 없는 아이디어라 할지라도 방법을 찾아 나섰고, 시대의 표준에 맞지 않아도 포기하지 않았다. 자기가 만드는 건물이 어떤 결과물로 나올지 미리 안다면, 그는 그 일을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의 건축이 위대한 이유가 건축을 해방시켰기 때문이라면, 이는 실패와 도전이 평생 반복된 결과다.
가고시안 갤러리는 종종 프랭크 게리의 물고기 조각이나 곰 조각을 전시했다. 어릴 때부터 그는 회화, 조각, 클래식 음악을 좋아했다. 하지만 조각품 비슷한 걸 내놓지 않았더라도 그가 예술가일 수 있는 건 예술과의 감정적 연결 고리를 건물과도 형성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며, 접힌 종이 같은 희한한 건물을 만들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상상을 실현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값싼 재료로 지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작은 집부터 전설이 된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까지, 게리는 쓸 수 있는 예산이나 스프링클러의 개수에 좌절하지 않고 미학적 기법을 구현했다. 클라이언트의 목적에 부합하되 구조적으로 창의적이고 견고하며, 세상과 의미 있는 소통을 할 수 있는 이상향의 건축은 그렇게 탄생한다. 1960년대 그는 LA의 전설적인 페루스(Ferus) 갤러리를 중심으로 한 일군의 아티스트들과 어울렸다. 아티스트들과 있을 때 더욱 편안했다고, 그는 인터뷰에서 말했다. 건축가들이 공장에서나 쓰는 창문을 어떻게 오피스에 쓸 수 있느냐고 그를 비난한 반면 예술가들은 늘 든든한 동료가 되어주었다. 다큐멘터리 <프랭크 게리의 스케치>에서 감독 시드니 폴락은 말한다. “게리는 자신만의 독창성으로 늘 상식에서 벗어난 카드를 선보입니다. 오랜 친구 사이인 우린 자주 같이 앉아서 경제적 제한 속에서 어떻게 하면 자신을 잘 표현할 수 있을지에 대해 토론해요.” 프랭크 게리는 자기 과거와 업적에 박제될 마음이 없어 보였다. 마주 앉은 자리에서 그는 열정적으로 일하는 것이 얼마나 더 생산적인지를, 현재의 프로젝트가 인생 전반의 배움과 철학, 경험의 정수를 어떻게 집대성한 결과물인지를, 그리하여 그가 얼마나 인간에 가까운 진보한 건축을 꿈꾸는지를 천천히 이야기했다. 도전의식과 반골 기질은 여전히 날 서 있었고, 유머 감각도 그대로였다. 1시간 전, 그는 유리문에 코를 박고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나타났다. 이것이 89세 거장이 건넨 첫 인사였는데, 나는 그 순간을 여태 잊을 수가 없다.
몇 년 전 당신에 대한 글을 쓴 적 있습니다. 당시 한국의 1세대 패션 디자이너가 당신의 지치지 않는 열정에 감동받았다고 말해 주었지요. 혁신적인 삶 전체를 아우르는 에너지의 근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제가 남들보다 커피를 좀 많이 마시긴 합니다.(웃음) 전 호기심이 강해서 뭘 찾다 보면 어떤 무언가가 다른 것으로 저절로 이어지는 걸 경험해요. 제게 가장 중요한 건 나 자신이 되는 것(to be oneself), 다른 누군가가 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난 아주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자랐습니다. 그러나 가족 모두에게는 일과 일상의 규칙이 있었고, 이를 가족들에게서 배웠어요. 무엇보다 저는 이 일을 매우 사랑하는 것 같아요. 제가 어디로 향하게 될지 여전히 궁금하고, 사람들이 사는 공간을 만든다는 것조차 매우 매력적이에요. 오랫동안 나는 왜 환경이 좋지 않고, 더 나아질 수 없는지에 대해 생각하곤 했어요. 어떤 일을 그럭저럭 평범하게 하나, 훌륭하게 해내나 투자하는 건 똑같아요. 하지만 보통은 이 삶을 그냥 받아들이죠. 혼자서 바꿀 수 없기에 수긍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전 빌딩 하나를 디자인할 때도 항상 소수의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흥미로운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져요. 건축가의 사회적 의무이자, 그래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행동으로 실천해야 한다고 믿어요.
