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2 x 배우2
이제훈, 안재홍, 박정민, 최우식. 각자의 영화사를 써가는 배우 4인이 우연적 필연으로 <사냥의 시간>에서 교차했다.
이제훈, 안재홍, 박정민, 최우식은 한국 영화의 ‘다음’을 얘기할 때 거론되는 배우다. 영화 <사냥의 시간>을 위해 그들이 모였다. 최우식은 아침 7시까지 밤샘 촬영을 하다 왔고, 박정민은 영화 촬영 중인 태국에서 귀국했고, 안재홍은 영화 <해치지 않아>의 홍보 활동을 병행 중이며, 이제훈은 자신의 분량은 끝났어도 단체 인터뷰를 하고 싶어 동생들을 기다렸다.
그만큼 이 젊은 배우들에게 <사냥의 시간>은 특별하다. 이제훈은 대표적인 이유로 ‘제너레이션’을 꼽는다. “저뿐 아니라 안재홍, 박정민, 최우식 그리고 박해수까지, 한국 영화의 ‘뉴 제너레이션’이 모일 수 있는 작품이 있을까요? 두 명 정도는 조합할 수 있지만, 다섯 명이 모인다는 것 자체가 흥분됐습니다.” 최우식은 “작품의 캐릭터, 대사, 감정 모두 좋았을 뿐 아니라 형들과 함께할 수 있어 굉장한 경험일 것 같았다”고 말한다. 안재홍은 한국 영화계의 새 시대를 연 <쉬리>를 예로 든다. “<쉬리>를 촬영할 당시 한석규, 송강호 선배님의 나이가 지금 우리와 비슷해요. 선배님들이 한마음으로 치열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뭉쳤습니다.” 박정민은 <사냥의 시간>을 ‘선배님에 대한 헌사’라고 말한다. “물론 선배님들과 작업하면 배울 점이 많죠. 하지만 이 영화처럼 형, 동생이라 부를 수 있는 젊은 세대의 영화가 나와주는 것 또한 의 미가 깊습니다. <사냥의 시간>을 한국 영화의 기반을 닦으신 선배님들에게 ‘헌사’를 바치는 마음으로 보여드리고 싶어요.” 최근 박정민이 출연한 <시동>, <사바하>, <타짜: 원 아이드 잭>, <염력>의 감독들은 모두 차세대다. <사냥의 시간> 또한 <파수꾼>으로 제32회 청룡영화상 신인감독상을 수상한 1982년생 감독 윤성현의 차기작이다.
<파수꾼>은 많은 ‘파수꾼식 영화’를 양산해내며 아카이브가 된 독립영화다. 젊은 남자 배우들이 오디션을 위해 준비하는 자유 연기에도 <파수꾼>이 단골이다. 박정민은 심지어 자신이 연기한 <파수꾼> 속 희준의 대사를 오디션에서 받은 적 있다. “저인지 모르더라고요(웃음).” <파수꾼>이 독립영화로서 크게 성공했음에도 <사냥의 시간>이 나오기까지 10년이 걸린 이유는 무엇일까.
이제훈은 “감독님과 영화적 동지로서 <사냥의 시간>이 기획된 4~5년 전부터 이야기를 나눠왔다”고 말한다. “오랜 기간 여러 작품을 구상하는 감독님을 지켜봤죠(윤성현 감독은 사이버펑크 장르의 다른 영화도 준비했다). <파수꾼> 때부터 항상 감독님을 지지하고, 어떤 역할이든 시켜주면 하겠다는 마음이었어요. 감독님과의 관계가 시나리오나 그 무엇보다 우선순위에 있었습니다. 물론 <사냥의 시간>은 정말이지 놀라운 작품이었어요. 직선적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터미네이터>,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매드 맥스>가 연상됐죠. 감독님이 ‘장르’를 만끽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것 같아요.” 안재홍은 <파수꾼>의 감독이 시나리오를 건넸다는 사실 자체가 흥분됐다고 회상한다. “<파수꾼>은 충격에 가까운 감동이었어요. 독립영화에서 성장한 배우로서 영향을 많이 받은 작품입니다.”
