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특한 컬트 브랜드의 창립자 장 투이투
각자 이유는 다를 테지만 누구나 아페쎄를 향한 연모의 감정을 지닌 적 있다. 이 독특한 컬트 브랜드의 창립자 장 투이투가 서울을 찾아 아페쎄의 미래를 그려주었다.
“인터뷰는 쉽지 않습니다. 대부분 제가 말한 내용의 30% 정도만 실제로 글에 실리니까요.” 아페쎄(A.P.C.)의 창립자 장 투이투(Jean Touitou)는 인터뷰를 위해 자리에 앉자마자 내게 경고하듯 말했다. 그를 만난 건 10월 중순 신라호텔 1층 라이브러리 프라이빗 룸. 소파 뒤로 몸을 기댄 그는 말을 이었다. “그럼에도 저는 제 생각 그대로 말할 겁니다. 과연 얼마나 그 내용이 전달될지는 두고 볼 일입니다.”
장 투이투는 늘 직설적이었다. 파리 본사에서 열린 컬렉션 프레젠테이션 하이라이트는 투이투의 연설. 그는 컬렉션에 대한 설명 이전에 고민과 감상을 담은 소감으로 관객을 즐겁게 했다. 매체 인터뷰 앞에서도 몸을 사리진 않았다. 때로 그 내용이 논란이 되기도 했지만, 담대하고 소신 가득한 성격이야말로 아페쎄를 컬트에 가까운 브랜드로 지킨 자산이었을 것이다. 방한 중 유일하게 진행한 <보그> 인터뷰에서도 소신껏 자신의 의견을 쏟아냈다. “패션은 이제 일종의 세금입니다.” 그는 내가 미리 보낸 질문지 속 “지금 패션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관한 이야기부터 답하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즉 현재 패션에 대해 정의를 내려야만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다는 것이다. “패션은 이상하게 진화했어요. 거대한 패션 기업은 중상류층 이상의 사람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무언가 사게 만들죠. 만약 어떤 브랜드의 물건을 사지 않으면, 사회에서 위엄 있는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합니다.” 패션이 일종의 사회적 세금이 되었다는 것이 요지다. 흥미로운 철학은 이어졌다. 수십 억 유로의 매출을 올리는 브랜드는 패션을 선물 시장처럼 만들었고, 아무도 입지 못할 드레스만 무대에 오르는 패션쇼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등등. 그렇다면 패션은 이제 그에게 아무런 재미를 주지 못하는 걸까? “아니요, 하지만 저는 패션이 흥분으로 가득한 시절을 보낸 적 있어요. 다시 한번 패션계에 흥미로운 일이 벌어질 거라 기대합니다.”
비관적 이야기를 잔뜩 늘어놓은 뒤, 아주 짧게 희망을 예견하는 건 투
이투의 성격과 닮았다.(인터뷰 중에도 시종 무뚝뚝한 표정을 짓다가 별것 아
닌 것에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투이투가 그리는 진보와 희망을 직접 만
날 수 있었던 건 10월 초 파리 패션 위크에서 열린 2019 S/S 컬렉션이었다.
오래 고수하던 본사에서의 프레젠테이션 대신 정식 패션쇼를 선보인 것이
다. “32년째 패션계에서 일하고 있지만, 다른 이들이 선보이는 방식을 따르
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우리의 작업이 패션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도 있
었어요.” 그는 이번 패션쇼가 매우 만족스러웠음을 밝혔다. “일종의 자유를
얻은 기분이었어요.”
이번 패션쇼는 아페쎄에게 찾아올 변화 중 하나다. 지난해 30주년 기념 후 변화를 모색해온 것이다. “우리 사업 규모를 두 배 더 키우고 싶습니다.” 흥미로운 작업을 계속하고, 패션계에 영향을 끼치고 싶은 것이 가장 큰 이유다. “지난 몇 년간 가속페달 대신 브레이크를 밟아왔습니다. 빠르게 확장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제 패션계의 괴물들 속에서 살아남아야겠다는 결심이 섰습니다.”
