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시착한 김기영
김기영 감독의 20주기다. 여성의 원초적 힘을 믿고 자신만의 언어로 영화를 만든 남자 혹은 외계인.
내년이면 100주년을 맞는 한국 영화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감독을 꼽는다면 누굴까? 산업적 영향력이라면 신상옥 감독일 것이다. 철학적 고뇌를 친다면 유현목 감독일 것이다. 가장 긴 시간 동안 견딘 ‘인동초’라면 임권택 감독일 것이며, 다작이라면 100편 이상 만든 김수용이나 고영남 감독을 이야기할 수 있을 거다. 이만희나 하길종 같은 요절한 천재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김기영 감독을 넘어서진 못한다. 지나치게 개인적인 평가 아니냐고? 맞다. 그런데 김기영이라는 이름이 주는 압도적 느낌을 넘어서는 한국의 영화감독은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
김기영 감독은 한국 영화의, 말하자면 ‘외계인’ 같은 존재였다. 20년 전인 1998년 2월 5일, 화재로 아내와 함께 갑자기 세상을 떠난 그는 정말 ‘이 세상 것이 아닌 듯한’ 영화를 만들었다. 흔히 <하녀>(1960)를 그의 대표작으로 꼽지만 이 영화는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점잖은 축에 든다. 50대에 접어들어 만든 영화, 즉 <화녀>(1971) <충녀>(1972) <이어도>(1977)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1978)로 이어지는 라인업을 보고 있으면, 그는 한국이라는 토양에서 절대로 태어날 수 없는 감독처럼 보인다. ‘유신 체제’라는 극도의 억압적 시스템에서 남한의 모든 문화가 신음하던 1970년대, 이때 김기영 감독이 만든 영화는 ‘극단의 극단’이었다.
특히 <이어도>는 거대한 충격이다. 이청준의 원작을 옮겼다지만, 우린 이 영화를 보는 동안 원작자의 존재를 잊고 김기영 감독이 만들어낸 원색의 화면과 심원한 정신세계와 기괴한 욕망을 맞닥뜨린다. 특히 클라이맥스에 도착하면, 한국 영화는 물론 세계 영화를 통틀어 이토록 거침없는 섹스 신이 있었을까 싶다. 죽은 남자와 산 여자가 섹스를 하는 네크로맨틱의 풍경! 그는 인간들의 영화에서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예사롭지 않게 해내곤 했다.
‘기영’이라는 이름이 혹시 ‘기이한 영화(奇映)’의 준말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김기영의 영화는 독보적이었다. 한국 영화의 계보도를 그릴 때 그는 영원히 ‘좌표 없음’일 것이며, 단언컨대 그 어떤 감독도 그를 조금도 모방할 수 없을 것이며, 그보다 과감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기이한 예술가가 형성된 건, 하나의 고정점에 정박되지 않았던 삶의 이력 때문일지 모르겠다. 1919년, 일제강점기에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평양에서 학업을 마친 후 20대 초반에 혈혈단신 도쿄로 간다. 이후 그는 영화광이 되었고 연극에 심취하며 해방 후엔 서울대 의대에 입학한다. 이념의 격변기엔 사회주의와 우익 운동과 중도를 모두 경험했고, 전쟁 후엔 미국 공보원 영화제작소에서 선전 다큐멘터리를 만들었고 1955년에 <주검의 상자>로 영화감독이 된다. 그리고 이후 30여 년 동안 32편의 영화를 만들었고 그중 3분의 1가량은 필름이 사라져 현재 볼 수 없다. 한때는 직접 영화사를 운영해 제작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김기영 감독을 이야기할 때 가장 중요한, 그리고 유일한 키워드는 ‘여자’다. 남자 감독들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한국 영화사에서, 특히 가부장제에 흠뻑 젖어 있던 1960~70년대에, 김기영 감독만큼 여성 캐릭터에 집착하며 ‘여자의 위력’을 드러냈던 감독은 없다. <하녀> 이후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들, 즉 하녀와 식모와 호스티스, 결국엔 ‘첩’이 되는 그들은 멀쩡해 보이는 중산층 가정에 파고들어 기어코 그 집을 붕괴시킨다. 이 구도는 <하녀> <화녀> <충녀> 3부작과, <화녀>의 리메이크인 <화녀 ’82>(1982)와, <충녀>를 다시 만든 <육식동물>(1984)에서 끊임없이 반복된다.