크로니클 출판사의 디렉터는 ‘작업과 배움 그리고 발견’이 80세 이상 거장들이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라 썼는데, 한 가지 빼먹은 것 같군요. 이 일을 정말 좋아해야 한다는 사실이요.
맞아요, 그냥 좋아요. 일에서 에너지를 얻고,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함께 일하는 것이 좋습니다. 다양한 지역에서 다양한 고객들이 찾아오고, 다양한 도시를 자주 다닐 수 있는 것도 좋아요.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을 즐거운 마음으로 작업할 수 있었던 것도 제가 예술과 음악을 사랑하기 때문이었어요. 그것이 어떤형태가 되었든 다른 사람의 작품을 보면 신이 나요. 내가 더욱더 열정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영감을 줍니다.
스튜디오 입구에 회화 작품 몇 편이 걸려 있더군요. 예술 작품도 컬렉팅하나요?
네, 여기서 함께 자란 사람들 것만 조금요. 이를테면 크레이그 카우프만(Craig Kauffman)과 빌리 알 벵스턴(Billy Al Bengston) 같은 아티스트죠.
근래 당신을 가장 흥분시킨 프로젝트는 무엇인가요?
그건 말보다는 오히려 페이스북에 쓰는 게 재미있을 것 같아요. 좀 다른 스타일의 작업을 하고 있어요. 제 창고 같기도 하고, 사무실 같기도 하고, 어쨌든 자유로워요.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아직 비밀이에요. 프랑스 아를의 마야 호프만 재단(Maya Hoffman Foundation)과 작업하는 건 말할 수 있어요. 오래 준비하다가 드디어 공사를 시작했어요. 마야 호프만은 프랑스에서 예술 발전을 위해 공헌한 분인데, 재단은 주로 사진과 조각품을 컬렉팅하죠. 갤러리 공간도 있고, 전시도 진행하지만 현역 예술가들을 위한 스튜디오라고 보면 됩니다.
LA와 직접 관련된 프로젝트도 있다고 들었어요. ‘Sunset’ 또한 이 도시의 역사를 잘 알고 있기에 건축가로서의 소명 의식 역시 더욱 강해질 것 같습니다만.
네, 특히 나는 3년 전부터 캘리포니아주를 관통하는 로스앤젤레스강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어요. 어느 날 LA 시장이 제게 한번 봐달라고 부탁하더군요. 51마일에 이르는 강을 둘러싼 넓은 땅인데, 고속도로처럼 지역을 분할시켜요. 사람들은 이 땅을 꽃과 새의 서식지로 만들기 위해 노력해왔어요. 일상의 놀이를 위한 장소로 말이죠. 문제는 이 강이 애초에 홍수 방지 프로젝트로 조성된지라, 그런 용도로는 쓰일 수 없다는 거예요. 희망과 현실의 차이가 큰 거죠. 그래서 우리는 이를 해결하기 위한 몇 가지 아이디어를 고민했어요. 그 주변에 예술 커뮤니티를 만들어 댄스, 음악, 조각 등을 가져오는 것도 그 일환이죠. LA 필하모닉의 음악감독이자 상임지휘자 구스타보 두다멜(Gustavo Dudamel)도 참여하죠. 무용가 벤자민 마일피드(Benjamin Millepied, 나탈리 포트만의 남편)와도 이 프로젝트와 관련해 이야기를 나눴어요. 매우 기대가 큽니다.
그 일대는 원래 어떤 곳인가요?
LA 중에서도 가난한 구역에 속하죠. 서쪽 지역에 비해 아이들의 수명이 10년이나 짧아요. 공원 같은 탁 트인 자연 공간이 없거든요. 따라서 이곳에서 생기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복지 비용도 엄청나죠. 그래서 강 주변을 바꿔 생산적인 공간을 더 많이 만들려고 하는 거예요. 사실 자진해서 하는 일이라 저는 돈을 안 받아요.(웃음)
공간뿐 아니라 사람들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기대됩니다. 건축가의 사회적 의무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어요. 그간의 건축 작품의 결정판 같은 느낌도 들고요.
