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채의 오후
정은채가 지켜온 세계는 세상의 고정관념과 보편적 인식에 흥미로운 각도를 더해준다. 애써 발산하지 않아도 어디서든 드러나는 정은채의 정수. 투명하고 단단한 정은채의 내면과 이면.
드라마 <리턴>은 (여러 의미에서) 문제작이었지만 2018년 지금 이 순간 사람들을 몰입의 경지로 이르게 하는 속도를 정확히 알고 있는 드라마였다. 행간은커녕 말줄임표도 기다리지 못하는 인내심 부족 국민을 60분씩 붙잡아놓은 건 악랄함을 더욱 신선한 악랄함으로 갱신하는 숨 가쁜 속도감이었다. 방영 도중 화장실이라도 다녀오면 수두룩한 증거와 반전의 실마리를 놓치기 일쑤인 촘촘한 드라마에서 한숨 돌릴 수 있는 지점은 정은채가 연기하는 ‘금나라’뿐이었다. 이유라면, 그녀가 유일하게 정상인의 범주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대학 졸업 전 시험 삼아 본 사법고시를 패스했다거나, 재벌가 남편과 결혼했다거나, 모든 설정을 다 떠나서 지나치게 예쁜 외모를 제외해야 하지만 말이다.
사실 ‘이미지’만 놓고 보면 정은채는 그 누구보다 ‘살인 사건의 진실을 파헤쳐나가는 사회파 스릴러’에 어울리지 않는 배우다. 그동안 관객이 사랑한 정은채는 털 뭉치같이 단순해진 감정의 날실을 풀어내 잔털까지 전하는 배우였다.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더 테이블> 같은 영화 속에서 정은채의 24시간짜리 하루는 해체되어 48시간으로 재조합된 것만 같았다. 세상의 시계는 그녀에게 너무 빨라 보였고 그녀가 늘어뜨린 시간 사이에는 깜빡하고 지나친 우리 감정이 있었다. 하지만 사각사각 연필로 써 내려간 시 같았던 배우가 스럴러에 투입되어 시청자에게 선사한 건, 모두 느꼈듯 이질감이 아니라 균형이었다. 정은채는 이를 두고 자신의 쓰임새를 말했다. “드라마 호흡은 굉장히 빠른데 제 안에서는 또 좀 다른 호흡으로 가거든요. 속도가 나기보다는 밑으로 깊숙이 빠지는 느낌이라 그런 밸런스가 생긴 것 같아요. 그런 필요로 제가 쓰이는 걸 수도 있고요”
스릴러물에서 평범함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배우라니 범인이 밝혀졌을 때만큼 충격이지만, 흥미롭게도 정은채가 이 드라마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원래 꿈꾸던 일을 다 접고 아예 다른 인생을 사는 여성 캐릭터에서 생각할 수 있는 지점이 있을 것 같았어요. 지금 저는 결혼하지 않았고 아이도 없고 전문성 있는 일을 하고 있는 셈인데 정반대 캐릭터라 고민이 많았어요. 그런데 또 한편 제 나이 또래 직장 생활을 하는 여자들을 대변하는 평범한 캐릭터 같기도 하더라고요.” 그녀의 말은 맞았다. 금나라는 어떤 ‘환장’할 상황이 벌어져도 자신의 선택에 대한 믿음을 지켰다. “극 초반에 최자혜 변호사와 재회했을 때, ‘지금 내가 선택한 이 길이 나의 선택이고, 전적으로 내가 안고 가야 하는 선택’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이 캐릭터를 가장 잘 대변한다고 생각해요.” 지옥 같은 사건의 미스터리가 풀리면서 금나라는 그렇게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오롯이 자력으로 일어선다.
“편하고 쉬운 역할은 아니었어요. 제 나름대로는 이 드라마를 통해서 해보고 싶은 시도가 있었어요. 캐릭터를 떠나서 연기적인 방식이라고 해야 하나… 예를 들면 그동안 굉장히 편안한 상태에서 하는 연기를 즐겼어요. ‘그냥 이런 사람이지 않을까’ 생각하게 하는 연기를 좋아했는데, 이번에는 ‘심지’는 강하고 깊되 큰 움직임이나 변화 없이 눈빛이나 말투로 연기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미션처럼요. 내 안에서의 편안함을 찾기보다 조금 불편해도 오롯이 서 있으면서도 강한 에너지를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면서 연기를 하고 있어요. 원래 제가 보여주던 모습과 달라 보였다면 그 이유일 거예요.”
‘심지’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배우들은 매번 다른 동기로 작품을 선택하지만 시간이 흘러 캐릭터들을 일직선상에 놓으면 그제야 보이는 공통점이 있다. 정은채의 인물들은 그녀가 말했듯 심지가 곧았다. “생각해보니까 겉으로 강하게 드러나는 인물이라기보다는, 다들 내적으로 단단하고 고집도 되게 있는 캐릭터네요. 표면적으로 봤을 때는 어디에도 구속되어 있거나 속해 있지 않은 사람. 이편도 저편도 아니고 어떤 구조 속에 있는 인물도 아니었어요. 작품은 그냥 작품이고 내 삶은 내 삶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작품과 시대가 서로 영향을 끼치면서 좀 다른 고민을 해볼 수 있게 되는 지점이 늘 재미있는 것 같아요.” 영화 <더 킹>에서 뽀글거리는 머리를 한 채 조인성을 잡고 흔들던 정은채도 예외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정은채의 ‘이미지’와 도저히 이어 붙일 수 없는 억척스러운 ‘조인성의 여동생’은 광장에서 부지불식간에 펼쳐지는 플래시몹처럼 순식간에 등장했다가 사라지곤 했지만 분명 80년대와 생생한 교류를 즐거워하고 있었다. 얼마 전 촬영을 마친 영화 <안시성>에서 정은채가 맡은 역할은 ‘신녀’다. 다른 배우들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당나라 군대와 싸울 때 정은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와 소통하면서 앞날을 제시할 예정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힘과 에너지를 겨룬다고 해야 하나요. 스스로 굉장히 확신을 가지고 방향을 제시하는 캐릭터예요. 되게 독특하고 엄청 무게감이 있죠. 외적으로도 새로운 시도를 많이 했어요. 일반적인 사극 분장과는 다를 거예요.”