세상에 아페쎄의 존재를 알리는 계획은 더 있다. 6개월에 한 번씩 ‘인터랙션(Interaction)’ 컬렉션을 선보인다. 누군가를 초대해 아페쎄 컬렉션을 해석한 디자인을 자유롭게 선보이는 방식. “결코 ‘콜라보레이션’이라 부르지 않을 겁니다. 그 단어는 이제 죽었죠. 대신 그 인물과 우리가 직접적으로 상호 작용을 한다는 걸 나타내고 싶었습니다.” 12월 공개할 첫 손님은 뮤지션 키드 커디(Kid Kudi). 아직 밝힐 수 없지만, 아티스트, 스트리트 웨어 브랜드, 영화감독, 스타일리스트 등이 뒤를 있는다. 3년 넘게 준비한 새 매장 디자인, 재정비한 크리에이티브 팀 등도 변화의 일부다.
물론 모든 것이 쉽지 않다. 브랜드와 디자이너가 더 큰 회사에 팔리는 시대에 독립성을 유지하는 건 만만치 않은 일이다. 그렇기에 투이투는 패션의 경계에 서 있는 걸 즐긴다. “인사이드와 아웃사이드 사이에 존재하고자합니다. 인사이드에 들어가는 순간 온갖 소음에 귀가 멍멍해질 겁니다. 또 경계에서 벗어나는 순간 사라지고 말 테니까요.” 실용적이고 미니멀한 브랜드라 여겨지는 것 역시 경계한다. “미니멀리즘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하는 건 싫습니다. 미니멀한 아이디어를 제공하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일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죄수복 같은 유니폼만 만들고 말겠죠.” 오히려 그의 작업 방식은 맥시멀리즘에 가깝다. 기록되거나 알려지지 않아도 자신만의 수많은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콜롬비아에서 은박지만 수입한 적도 있어요. 세관과 경찰이 마약이라도 수입하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었죠. 일본에서 베이스 연주자를 위한 ‘가라오케’를 주최한 적도 있습니다. 말도 안 되지만, 흥미로운 프로젝트야말로 우리 회사를 움직이는 엔진입니다.” 지난해 30주년을 맞이해 선보인 책
패션을 좋아하는 이라면, 누구나 아페쎄 덕분에 패션이 즐거웠던 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완벽한 스웨터와 뻣뻣한 데님 팬츠, 사랑스러운 가죽 백 등으로 유명한 이 브랜드는 30년간 특유의 멋을 전해왔다. 내 주변도 예외는 아니었다. 투이투를 만나러 간다고 하자, 지인들은 각자의 ‘아페쎄 스토리’를 들려주었다. 누군가는 데님 팬츠의 색깔을 예쁘게 빼기 위해 숨도 안 통할 듯 타이트한 청바지를 입고 잠자리에 들던 추억을 이야기했고, 또 누군가는 유학 시절 용돈을 모아서 산 퀼팅 담요를 아직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고 말했다. 심지어 늘 매력적이던 포스터를 몰래 떼와서 자취방에 붙인 친구도 있었다. 나 역시 한동안 이 프랑스 라벨의 ‘팬보이’였다. 도쿄 나카메구로 개천 앞에 자리했던 서플러스 스토어에서 시즌 지난 셔츠 한 장을 사고 기뻐한 적도 있고, ‘뉴 큐어’ 데님 팬츠를 2년 동안 세탁하지 않고 입어서 나만의 청바지를 만든 적도 있다.
이러한 에피소드를 나누자 투이투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그가 말하는 브랜드 정신 역시 바로 사람들을 좀더 행복하게 하는 것이다. “마음에 드는 옷을 입었을 땐 기분이 좋아질 수밖에 없어요. 각자 다른 방식으로 차려입겠지만 우리가 입는 옷만으로 기분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이 되었든 간에 사람들을 행복하게, 상승효과를 느끼도록 하는 것이 우리 회사의 존재 이유입니다.”
투이투의 대화는 쉬지 않고 이어졌다. 프랑스 작가 미셸 우엘벡(Michel Houellebecq), 시지프스 신화, 거대 기업의 매출, 피비 파일로와 새로운 셀린, 그가 좋아하는 뮤지션, LA의 멋진 스토어, 칸예 웨스트와 인스타그램 등등. 어쩌면 그의 예상이 맞았는지 모른다. 결국 난 그의 이야기 중 30%도 이 인터뷰에 담아낼 수 없었다. 하지만 패션을 통해 좀더 행복한 사람이 많아지는 세상을 바라는 그의 희망만큼은 전달할 수 있길 바란다.
- 에디터
- 손기호
- 포토그래퍼
- 김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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