그럴 거예요. 물론 저는 상업적인 활동도 열심히 합니다. 일례로 서울에 작은 루이 비통 스토어도 만들고 있어요. 보여줄 수는 있지만, 아직 사진을 찍을 수는 없습니다.
클래식 음악을 유난히 좋아해, 이에 관한 프로젝트라면 언제든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씀하신 적도 있는데요.
네, 맞아요. 베를린의 작은 콘서트홀 불레즈 홀(Boulez Hall)도 생각만으로 신나는 프로젝트예요. 나는 사람들이 예술을 통해 대화할 수 있다고 믿어왔어요. 어느 날 다니엘 바렌보임(Daniel Barenboim)과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람들을 모아 오케스트라를 시작했어요. 듣기만 해도 정말 강력하지 않나요? 단원들과 부에노스아이레스 등에 함께 간 적이 있어요. 이스라엘 사람들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서로 대화하고, 함께 음악을 만들어가는 모습을 보는 게 정말이지 너무 좋았어요.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열여섯 살짜리 이스라엘 소년 옆에 시리아 소녀가 오보에를 가지고 와 앉고, 이집트 소년이 첼로를 가지고 오고, 팔레스타인 소년이 비올라를 가지고 앉아요. 이들이 함께 연주하는 모습은 눈물이 날 정도로 아름답죠. 모든 공연이 그랬어요. 그들을 위해 700석 정도의 작은 콘서트홀을 만드는 일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죠. 이 프로젝트 역시 따로 보수를 받지 않았어요, 선물처럼 말이죠.
공간의 크기가 그 가치와 비례하는 게 아님을, 우리는 종종 목격해왔습니다.
비슷하게는 초등학교 관련 프로젝트도 있어요. 턴어라운드 스쿨(Turnaround Schools) 프로젝트라는 예술 교육 프로그램인데, 지난 40년 동안 유지되어왔지요. 지금 미국의 많은 아이들은 여러 이유로 학교를 그만두고 있는 상황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학교에 예술 교육을 도입해 학생들이 손으로 뭔가를 만들게 함으로써 스스로 배우게 하고 싶었어요. 아이들은 카드 보드로 도시를 만들고, 직접 색을 칠합니다. 건축과 미술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카드 보드로 만든 도시가 얼마나 큰지 알기 위해 수학을 배우고, 누가 이 도시를 운영하는지 생각하며 사회학을 배웁니다. 이 학교 아이들 모두가 예술가가 될 리는 만무하지만, 적어도 계속 학교를 다닐 수 있게 할 수는 있어요.
프로젝트란 당신의 것을 베푸는 것과 다름없군요. 캘리포니아에 이런 학교가 많은가요?
현재 16개 정도 있어요. 사실 캘리포니아에만도 300여 개의 학교가 이런 비슷한 문제를 갖고 있어요. 미국의 교육 시스템이 엉망인 거죠. 제가 가는 학교 중 하나는 캘리포니아 북부, 산 주위에 인도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고립된 커뮤니티인데, 거긴 거의 무방비도시예요. 아이들이 마약을 한 어른들에게 강간당하고, 폭행당하고, 그래서 아이들의 자살률도 높습니다. 도덕의 경계가 아예 없는, 아주 위험하고 척박한 곳이죠. 이런 교육은 그런 지역의 아이들에게 살아야 할 크고 작은 이유를 줄 수 있습니다.
틸다 스윈튼도 아이들이 자기 자신으로 자랄 수 있는 전인교육을 위해 스코틀랜드에 학교를 지었다죠. 어쨌든 LA에서 60여 년 동안 살면서 도시가 어떻게 변화했으면 좋겠다는 철학을 가졌을 듯합니다. 이런 일련의 프로젝트가 그런 비전을 반영하고 있나요?