‘신’과 소통하는 캐릭터를 연기할 정은채가 예상 밖이라면, 자연인 정은채 내면의 속도는 예상대로 ‘느림’이다. 호흡이 엄청 느리거나 끊임없는 반복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이다. 과거 인터뷰에서 밝혔듯 다큐멘터리 보는 걸 좋아하고, 빠르게 걸을 바에는 뒤로 걷는 사람이다. 요즘 그녀를 가장 사로잡은 영화는 <패터슨>이다. 미국 뉴저지주 패터슨에 사는 버스 운전사 패터슨은 알람 없이 매일 똑같은 시간에 눈을 뜨고, 똑같은 루트로 버스를 몰고, 퇴근 후에는 개를 산책시키며 바에 들러 맥주를 마신다. “너무 강렬했어요. 전 굉장히 정적이거나 호흡이 엄청 느린 작품을 보면서 즐거움을 느껴요. <패터슨>은 반복되는 일상을 보여주는데 그런 데서 엄청난 힘을 받아요. 지루하고 반복적이더라도 즐거운 면모가 있어야 대중도 볼 텐데 그럴 수 있는 힘을 가진 배우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아무런 제약 없이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을까. “평소에 이야기나 캐릭터를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편은 아닌 것 같아요. 패턴이나 기호, 호흡이 느껴지는 작품이어야 접근합니다.”
정은채는 글쓰기를 좋아한다. 몇 년 전에는 ‘어느새 찾아온 새벽’에 ‘여름바다’를 떠올리며 적어 내려간 것 같은 가사를 담아 <정은채>라는 포크 앨범을 낸 적도 있다. 감성도 재능이라고 한다면 분명 그녀는 타고난 재주가 많은 사람이다. 그런 정은채의 ‘패턴’에는 소위 ‘고정 팬’이 있었다. 같은 패턴에서 편안함과 재미를 느끼는 사람들이다. 사실 드라마 <리턴>이 가져온 변화는 주연배우 교체만은 아니었다. ‘나만의 배우 정은채’는 ‘모두의 배우’가 되었다.
드라마 방영 내내 나는 문화생활은 TV로만 하는 과장님 친구랄지, 저녁을 먹으러 간 돼지불백집 사장님으로부터 “저 배우는 누군데 저렇게 예쁘냐”는 질문을 받았다. 데뷔 초 성형수술을 권하는 매니지먼트가 싫어 혼자 활동했을 때나 지금이나 정은채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저 대중이 정은채를 알아보기 시작했을 뿐이다. “자주 보여주면 익숙해져서 좋아 보이는 게 있는 것 같아요. 눈에 익어서 친근해지고 그래서 좋은 느낌.” ‘어쩜 그렇게 예쁘냐’는 대중의 반응에 대한 정은채의 분석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었지만 그 말을 하는 정은채의 얼굴은 아름다움은 모두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음을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래 보아온 정은채의 얼굴이 새삼 새로웠다.
전에 없던 아름다움을 표현할 길이 없어 정은채를 두고 ‘묘하다’ ‘신비롭다’ 같은 수식어를 사용하지만 정작 정은채는 평소 그 단어를 쓰지 않는다. “신비로운 어떤 건 없는 것 같아요. ‘되게 좋다’ ‘편하다’ ‘흥미롭다’ ‘재미있다’라고 느껴지는 사람은 있어요. 그냥 자기 일 하는 사람이오. 외부 자극에 최소한으로 영향을 받고 잘 덜어내며 꿋꿋하게 자기 일을 해나가는 사람들.” 신비로운 정은채의 선명한 대답이다. 그녀가 아름다움을 느끼는 존재는 무에 가깝거나 공기에 가까운 사람이다. “예전에는 잔 다르크 같은 강렬하고 주체적인 여성상에 많이 매료되었는데 요즘은 눈에 잘 안 띄는 존재들에게 자꾸 눈길이 가요. 외적으로도 내적으로도 뭔가 티가 나지 않는 존재에게 매료되곤 해요. 앞으로 또 변하겠죠.”
인터뷰 말미, 정은채는 인터뷰하는 것도, 나중에 인쇄되어 나온 인터뷰 글을 읽는 것도 좋아한다고 말했다. 같은 말을 해도 어떤 기자와 인터뷰했느냐에 따라 다르게 활자화되는 게 신기하다고 했다. 인터뷰 글을 읽으면 대화를 나눌 당시 공기와 사람이 기억난다고도 했다.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게 싫어서, 자신의 말을 곡해할까 봐 인터뷰를 싫어한다던 여러 배우가 생각났다.
영화 <패터슨>에서 패터슨은 매일 아침 버스 운행 전 운전석에 앉아 시를 썼고, 그의 동료는 매일 아침 패터슨을 찾아와 불평을 늘어놓았다. 시리얼을 먹다가 발견한 성냥갑으로도 시를 쓰는 사람이 있다. 정은채는 아무렇지 않은 일상을 보고 싶은 예술로 만든다. 그녀에게 일상이란 그저 공기 중에 흩어져 사라지는 시간은 아니다.
- 에디터
- 조소현
- 포토그래퍼
- 목정욱
- 헤어
- 손혜진
- 메이크업
- 원조연
- 스타일리스트
- 박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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