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평적 호텔
수직으로 치솟은 건물이 아닌, 마을 전체가 호텔이 된다면?
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에서 밥(빌 머레이)과 샬롯(스칼렛 요한슨)은 파크 하얏트 도쿄에 머문다. 밥은 일본에 광고를 찍으러 왔는데 현장 통역은 처참한 수준이다. 남편을 따라 일본에 온 샬롯 역시 말이 통하지 않는 낯선 곳에서 공허하고 외롭다(영화의 원제는 ‘Lost in Translation’). 소피아 코폴라 감독은 파크 하얏트 도쿄를 배경으로 선택했다. 호텔은 고급스럽고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지만, 두 주인공을 철저히 이방인으로 놔두기 때문이다.
내게 글로벌 체인 호텔은 그런 이미지다. 배낭여행자로 머물던 게스트하우스, 에어비앤비가 주는 생동과 긴장이 거세된 채 흠잡을 데 없이 편리하지만 무색무취인 공간. 호텔은 수직 엘리베이터로 오르내리거나 프런트에 전화를 걸면 숙식에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이 해결된다. 고도성장의 시대가 그랬듯 효율적 수직 공간이다. 하지만 세계 어디에 묵든 호텔 안은 비슷비슷하다. 무국적이다. 대안처럼 한때 작지만 현란한 부티크 호텔이 유행했고, 홍대 인근의 L7이나 중구의 레스케이프, 여러 에이스 호텔처럼 번쩍이는 힙스터도 환영받았다. 몇 년 사이 지역과 소통하려는 호텔이 등장했다. 로비에는 지역 아티스트의 전시가 열려 투숙객이 아닌 관람객도 북적이고, 지역 셰프가 쿠킹 클래스를 연다. 대나무가 많이 나오는 지역은 지역 건축가를 고용해 대나무 호텔을 짓고 환경 콘텐츠를 가져간다.
그러다 건축가 정재헌에게 수평적 호텔 얘기를 들었다. “대도시 호텔은 지가가 높고 고밀 개발 안에 완성되어야 하기에 수직적 엘리베이터가 객실을 연결할 수밖에 없죠. 하지만 ‘수평적 호텔’은 골목이 엘리베이터가 되고, 동네의 카페와 음식점이 호텔의 F&B가 됩니다. 마을 전체가 호텔인 거죠.”
일본의 하나레(Hanare) 호텔이 그러하다. 컨셉은 ‘The Whole Town = Your Hotel’이다. 호텔은 마을의 오래된 집을 개조했고, 호텔 내 사우나가 없는 대신 동네 목욕탕 이용권을 주고, 레스토랑이 입점하는 대신 동네 맛집 지도를 준다. 자전거 대여소를 알려주어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탐방하길 권한다. 웹사이트에는 전통문화 체험 공간, 목욕탕, 식당 등을 동그라미로 묶어 호텔로 소개한다. 이 호텔은 세계에 하나뿐이다. 이 동네가 하나뿐이니까. 투숙객은 이곳에 머물며 동네를 탐방할 뿐 아니라 주민과 소통하며 일반 호텔이 줄 수 없는 경험을 한다. 정재헌은 “백화점처럼 모든 것을 갖춘 호텔이 아니라, 골목길의 로드숍처럼 네트워크가 유기적으로 연결된 형태여야 그 지역의 진짜 여행이 시작된다”고 말한다.