이제훈과 박정민에게 <파수꾼>은 필모그래피에서 늘 거론되는 작품이기에, 10년 전 영화라는 세월의 차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감독과 배우가 재회한 <사냥의 시간> 촬영 현장도 그러했다. 박정민은 촬영장에 처음 도착했을 때의 풍경이 생생하다. “분장 버스에서 내리는데, 감독님이 모니터 앞에 앉아 있고, 제훈이 형이 현장에서 어슬렁거리는 풍경이 <파수꾼> 처음 찍을 때와 같았어요. 현장 규모는 커져 있는데, 그 모습은 10년 전과 동일했죠. 시간이 흘러도 그때만큼 치열했기에 달라진 점은 없었어요.” 이제훈은 “밥차가 생긴 점은 달라졌다”며 웃는다. “당시는 규모나 예산이 작은 독립영화라 김밥이나 저렴한 도시락으로 때우는 일이 많았어요. 이제 밥차에 간식차까지 호화로워졌죠. 물론 감독님의 끈질긴 연출력은 여전했습니다. 모든 배우들에게 한계치 이상을 요구했죠.” 모든 배우가 공감하며 웃었다.
2018년 1월 10일, 최우식과 안재홍의 첫 촬영부터 그러했다. 촬영이 끝난 밤, 안재홍은 박정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여행 가야 할 것 같아.” 안재홍은 그만큼 한계를 뛰어넘는 경험이었다고 말한다. “그 날짜를 잊지 못해요. 첫 신이 원 테이크였는데, 아마 첫날, 첫 신, 원 테이크 신에서 가장 많은 테이크를 간 영화로 기네스북에 오를 것 같았죠. 우식이가 첫 촬영부터 완벽히 캐릭터화돼서 도움을 받았지만, <파수꾼>이 괜히 나온 게 아니구나 싶었어요. 숙소에 가기만 하면 곯아떨어졌어요. 치열한 만큼 배우로서 의미 있고 굉장한 시간이었어요.” 최우식은 “재홍이 형의 눈에서 광기를 보았다”고 말한다. “영화 초반에 풀어졌다면 뒤로 갈수록 힘들었을 거예요. 첫 촬영의 긴장감이 후반까지 이어졌다고 생각해요. 감독님은 원하는 바가 뚜렷하고 정확히 디렉션하기에 배우의 방향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죠.” 이제훈은 둘의 첫 촬영을 현장에서 지켜봤다. “솔직히 감독님과 두 배우가 첫 호흡이라서 낯설지 않을까 싶었죠. 그런데 우식이와 재홍이 형 모두 완벽히 캐릭터화되고, 감독님과 호흡하는 모습을 보고 기분이 정말 좋았어요. 단언컨대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사냥의 시간>에는 네 친구와 정체불명의 추격자가 등장한다. 희망 없는 도시의 감옥에서 출소한 준석(이제훈)은 가족 같은 친구인 장호(안재홍), 기훈(최우식), 상수(박정민)와 함께 무모한 작전을 계획한다. 새로운 인생을 향한 꿈도 잠시, 정체불명의 추격자(박해수)가 나타나면서 죽음의 사냥터로 내몰린다. 최우식은 자신의 어떤 모습 때문에 ‘가진 것은 의리뿐인 반항아, 기훈’에 캐스팅됐는지 답을 찾는 중이었다. “형들과 동갑인 역할이어도 초반엔 말도 잘 못 놓는 성격인데, 감독님께선 희한하게 저로부터 기훈을 보셨다고 했어요. 정말 촬영에 들어가자 몸에 딱 맞는 옷을 입은 듯 캐릭터를 찾아가는 데 어렵지 않았죠.” 최우식은 “형처럼 다가온 감독님 덕분”이라고 여긴다. “나이 차이가 많지 않기도 하고, 정말 형이 동생에게 하듯이 친근하게 대해주셨어요. 보통 어느 감독과 배우든 이야기를 많이 나누지만, 윤 감독님과는 정말이지 진실한 대화가 오갔죠.” 안재홍 역시 공감한다. “촬영 전부터 자주 만났어요. 감독님과 미팅은 물론 사적으로도 깊이 있게 이야기를 나눈 덕분에 첫 촬영부터 그 인물이 될 수 있었죠.”