사실 도시 전체를 바꾼다는 건 상상하기 힘든 일이에요. 부분이 모여 전체가 되겠죠. 만약 LA 리버 프로젝트가 현실화된다면 51마일의 공원이 연결될 거예요. 정치적으로 가능한지는 다른 문제예요. 그래서 그 3마일을 시작으로 조금씩 바꾸는 거예요. 그리고 제 생각에 이 도시에는 좀더 나은 교통 시스템이 필요해요. 제가 1947년쯤 LA에 처음 왔을 땐, 전차가 돌아다녔어요. 이젠 다 없어졌죠. 멀쩡한 교통수단을 자동차와 석유 회사들이 다 갈아치운 거예요.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야 옛날 모습을 복원하려고 조금씩 손을 대는데, 늦은 감이 있어요. 서로가 제대로 연결이 안 되는 거예요. 천편일률적인 상업적 박스 모양의 건물이 아닌, 진짜 건축물이 있으면 좋겠어요. 한국도 그렇죠? 어디든 그래요. 두바이도 스테로이드를 맞은 미국 같아요. 가장 나쁜 아이디어만 골라 건물을 짓거든요.
서울도 많이 다르지 않습니다. 저는 매일 아침 한강변에 빽빽하게 들어선 아파트와 삐죽 올라온 로켓 모양의 거대한 건물을 보며 출근하는데, 볼 때마다 속이 상합니다. 건물이 인간의 환경과 미래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는 걸 왜 고민하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도시 계획을 공부한 건축가로서, 단 하나의 법칙을 지켜야 한다면 무엇을 선택하고 싶은가요?
한 가지요? 불가능해요.(웃음) 하나의 규칙으로는 이런 상황을 해결할 수 없으니까요. 정치인들과 대화도 하고, 그 건물에 머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모두 더 나은 환경을 원해야 가능한 겁니다. 일반적으로 보통 사람들은 건물 하나를 짓는 데 얼마 정도의 비용이 드는지 몰라요. 그 똑같은 돈으로 더 인간적인 건물을 지을 수 있다는 사실도 모르죠. 경제적으로 따져봐도 나쁜 건물을 지을 이유가 없는 거예요. 훌륭하다고들 칭찬해주는 빌바오의 구겐하임 건물도 실제 돈이 그렇게 많이 들진 않았어요. 건축학의 힘은 매우 크고, 더 많은 사람들이 그걸 적극적으로 이용해야 해요. 왜 건축학을 활용하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우린 다 준비되었는데. 차라리 ‘더 나은 건물을 지어야 한다’는 법을 만드는 게 낫겠어요.
모두들 당신에게 건물 짓는 것에 대해서만 묻습니다. 하지만 60년 넘게 일해온 건축가라면 자신이 직접 지은 건물이 속절없이 철거되는 모습도 보게 될 텐데, 그럴 땐 어떤 생각이 드나요?
모르겠어요. 피할 수 없는 것 같아요. 물론 제가 가서 시위를 하진 않습니다.(웃음) 오랫동안 살아남은 건물도 있어요. 전 디즈니 홀 같은 건물은 오랫동안 존재했으면 해요. 주로 대학 같은 교육용 건물이 철거되었어요. 더 큰 건물을 짓고 싶었나 보죠, 뭐. 그걸로 싸우진 않아요.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을 이해시키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니까요.
여전히 프로젝트가 하늘에서 떨어지길 기다리는 편입니까?
가끔씩 경쟁 입찰에 참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도 주로 부탁을 받아 나가는 거고. 그냥 기다리는 게 나아요.(웃음)
현대의 건축가들에게 가장 필요한 자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음… 인간성을 존중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키워가고, 부정적이지 않은 거요. 프로젝트가 얼마나 큰지는 상관없고, 얼마나 좋은지를 먼저 살펴야 해요.그건 사람들과 얼마나 연결되어 있는가의 문제일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이 어떤 건물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우린 금방 알 수 있어요. 하지만 처음엔 새로운 걸 보는 걸 싫어하던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도 종종 경험할 수 있습니다.
건축가로서 인간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건 건축물이 인간과 같은 성향을 가졌다는 말인가요?