한국도 이런 실험을 하고 있다. ‘머무는 것 자체가 여행이 되는 숙소 큐레이션 플랫폼’ 스테이폴리오의 ‘수평적 호텔–서촌 유희’ 프로젝트가 그러하다. 스테이폴리오는 서촌에 아담한옥, 누와, 일독일박, 서촌영락재, 썸웨어라는 다섯 개의 스테이를 열었다(이들은 호텔이란 칭호가 동네와 상충되는 어감이라 선호하지 않는다). 이들 스테이와 서촌 고유의 여러 공간을 연결해 수평적 호텔로 발전시켰다. 프로젝트의 출발은 2019년 1월, 서촌에 오랫동안 비어 있는 점포다. ‘주인 어르신’과 친분으로 5년 동안 임대해 서점을 열었다. 매달 단어 하나, 책 한 권을 소개하는 ‘한 권의 서점’이다. 서점 자체만으로 수익을 낼 수 없기에 이를 스테이의 리셉션으로 활용했다. 지난 5월 맞은편에 나온 자리 역시 ‘주인 어르신’을 설득해 장기 임대하고, 지속 가능한 생활양식을 소개하는 ‘서촌도감’을 개업했다. 스테이의 라이프스타일 체험장쯤 된다. 스테이에선 서촌의 상점을 표시한 지도를 준비 중이다. 이들은 호텔의 레스토랑, 라운지, 테라스 역할을 한다. 지도는 일곱 개의 길을 제안한다. 일곱 개의 호텔 엘리베이터인 셈이다. 아담한옥에서 출발하는 2번 엘리베이터를 타면 카레를 파는 공기식당, 앤티크한 한옥 카페 스펙터, 간단히 와인을 즐기기 좋은 아주로가 나온다. 엘리베이터를 타는 중에 서촌의 터줏대감인 대오서점, 이상의 집도 들를 수 있다. 누와와 서촌영락재가 자리한 3번 엘리베이터를 타면 정말이지 멋진 한옥 카페인 풍류관과 비건 화장품 공방인 BBL House, 플라워 클래스가 열리는 한옥 꽃집 화려, 동네 핫 플레이스인 영국식 베이커리 카페 스코프가 자리한다. 엘리베이터 중간중간 동네 할머니께서 산책하는 모습도 보고, 오랜 담장에 핀 꽃, 지붕에 널린 고추도 본다. 빵을 굽는 스코프 주인장과 서촌에 자꾸 늘어나는 카페에 대한 이야기도 나눈다.
수평적 호텔은 호텔, 동네, 투숙객 모두에게 이롭다. 포시즌스 같은 큰 건물을 지으려면 비용이 어마어마하지만 수평적 호텔은 그렇지 않다. 스테이폴리오가 오래 비어 있던 공간을 스테이와 서점, 라이프스타일 숍으로 바꿨듯 지역의 빈집에 숨을 불어넣는다. 동네 상점과 네트워크를 구축해 투숙객이 방문하게 하고, 그곳의 진짜 매력을 접하게 한다. 그렇다고 주민이 여행자에게 특별한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아도 된다. 호텔의 안내로 왔다는 손님에게 사탕을 후식으로 주거나, 몇 마디 더 나눠주는 정도의 친절이면 충분하다. 그곳에 살며 새겨진 나이테를 보여주는 자체가 여행자에겐 최고의 경험이다.
주민은 각자의 삶을 살며 소화 가능한 선에서 여행자를 받아들이고, 여행자는 그들 속으로 한 발짝 들어가 여행한다. 그렇기에 이상묵 대표는 수평적 호텔에서 “지역 주민과의 공생, 지역이 지켜온 정주성과 관광의 균형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북촌에 더 이상 주민이 살지 않고, 익선동이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순식간에 망가졌잖아요. 수평적 호텔은 이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에 대한 예의, 골목길에 켜켜이 쌓인 동네의 역사에 대한 존중에서 시작해야 하죠.” 대세는 수평적 호텔이다. 첫째, 수직은 흘러간 노래다. 끝없이 올리는 바벨탑 건물은 자존감 없던 시절의 헛된 과시처럼 보인다. 둘째, 혼자이되 혼자이지 않은 시대다. 우리는 각자의 공간을 침범하지 않는 선에서 교류를 더 추구할 것이다. 그것이 삶을 더 풍요롭게 할 것임을 아니까. 셋째, 앞으론 소유보다 경험을 위해 돈을 쓴다. 여행만 해도 어떤 고유의 경험을 하느냐가 관건이다. 모두 수평적 호텔의 요건이다. 무엇보다 수평적 호텔은 침체된 동네를 살릴 수 있을 것 같다. 서촌처럼 오랜 역사로 다져진 동네 외에도, 어느 동네나 각자의 스타일이 있으니 다양한 수평적 호텔이 등장해 지역과 상생할 수 있다. 모 아니면 도, 고급 아니면 저급인 서울의 호텔 풍경이 달라지는 것만으로도 좋다.
- 피처 에디터
- 김나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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