<사냥의 시간>에서 가장 변화가 큰 인물은 안재홍이다. 안재홍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배우로서 첫 주목을 받은 <족구왕>의 순수한 복학생부터 최근 <멜로가 체질>에서 할 말은 하지만 얄밉지 않은 피디님까지, 선(善)이 느껴지는 배우다. 이번 영화에서는 삭발한 머리를 회색으로 염색하고, 푸석한 입으로 욕을 뱉는다. “기존에 제가 해온 역할과 다른 지점을 보여주는 쾌감이 있었어요. 새로운 안재홍을 보실 수 있을 거예요. 감독님도 그런 면을 끌어내고 싶었던 것 같아요.” 촬영이 끝나고 몇 달 후 후시녹음 때, 안재홍은 장호의 목소리를 찾는 데 애를 먹을 정도였다. “그만큼 완전히 다른 인물로 살았습니다. 저뿐 아니라 다른 배우들의 변신 또한 볼 수 있어요. 배우의 새로운 얼굴, 이것이 <사냥의 시간>이 가진 큰 매력 중 하나입니다.”
윤성현 감독은 촬영 전 안재홍에게 USB를 줬다. 거기에는 영화나 시나리오가 아닌 ‘특정 이미지’들이 담겨 있었다. “참고하라는 클립이었죠. 뭔지 말할 수 없지만, 정말이지 독특한 비주얼이었어요.” 감독이 비주얼 레퍼런스로 삼았다는 마티유 카소비츠의 <증오> 속 아이들, 그곳에 등장한 출구 없는 터널 같은 이미지는 아닐까. 이제훈은 감독의 권유로 <증오>와 비슷한 분위기의 스트리트 패션을 일상에서도 3년째 입었다. 길 잃은 청춘들이 불안감을 감추려는 듯 과도하게 부풀린 사이즈의 스포츠웨어, 서브컬처라 명명되기 전 거리에서 소모된 차브(Chav) 스타일이다.
이제훈은 영화가 끝난 지금도 옷을 버리지 않았다. “영화 속 패션이 실생활에까지 영향을 끼친 건 처음이에요. 몸에 익어서 앞으로도 즐겨 입을 것 같아요. (다른 배우들은 “형의 이전 패션보다 낫다”고 웃는다.) 인정합니다. 가끔 사진 라이브러리에서 옛날 제 패션을 보면 이해하기 힘들어요. 이제는 좀 ‘보그답게’ 입고 다녀야 할 텐데 말이죠(웃음).”
흔히 <사냥의 시간>을 <파수꾼>과 비슷한 작품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윤성현 감독의 작품인 데다 <파수꾼>의 주역인 이제훈과 박정민을 비롯해 젊은 남성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말이다. 박정민은 다른 작품이라고 단언한다. “<파수꾼>이 청년들의 관계를 사람 간의 관계로 확장시켜 보여주고 공감을 불러일으킨다면, <사냥의 시간>은 어떻게 보면 장르영화입니다. 친구들의 관계는 극을 끌고 가는 정서 정도죠.” 어느 인터뷰에서 윤성현 감독은 “<파수꾼>이 현미경같이 내면을 들여다보는 영화라면 <사냥의 시간>은 현상 체험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중략) 어릴 때 본 <아키라>, <매드 맥스>, <터미네이터>처럼, 오직 영화를 통해서만 표현할 수 있는 시네마틱한 경험을 안겨줄 매체적 특징이 뭘까를 고민했다”고 말했다. 그만큼 이 영화는 한국 영화 아카이브에 없을 확률이 크다. 박정민은 그 새로움에 쾌감을 느꼈다. “앵글부터 전에 보지 못한 것들이죠. 제가 나오지 않는 장면에선 멋진 앵글 안에 있는 배우들이 부럽기까지 했어요. 배우로서 이런 영화에 참여할 수 있다니 기쁘죠.” 최우식은 온갖 수식어(독특하고 신선하고 과감하고 강렬한)를 쓰며 대답을 이어간다. “조명만 해도 프랙티컬 라이트(Practical Light)를 썼죠. 다른 현장에선 경험하지 못한 이미지, 톤에 완전히 사로잡혔어요.”