김기영 감독은 여자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그 앞에서 남성은 얼마나 무기력한지 일찌감치 깨달았던 사람이었다. 경제 발전과 새마을운동으로 나라 전체가 매진하던 시대에, 그가 보여주는 지옥도에 가까운 집 안 풍경은 그래서 통렬하다. ‘조국 근대화’라는 국가적 과제가 사회 전체를 이끌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산업화 과정에서 ‘하녀’가 된 여자들의 욕망은 근엄한척하는 가부장들을 굴복시키고 가정의 질서를 교란시킨다. 중요한 건 그의 영화에서 ‘생산’은 언제나 여성의 몫이라는 점이다. <화녀>를 보자. 작곡가인 남자는 룸펜에 가깝고, 아내는 양계장으로 생계를 이어가며, 그 집에 시골에서 도망친 식모 명자(윤여정)가 들어간다. “(알을 낳지 못하는) 수평아리는 필요 없어. 없애버려야지”라는 대사가 직설하듯, 남자는 잉여다.
<충녀>의 남자는 더욱 처량하다. “중년 남자와 살려면 의학박사가 되어야 한다”는 마나님은 수시로 남편의 체중을 체크하고, 성불구를 고치겠다며 호스티스인 명자(윤여정)를 첩으로 들이지만, 첩이 아기를 가져선 안 되기에 수면제를 먹인 후 정관수술을 해버린다. 본처와 후처는 12시간씩 나눠 남자를 소유하고, 두 여자의 신경전 속에서 남자는 예상치 못했던 두 집 살림을한다. 이 영화의 리메이크인 <육식동물>엔 아예 남자에게 턱받이를 한 후 젖병을 물리는 장면까지 등장한다. 거세와 퇴행을 통해 모든 능력을 상실한 남자. 김기영 감독에게 남자는 그런 존재였으며, 이런 관점은 남녀 관계에 대한 그의 악취미적 혜안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김기영의 팜므 파탈은 남성과 욕망의 줄다리기를 하다가 결국은 굴복하고 심판 받는 나약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이 세상을 움직이는 가장 원초적인 힘은 여성에게서 나온다고 믿었다. 그의 영화에서 남성들이 너무 쉽게 좌절하고 어쩔 줄 몰라 허둥댄다면, 여자들은 강력한 의지로 밀어붙이고 단호하며 경계를 넘어선다.
여기서 당연히 그 여자들을 연기할 배우들은 매우 중요해진다. 일단 김기영 감독이 영화계에 데뷔시킨 여배우들의 목록을 보자. <황혼열차>(1957)의 김지미, <하녀>의 이은심, <병사는 죽어서 말한다>(1966)의 선우용여, <화녀>의 윤여정, <충녀>의 박정자 그리고 <혈육애>(1976)의 이화시. 그는 당대 선호하던 동양적인 오목조목한 이미지보다는, 전형성에서 벗어난 마스크를 선호했으며 특히 윤여정과 이화시는 그의 페르소나였다. 그녀들을 알아본 감독의 안목과, 그렇게 카메라 앞에 선 여배우들이 뿜어내는 독기가 없었다면, 김기영의 영화는 심하게 밋밋해졌을지도 모른다.
다시 <이어도> 이야기를 하자면, 이 영화에서 이화시와 박정자가 함께 카메라를 노려보는 투 숏 클로즈업은 너무나 단순하면서도 강렬함 이상의 강렬함을 보여준다. 이런 장면을 만들어낼 수 있는 감독은 김기영밖에 없었으며, 여기엔 그의 여배우들이 절반 이상의 지분을 차지한다. 이처럼 그가 만들어냈던 수많은 명장면은 모두, 다른 영화에선 거의 재연되지 않았던 여성의 이미지를 통해 완성됐다.
김기영 감독은 관객에게 불편한 것을 우회하지 않고, 오히려 과장하고 그로테스크하게 뒤틀어 보여줌으로써 특별해진 예술가다. 그의 영화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쥐들의 공포스러운 존재감, 해골과 시체에 대한 이상한 애정, 한국 영화 사상 가장 이상한 체위와 카메라 워크가 만난 섹스 신, 악몽처럼 보여주는 아기의 모습, 긴 계단에 대한 집착, 시그니처와 같은 문어체 대사는 ‘여자들’과 결합되어 전복적인 영화로 탄생했다. 그리고 20년 전, 79세였던 그는 <악녀>를 준비하다가 거짓말처럼 우리 곁을 떠났다. 자조적으로 “돈 될 영화를 만들었을 뿐”이며 “나는 변태”라고 말했던 김기영 감독. 우린 이제 알고 있다. 그는 한국 영화에 불시착한 UFO였으며, 자신만의 언어로 영화라는 것을 만들다 떠난 외계인이라는 걸.
- 에디터
- 김나랑
- 포토그래퍼
- 한국영상자료원
- 글쓴이
- 김형석(영화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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