셰익스피어는 이렇게 말했어요. “All the world is a stage, and we are all players.” 저는 그 말을 항상 떠올려요. 우리 모두 무대에 있고, 건축물은 삶을 위한 무대예요. 물체를 통해 느낌을 전달할 수 있어요. 건축은 느낌을 갖고있어요. 사람들이 그 감정을 느끼게 하려는 거죠.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파티처럼 느껴지도록, 그 공간이 감옥처럼 느껴지지 않도록. 제게도 새로운 무대가 생겼어요. 제 아들이 최근에 저희 집을 지었고, 이사했거든요. 1, 2주밖에 안 되어서 그런지 낯설어요.
1970년대에 산타모니카에 지은 그 악명 높은 집에서 수십 년을 사셨으니, 축하할만한 일이군요.(웃음) 조각이나 주얼리 등 다른 창의적인 프로젝트를 통해서는 무엇을 얻습니까?
크기와 규모가 작은 작품을 만드는 그 변화가 좋아요. 보석을 만드는건 이 보석으로 인해 아름다워지는 여자들을 봐서 좋고요.(웃음) 다른 종류의 교류인 셈이에요. 잠시 동안이라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게 재미있었어요. 더 하고 싶어요. 어쩌면 한국의 주얼리 회사일 수도 있겠죠. 특히 조각품은 건축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요. 건축이 다시 과거처럼 변하는 것에 대한 반응이었거든요. 우린 뒤가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언젠가 제가 강의를 할 때 후기 모더니즘은 그리스 신전에서 온 거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 그리고 혼자
생각했죠. ‘그렇게 뒤로 후진하고 싶다면 30만 년 전 물고기로 돌아가는 건 어떨까?’ 그래서 물고기를 그리기 시작했어요. 다른 활동도 했어요. 소피 칼과도 일하고, 곰 조각품도 만들었죠. 루이 비통을 위해 하얀 말을 디자인하기도 했고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가’라는 사실은 당신의 작업과 작품에 어떤 영향을 줍니까?
네, 좋습니다. 건강하고 안정적인 영향이라고나 할까요. 많은 예술가 친구들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곤 하는데, 내 생각엔 그럴수록 내가 모든 걸 알지 못한다는걸 스스로 깨닫게 하고 더욱더 나아가게 하는 것 같아요. 항상 약간의 긴장감도 있는데, 전 좋아요. 물론 감사하는 마음이 크죠. 다음 작품에 대한 긴장감이 오히려 나를 솔직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설사 그것이 실현 불가능할지라도, 궁극적으로 표현하고 싶은 건축이 여전히 존재합니까?
글쎄요, 전 보기보다 현실적인 사람이에요. 1969년에 자전거처럼 돈을 넣으면 빌릴 수 있는 자동차를 제안하기도 했고, 난방, 순환 시설을 집과 따로 만드는 방식도 제안했어요. 요즘 집을 지을 땐 프레임을 잘라 파이프를 넣잖아요? 그게 낭비이고, 서로 분리하는 게 실용적일 것 같다, 이런 식으로는 예상을 해요. 실제 세계에서는 건축학 이론이 항상 들어맞진 않습니다. 그래서 건축학의 철학적인 면에 너무 집중하기보다는 실제적 영역에 접근해 만드는 걸 더 좋아해요. 그에 충실하다 보면 철학적, 시적 요소는 저절로 오죠.
만약 당신의 손자가 당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뭐라고 답해줄 건가요?
네, 얼마 전에 둘째 손녀가 태어났지요. 잠깐만요, 사진을 보여주고 싶은데… 제 며느리는 한국 사람이에요. 이 사무실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는데, 그녀는 정말 훌륭해요. 내가 그린 작은 낙서를 본 그녀가 카펫을 만들었죠. 아들 내외는 남매를 키워요. 오히려 이 아이들이 제게 알려줄 거예요. 아마 ‘be yourself’라고 말해줄것 같은데요?
마지막 질문입니다. 당신의 유머 감각을 매우 좋아해요. 그 감각은 어디서부터 오는건가요?
글쎄요, 음… 자기 보호 아닐까요?(웃음)
- 에디터
- 윤혜정
- 포토그래퍼
- Hyea W. K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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