이 영화의 메시지를 물었을 때 배우들은 “교훈을 주려 하는 영화가 아니라, 체험에 중점을 둔 작품”이라고 공통적으로 말한다. 이들에게 영화적 체험이란 무엇일까. 극장에 도착하고, 의자의 패브릭 냄새를 맡고, 휴대전화가 아닌 영화관의 풍성한 음향을 느끼고, 이야기의 힘뿐 아니라 영화만이 가능한 연출을 생각하면 영화는 ‘본다’기보다 ‘체험’하는 매체다. <사냥의 시간>은 그 체험을 극대화하고자 한다. 배우들은 자신들의 영화적 체험을 이야기했다. 이제훈은 <그래비티>, <인터스텔라>가 “영화만이 줄 수 있는 무언가”였다고 말한다. “배우 산드라 블록이 끝이 어딘지 모르는 우주에서 미아가 되는 장면부터 기존 우주 영화와는 달랐어요. 충격에 가까웠죠. 문학과 음악으론 구현해낼 수 없는 영화만의 비주얼이라 여깁니다. 최근에 본 탕웨이 주연의 영화 <지구 최후의 밤>도 좋았어요. 영화가 시작하고 1시간 만에 제목이 뜨는 등 새로운 구성과 작가주의 표현 방식이 인상적이었죠. 앞으로 저도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는 작품을 하고 싶어요.” 안재홍은 영화 <조커>를 꼽는다. “사장에게 해고 통보를 받고 일그러지는 호아킨 피닉스의 얼굴에서 뭔가 갑자기 튀어나올 것 같았어요. 배우의 압도적 연기만으로 긴장감이 생겼고 관객에게 영화적 체험을 선사했죠.”
배우는 관객뿐 아니라 당사자로서 더한 영화적 체험을 경험할 수 있다. 최우식은 2014 부산국제영화제 올해의 배우상을 안겨준 영화 <거인>을 촬영하며 참으로 많이 울었다고 회상한다. 김태용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에서 최우식은 보호 시설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애쓰는 열일곱 살을 연기한다. 당시만 해도 발랄한 옆집 동생 이미지였지만 감독은 미쟝센 영화제에 출품된 단편영화 <에튀드, 솔로>의 ‘비릿한 눈빛’을 보고 캐스팅한다. 박정민의 말이 맞다. “배우는 어떤 연출자를 만나느냐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배우는 어떤 배우를 만나느냐가 중요하다. 이제훈은 심신의 한계가 <사냥의 시간> 전후로 나뉠 만큼 쉽지 않은 촬영이어서 혼자였다면 포기했을 거라고 말한다. “현장에서 같이 숨 쉬고 어려움을 나누는 친구들이 있어서 버틸 수 있었어요. 행여 불평할 만한 상황에서 누구도 그러지 않았고, 함께 작품을 이뤄나간다는 것에 모두 행복해했죠.” 안재홍은 “케미라 말하기 부족할 정도로 돈독해졌다”고 덧붙인다. 박정민에겐 배우들과 작업하는 과정이 영화적 체험이었다. “감독님의 디렉션과 촬영 방식에서도 영향을 받았지만, 넷이 함께하면 연기하는 게 아니라, 정말 넷이 뭔가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실제 같았죠. 제 분량이 끝나면 아쉬울 만큼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배우 박해수, 감독 윤성현까지 함께한 이들의 단톡방 알람은 지금도 계속 울린다.
- 피처 에디터
- 김나랑
- 포토그래퍼
- 곽기곤
- 비주얼 크리에이터
- 오충환
- 스타일리스트
- 신지혜(이제훈), 박태일(안재홍), 오충환(박정민), 장빛나(최우식)
- 헤어
- 박민경(이제훈), 박상현(안재홍), 박은지(박정민), 문현철(최우식)
- 메이크업
- 서미연(이제훈), 이상언(안재홍), 이혜진(박정민), 오은주(최우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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